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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하들이 미친듯이 유능하다-188화 (188/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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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내가 바로 세계의 적이다

#8 - 내가 바로 세계의 적이다(12)

살다 살다 나를 강하게 여기는 부하의 인식이 내 앞길을 가로막을 줄은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 이런 괴이한 시련은 내 게임인생에서도 난생 처음으로 겪는다.

시련 자체는 그렇다고 쳐도 난이도가 너무 미쳤다.

나는 이제 스스로의 건강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한 손가락으로 산맥을 짓누르고 손바닥으로 신화생물을 터뜨리며, 검기를 뽑아서 지저 10km를 초토화시켜야 한다.

‘시발. 저게 사람한테 가능한 스펙이냐.’

내가 본 최강의 용사도 저딴 짓은 못했다.

멸혼객과 카이사르도 저런 미친 짓은 불가능했다.

“리나. 너는 그게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야?”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이다.”

리나는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보스는 보스잖아. 신화생물 정도는 싸대기만 때려도 죽일 수 있어야하는 거 아니야?”

“…….”

“히드라가 눈깔 야리면 막막 이케이케 저케저케해서 1초 컷 할 수 있는 거잖아.”

이케이케 저케저케가 뭐냐.

귀엽게 팔 움직이고 손짓하면서 말해도 안 된다.

“보스가 생각보다 약할 수도 있는 거지... 응, 알았어...”

“알아줘서 고맙군.”

“손바닥은 무리여도 주먹이면 잡을 수 있는 거잖아.”

좀 더 낮춰.

주먹이 아니라 전설등급 무기 쥐어줘도 못 잡아.

카리스마 특화라서 공격 못 한다고.

맞지도 않지만 때리지도 못해.

데미지가 안 들어가는데 어떻게 때려.

“설마 보스 주먹으로도 못 잡는 거야?”

리나의 눈에 의혹이 싹 텄다.

나는 냉큼 부정했다.

“주먹이면 거뜬하지.”

“역시 그렇지? 와! 보스는 대단해!”

“…….”

남자의 허세는 정말이지 도움이 될 때가 없다.

죽어라, 허세욕구.

제발 내 안에서 말끔히 사라져라.

“정말로 가능한 겁니까?”

예상치 못한 태클이 들어왔다.

리나는 쌍심지를 키며 사납게 쏘아붙였다.

“누구야! 보스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방진..”

유모다.

“어... 안녕하세요.”

“…….”

“…….”

유모는 물끄러미 리나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에 표정이 없다.

리나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더니 가마 안에 쏙 들어왔다.

날 방패막이로 삼으려는 모양이다.

조그마한 손으로 내 허리를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보스. 어떻게든 해줘. 저 유모는 무섭단 말야..”

“어쌔신마스터가 약한 소리나 하기는.”

“드래곤슬레이어 앞에서 어쌔신마스터가 무슨 소용이야. 리나가 아무리 귀여워져도 유모를 이길 수는 없다구..”

귀여워진다고 강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튼 저 무표정이 나한테 향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나는 최대한 덤덤한 척 연기하며 유모의 물음에 대답했다.

“정말로 가능하냐는 건 어떤 의미지?”

“보스의 근력은 신의 저주로 인해 지나치게 줄어들었습니다. 지금의 전투력으로는 도저히 신화생물을 주먹으로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리나의 눈초리에 다시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대신 지금은 신성력이 있다.”

“신성력은 근력처럼 언제나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너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또한 지금껏 흑산회와 브람 시, 마이어 왕국과 흑산회 진영을 키운 이유이기도 하다.”

“흑산회 진영 말입니까?”

“그렇다.”

나는 최대한 오연한 어조로 모든 것은 계획대로 이루어졌다는 듯이 팔을 펼치며 망토를 펄럭거렸다..

“보아라, 이 백만 군세를. 이들이 심층지대의 진정한 거악들과 맞서 싸울 기회를 열어줄 것이다.”

“진정한 거악들...?”

“악신의 사도. 악신의 계약자. 미궁의 심층에 존재하는 진정한 지옥의 지배자들. 그들이 너희들의 적이다.”

“그럼 보스의 적은 그 너머에 있는 겁니까?”

“그렇다.”

간신히 그럴싸한 흐름을 잡아내었다.

나는 여세를 몰아 연기스킬을 최고조로 발동하였다.

“인과율에 묶인 악신들을 대신하여 지상을 악과 마가 창궐하는 소굴로 물드는 재앙의 화신. 바로 마왕이다.”

“!!”

“내 힘은 마왕을 제거하기 위해 존재한다. 마왕만 제거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힘은 필요 없다.”

유모는 수긍하였다.

애초에 그녀는 신성력을 지니지 못했다.

어림짐작으로 대충 가능하겠거니 여기고 말았을 뿐이다.

마왕을 뭐 어째?

미친 소리지.

그거 미궁의 최종컨텐츠로 추정되는 거잖아.

그리 간단히 잡혀줄 리가 없다.

그냥 유모가 대충 안심하라고 내뱉은 말이다.

“내 안배는 완벽하다. 그러니 빅 마우스들을 이 이상 소모해서는 안 된다.”

이 흐름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통찰은 만능이 아니다.

분석정보를 뛰어넘는 역량으로 설득하면 되는 거잖아.

마침 내 연기스킬 등급도 장난이 아니다.

지난 2년간 대부분의 스킬은 마스터 등급에 도달했다.

설득될 수도 있지.

아니, 설득되라!

가능성은 낮지만 랜덤박스 까는 기분으로 질렀다!

[리나가 특성 <암살자의 직감>을 발동합니다. 연기 간파 확률이 2배 상승합니다.]

[리나가 스킬 <절대간파>를 발동합니다. 연기 간파 확률이 3배 상승합니다.]

[리나가 고유장비에 내장된 특수효과 <절멸자의 눈>을 발동합니다. 연기 간파 확률이 5배 상승합니다.]

그리고 꽝이 떴다!!!

[리나의 연기 간파 확률이 100%가 되었습니다.]

[연기가 간파됩니다.]

[리나의 통찰력과 당신의 통찰력의 대항체크 발동!]

[79 vs 143]

[능력치 차이 x 5%의 확률로 당신의 본심이 발각되지 않습니다.]

[본심 가드확률 320%에 의한 절대방어 성공!]

천만 다행히도 알맹이까지 모두 발각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연기를 했다는 사실은 발각되었다.

유모한테 쫄려서 썼던 거지만 리나는 어찌 생각할까.

“보스. 뭔가 숨기는 거 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보스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거냐.”

“리나는 귀여우니까 알아! 그렇게 얼버무려도 소용없어!”

특성이랑 스킬이랑 아이템 특수효과 발동하면서 100% 확률로 남의 스킬 간파하는 녀석의 어디가 귀엽다는 거냐. 그런 건 귀여운 게 아니라 무서운 거다.

“보스는 언제나 미궁공략을 말했지만 <그 뒤>에 대해서 언급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미궁에 내려가서 마왕과 함께 죽으려는 거잖아!”

“........뭐?”

“보스가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 진군속도를 늦춰가면서 전진해봤자 조금도 기쁘지 않다고. 리나는 쓸모없는 버러지들이 죽어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보스가 살았으면 해!”

그거 참 감동적이지만 살벌한 말이네.

이 녀석, 빅 마우스들이 반란을 일으킬 걸 알고도 진군속도를 올리기 위해서 줄곧 친위대를 압박해왔던 게 틀림없다.

이래서는 통찰정보가 내게 경고했던 대로 리나를 설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건강함을 과시하려고 신성력을 썼다간 생환가능성이 낮아진다며 더 날뛸 기세다.

“너희들도 죽을 수 있다.”

“상관없어!”

“내게는 상관이 있다.”

이번만큼은 연기스킬을 쓰지 않고 진심을 토로했다.

“이제는 마왕을 죽이는 것 따위보다 내 부하들이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해졌다.”

“보스..”

“이걸로 내 진심을 알겠는가?”

리나는 훌쩍이며 고개를 숙였다.

이거 참 쑥스러워지네.

울 정도로 감동받아버린 건가.

“보스의 뜻이 정 그렇다면..”

리나가 단검을 꺼내들었다.

응?

“리나의 귀여움이 보스의 대업에 방해가 될 뿐이라면, 리나가 먼저 죽을게!”

“무슨, 막아!”

카앙!

유모가 가한 권압이 리나의 단검 날을 박살냈다.

뭐였지 방금 그건.

아니, 아무튼 그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어리석은 녀석!”

나는 정색하며 화를 냈다.

“무얼 위한 미궁정복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너희가 죽으면 설령 미궁을 정복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우우.. 그치만..”

“두 번 다시 이런 바보 같은 짓은 저지르지 마라. 이런 곳에서 개죽음이나 당하라고 널 중용해온 게 아니다.”

리나는 이번에야말로 감격에 벅찬 기색이었다.

“보스... 리나는 정말 기뻐!”

“그러냐.”

“보스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적과 싸우는 버림패로 사용되고자 자살을 할 수 없게 설득 당했다니, 자존감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어!”

버림패잖아 그거.

어디에 자존감이 채워질 구석이 있는 건데.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유모가 쓰레기를 보는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고.

권압으로 단검 날을 부수는 인간전차가 쳐다보고 있다고.

진짜 살해당할까봐 무섭다.

“그래도 뭔가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리나는 너무 걱정돼. 진격속도를 늦추면 보스가 영영 떠나버릴 것만 같은 걸.”

“방법만 있다면..”

-있는데요?

순간 어색한 정적이 이어졌다.

방금 그거 뭐였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내 허리띠에서 뭔가 풀려나왔다.

마법등급 아티펙트 <부유하는 황금공>. 이쯤 돼서는 이런 것도 있었지, 싶을 정도로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녀석이다.

황금공에 깃든 에고, <황금의 마법사 테라치>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루 드렸잖아요. 그거 쓰세요.

탐욕의 자루.

무생물은 뭐든지 집어넣을 수 있는 특수보관 아이템이다.

“자루를 뭐 어떻게 쓰라는 거냐.”

-땅 수납하면 되잖아요.

“엑.”

거짓말 안치고 모두가 띠용 하는 표정을 지었다.

“땅을, 아니, 미궁 바닥을 수납하라고?”

-네.

“그런 게 될 리가 없잖아.”

-왕궁 수도도 채집했는데 미궁 바닥은 왜 안 되는데요?

“…….”

그러네.

그거 설득력 넘치네.

나는 땅바닥에 탐욕의 자루를 대고 ‘바닥을 수납한다’라고 강하게 이미지를 떠올렸다.

[이 던전 암반층 속에는 생명체가 존재합니다. 높은 확률로 흙과 암반을 먹고 사는 랜드 웜이나 암석괴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부생명체를 암반층 밖으로 쫓아내십시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보스. 무언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암반층 안에 있는 랜드 웜과 암석괴물들 때문에 수납이 되지 않는다. 놈들을 죽이지 못하면 암반층을 수납할 수 없다.”

“간단하군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이게 뭔 미친 소리지.

나와 리나가 멍청하니 쳐다보는 가운데 유모가 돌바닥을 무슨 스펀지처럼 뚫고 한 손을 꽂았다.

드드드드득

미궁 전체가 뒤흔들릴 것만 같은 굉장한 소리가 울렸다. 거대한 힘의 파동이 무형의 위력을 지면을 향해 투사했다. 그 여파만으로도 대지 전체가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쩌저저저적!

파도처럼 일어난 지면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땅에 디딘 발마저 얼어붙지 않을까 두려워 멈칫했지만 힘의 분배가 어찌나 정교한지 발에는 서리조차도 일지 않았다.

“전부 얼려 죽였습니다.”

장하다 김유모. 미궁을 네 손으로 멸망시켜버리렴.

그냥 유모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나 여기 왜 있는 거지.

“그 힘, 어디까지 쓸 수 있는가.”

“아이스드래곤의 드래곤하트는 본래 무한한 마나를 생산하지만 용족이 아닌 인간인 저로서는 출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출력한도가 월등히 낮아진 채로만 무한히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변변찮은 권능이라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그게 변변찮은 수준이면 게이머들은 죄다 호밀밭에서 호밀이나 뜯어먹는 새대가리보다 못한 수준이다.

‘지면을 수납한다.’

이번에야말로 성공하리라 마음먹으며 수납을 이미지했다.

[미궁 암반층이 수납되었습니다.]

정말로 된다.

땅이 쑥 꺼지면서 단번에 길이 열렸다.

복잡하게 비비 꼬인 길을 따라 전진할 필요도 없다.

그냥 직행이다.

단번에 다음 층 플로어로 슝 떨어진다.

지름길도 이런 지름길이 있을 수가 없었다.

“아.”

덤으로 암반층의 높이는 200m 이상이었다.

우리는 느닷없이 고공 200m에서 낙하하는 처지가 됐다.

쿵! 쿵쿵쿵! 쿵쿵!

빅 마우스들이 거세게 지면과 충돌하였다.

강한 놈들은 살았지만 약한 놈들은 즉사를 면치 못했다.

[친위대 빅 마우스 50마리가 낙사했습니다.]

[현재 생존율 87.5%]

[생존 875마리, 사망 125마리]

[일반 빅 마우스 11794마리가 낙사했습니다.]

[낙사경험치를 습득합니다.]

[A급 업적 ‘지옥에는 바닥이 없지’를 달성했습니다.]

리나를 따라 내려갈 때보다 5배는 더 죽었다.

일반 빅 마우스도 포함하면 1179배는 더 죽었다.

“보스. 더 죽으면 곤란한 거 아니었어?”

“계산대로다.”

“아까는 죽으면 안 된다고..”

“아무튼 계산대로다.”

“응…….”

리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나를 희대의 싸이코패스 보듯이 두려워하며 쳐다봤다.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행동을 납득할 수 없는, 마치 카이사르 같은 또라이를 보는 시선이었다.

============================ 작품 후기 ============================

낯선 물건은 아무데서나 사용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집니다.

소녀전선이 그렇습니다.

화장실에서 켜는데 최대볼륨으로 "소녀전선!!"하고 졸라 쩌렁쩌렁하게 합창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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