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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하들이 미친듯이 유능하다-194화 (194/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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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내가 바로 세계의 적이다

#8 - 내가 바로 세계의 적이다(18)

죽어도 상관없는 지휘관으로 라만을 골랐을 때만 해도 귀찮은 짐을 하나 덜었다고 생각했었다.

“라만. 그대에게 십만대군을 맡기도록 하겠다.”

“지혜의 과실은 농밀한 세월로 빚어내나니. 거짓된 불멸을 추구하던 몸이나마 지나온 세월이 모두 거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오.”

“…….”

알겠습니다를 이따위로 말하는 새끼는 처음 봤거든.

“보스. 노망난 할아범한테 일군을 맡겨도 괜찮은 거야?”

“이보다 적절한 인선은 없다.”

“정말로?”

“그렇다.”

“헹. 그 영감도 의외로 대단한 면모가 있었나보네.”

리나와 그런 느낌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인근 성역을 하나씩 점령하던 도중, 덜컥 알림이 떠올랐다.

[주류 12악신의 일원 ‘오만의 악신’이 라만의 수성군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성역 <오만한 첨탑>을 습격하던 악신들이 집단패닉을 일으키며 도주합니다.]

[주류 12악신의 사망소식이 심층지대 전역에 알려집니다.]

정말로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던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게이머들은 발칵 뒤집어졌다.

“오만의 악신이 죽었다고? 그 영감한테?”

“젠장! 거길 지원했어야 했는데!”

“그 영감이 그렇게나 강한 지휘관이었을 줄이야.”

모두들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처럼 안타까워했다.

악신을 죽인 부대에 함께 있으면 보상도 공유 받는다.

결정적 공헌을 못해도 집단보상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런 보상이 있으니 게이머들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지만 않으면 강해질 수 있으니 누군들 무서워하랴.

지금껏 부수고 죽인 성역과 소신격들의 숫자도 적지 않다.

미궁의 고대신격이나 천계의 원시천존처럼 대신격은 아니어도 그에 준하는 중간신격인 주류 12악신의 일원을 해치운다? 상상만 해도 짜릿한 보상이 주어질 게 틀림없었다.

“보스, 들었어? 그 영감이 오만의 악신을 죽였대!”

“알고 있었다.”

“역시 보스의 인선은 대단해! 처음부터 노렸구나!”

전혀 아니다.

죽을 자리에 쓸모 없는 놈 보낸 거다.

“보스! 이번 성역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연합기관도 공을 세우고 싶습니다!”

“흑산교 사제의 신실함을 증명하겠습니다!”

황금의 성역을 흡수하자 실력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공을 세울 기회를 달라며 부르짖었다. 오만의 악신이 죽으니 수성도 의외로 해볼 만하지 않나 싶어서 욕심을 부리는 모습이었다.

내 경험 상 아군이 승전보를 울렸다고 뒤늦게 의욕을 보이는 놈들은 전부 어설픈 놈들이다.

“콰이어. 황금의 성역은 네게 맡기겠다.”

“응? 아니, 난 하기 싫은데.”

“그래서 네게 맡기는 거다. 의욕이 앞서지 않는 자만이 냉철하게 수성을 유지할 수 있다.”

실은 그냥 꼴 보기 싫은 흑오문의 수장을 하나씩 위험한 자리에 박아두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하기 싫다는 건 아닌데... 이왕이면 색욕의 성역 같은 거 나올 때 시켜주면 안 돼? 일단은 색마라고 불리는 몸이니 친숙한 곳이 좋아서...”

무슨 벚꽃 떨어지는 날에 나들이라도 나갈 것 같은 나풀거리는 옷을 입고 은은히 볼을 붉히며 손가락으로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저거 남자다. 심지어 포주들의 왕 같은 놈이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취하고 싶은 건 뭐든지 취하는 쓰레기 같은 녀석이 강한 남자인 내게 반했다며 귀여운 척 하는 꼴을 보는 게 얼마나 역겹던지 원.

“지금 이곳을 맡길 수 있는 건 너뿐이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인선이 너라는 거다. 이 의미를 모르겠는가?”

“아아.. 제게 맡겨주세요.”

“…….”

그 뒤로는 친한 척 해서 부담스러운 이종족길드의 세 절대자, 전사교단에서 이적한 사제장과 흑산교 주교로 발탁된 알라인, 전직 탑 랭커 출신의 재수 없는 게이머 다섯을 골랐다.

엄청나게 의욕이 넘쳐나지는 않아도 약간의 욕심은 있고, 덤으로 곁에 두기 꺼림칙한 녀석들이다.

충성심을 보이는 놈들을 기분 나쁘니까 죽일 수는 없으니 이 기회에 죽기 좋을 자리에 박아두고 최대한 시간을 벌어주기를 요청했다. 교묘한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다.

“아무래도 보스께서 외인들에게 기회를 베푸는 것 같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럼 다음은 저 여자의 차례인가.”

흑산회 간부들은 마약술사 파난을 주목하였다. 그녀와는 한때 멸혼객의 마지막 지지자였으나 관계청산을 빌미로 손을 잡은 관계이며 지금은 흑오문의 다섯 수장 중 일인이 되었다.

별도로 브루투스와 함께 드래곤하트를 이용한 연단법 제조과정에 협력하고 있다.

“보스. 할 말 있음.”

“말해라.”

“단 둘이서.”

리나의 머리가 휙 돌아갔다.

“뭐어? 보스랑 여자애가 단 둘이서??”

한동안 잠잠해진 얀데레 스위치가 깜빡거린다.

이런, 위험해!

서둘러 변명을 하려는데 갑자기 리나가 피식 웃었다.

“뭐어. 저런 꼬맹이하고는 뭘 하고 싶은 마음도 안 들겠지.”

“…….”

파난은 키가 작다.

아마도 나란히 세우면 레이브랑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성격까지 온순한 건 아니다.

피식.

“어쭈? 지금 귀여운 리나를 보고 비웃은 거야?”

“절벽 주제에.”

“죽어.”

반사적으로 꺼내든 단검에 즉각적으로 유모의 지풍이 날아들었다.

쨍그랑!

단검의 날이 산산조각 난 채 바닥을 뒹굴었다.

“…….”

만일 저 지풍이 목으로 날아든다면 피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거기에 생각이 도달한 사람들은 모두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리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스의 이야기를 방해하지 말아주십시오.”

“네, 유모...”

리나는 말 잘 듣는 온순한 소녀가 되었다!

“파난. 이번 자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주류 12악신의 영역을 순회하는 이유는 심층지대 그 너머로 내려가기 위해 숨겨진 입구를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입구는 열두 번째로 방문한 성역에서 반드시 출현한다.

그렇기에 열두 번째 성역만큼은 악신들의 입장에서도 결코 침범 받아서는 안 될 장소이며, 우리에게는 목숨을 걸더라도 사수해야 할 최후의 보루다.

당연히 싸움은 가장 치열하고 죽을 확률은 가장 높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 녀석은 수상해.’

‘한 때는 적대관계였고.’

‘그리 순순히 나를 도울 것 같지도 않아.’

그런 냉철한 판단의 결과, 버림패는 파난으로 결정됐다.

“여기가 뚫리면 모두가 죽는다. 흑산교의 명운이 걸린 자리다. 그런 자리이기에 나는 네게 이 자리를 맡기겠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적이지만 서로에게 한 약속을 믿고 이 자리까지 함께 해주었다. 그만한 용기를 보인 네게 그에 상응하는 신뢰를 보이는 행동의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

“네게는 경의를 표한다. 그 증거로서 흑산교의, 우리 모두의 등 뒤를 네게 맡기도록 하겠다.”

파난은 흰색가운 안에 푹 쑤셔넣은 손을 뒤적거렸다.

부스럭

가운 밖으로 나온 그녀의 손에는 사탕이 들려있었다.

“줄게.”

“뭐?”

“신뢰의 증표.”

마약 만드는 놈이 주는 사탕인데 이거 먹어도 되는 거냐.

에라 모르겠다.

뭔 일 생기면 연금술사인 브루투스가 해독시켜주겠지.

“기꺼이 받도록 하지.”

나는 주저 않고 사탕을 받자마자 까서 씹어 먹었다.

으득 으드득

사탕 깨지는 소리에 모두가 경악했다.

“마약술사 파난이 준 사탕을 먹었다고?”

“장난 아니잖아.”

“보스가 그 정도로 저 여자를 신뢰했었단 말이야?”

당연히 새빨간 거짓말이다.

파난이 나를 믿어주든 속든 그것도 개의치 않는다.

이 거짓말의 목적은 누군가의 설득에 있다.

“헤엥.”

리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리나가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속여도 오직 리나에게만 걸리는 거짓말.

그건 리나를 향한 설득이나 다름없다.

이놈들은 전부 버림패이니 안심하라는 신호다.

교주 라만의 뜻밖의 선전에는 당황했지만 그를 그 자리에 보낸 것이 신을 죽이라고 보낸 게 아니라는 것쯤은 거짓말을 통해서 분명하게 밝혔다.

지금 보내는 놈들도 버림패이기는 마찬가지이니 나를 방해하지 마라. 리나는 그런 의지를 확실하게 인지하였다.

“하아. 어쩔 수 없네. 보스가 이렇게까지 외인을 신뢰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없으니까. 마약쟁이가 마음에 안 들기는 해도 이번만큼은 귀여운 리나가 특별히 봐주겠어.”

“시끄러, 절벽..”

“역시 죽여야겠어.”

다시 욱하려던 리나는 등꼴을 쭈뼛거리며 멈췄다. 유모가 한 번만 더 소란을 피우면 개박살을 내주겠다는 흉신악살 같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뒤는 부탁한다.”

이 앞은 랭킹 1위의 게이머만이 도달한 곳. 심층지대의 제 1계 <오픈필드>와 제 2계 <스테이지 필드> 및 <성역>을 넘어선 제 3계 <메인 스테이지 필드>다.

스테이지 필드는 피할 수 있지만 메인 스테이지 필드는 반드시 지나칠 수밖에 없다. 사실상 미궁의 중심부로 향하는 최종난관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결의를 다지고 나아가려는데 약간의 저항감이 느껴졌다.

꾸욱

“이것도.”

소매를 잡은 손에서 내 손바닥 안으로 사탕 하나가 쏙 굴러 떨어졌다.

뭐지 이건. 사탕과시인가.

귀찮아서 곧바로 까먹으려는데 파난이 다시금 옷깃을 꾹꾹 잡아당겼다.

“안 돼.”

“뭐?”

“필요한 때를 위한 보험. 지금은 아니야.”

파난의 말에 불현 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녀를 영입한 뒤, 따로 내린 명령이 있다.

연금술사 브루투스를 감시하라는 밀명이었다.

“전에 건 문제가 있었는가?”

“죽어.”

“죽을 정도로 위험했다고!?”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듣던 부하들이 발칵 뒤집어졌다.

“지금 보스를 대놓고 독살하겠다는 건가!?”

“뭐야 저 여자!”

“이거 엄청나게 위험한 거 아니야?”

괜한 혼란이 이어지는 건 사양이다.

나는 보다 직접적으로 물었다.

“이걸 먹으면 괜찮다는 건가?”

“필요한 때가 된다면.”

“알겠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필요한 때가 오겠지.”

파난의 교묘함에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녀는 브루투스를 감시했고 그 결과 연단법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게 틀림없었다.

두 개의 사탕을 개별적으로 복용해서 연단법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것이 파난이 내놓은 대응책이었다.

분명 겉보기로는 평범한 사탕이어도 연단법과 함께 복용하면 드러나는 특수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브루투스의 경계를 피해 보험까지 들여놓는 치밀한 안배가 돋보였다.

‘안 그래도 브루투스는 엄청나게 수상한 녀석이니까.’

그 녀석의 배후는 틀림없이 지금은 멸망한 망국 중의 하나이고, 녀석의 목표는 적대국가의 미궁도시 공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그런 녀석에게 드래곤하트를 이용한 연단법이라는 최강의 무기를 하나 쥐어줬다.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었기에 뒤늦게 없던 일로 무마할 수도 없었다. 보험 삼아서 파난을 붙여둔 건데 이렇게 결과물까지 가져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마지막이 되어서야 겨우 쓸모가 생겼군. 파난.’

이왕 헤어질 거 근사한 작별선물도 받았겠다, 마지막 자비를 베푸는 느낌으로 덕담이나 건넸다.

“잊지 마라. 때로는 삶이 고통스럽고 죽음이 편안하다.”

괜히 무리하게 발버둥치지 말고 죽을 때가 되거든 얌전히 포기하고 죽으라는 말이었다.

배후를 지킬 놈을 죽게 해도 되냐고?

어차피 모든 일이 성공하면 브람 시에 한해서는 미궁의 영향력이 말소될 것이고, 실패한다면 후방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과 별개로 이쪽이 먼저 죽을 거다.

‘솔직히 그냥 죽어주는 편이 제일 낫지.’

살아있어도 괜히 찝찝하기만 할 뿐이잖아.

그런 의미에서 드디어 홀가분해졌다.

브루투스를 제외하면 수상한 놈은 전부 떨쳐냈다.

“간다.”

이번에야말로 <메인 스테이지>를 향해 진입하였다.

파난은 더 이상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 * *

파난은 조용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때로는 삶이 고통스럽고 죽음이 편안하다.

직접 되풀이해보니 비로소 그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고통스러워야만.. 살아남는다..”

파난의 전투의지가 고양되었다. 빌헬름 마이어의 주변인물들이 언제나 그렇듯 찰떡같이 말하면 개떡같이 알아듣는 배은망덕한 해석이었다.

============================ 작품 후기 ============================

짐덩이들 한 번에 싹 갖다치우느라 전개가 지지부진했습니다 ㅠㅠ

대신 다음화에 분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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