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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내가 바로 세계의 적이다
#8 - 내가 바로 세계의 적이다(14)
유모의 광역학살기로 암반층 내의 생명체를 말살하고 암반층을 탐욕의 자루에 수납하기를 반복하니, 흑산회 진영의 전진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탐욕의 자루를 꺼낸 이후로 B30층, 미궁 하층부 직전에 도달하는 데에는 고작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는 본격적인 하층부 진입에 앞서 마지막 휴식을 가졌다.
진영에 속한 모험가들과 병사 등은 각자의 소속에 따라 따로 한 자리에 뭉쳤다.
그건 흑산회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요간부들이 한 자리에 모여들자 자연스레 미궁진출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하루 만에 잔뜩 내려왔으니까 하층부도 하루 돌파, 심층지대도 하루 돌파하면 삼 일만에 돌아갈 수 있겠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도시락이라도 싸올 걸 그랬나.”
“우와! 도로시 언니. 요리할 줄 알아?”
그리고 신속하게 샛길로 새어버렸다.
요리토크인가.
개인적으로 흥미가 느껴지는 대화다.
“물론이지. 데코레이션 정도는 충분히 거뜬하단다.”
“데코레이션? 요리는?”
“그거야 유모가 대신 해주시지. 귀족가의 여식이었던 몸으로써 함부로 천한 일에 손을 댈 수는 없잖니?”
“…….”
참으로 의외의 부분에서 귀족 어필을 하는 도로시였다.
“그러는 리나는 요리 할 줄 아니?”
“하나 정도는!”
“어머. 그거 참 근사하구나.”
칭찬하는데 칭찬처럼 들리지가 않는다.
방금 전에 요리는 천한 일이라고 말했었잖아.
저걸 또 바보같이 헤헤거리며 좋아하는 리나가 가엾다.
“귀여운 리나는 솜사탕을 만들 수 있어!”
뭣, 진짜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요리가 솜사탕이어도 괜찮은 거냐!?
“흥. 솜사탕 따위를 만들 수 있다고 부러울 것 같아?”
도로시는 왜 갑자기 분해하면서 입술을 질끈 깨무는 거냐.
정말 저게 부러운 건가.
“언니 저 싫죠?”
“응.”
언제나 생각하지만 내 부하들은 정말 난해하다.
그보다 무섭다.
웃는 얼굴인데 서로 칼 들이대고 있는 것처럼 살벌하다.
“참모총장. 당신도 일단은 여자인데 요리는 할 줄 아는가?”
“참나. 일단은이 뭐에요.”
“그야 요리 못하게 생겼으니 그리 묻지.”
쿠로의 시큰둥한 말에 모자이크녀가 이를 빠득 갈았다.
모자이크 입자를 보고 저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격을 이룬 뒤에 그녀의 맨 얼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올까.
“저 요리 잘하거든요?”
“그런 불길한 생김새로 요리라니. 차라리 오크 주술사가 하는 요리를 먹고 말지.”
“그러는 댁은 얼마나 요리 잘하시는데 그래요?”
쿠로는 차갑게 조소하며 원형방패를 모닥불 위에 올렸다.
10분 뒤, 고기볶음을 먹으며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새끼 정말 안 어울리게 요리 잘하는구나 하고 말이다.
“크읏. 이건 반칙이에요. 남자가 요리를 잘한다니.”
“남자가 아니라 내가 잘하는 거다.”
“그런 건가요?”
모자이크녀의 물음에 청일이 무표정한 얼굴로 칼을 뽑아들었다.
탁탁탁탁탁
엄청난 속도로 썰려버리는 채소를 보며 모두가 납득했다.
이 새끼도 요리 겁나 잘하는구나.
재료만 충분하면 레스토랑 음식은 가뿐히 만들겠다.
어지간한 셰프 뺨치는 솜씨다.
“검객이 어디서 요리를 배웠어요?”
“산에서 살다보면 이런저런 재주가 늘기 마련이지.”
산악인은 대단하군.
고개를 끄덕이는데 왠지 모르게 시선이 느껴졌다.
주변을 돌아보니 모두가 혹시나 하고 쳐다본다.
“…….”
이거 뭔가 고민된다.
보스가 요리를 잘한다고 하면 뭔가 좀 깨는 느낌이잖아.
그렇다고 못한다고 하면 실망받을 것 같은 느낌이고.
“몬스터의 생살도 잘 먹으면 먹을 만하다.”
“으엑.”
“역시 보스는 보스야.”
적당히 기대를 충족했는지 시선이 곧 넘어갔다.
모두의 관심을 받은 사람은 브루투스였다.
그는 품에서 자그마한 연금키트를 꺼내들었다.
“연금술로 만든 요리 드셔보실 분?”
“…….”
“없어요? 저 요리 잘하는데.”
그냥 넌 요리 잘하는 걸로 쳐줄게.
굳이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확인하고 싶지는 않아.
간부들과 떠들썩한 잡담을 마친 뒤에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거론했다.
“이 앞부터는 바닥을 뚫고 길을 만들 수는 없다.”
“제 능력으로 얼려죽일 수 없는 적이 있습니까?”
“있다.”
유모는 호승심을 보였다.
“어떤 적입니까?”
“번식이나 생존욕구가 배제된, 철저하게 살상만을 목적으로 탄생한 존재. 진정한 의미에서의 몬스터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들이 출몰하기 시작한다.”
“빅 마우스도 하층부의 몬스터입니다. 이 정도의 나약한 개체라면 얼마든지 얼려죽일 수 있습니다.”
“놈들은 청소부다. 하층부 먹이 피라미드에서는 최하층에 불과하지. 빅 마우스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무자비한 존재들이 나타나기 시작할 거다.”
“!!”
레이브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맞아요. 최상급도적교본 하층부 상권 제 3장 서식 피라미드에 따르면 빅 마우스보다 강한 몬스터는 3000종도 넘게 존재한다고 해요.”
“…….”
“헤헤.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죠? 보스에게 가혹한 교육을 받을 때에는 밤마다 남몰래 울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때 흘린 눈물이 지금 흘릴 피를 줄인다고 생각하니 보람이 느껴져요.”
딱히 기특해서 쳐다본 거 아닌데.
뭔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키지.
“널 왜 키웠는지 모르겠군.”
“!?”
“너 지금 이 파티에서 역할이 뭐냐.”
레이브는 무척이나 억울해하였다.
“도적이 하는 역할은 전부 다 하잖아요! 길 찾기, 함정해체, 매복감지, 자물쇠 따기, 식용식물 분류..”
“그래서. 그 중에서 지금껏 활용한 건 뭐가 있냐.”
“길 찾기랑 함정해체랑 매복감지요.”
“지름길로 다닐 때에는 길을 찾을 필요도 없고, 함정을 해체할 일도 없고, 매복을 감지할 필요도 없군.”
“그, 그건..”
예전에는 뭔가 쓸모가 있겠거니 생각해서 키웠는데 지금은 뭐 이 따위로 잉여한 녀석이 다 있나 싶다.
돌이켜보면 카이사르와 리나 다음으로 흑산회에 들어온 녀석인데 존재감은 가장 늦게 합류한 간부급 인사인 브루투스보다도 낮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하층부부터는 지름길을 사용할 수 없잖아요! 분명 제가 도움이 될 거에요!”
“그게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
“네?”
“바닥을 뚫을 수 없다고 했지 벽을 뚫을 수 없다고 하지는 않았다.”
“…….”
벽 뚫고 다니면 복잡한 길을 돌아다닐 필요도 없잖아.
“걱정마라. 이제 와서 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지금까지 교육한 게 아까워서라도 절대 못 버린다. 저기 다른 곳에 모여 있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흑오문의 라만과 파난, 연합기관의 몇몇 길드장들도 다른 회차였다면 최종파티의 일원으로 선정될 정도의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
이건 역대 최강의 공략부대다. 악명 높은 길드조차도 40인 공격대가 최고였음을 생각하면 백만 대군을 동원하는 공략은 전례조차도 없는 역대급 도전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너에게는 기회를 주겠다.”
“기회요?”
“좀 더 쓸모 있어질 수 있는 기회.”
레이브는 흠칫 놀랐다.
“강해지는 대가로 뭘 치러야 하죠?”
“반동. 네 안에 잠들어있는 가능성을 개화시키는 것이니, 그간의 공부가 충분하다면 어떤 악영향도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공부가 부족했다면 폐인이나 백치가 되고도 남지.”
“으으.”
“자신은 있는가.”
“자, 잠시만요.”
엄청나게 자신 없어 보이네.
레이브는 리나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리나 누나. 저 어떡해야 해요?”
“응? 하면 되지 않을까?”
“폐인이나 백치가 되면 어쩌죠?”
“걱정 마!”
리나는 씨익 웃으며 엄지로 목을 가리켰다.
“그때는 고통 없이 죽여줄게!”
“…….”
상담 상대가 잘못된 것 같다.
침울해하는 레이브에게 도로시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무 걱정하지 마렴. 다 잘 될 거란다.”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제가 열심히 한 공부도 보스의 입장에서 보면 한없이 미천한 수준으로 보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공부가 부족한 자신을 탓하며 죽으면 되겠네.”
“네?”
“남자는 지나온 길로 모든 걸 말하는 법이란다. 지금까지의 길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고, 그렇지 않다면 밥만 축내고 살아온 대가를 치를 뿐이잖니?”
상냥하게 말하는데 내용은 전혀 상냥하지 않다.
그보다 엄격해.
역시 귀족가의 여식은 무섭다.
“인생은 원래 실력이 전부다.”
“남자라면 우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쿠로와 청일도 엄격하기로는 도로시 못지않았다.
“하하하. 꼬마야. 정 겁이 나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단다.”
“정말요?”
“인체개조를 하면 분명 돌연변이에 대한 저항력이 낮아져서 가능성의 개화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장담한다. 파충류랑 섞어줄까? 아니면 양서류와 섞어줄까?”
브루투스의 제안은 아예 쐐기를 박았다.
레이브는 겁에 질렸다.
돌연변이가 되느니 백치가 될 위험을 감수하려는 모양이다.
“도전할게요...”
나는 CP창에서 미리 눈독들이던 특성을 부여했다.
[레이브에게 특성 <절대감지 : 출입구>를 부여합니다.]
[특성 적성도 68%]
[적성도 확률을 초과 값이 나올 시,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Roll : 56]
[레이브가 특성을 무사히 습득했습니다.]
[<절대감지 : 출입구>는 출입구를 절대적으로 감지하는 특성입니다. 어떠한 물리적 및 마법적 효과로도 이 특성의 효과를 방해하거나 무효화할 수는 없습니다.]
[레이브가 지닌 특성 <만능도적>이 <절대감지 : 출입구> 특성과 융합하여 <만능 패스파인더>가 되었습니다.]
[레이브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목표로 하는 출입구까지 동행자들을 인솔할 수 있습니다. 단, 인솔 시마다 지식과 경험의 부족함에 비례한 난이도의 패널티를 겪습니다.]
다행히도 도박은 성공했다.
“너는 패스파인더의 재능을 각성했다. 느껴지는가. 출입구가.”
“네!”
“그럼 안내해라.”
우리는 레이브의 안내에 힘입어 마주치는 벽은 탐욕의 자루에 모두 수납하고 등장하는 몬스터는 백만 대군의 저력을 발휘해 몰살하며 쾌속전진을 거듭하였다.
아무리 험난한 지형지물도, 아무리 많거나 강력한 몬스터들도 우리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이윽고 레이브가 안내를 마치며 자랑스레 문을 가리켰다.
“인솔을 마쳤어요!”
“훌륭하군.”
“헤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뭐, 뭔가요?”
뭔가요는 개뿔.
B32층으로 내려가는 출입구를 찾으랬지.
“누가 차원문을 찾으라고 했냐.”
[적혈의 차원문을 발견했습니다.]
이 이상 수상할 수가 없는 시뻘건 차원문이 붉은 빛을 넘실거리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근처에 놓인 악신의 제단을 보아하니 악신의 영토와 이어지는 차원문인가보다.
덤으로 모든 악신의 영토는 심층지대 내에 존재한다. 이거 넘어가면 심층지대 직행이다.
“아악!”
갑자기 레이브가 비명을 지르며 차원문에 끌려들어갔다.
[레이브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출입문입니다.]
[레이브가 <패널티 : 숙명의 인도>를 부여받습니다.]
[적혈의 차원문이 레이브를 집어삼킵니다.]
“안 돼!”
얼마나 비싼 CP값을 치르고 특성을 줬는데!
저놈이 혼자 심층지대에 가면 순식간에 죽어버릴 거다.
나는 신속하게 신성력으로 결속권능을 발휘했다.
결속이 이어지는 한, 레이브는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
분명 차원문에도 진입하지 못하게 될 거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대뜸 적혈의 차원문이 존나 커졌다.
[적혈의 차원문이 결속대상을 함께 집어삼킵니다.]
[피의 악신 르멘시아의 신역에 도달했습니다.]
시발. 제대로 망했다.
사방의 공기는 어느새 끈끈한 살기와 마기로 가득 찼다.
미궁 전역에 번진 막역한 불길함도 보다 짙어졌다.
미치광이의 혈관 속을 들어온 것처럼 모든 사물이 새빨간 광경 아래, 피투성이의 혈인들이 수도 없이 몰려들었다.
-어리석은 모험가여! 나의 신역에 발을 들인 것을 환영한다. 성대한 환영식을 치러주마. 크하하하하하!
[혈인 1250개체가 성대한 환영식을 개최합니다!]
한없이 불길하고 소름끼치는 목소리. 피의 악신에게서는 진득한 악의가 묻어났다.
이렇게 허망하게 최후를 맞이하나 싶던 찰나, 갑자기 허공에서 빛이 번쩍였다.
슈슈슝
슈슈슈슈슝
허공에서 부하들이 나타났다.
연이어 사방팔방에서 백만 대군이 우르르 모습을 드러내었다.
[결속권능에 의해 백만 대군이 함께 차원문을 넘어왔습니다!]
달려오던 혈인들이 우뚝 멈췄다.
이건 뭔가 아니다 싶었나보다.
-아니, 잠깐. 뭐야 이거. 뭐가 이렇게 많이 와.
피의 악신 르멘시아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적의 계략은 간파되었다! 수적 우위를 살려 단숨에 적들을 섬멸하라!”
“와아아아아!”
백만 대 1250의 일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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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층부는 뭔가 쓰기 귀찮아서 스킵입니다.
네.
정말로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