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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내가 바로 세계의 적이다
#8 - 내가 바로 세계의 적이다(19)
<메인 스테이지>는 심층지대 중앙부로 향하는 최종난관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스테이지의 배경이 되는 무대 또한 여타의 스테이지와는 난이도가 확연히 달라진다.
다른 스테이지는 악신들에 의해 멸망한 세계의 파편이다. 재앙이 들끓고 원초적인 파괴와 죽음이 만연한 지옥이다.
메인 스테이지는 그런 지옥들을 한층 더 뛰어넘어서 아예 지옥 그 자체가 배경이다. 소위 어비스(Abyss)라 불리는 죽은 자들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잠깐. 이 앞에 있는 거 어비스 아니야?”
“나도 알아. 우리 게이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괴담이잖아.”
“괴담이 아니야. 일정수준 이상의 강자는 확률적으로 사망 이후에 어비스를 경험한다고.”
신성력을 이용해 랭커 게이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내심 동의를 표했다.
‘어비스는 나도 경험해본 적이 있지.’
죽고 눈떴는데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용암 위 절벽이었다. 온몸이 샛노란 호머 심슨처럼 생긴 새끼가 삼지창을 들고 쿡 찌르니 그대로 용암에 추락했었지.
일개 잡몹조차도 절정고수의 반열에 접어든 랭커 게이머들을 푹 찌르고 떠밀어 죽이는 말도 안 되는 곳이다.
처음에는 뭔 이딴 버그가 다 있나 했는데 전작 미궁도시 고객센터에서 1대1 문의로 어비스는 버그가 아니라는 답변을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모른다.
신살의 업적을 공유한 군단?
턱도 없다.
절대자 급이 아니면 순식간에 모조리 죽어나갈 거다.
라만에게 십만 대군을, 그 외의 열 명의 지휘관에게는 각각 오만 명의 대군을 할당했다. 파난에게는 남은 사십만 대군을 모조리 맡겼다.
이 앞으로 가는 건 수성지휘관으로 발탁되지 않은 남은 절대자들뿐이다.
신살의 업적을 통해 단기간에 인위적으로 양성된 절대자이니 그들의 강함이 전성기의 멸혼객이나 카이사르에 비견될 수는 없다. 그래도 최소한의 병졸로서의 역할은 수행할 수 있으리라.
“불세출의 용사들조차 번번이 무너진 통곡의 벽과 마주했으나 아군의 형세 또한 높이 평가할 수 있으니 용맹함을 잃지만 않으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전작의 랭킹 1위 게이머 <가후>가 다가와 말했다.
“…….”
역시 저 새끼는 이상하다. 그동안 만날 일이 없어서 신경도 안 쓰고 있었지만 컨셉플레이의 최고봉은 저 가후 새끼가 아닐까 싶다.
모자이크녀처럼 기껏 매력을 몰빵하고도 절대자가 아니면 본 모습도 못 알아보는 안습한 처지가 되어서 유명무실한 컨셉플레이가 아니라 제대로 된 컨셉플레이를 하는 녀석이다.
대표적인 활약으로는 전작의 B30층 계층보스 토벌전이 있다.
놈은 책사로 컨셉 플레이를 잡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행중에서 전투력은 가장 높았다.
그의 동료들은 당연히 선두에 설 것을 요청했다.
허나 가후는 이와 같이 말하며 그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묵살하였다.
「책사에게 일기토에 나설 것을 종용하다니, 비겁한 놈들!」
「…….」
당연히 그 회차의 가후 파티는 전멸했다.
그래도 이는 가후의 유명세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 때의 후원금을 바탕으로 더욱 강력한 시트지를 만들 수 있었으니, 만일 이를 노리고 저지른 사건이라면 가후는 정말로 뛰어난 모략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스. 저 사람을 멀리하세요.”
“드문 일이군. 모자이크 네가 사람을 멀리 하다니.”
“마이어 왕국의 참모총장으로 활동 중인 저는 알 수 있어요. 저 사람은 제 컨셉.. 아니, 제 자리를 위협하기 위해 은밀하게 모략을 펼칠 게 틀림없어요.”
“…….”
“아무튼 그를 멀리해야 해요.”
이거 무조건 컨셉이 위협받아서 하는 말이잖아.
그보다 넌 언제부터 참모 컨셉이 된 거냐.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싫다.”
“네에!?”
“애초에 네 미색으로 참모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모자이크가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그건 여성비하적인 발언이에요!”
“틀렸다. 방금 건 미인비하적인 발언이다.”
“!?”
모자이크는 자신이 미인이라고 돌려서 말한 것에 기뻐해야할지, 미인이니까 일하지 말라는 말에 화를 내야할지 혼란스러워하였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는 내 발언에 대하여 논리정연하게 반박했다.
“미인이라서 일을 할 수 없는 건 말도 안돼요! 리나나 도로시도 미인이지만 보스의 직속파티원으로 활동하고 있잖아요! 설마 리나나 도로시는 미인이 아니라고 주장하실 건가요?”
“으음. 그건 아니다.”
“그럼 제 미모를 빌미로 직위해제를 한다는 부당한 주장을 철회해주세요! 길드의 지부장 쿠로나 도로시를 흑산회에 들인 제 공을 생각해서라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그녀는 인재등용 및 관리에서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쓸 만한 인재를 추천하고 등용하며 관리하는 일도 넓은 의미에서는 모사의 역할로 볼 수 있었다.
“명군께서는 어찌하여 아녀자의 말을 귀담아 들으십니까.”
가후의 참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적의 군세를 읽고 능동적으로 대응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용맹함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과감하게 나서야 할 때에 주춤거린다면 필히 기세를 잃고 적에게 압도당해 자멸할 것입니다.”
“그건 틀렸어요! 군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냉정침착하게 허세와 실세를 구별하는 안목이죠. 능동성을 위해 용맹함을 내세울 뿐이라면 모략은 어디에 있죠?”
“최고의 모략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따르기 쉬우며 마땅히 취해야 할 이점을 얻도록 하는 모략입니다. 이것이 그대와 같은 아녀자는 평생이 지나도 깨닫지 못할 진실입니다.”
뜬금없는 가후와 모자이크녀의 설전에 모두가 황당해하였다. 그보다 역사 속 가후가 여성차별주의자였나? 컨셉플레이를 왜 저 따위로 하는 건지 모르겠다.
“보스. 쟤 이상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닐까?”
“원래 똑똑한 놈들은 다 이상하다.”
“히히. 귀여운 리나랑 늠름한 보스는 정상이라서 다행이네.”
그거 우리가 멍청하다고 말하는 거잖아.
이 멍청한 새끼야.
“저는 저 사람이 불편해요. 일개 외인 주제에 참모총장의 권위에 도전하려 들다니, 도무지 마음에 들지가 않아요. 가후라는 자는 발언에 나설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도로시의 주장도 일리가 있군.”
“그럼 귀족가의 예법지식을 시험해볼까요? 아니면 궁중법도에 대한 상식을 확인해볼까요? 어느 쪽이든 맡겨주세요.”
네가 잘하는 걸로 시험하려고 하지 마라.
모략가한테 그딴 게 왜 필요해.
그거 그냥 니가 쟤 갈구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그만 되었다. 가후와 모자이크는 들으라.”
두 사람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조아리며 내게 예를 표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권력자는 나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어서 좋은 기분이 들었다.
전 랭킹 1위 게이머가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비로소 내가 강해졌다는 실감이 느껴진다.
“예로부터 출사를 원하는 자,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라는 격언이 있었지.”
“낭중지추의 고사입니까.”
“그렇다. 네게 소수의 병력을 할당하겠다. 이들을 데리고 선발대로 메인 스테이지에 내려가 성과를 거두라.”
“!!”
“그 성과의 경중에 따라 너를 향한 평가를 달리하겠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쓰레기 같은 발언이었다.
가후는 당연히 화를 냈다.
“이 가후를 곤경에 빠뜨려 처리하겠다는 겁니까? 심층지대의 메인 스테이지의 선발대로 나서는 것이 등용조건이라면 세상 그 어떤 모략가도 감히 도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넌 내게 등용될 수 없겠군. 내 부하들은 언제나 당시 전력으로는 넘을 수 없는 난관을 극복해왔다.”
“…….”
결과적인 이야기이기는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너무 튼튼한 팩트라서 가후는 할 말을 잃었다.
“승복하겠는가.”
그래도 모략가를 자처할만한 달변이 어디 간 건 아니었다.
가후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했다.
“정녕 이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자신하신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일군을 제게 맡기고 다른 일군을 모자이크녀에게 맡기십시오. 이래야 능히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전모드에 들어갔던 모자이크녀가 깜짝 놀랐다.
힐끗 눈길을 주니 동공이 아주 가파르게도 떨리고 있다.
설마 물귀신 작전으로 선발대를 하나 더 늘릴 거라고는 짐작도 못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제안이군.”
가후를 없애기 위해 모자이크녀를 투자한다면 나로서도 그리 손해는 아니었다.
“모자이크.”
“네..”
“나의 위신을 걸고 흑산회의 저력을 보여주어라.”
싫다고 뭐 어쩌겠어.
여기서 이거 안하면 대놓고 난 가후보다 허접입니다, 라고 복창하는 꼴이나 다름없는데.
TOP 100위에 속한 게이머인 그녀가 자신이 쌓아올린 위치와 명성 등을 한 순간에 날려버릴 위험을 무릅쓰고 순순히 포기할 리가 없다.
“저 그냥 참모총장 안하면 안 되나요.”
“…….”
“살려주세요.”
뒤통수가 찡하다.
“닥쳐라. 너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으으.”
“더욱이 여기에는 네가 가야만 하는 이유도 있다.”
나는 신성력을 통해서 신자들의 위치를 인식할 수 있다.
심층지대 내에서는 효용이 떨어지더라도 대략적인 위치는 안다.
카이사르는 현재 위치보다 더 아래에 있다.
그럴싸한 장소는 어비스밖에 없다.
분명 녀석은 아직도 어비스의 악마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모자이크녀 또한 내가 밝힌 정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인님이 아직까지 살아계셨다니! 설마 지난 2년간 미궁의 이 깊숙한 곳에서 홀로 싸워오셨단 말인가요?”
“녀석이라면 불가능할 것도 없지.”
“으음. 확실히 카이사르님이라면 불가능은 없을 것 같기도...”
“네 주인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너는 애완동물 된 자로서 주인을 찾아가지 않겠다는 것이냐?”
“그 비유는 좀 괴롭습니다만... 주인님이 계신다면 얘기는 달라지지요. 기꺼이 선발대에 자원하겠습니다.”
모자이크녀 뿐만 아니라 가후도 의욕을 드러내었다.
카이사르의 생존.
줄곧 아껴둔 정보 하나로 효과적으로 선발대를 보낸 것이다.
“보스. 어느 쪽이 먼저 돌아올까?”
모자이크녀는 NPC 절대자들을, 가후는 게이머 절대자들을 데리고 갔다.
전투실력은 NPC가 한수 위에 있고 정신저항력은 게이머가 한수 위에 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둘 중에 하나를 고르자면 답은 정해져있다.
“모자이크녀다.”
벌컥
말하기가 무섭게 방금 내려갔던 가후가 올라왔다.
“틀렸네, 보스!”
“…….”
아니, 이건 좀 반칙이잖아.
뭐야 이 새끼.
내려간 지 몇 초나 지났다고 바로 돌아오는 건데.
“적장의 매복입니다.”
“모자이크녀는!”
“그녀는 회군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죽어도 상관없기는 해도 이런 식으로 개죽음을 당해도 좋은 건 아니었다. 나는 신속하게 남은 전력을 모두 동원하여 모자이크녀 구출에 나섰다.
[메인 스테이지 <어비스(Abyss)>에 진입합니다.]
[경고! 경고!]
[지옥의 108대악마가 당신들을 맞이합니다.]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배치만 봐도 입구에는 잡몹만 보내고 점진적으로 강한 놈을 상대하게 하며 게이머를 성장시킨다는 의도 따위는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어비스에 발을 들인 순간 캐릭터 시트지를 확 찢어버리겠다는 강한 의지만을 느낄 수 있었다.
악마들도 이전에 봤던 것보다 수준이 비약적으로 높다. 이쪽이 절대지경 수십 명이라면 저쪽은
[최고 강도의 위험 경보!]
[지옥의 군주 염라대왕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모든 악마군단이 총출동합니다.]
한없는 불길함이 거센 폭풍처럼 밀어닥쳤다.
수도 없이 떠오르는 경고창.
그 모든 알림을 내딛는 걸음마다 산산이 박살낸다.
시스템 알림에마저 간섭할 수 있는 존재.
어비스의 군주, 염라대왕.
극강의 적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었다.
염러대왕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보스.”
근데 카이사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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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