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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내가 바로 세계의 적이다
#8 - 내가 바로 세계의 적이다(11)
8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초원을 횡단하여 세계를 재패하던 징기스칸의 기분은 어땠을까.
그 기분은 모르겠지만 내 기분이 더러운 건 확실했다.
백만 명의 빅마우스 테이머들과 수백만 마리의 빅마우스들을 이끌고 내려가고 있다고.
어째서 빅마우스는 백만 마리가 아니냐고?
저거 한 명당 한 개씩 테이밍한 게 아니다.
실력 있는 놈들은 몇 십 마리도 가지고 있다.
빅 마우스는 강한 자를 따를수록 강한 먹이를 먹을 수 있다고 믿기에 강한 테이머에게는 여러 마리가 들러붙는다. 덤으로 지금 이 무리에서 가장 막강한 고수로 인정받는 게 바로 나다.
지금 천 마리의 빅 마우스들이 들러붙고 있다. 그냥 위에 탄 것도 아니고 빅 마우스가 떠받치는 가마에 타있다.
사방에서 엄청나게 쳐다보는데 존나 부담스럽다.
“의자왕이라고 알아? 삼천궁녀에게 떠받들어지던 왕.”
“우리 신은 빅 마우스 천 마리가 대신하네.”
“미녀보다 잘 싸우는 괴물이 좋은가봐. 역시 변태스러울 정도로 미궁공략에 영혼을 바친 신다워.”
괜스레 드높은 신성 능력치 탓에 신자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까지 죄다 들린다. 덕분에 저놈들이 나를 전쟁에 미친 전쟁광이나 인류 역사상 다시없을 전쟁신으로 여기는 건 잘 알게 되었다.
“보스! 빅 마우스 군단의 승차감은 어때?”
가마 천장 뚜껑을 열고 리나가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변함없이 높은 곳을 좋아하는 바보다.
“솔직히 좋지는 않군.”
“정말?”
“좀 더 평범한 기승물이라면 좋았을 텐데.”
대놓고 빅 마우스 줫같으니까 갖다버리고 딴거 가져오라고 할 수는 없잖아. 당장 가마 들고 있던 빅마우스들이 주둥이 쩍 벌리고 나 씹어먹으면 어떡해.
리나도 내 곁에서 함께한 지 2년도 더 지났는데 이 정도로 돌려 말했으면 대충 알아먹었겠지.
“응 알았어! 뒤는 귀여운 리나한테 맡겨!”
리나는 단검을 뽑더니 대뜸 빅 마우스 한 놈을 찔러 죽였다.
[리나가 빅 마우스를 살해했습니다.]
깜짝 놀라 얼어붙은 빅 마우스들에게 리나가 윽박질렀다.
“짜식들아! 보스가 네놈들이 말보다 느려터진 새끼들이라고 불만스러워 하시잖아! 지금부터 말보다 느리게 뛰는 새끼들은 다 찔러 죽인다! 질주 실시!”
개새끼야.
그거 아니야. 아니라고.
부글부글 끓는 속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가마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빅 마우스들이 질주하며 가뜩이나 개떡같던 승차감이 지진이라도 맞은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건 이미 탑승물에 타있는 상태가 아니다. 가마에 처박힌 채로 뽑기상자에 들어간 뽑기종이처럼 흔들리고 있다고.
“시발. 정지! 당장 멈춰!”
“무슨 일이야, 보스?”
“역시 그냥 걸어가는 게 낫겠다.”
리나는 환하게 웃으며 단검 한 자루를 더 뽑았다.
“알았어, 보스. 조금만 기다려봐~”
천장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시스템 로그가 떠올랐다.
[리나가 빅 마우스를 살해했습니다.]
[리나가 빅 마우스를 살해했습니다.]
문답무용으로 두 마리가 살해당했다.
리나의 노기어린 외침도 들렸다.
“뭐하는 거야, 짜식들아! 보스가 네놈들의 형편없는 승차감 때문에 차라리 걷고 싶다는 말씀까지 하시잖아!! 가뜩이나 무형지독의 후유증을 앓고 계신 보스를 죽일 셈이냐!!”
뭐냐. 이 평상시 리나의 모습으로는 떠올릴 수도 없는 엄청난 거리감이 드는 말은. 귀염귀염하게 굴면서 애교를 부리던 리나의 모습은 전부 가식이었던 건가.
용케도 저 작은 체구로 멸혼객이나 카이사르를 대신해서 흑산회 서열 2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싶더라니.
설마 이런 의외의 일면을 숨기고 있는 줄은 몰랐다.
“보스! 이제 어때? 얌전해졌어? 귀여운 리나가 한 마리 더 안 죽여도 괜찮지?”
여기서 안 괜찮다고 했다간 빅 마우스 군단이 심층지대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멸할 기세다.
“...괜찮다. 이대로 가도록 하지.”
“응! 알았어!”
두두두두두!
결코 편하다고는 할 수 없는 승차감이지만 나는 가마의 벽을 꽉 붙잡으면서 필사적으로 버텼다.
어디에 한 번 부딪혀서 신음이라도 흘렸다간 그때마다 빅 마우스가 몇 마리씩 도살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억지로 힘을 주며 버티니 다행히도 아까처럼 벽에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큰일이다”
“우리 죽었다”
“살려줘”
갑자기 빅 마우스들이 동요하며 웅성거렸다.
뭔가 해서 가마에 달린 창을 열었다.
내리막길이다.
“…….”
리나는 창밖을 내다본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더니 다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바보들! 보스가 빨리 가라고 쳐다보고 있잖아! 귀여운 리나가 채찍질을 해야 출발할 테야? 리나한테 맞는 포상을 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도 보스를 기다리게 하는 건 사형감이야!”
짜아악!
퍼엉!
채찍질 한 번에 암반이 터지며 갈라지는 꼴을 보고 모두가 침을 꼴깍거렸다. 빅 마우스들은 무진장 서럽다는 듯이 나를 향해 낑낑거렸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출발하였다.
리나는 보스가 시킨 대로 잘했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생각하며 창을 닫았다.
[돌발 퀘스트 ‘빅 마우스 친위대를 살려라’ 발동!]
[리나의 과도한 충성심에 의해 무자비하게 죽어나가는 빅 마우스들! 당신은 그런 빅 마우스들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살리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심층지대에 도달하기 전까지 빅 마우스 친위대의 생존율에 따라 살아남은 빅 마우스들에게 특전이 지급됩니다!]
[빅 마우스 친위대]
[현재 생존율 99.7%]
[생존 997마리, 사망 3마리]
정말로 오래간만에 보는 퀘스트창이지만 반갑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잠수함패치로 쥐도 새도 모르게 퀘스트 난이도 알림기능이 새로 생겼기 때문이다.
[퀘스트 난이도 : 불가능Impossible]
“…….”
아니 대체 얼마나 죽어나갈 예정이면 이게 불가능이야?
기가 막혀서 통찰 능력치를 활용해보았다.
[정보판정 통찰체크]
[목표 값 70 이하 > 현재 값 15]
[통찰체크 성공]
[리나는 선신진영의 대대적인 철수 및 중립연합국의 몰락으로 인한 여파가 지상을 초토화시킬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미궁을 돌파하는 속도를 최대한 빠르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녀는 이번 일에 한해서는 보스의 명령이라도 정면으로 거스를 각오마저 지니고 있습니다. 보스가 무형지독에 걸렸으며 아무도 모르게 후유증을 감추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는 리나가 당신에게 품은 절대적인 신뢰와 연결되는 결정입니다. 그녀는 당신이 모든 고통을 홀로 짊어지는 고독한 성향의 인간이며 그렇기에 믿을 수 있다고 신뢰를 품고 있습니다.]
[자체통찰력에 의한 추가정보 제공!]
[리나는 보스의 총애를 받는 실력파 부하이자 최고참 간부로 흑산회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는 흑산회 내 모든 간부들과 사전접촉 후 설득을 마쳤을 겁니다.]
[빅 마우스는 전진속도를 높이기 위한 소모품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흑산회에 제동을 거는 게 아닌 방해요소를 당신의 힘으로 해결해야만 합니다.]
통찰에 의한 분석정보는 말하고 있다.
꼬우면 니가 알아서 가라고.
“…….”
그냥 다 뒤지게 두자.
이거 딱히 못 깨도 엄청난 피해가 생기는 건 아니잖아.
빅 마우스 강화 이벤트쯤이야 포기하면 그만이다.
두두두두두
무리지어 전진하는 수백만 빅 마우스 군단의 전진을 가로막을 간 큰 몬스터들은 없었다.
기존의 흑산회 파티만 해도 모든 몬스터들의 접근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아예 대군을 이루고 물 밀 듯이 밀어닥치며 전진하고 있다.
공포심이 존재하지 않는, 오직 무언가를 죽이고 파괴하기 위해 존재하는 몬스터가 아니라면 모든 몬스터가 달아났다.
막대한 숫자를 자랑하는 전사의 종족, 오크Orc?
뛰어난 도법을 자랑하는 도객의 종족, 리자드맨Lizard Man?
지저에서 접근하는 대량 포식자 종족, 랜드웜Land Warm?
아무 의미도 없다.
아무 소용도 없다.
숫자로도 백만 대군을 막을 수는 없다. 개중에 특출한 고수가 나타나더라도 인간들의 초고수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빅 마우스 친위대]
[현재 생존율 92.5%]
[생존 925마리, 사망 75마리]
그래도 빅 마우스들은 끊임없이 죽어나갔다.
한 층마다 열 명씩은 죽는다.
길이 복잡하고 험해지는 저층으로 가면 전멸은 확정이다.
‘몬스터라고 감정이 없는 건 아니야.’
방치하려던 생각은 말끔히 사라졌다.
친위대로 뽑힌 놈들조차도 소모품으로 쓰이는 상황이다.
다른 빅 마우스들이 공포심을 품지 않을 리가 없다.
이건 분명 문제가 된다.
백만대군이 지닌 최고의 전력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흑산회 파티가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모험가들의 떼죽음이다.
테이머들은 이미 빅 마우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빅 마우스들이 일제히 반격에 나선다면 엄청난 숫자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독자적인 전투능력이 없는 모험가들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생존자는 최종적으로 단 1%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점을 토대로 리나를 만류해보자.
그렇게 마음을 먹는데 또 다시 통찰력이 발휘되었다.
[한계수치를 돌파한 통찰력이 인과를 통찰하며 미래의 결과를 도출해내었습니다.]
[고급통찰력에 의한 인과예지 발동!]
[리나와 흑산회 간부는 빅 마우스 군단과 흑산회 대군을 모두 소모재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떠한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감수할만한 일이라 여길 것입니다.]
[이전과 같은 이유로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설득을 원한다면 두 가지 방법만이 남아있습니다.]
[빅 마우스를 죽이지 않아도 전진속도를 높일 방법을 강구해내거나, 혹은 전진속도를 높이지 않아도 당신의 건강에 이상이 없음을 증명해내는 방법입니다.]
시스템 로그를 보자마자 목 끝까지 욕지기가 올라왔다.
전진속도를 높일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다.
그나마 현실적인 방법이 부하들의 착각을 해소하는 거다.
근데 착각 존나 잘하는 새끼들한테 어떻게 착각을 풀어.
이 새끼들은 젓가락으로 고기만 찍어도 보스가 사람을 찔러 죽이고 싶어 하신다며 감옥에서 죄인을 꺼내 처형대에 세우는 놈들이다.
영문도 모르고 처형장에 불려가서 대뜸 손에 칼을 쥐어주고 보스의 뜻대로 하십시오, 이러는 새끼들이라고.
거기다 대고 ‘아니, 이거 안 죽이고 싶은데’라고 말하면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보스가 달라졌어! 하고 수군거리다가 불순한 눈빛을 보이는 하이애나 같은 새끼들이다.
그런 이벤트가 발생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착각을 해소하지 않고 이용하기만 선택했다.
분명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것도 부하들의 그런 또라이 같은 면모를 배척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한 무리로 융화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실로 이룬 것이 지금의 충성심.’
‘그리고 지금 증명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의 건강함.’
‘이걸 증명하는 게 가능한가?’
냉정하게 고민하닥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새끼들은 내가 무술로 절대지경에 도달하고 심지어 이를 초월해서 신이 되어버렸다고 여기잖아.’
독에 걸리지 않았다고 증명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신의 저주.
줄곧 형편 좋게 내 약함의 변명으로 대왔던 게 족쇄가 된다.
건강을 되찾으면 저주가 사라진다.
저주가 사라지면 본 실력을 발휘한다.
즉, 건강을 되찾았다는 증거로 본 실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것도 내가 지닌 본 실력이 아니다.
부하들이 믿는 가상의 내가 지닌 본 실력이다.
나는 천장을 봉으로 툭툭 두들겨 리나를 호출하였다.
“리나. 잠시 묻고 싶은 말이 있다.”
“응! 머야 머야?”
“너는 내 본 실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지?”
번거롭게 다른 부하들을 찾아가 한 명 한 명 모두 납득시킬 필요 없다.
리나만 납득시키면 나머지는 다 납득시킬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리나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누구도 납득시키지 못한다.
이 앙칼진 녀석의 대답이 모든 것을 판가름한다.
심층지대 참여인원이 백만 명인지 만 명인지를 결정짓는다.
“한 손가락으로 산맥 정도는 짓누를 수 있지 않아? 산맥에 숨어있는 신화생물이 뛰쳐나와도 손바닥으로 후려쳐서 터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보스가 마음만 먹으면 검기만으로 단숨에 미궁 열 개 층도 박살낼 수 있을 것 같아! 미궁은 엄청 깊으니까 열 개 층이면 10km쯤 되는 걸까?”
퀘스트 난이도가 불가능인 이유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개새끼야.
넌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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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 : "존나 쌘 싸이코패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