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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내가 바로 세계의 적이다
#8 - 내가 바로 세계의 적이다(9)
진품 엘릭서는 개박살이 났다. 그새 중요성분이 기화되기라도 했는지 브루투스는 몇 번 조사를 해보다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말했다.
“이거 완전히 맛이 갔습니다. 아무리 개량을 시도해도 진품의 30% 정도의 효과도 내지 못할 겁니다.”
“그런가.”
“괜찮으시다면 30%의 모사품이라도 곧바로 제작에 착수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브루투스가 두 눈에 이채를 띄었다.
“무형지독을 자력으로 해독하신 겁니까?”
“그건 아니다.”
애초에 무형지독 같은 거 걸린 적이 없잖아. 걸린 게 있다면 스테이크 조각과 바나나쉐이크, 굳이 하나 더 손꼽자면 희박한 양심 정도겠지.
“이 일은 다른 부하들에게는 함구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괜히 병을 치료해야 된다거나 엘릭서를 깬 죄로 백의종군을 하겠다거나 징징거려대면 나만 귀찮아진다.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이럴 땐 아무 일도 없던 척 하는 게 상책임을 깨달았다.
한결 조용해진 집무실에서 신성관리창을 만지작거리고 권능도 개량하다가 기지개를 켰다.
시끌벅적한 놈들은 전부 밖으로 돌려버리니 집무실도 꽤 조용해졌다.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내가 대형사고를 쳤으니 니가 책임지고 깨끗하게 치워라, 하는 상전 같은 부하새끼들도 없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 보이는가.”
지금 말을 건네는 놈은 카이사르가 육성하던 친위대원 중에서 부대장인 녀석이다. 일전에는 수도로 가는 선박에서 암살자들을 천장에 던져주는 일을 했었다.
그 때도 사람 됨됨이가 참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곁에 두고 보니 정말로 좋다.
수련도 열심히 하고 친위대원들의 수련도 잘 챙겨주며 경호임무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경호는 내팽개치고 암살이나 다니는 암살단과는 너무나도 비교되는 성실한 녀석이다.
“만사가 순조롭게 풀리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군.”
권능개발도 곧 있으면 끝나고 신앙심은 나날이 엄청난 양이 쌓인다. 미궁의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신앙에의 의존도는 커지고, 미궁을 수월하게 공략할수록 신앙의 질은 더욱 높아진다.
전 국민을 미궁 하나로 흑산교에 종속시켜서 힘을 키우니 어지간한 천상의 대신들이 부럽지 않다.
선신진영을 선택하지 않은 건 정말 신의 한수 같다. 만일 그쪽을 선택했으면 나는 12대신을 추종하는 하위신격이나 돼서 장기판이나 닦고 차나 내오는 찐따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겠지.
“암살단이 복귀한 모양입니다.”
친위대 부대장이 창문을 열자 시커먼 야행복을 입은 암살자가 불쑥 난입하였다. 지금이야 익숙해져서 안 놀라지, 2년 전에는 저 꼬라지를 볼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랐다.
암살자가 복면을 벗고 얼굴을 드러냈는데 뜻밖에도 일반 암살단원이 아니라 암살단 부단주 이질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수고했다.”
뭔가 딸 키우는 기분으로 키워서 그런지 암살자들과 내 대화는 보스와 부하의 대화라기보다는 아빠와 딸의 대화처럼 느껴진다. 이질도 그리 생각하는 건 마찬가지인지 꽤 편한 표정이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친위대 부대장의 얼굴만 봐도 내가 정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귀여운 아이를 딸이 아니라 아내로 생각하는 놈들이 이상한 거다.
“암살행은 어떻게 되었지?”
“배달부들은 국경봉쇄 및 다중 포위망에 의해 단 한 명도 특정교단에 넘어오지 못했습니다.”
“잘됐군.”
“그래서 남는 시간에 짬을 내서 요인암살을 하고 왔습니다.”
“…….”
요인암살을 잠깐 시간 남으니까 방치형 폰 게임이나 돌리는 것처럼 가볍게 말하지 마라.
“몇 명을 제거했지?”
10명 내외면 해당 요인들이 죽음으로써 일어날 파동을 예측하고 가볍게 선전공세나 나설 생각이었다. 아직 현장에서 철수하지 못한 암살대원들이 위험에 빠지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1030명을 제거했습니다.”
“뭐?”
“1030명을 제거했습니다.”
근데 예상한 거랑 자릿수가 다르다.
그것도 두 자릿수가.
“죄송합니다. 요즘 다들 암살 금단증세에 시달려서..”
“기가 막힐 노릇이군.”
“목표량인 10000명까지 가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의 반성이었냐!?”
“무능한 모습을 보여드려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니 미친. 암살하라고 보내면 목표 한 명만 조용히 슥삭 처리하고 나와야지 누가 네임드 NPC는 보이는 족족 닥치는 대로 죽이고 다니랬냐.
이쯤 되면 내 부하가 유능하다는 생각보다는 개또라이 같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리나 단주가 보스의 중독소식을 듣고 단단히 격분했습니다. 무슨 신을 암살했고 보스의 목소리를 들었다며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은 소리를 하느라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아. 내 잘못이었구나.
무쌍모드 스위치 내가 켜버렸지. 하하.
“그 바보는 지금 어디에 있냐.”
이 이상 진지할 수 없을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질은 쭈뼛거리다가 대답했다.
“궁궐에 갔습니다.”
“!?”
“신전을 다 조졌으니 중앙연합국을 위에서부터 100명 죽여 놓겠다고 달려갔습니다.”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리나의 현재위치를 확인해보았다.
[리나]
[현재위치 : 중앙연합국 궁중기사단 숙소]
[현재상태 : 교전 중]
리나라면 어떻게든 궁중기사단은 극복한다고 쳐도 저기는 중앙연합국이다. 온갖 왕을 따르는 부하들이 개떼거지로 몰려올 거고 결국은 포위망 속에서 체력이 소진되어 죽는다.
신성에 의한 지원은 연이어 발동할 수 없다. 과도한 신성력의 부여는 해당 인물의 수명을 갉아먹는다.
그렇다면 신성력이 아닌 다른 것으로 투자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곧장 CP창을 열었다.
CP로 특성이나 스킬, 칭호, 장비, 능력치 등을 구매해서 리나의 전력을 올리는 방법도 있다. 물론 이런 구매는 힘을 얻는 당위성을 생성하는 과정에서 온갖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때로는 대우주의 신비를 엿보고 백치가 되는 대가로 힘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죽음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능력을 각성했다며 다 죽어가는 상태로 힘을 얻기도 한다.
당연히 그런 투자는 안 한다.
편법이 있다.
대량의 CP를 투자하면 후유증 없는 지원도 가능하다.
[리나에게 <가호 : 신속의 라피아드>을 부여합니다.]
[리나에게 <가호 : 데오랑의 방패>를 부여합니다.]
가호는 어떤 당위성도 필요 없다.
그저 주는 자의 호의만으로 제공할 수 있는 거다.
CP는 그런 호의를 대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신속의 라피아드>는 인위적인 바람이 그녀의 곁을 함께 하며 회피력을 늘려주고 <데오랑의 방패>는 마력방패가 주변을 따라다니며 공격을 막아준다.
이게 있는 동안이라면 적들의 공격을 전부 무시하거나 방어하면서 유유히 궁중에서 벗어날 수 있다.
“리나! 가호의 힘을 이용해서 위기를 벗어나라!”
신언까지 사용하면서 경고를 가하자 리나가 몹시 감격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응! 보스! 귀여운 리나와 보스가 함께라면 어떤 위기도 우릴 당해낼 수 없을 거야!”
리나는 제 주변을 뱅글뱅글 도는 마력방패를 붙잡았다.
키이잉─!?
마력방패가 킹킹거리며 앙칼지게 반항했다.
“얌전히 있어!”
리나는 방패를 자유궤도에서 꺼내고는 원반처럼 집어던졌다. 어떤 공격도 막아내는 방패가 기사들을 덮쳤다. 강철갑옷도 대마법방어진도 마력방패를 견뎌내지 못했다.
기사들이 볼링핀처럼 사방으로 마구 튕겨져 나갔다. 자세히 보니 회피력을 올려줘야 할 <신속의 라피아드>까지 방패에 붙어서 가속효과가 발동했다.
“보스는 정말 대단하시네요. 설마 리나 대장의 말대로 원격으로 지원이 가능하고, 심지어 저만한 전력을 단숨에 돌파할 수 있는 신물까지 내려주시다니...”
“으음. 보스의 곁을 지킨 지도 어느덧 2년이 되어가지만 오늘처럼 놀란 날은 없을 것 같습니다. 설마 중앙연합국의 궁중에 암살단주를 단독으로 파견하시다니...”
이질과 친위대 부대장이 희대의 싸이코패스를 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보스가 이런 또라이니까 리나가 저렇게 또라이처럼 설치고 있지 하는 기색이었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말하기도 뭣해졌기에 떨떠름한 기색을 억누르며 연기스킬을 발동했다.
“모든 것은 계산대로다.”
언제는 뭐 극악무도한 싸이코패스 보스가 아니었던가. 이 바닥에서는 이미 최고봉이 되어버린 몸이다.
새삼 ‘그거 공격용 아닌데? 생존용으로 준 건데?’라고 하면 ‘이건 뭔 찌질한 소리지? 보스가 무형지독 때문에 뇌세포가 뒤져서 노망이 나버렸나?’하는 시선이나 돌아올 거다.
리나는 가호의 힘을 등에 업고 단신으로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였다. 사방에서 암살자들이 나타나면 어느새 놈들의 시체를 짓밟고 도약하고 있다.
“걸렸다!”
“전원, 일제사격!!”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서 뭉개버려라!!”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마법병단의 융단폭격이 가해질 때에는 나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었다.
“꺄하하하하! 이거 베는 맛이 있잖아!!”
방패 하나로 좌측의 공격을 튕겨내고, 단검 한 자루로 마법을 구성하는 마력축을 찢어발기며 무효화시키는 모습은 숫제 마법사의 재앙이 따로 없었다.
“맙소사! 암살자가 주문도적도 못할 마법파괴라니!!”
“안 돼!!”
고위마법사들은 공포에 질려서 마법을 난사했지만 어떤 마법도 리나의 발을 묶지는 못했다.
급기야 고위마법사 한 명은 생체마력과 진원진기까지 동원해가며 금지된 혈마법을 발동했다. 리나를 목숨을 걸어서라도 막아야 할 생사대적으로 여긴 것이다.
“라그나 리 리라티오!”
시커먼 피로 이루어진 안개마법이 최초로 리나의 단검을 뚫고 그녀의 몸에 스며들었다. 거멓게 죽어가는 피부를 보며 고위마법사는 칠공에서 피를 쏟아내며 광기어린 흉소를 지었다.
“흑산회의 거악, 어쌔신마스터를 길동무로 삼는다면 이 노구의 목숨값도 제법 비싸지 않은가.”
“흥. 고작 이 정도 저주로 리나를 죽일 수는 없어.”
리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단검을 자신의 몸에 찔렀다. 자살이라도 하는 건가 싶어서 화들짝 놀랐는데, 대뜸 리나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나오며 끔찍한 귀곡성을 내질렀다.
왜곡되고 비틀리던 연기는 끝내 점으로 응축되어 소멸하였다. 저주의 핵심이 단번에 관통되어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보스가 걸린 저주를 없애기 위해서 리나가 얼마나 열심히 연구해왔는지 알아? 어지간한 고위저주 따위는 단검 한 자루로 전부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연습해왔다구!”
“수명을 바치고 내세의 안식을 포기하면서까지 얻은 힘으로도 진정한 거악은 당해낼 수 없단 말인가! 하하! 크하하하! 크아아아아아아!”
고위마법사는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한 줌 핏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공포에 질린 마법병단은 제대로 된 마법시전도 하지 못했고, 리나는 미친년처럼 날뛰며 마법사들을 도살하였다.
“감동적이네요.”
“크흑. 이 나이에 눈물을 흘릴 날이 올 줄이야.”
이질과 친위대 대장은 눈시울을 붉혔다.
당연히 나는 식겁했다.
이 새끼들 미친 거 아니야? 저 무자비한 학살극의 어디에 감동 포인트가 있는 건데.
“로맨스 소설이나 보면서 뒹굴거리던 글러먹은 단주가 밤늦게까지 저주 전문서적을 공부한 보람이 있었군요.”
“어린 것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기특했던지. 아, 죄송하지만 이거 못 본 척 해주실 수 있습니까? 암살단주는 보스 모르게 저주파괴를 연습하고 싶다고 해서 말입니다.”
시발.
그럼 어느 날 갑자기 리나가 ‘보스의 저주를 치유해줄게!’ 하면서 내 몸에 단검을 쑤셔 박는다는 소리잖아.
그것도 모든 직업을 통틀어서 순간데미지가 가장 높은 암살자이고, 현존하는 암살자 중에서 최강자가 되어버린 어쌔신마스터 리나가 저주파괴를 한답시고 단검을 쑤셔 박는다고.
데미지 어쩔 건데.
즉사하잖아.
애초에 저주 안 걸렸다고.
“듣기로는 저주파괴는 체내에 깃든 저주만을 파괴하는 정교한 기술이라고 합니다. 마력운용의 극치에 달하는 기술이기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보스라면 칼에 찔려도 태연하게 커피를 마실 것 같지만요. 하하하.”
“동감입니다. 보스라면 그대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샤워를 할 때에나 단검을 발견하고 거추장스럽다며 시큰둥하게 뽑아내실 분이죠. 어쩌면 체스도 두실 것 같습니다.”
화기애애하게 살벌한 대화 주고받지 마라.
나 그런 상남자 아니다.
관우처럼 몸에 칼질 당하고도 장기 못 둔다고.
“어차피 보스가 걸린 저주는 극악무도한 저주이니 저주파괴의 위력을 최대로 걸어도 단번에 파괴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아무리 세게 공격해도 신체에 가해지는 데미지는 없는 것이죠.”
이질은 위안이나 삼으라는 것처럼 그리 첨언하였다.
시발.
리나한테 암살당해서 즉사하기 싫으면 어디 가서 줜나 쌘 저주라도 걸리고 와야겠다.
============================ 작품 후기 ============================
[아무래도 상관없는 설정 모음]
⑥신조어
카이사르하다 = 상식이 없는 개 또라이 짓을 하다
리나스럽다 = 귀엽지만 또라이스럽다
⑦유물
고대 메이지들의 혼을 담아서 만든 마도구. 모든 유물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으며 효능은 일반 아이템을 상회한다. 사용조건이 달려있고, 유물은 사용자를 스스로 선별한다.
1만 개의 유물은 각각의 넘버링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고대 메이지들의 강함을 순서대로 나눈 것이다.
물론 설정딸만 쳐놓고 작가가 귀찮아서 에고웨폰으로 몇 개 집어넣은 다음에 비중을 1도 안 주고 있다. 존재감이 붕 떠버려서 왜 있는지도 모르겠는 진귀한 쓰레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