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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내가 바로 세계의 적이다
#8 - 내가 바로 세계의 적이다(2)
어느 날, 갑자기 신들의 예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빌헬름 마이어가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다.
-흑산회가 미궁의 재앙을 깨울 것이다.
-대륙의 남부는 머지않아 종말을 맞이한다.
모든 선신이 신자들에게 예언했다.
-도망쳐라. 달아나라. 떠나라.
-파멸의 앞잡이들의 터전으로부터.
흑산회로부터, 마이어 왕국으로부터, 흑산회 진영으로부터 지금 당장 달아나라고.
“같잖은 수작질을 벌여대는군.”
“보스. 정말로 괜찮은 거야?”
“걱정할 거 없다. 선신진영을 따르지 않았으니 그들 진영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리나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그래도 뭔가 안심이 되지 않는 표정이다. 나는 머리 대신 리나의 턱 아래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그런다고 안심이 되는 건 아니거든?”
“그건 유감이군.”
그래도 내 기분이 좋으니까 상관없겠지.
“치유의 교단 놈들도 참 괘씸하지. 보스 덕분에 그렇게나 잔뜩 출세했건만 모조리 중부지대로 떠나버린다니. 치유의 사제들을 따라서 위로 떠난 모험가들도 엄청나게 많아.”
“인간은 원래 간사한 생물이다. 다소의 유출은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두 손 놓고 두고 보기만 할 것도 아니다.”
“방법이 있어?”
“치유의 신이 하사하던 권능을 내가 직접 신도들에게 하사하면 된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와! 역시 보스는 대단해!”
나는 오래도록 고민하던 권능의 일부를 결정지었다.
[신앙등급 1단계의 신자들에게 부여되는 1단계 권능이 <강인한 생명력>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다소의 부상은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권능이다. 이거라면 치유의 권능처럼 눈에 띄는 부상을 치유할 수는 없어도, 피로나 부상의 후유증을 감소시키는 건 가능하다.
또한 생명력 권능은 수련을 마친 뒤에 몸이 빠르게 회복되며 보다 고강도의 수련을 실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백보무투술과 백보심공을 위주로 무수한 격투가들이 활동하는 흑산의 교단에게 있어서 이보다 적합한 권능은 쉬이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보스의 강점은 생명력이 아니잖아.”
“재밌는 말을 하는군. 그럼 내 강점이 뭐라고 생각하지?”
“파괴! 약탈! 살인!”
“…….”
네가 날 얼마나 쓰레기 같은 남자로 여기는지는 잘 알았다.
용케도 그런 쓰레기에게 애정을 품었구나.
그걸 감안하고 받는 애정이라고 자각하니 애정이 무겁다. 조금은 무섭기까지 하다.
“보, 보스... 왜 그런 눈으로 리나를 바라보는 거야?”
아차. 동기화 비율이 높아졌으니 이제는 내 표정이 고스란히 얼굴로 드러나는 걸 잊었다.
“보스도 리나를 냉혹한 암살자라고 여기는 거야?”
“무슨 헛소리냐. 넌 원래부터 암살자였다. 그리고 내가 무서워한 건 네 머리에 보였던 비듬이었다.”
“잠깐, 꺄, 거짓말! 보지 마! 바보. 보스는 바보!”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쏜살같이 달아난다.
아직도 순진한 구석이 있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어려보이는 녀석이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건 녀석 하나뿐이다.
요즘은 너무 많은 게 변했다.
NPC들은 나를 신으로 숭배하니 말 붙이기도 조심스러워하고, 게이머들은 완전히 나를 NPC라고 생각하며 건방지게 주변을 얼쩡거릴 생각도 않는다.
내 신분이 변화한 만큼 부하들도 하나같이 벼락출세를 했다. 다들 예전의 풋풋한 신참 느낌이 나지를 않는다.
그보다 대하기가 무섭다. 동기화 비율이 떨어져서 조금만 예전 같은 포커페이스에 실패해도 아주 세상이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경악한다.
“헉! 보스가 스테이크를 씹다가 미간을 꿈틀거렸다!”
“맙소사! 뭘 먹어도 벽돌 씹는 골렘처럼 무표정하던 보스가 식사 도중에 표정이 변했다고!? 설마 스테이크에 독이 들어있었던 건가!!”
“당장 주방장 잡아와! 너희는 치유의 사제.. 아니, 브루투스에게 해독포션을 받아오고!”
스테이크가 의외로 맛있어서 놀랐다고는 한 마디도 못한다.
이런 심각한 분위기에서는 절대로 못 말한다.
사실대로 말했다가 부하들이 만약 ‘우리 보스는 이제 스테이크를 먹고 맛있어서 미간을 꿈틀거리는 찌질한 새끼가 됐어!’라고 생각하며 만만히 여기면 어쩐단 말인가.
물론 모든 부하들이 카이사르나 리나 같은 또라이는 아니다.
그래도 내 부하는 기본적으로 50% 가량이 또라이다. 어떤 또라이 부하가 발작을 일으키며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니 가급적 배신을 유발할만한 빌미는 만들고 싶지 않다.
“만독불침의 경지에 도달한 보스를 중독에 빠뜨릴 독이라면 전설로나 전해져 내려오는 무색무취의 무형지독밖에 없습니다. 보통 해독약으로는 도저히 치유할 수 없습니다.”
“개새끼야! 그래서 보스의 해독약을 만들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지금 대륙에 전해지는 열화판 엘릭서가 아니라 신의 권능이 온전하게 담긴 완전판 엘릭서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완전판 엘릭서는 치유의 교단밖에 제작할 수 없습니다.”
쿠로가 난처해하는 브루투스의 멱살을 잡고 탈탈 털더니 기어이 쓸 만한 정보를 캐냈다. 이놈도 제국에 있던 길드본부가 제국과 같이 망한 뒤로 부쩍 나를 향한 충성도가 높아졌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보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뮤온 사제장을 쫓아가 완전판 엘릭서를 받아내겠습니다!”
“그만둬라.”
“헉! 보스,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중독이 악화되기라도 하면 큰일 납니다.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카이사르와 리나를 양옆에 끼고 뒷골목을 돌아다니던 게 엊그제 같건만, 옥체라는 말까지 들으니 참 감회가 새롭다.
“알겠다.”
안 그래도 치유의 교단이 띠껍다고 생각하기도 했었고, 이참에 완전판 엘릭서라도 뜯어내서 연금술사인 브루투스가 잔뜩 양산하게 시켜야겠다.
그런 흑심을 품고 쿠로를 보냈는데 다른 부하들은 그것만으로는 어쩐지 불안한 기색이었다.
“치유의 교단이 이 기회를 노리고 보스를 곤란에 빠뜨리게 하면 어쩌지? 엘릭서를 내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보스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
“대륙 중부로 넘어가는 교단에서 신물을 약탈하는 건 어떤가요? 어차피 적이 될 세력이라면 온전히 보내주는 것도 어리석다고 생각하는데요.”
“괜찮은 생각인 것 같다. 보스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자이크녀의 작전도 나름 인상적이었다.
“좋다. 신물 약탈은 모자이크 녀에게 맡기겠다. 부장으로는 청일을 붙여주지.”
이걸로 혈기왕성한 부하들도 얼마간은 잠잠해지겠지.
그 틈에 각 단계별 권능을 개발해두자.
나는 느긋하게 권능제작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 * *
쿠로는 상식인이다. 기본적으로 게이머이고 탑 랭커는 아니어도 그에 준하는 일류 랭커이기도 한 만큼, 상식이 없어서 일어나는 문제 같은 건 발생할 여지가 없다.
“너희들. 빌헬름 마이어가 죽으면 길드의 원로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저희는 이미 쿠로님 파벌로 갈아탔습니다.”
“깐깐한 노인네들한테 뼛속까지 빨아 먹히면서 구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대신에 이쪽은 너무 똑똑해서 문제였다.
“엘릭서를 제조할 수 있는 치유의 교단이 중앙연합국에 넘어갔다간 길드의 원로들이 성장할 수 있는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분하지만 놈들의 자금줄은 엘릭서를 양산할 수 있는 수준이지.”
“싹을 잘라야만 하겠군요.”
“뮤온 사제장을 비롯한 모든 사제들을 죽여서 입을 막아버리고 기술전수를 불가능하게 하면 되는 겁니까?”
쿠로는 고개를 저었다.
“치유의 교단은 마이어 왕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다른 곳에서도 엘릭서 제조술 따위는 지니고 있겠지. 그러니 우리는 뮤온 사제장에게서 완전판 엘릭서를 강탈해야 한다.”
지난 2년간 길드의 질서는 쿠로를 중심으로 다시 세워졌다. 대륙 중앙에서 재기중인 원로급 게이머들이 원류를 자처하고는 있지만 그쪽은 한 번 뿐인 인계CP를 대거 상실하였다.
쿠로를 따르는 소수의 게이머들은 아직 인계CP가 남아있다. 이 차이는 실로 막대했다.
덕분에 쿠로는 자신을 따르는 게이머들과 함께 새로운 파벌을 만들었고, 신규 핵과금러들을 자신의 휘하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저, 그런데 사제장 씩이나 되는 NPC라면 무력으로 어찌한다고 순순히 엘릭서를 내주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양동을 건다. 우리 중 일부는 호위를 자처하고, 다른 일부가 파상공세를 펼쳐서 놈들을 위기에 빠뜨린다. 호위조가 신용을 얻어서 엘릭서의 전달을 부탁받으면 목표는 달성된다.”
“과연! 뮤온 사제장을 비롯한 치유의 사제들이 손도 까딱 못할 정도로 박살내고, 치유에 사용할 신성력도 고갈될 정도로 몰아붙이면 되는 거군요.”
계획의 기틀은 세워졌다. 쿠로는 뮤온 사제장을 찾아갔다.
예상대로 사제장은 경계심을 보였다.
“빌헬름 마이어가 우리를 잡으라고 하던가?”
“아닙니다. 오히려 호위를 부탁하셨습니다.”
“호위를? 우리를 순순히 보내주겠다고?”
“알라인 사제와의 연을 생각해서 마지막 자비를 베풀겠다고 하셨습니다.”
“으음... 확실히 그는 한 번 자신에게 소속된 사람은 철저하게 챙기고는 했었지.”
뮤온 사제장은 호위를 받아들였다.
‘계획대로다.’
쿠로가 썩소를 지으며 기뻐하던 도중이었다.
“보스의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갑자기 알라인 사제가 자신의 로브에 단 치유의 교단 증표를 거칠게 뜯어내었다.
“저는 치유사제의 길을 그만두었습니다.”
“뭣이...!?”
“제 신앙심이 보스의 앞길에 방해가 될 뿐이라면 기꺼이 버리겠습니다. 보스는 저 따위에게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될 위대한 분이십니다.”
뮤온 사제장이 질겁하며 만류하였다.
“그게 무슨 소린가. 치유의 신께서 자네의 헌신을 어찌나 기뻐했는지 벌써 잊었단 말인가. 자네는 전례조차도 없을 속도로 중급사제에서 상급사제, 나아가 고급사제가 되지 않았는가.”
“뮤온 사제장의 말이 맞네. 고급사제라면 차기 사제장이 되고도 남을 직위가 아닌가. 자네가 그럴 필요는 없네.”
“……!”
쿠로의 지원사격에 뮤온 사제장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여기서 그럴 일은 없다고 하면 쿠로는 말을 바꿔서 뮤온 사제장을 죽일 것이다. 살고 싶다면 순순히 차기 사제장 직위를 보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흑산회 진영이 거느린 암살단은 무지막지한 실력을 지니고 있으며, 타 진영에 넘어가더라도 암살단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그렇다네. 자네는 차기 사제장일세.”
“뮤온 사제장은 자네를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네. 인맥, 자원, 신성력. 말 그대로 모든 지원을 말이네.”
“크윽! 내가 그 정도로 자네를 아끼고 있다는 걸 이제는 알겠는가?”
“신언에 걸고 맹세할 정도로.”
“젠장! 그렇네. 나는 신언에 걸고 맹세할 수 있다네!”
알라인의 동공이 흔들렸다. 심중에 일어난 변화가 거센 탓에 육안으로 포착될 정도의 징후를 보인 것이다. 알라인은 높은 지능 능력치를 지니고 있기에 이 상황을 일정부분 이해했다.
뮤온 사제장이 자신의 직위를 비롯한 많은 것들을 양보하며 목숨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함을 말이다.
“안 됩니다.”
알라인은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뮤온 사제장은 생존을 위해서 신앙과 권력을 내려놓는 것조차도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유연한 사람입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어떻게든 흑산회 진영에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아니, 무슨 개소리야! 난 그저 살고 싶을 뿐이라고!”
“천박한 척 굴어도 소용없습니다. 저는 뮤온 사제장이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 교단본부로 돌아가 목숨이 위협받았다는 소식을 알려 정치적인 위험을 유발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쿠로는 이를 악물었다. 어설프게 똑똑한 알라인의 발언 때문에 이제는 뮤온 사제장을 적당히 달래는 게 불가능해졌다.
“에라, 모르겠다! 다 죽여 버려!”
“배신자들에게 죽음을!”
뮤온 사제장을 비롯한 치유의 사제들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힐러 밖에 없는 그들로서는 데미지 교환비가 절망적으로 낮았고, 결국은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주검을 짓밟으며 쿠로는 착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엘릭서만 얻으면 된다.
“알라인 사제. 엘릭서는 어디에 있지?”
“본부에 있습니다.”
“뭐? 지부에서도 만약에 대비해서 보관중인 건?”
“어제 배달로 보냈습니다.”
“시발! 그게 무슨 개소리야! 여긴 배달 같은 거 없었잖아!”
판타지세계에 배달부가 없는 건 아니다. 먼 길을 떠나 직접 발품을 팔아서 우편을 건네주는 형식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엘릭서를 맡길 정도로 신용도 높은 배달부는 있을 리가 없다.
쿠로가 기가 막히는 것도 당연했다. 알라인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신설된 배달길드가 있습니다.”
“젠장!”
쿠로는 이를 갈았다.
배달길드라니, 분명 현실의 배달업체가 게임 속으로 발을 넓혀서 배달경험을 토대로 영업을 뛰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는 상표를 듣고 시답잖은 녀석들이라면 현실에서 돈으로 매수해서 엘릭서를 넘겨받는 수단마저도 고려했다.
“그 배달길드 이름이 뭐지?”
“배달의 야만족입니다.”
“!!!!”
쿠로는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갑작스레 기절한 그를 보며 알라인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갑자기 저분이 왜 기절하신 겁니까?”
길드 소속 게이머들이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대신 대답했다.
“차라리 젠젠 딜리버리라면 몇 달이 지나도 물류창고에서 물건을 썩혀두면서 똥배짱을 부리니 엘릭서를 탈환할 여지라도 남았겠건만...”
“배달의 야만족은 당일배송을 원칙으로 합니다. 폭풍우가 치는 날에도, 지진이 일어나는 날에도 반드시 배달을 완수하는 또라이 같이 유능한 놈들이죠.”
“이건 틀렸습니다. 엘릭서는 이미 교단본부에 배달되었을 겁니다.”
그제야 배달의 야만족의 기동력을 깨달은 알라인은 길드 소속 게이머들처럼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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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 야만족과 젠젠 딜리버리는 배달의 민족과 로젠택배와 관련이 없습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