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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하들이 미친듯이 유능하다-196화 (196/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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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내가 바로 세계의 적이다

#8 - 내가 바로 세계의 적이다(20)

칼 들고 서있던 악마들이 폭죽을 터뜨리며 환호했다.

펑 퍼펑

폭죽이 터지며 ‘경☆축! 어비스 입성!’이라는 글자가 화려하게 허공을 수놓았다. 악마들이 PPAP를 추며 환호하는 개 같은 상황을 뒤로한 채, 나는 반사적으로 리나와 유모를 돌아보았다.

“!?”

리나와 유모는 자기들이 할 일을 떠올리며 엄청난 기시감을 느꼈는지, 이유도 모르고 필사적으로 내 시선을 외면했다. 아무래도 내가 무진장 빡쳐있음을 깨달은 눈치였다.

“어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악마들이 예상보다 더 강해져서 정말 무서웠어..”

“어... 근데 악마보다 더 무서운 게 보이는데.”

게이머들은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피며 입 다물었다. 환영받는 대상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자 악마들도 하나 둘 연주하던 악기 위를 오가던 입과 손이 멈췄다.

차가운 정적이 이어졌다. 적과 아군 모두가 엄청나게 긴장하며 카이사르와 내 눈치를 살펴보았다.

나는 그런 분위기를 해소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카이사르.”

“예. 보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카이사르는 가볍게 말했다.

“백번 말하느니 한번 보시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바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휘익! 휘파람을 불자 악마 몇 명이 기다란 쇠사슬과 거대한 금속봉을 가져왔다. 카이사르는 느긋하게 쇠사슬을 금속봉에 칭칭 감기 시작했다.

한 10분가량을 말이다.

‘느려!!’

너무 느리다고.

백번 말하고도 남을 시간 지나가잖아.

도대체 저 사슬의 끝에는 뭐가 걸려있는 건지도 신경쓰이고, 갑자기 저걸 왜 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뜸 역정을 내며 화를 내고 사슬 감지 말라고 하면 돌아올 대답도 무섭다.

칼로 사슬을 뚝 잘라버리고 ‘결국 기다리지 못하셨군요. 이게 보스의 운명입니다.’라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의 카이사르는 인간도 아니다. 대놓고 머리 위에 뿔도 달려있고 피부색도 막 파란색이라서 이 이상 악마스러울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시스템은 쟤가 염라대왕이라고 했었지.

캉! 카강!

쇠사슬이 감기는데 저항이 일기 시작했다.

쇠사슬이 감긴지 30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감겼습니다.”

“감겼군.”

“앞으로 30분만 지나면 직접 보실 수 있습니다.”

정말 병신 같은 대화법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내 인내심이 먼저 다했다.

“그냥 말로 설명해라.”

“알겠습니다.”

카이사르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짧게 합니까, 길게 합니까?”

“...짧게.”

“감정선은 어떻게 잡으면 되겠습니까?”

“닥치고 본론으로 들어가.”

“날아왔고, 싸웠고, 이겼습니다.”

너무 본론이잖아.

그건 두 눈으로 직접 봐서 알고 있다고.

좀 더 그 사이에 해야 할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거 아냐.

“조금만 살을 붙여라.”

카이사르는 대뜸 옆의 악마를 한 마리 붙잡았다.

덩치가 4m쯤 커진 카이사르라 그런지 진짜 무섭게 보인다.

붙잡힌 악마도 덜덜 떨면서 저항도 못하고 막 울먹인다.

“인간계에서 전쟁을 치르던 도중 무언가를 부쉈더니 이곳에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긴 놈들이 잔뜩 덤볐습니다. 저는 용맹하게 싸웠고, 이겼습니다.”

“…….”

“…….”

“끝이냐?”

“끝입니다.”

카이사르는 이야기를 하는 재능이 현저하게 부족했다.

이 새끼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게 멍청했다.

“주인님. 제가 보스가 원하는 내용을 직접 묻고 대화를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음. 부탁하지.”

급기야 모자이크녀가 전담코치마냥 붙어서 둘이 따로 무어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카이사르의 악마부하들과 내 인간부하들은 변함없이 무진장 눈치를 보는 상태 그대로였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기를 얼마간.

갑자기 가만히 있던 가후가 슬그머니 내게 다가왔다. 모자이크녀는 움직이는데 자신은 이대로 뒤처질 수 없다고 위기의식이 생긴 모양이었다.

“보스. 이것은 적의 함정입니다.”

“함정?”

“명민하신 보스라면 삼십육계 제 5 장 병전계(幷戰計)의 3항 가치부전(假痴不癲)을 아시리라 사료됩니다.”

“그딴 거 모른다. 지금 날 능멸하는 거냐.”

“사실은 졸렬한 모략가들만 알고 지식을 뽐내고자 그럴싸한 이름을 붙였을 뿐입니다. 모르셔도 무방합니다. 아무튼 가치부전의 계는 어리석은 척하되 실제로는 이성임을 말합니다.”

가후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금세 알 수 있었다.

“이 웃기지도 않는 춤과 노래와 환영이 모두 노골적인 함정이라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보스의 부하는 이미 악마가 되었습니다. 악마들과 한편이 된 것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보스의 부하로 변장한 적의 장군일지도 모릅니다.”

“과연... 미궁 깊은 곳에서 크게 안심하도록 하여 급습을 한다라. 먹힌다면 역전의 용사들도 엄청난 피해를 입고 궤멸적인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려는 건가.”

가후의 주장은 제법 그럴싸했다.

심층지대 쯤 되면 시스템 메시지도 무턱대고 못 믿는다.

정말로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할 수도 있는 거다.

환영마법 같은 거 잘못 당하면 [You Died...]도 막 뜬다.

이걸 진짜로 믿으면 영문도 모르고 진짜 죽는다.

철저하게 모든 현상을 부정하고 편집증적인 태도를 유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물론 그건 상대가 카이사르가 아닐 때에 한한 이야기다.

카이사르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또라이 같은 새끼다.

쟤라면 정말로 악마들 줘 패고 염라대왕이 됐을 것 같다.

“카이사르는 예나 지금이나 충직한 내 부하다.”

“!!”

“비록 모습이 달라졌어도 놈이 변함없는 내 부하임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가후는 내 굳건한 신뢰에 마지못해 승복하였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달랐나보다.

언제부터 엿듣고 있었는지 대뜸 성큼성큼 걸어왔다.

덩치도 커져서 그런가.

보폭이 장난 아니게 넓네.

그런 멍청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 사이에 카이사르가 우리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발을 들어서 가후를 짓밟으려 들었다.

기겁한 가후가 검을 뽑아들며 백보신권을 독자적으로 응용한 백보신검을 펼쳤다.

“버러지가 감히.”

카이사르는 더욱 격분하며 내리밟는 발에 힘을 실었다.

키이이이잉!

강철벽도 베는 검강이 거칠게 흔들리며 소모되었다.

가후가 다급히 이빨로 목에 달린 끈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허리춤에 들어있던 마법스크롤이 발동했다.

눈부신 섬광과 불벼락이 수십여 차례나 연속해서 몰아닥쳤다.

꽈과과과광!

벽력같은 굉음이 가시고 빛이 사그라질 무렵.

우리는 목격했다.

꺼지기 직전의 검강과 흠집도 나지 않은 카이사르의 모습을.

“대체 왜! 제게 왜 이러시오!”

“넌 너무 건방졌다.”

“모략가가 주군께 전략을 입안함에 무어가 건방지단 말이오!”

가후의 반발은 지당했고, 그의 발언 또한 옳았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카이사르는 상식이 없는 희대의 또라이였다.

“내가 건방지다고 정했으면 건방진 거다. 죽음으로 그 죄를 갚아라.”

기어이 가후가 압사 당했다.

한방에 한줌 핏물조차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카이사르의 발에서 불길이 일어 시체의 흔적까지 증발시켰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가후를 살해했습니다.]

게이머들은 동요했다. 랭킹 1위 게이머가 느닷없이 카이사르의 발에 짓밟혀 죽었기 때문이다.

장내의 분위기가 급격히 흉흉해졌다.

카이사르는 살기를 드러내는 게이머들을 내려다보며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보스께서 백보무투술을 전수함에 있어 사람을 가리지는 않으셨나보군. 이런 형편없는 버러지들이 가토의 절세신공을 익히고 있다니.”

“헉. 그러고 보니 카이사르는 가토와 함께 백보무투술을 창시한 대종사의 반열에 접어든 절대고수잖아. 그가 만든 무술로 그에게 대항한다는 게 가능한 걸까?”

게이머들은 급격히 전의를 상실했다.

카이사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 차례 살겁이 일어날 기세라 이쯤에서 적당히 중재하였다.

“카이사르. 그래서 모자이크 녀와 상의한 결과는 나왔는가.”

“예. 보스께서 궁금해하시는 바를 모두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카이사르는 악마 군악대에게 다가가 대뜸 근처 악마의 머리를 후려치더니 악기 몇 개를 받아내었다. 그리고는 내게 돌아와서 피 묻은 악기를 들이밀었다.

“이 악기들은 악마들의 뼈와 가죽으로 만든 특수한 악기입니다. 보스를 환영하면서 악마들이 순종적인 가축 겸 부하가 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특별한 재질로 만들었습니다.”

“.......뭐?”

“물론 보스께서는 교양이 넘치시니 악기의 구조보다는 연주한 음악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노래의 제목은 PPAP이며 샌드와 디오니소주라는 악마가 작곡한..”

“죽여.”

“예?”

“그 작곡가 새끼들 당장 잡아 죽이라고.”

카이사르는 내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악마 무리로 돌아갔다. 악마 십여 마리가 카이사르의 손길질과 발길질에 붕 떠오르며 튕겨져 나갔다.

악마 군악대를 쥐 잡듯이 파헤친 카이사르가 기어이 스켈레톤 악마 하나랑 반나체의 싸가지 없게 생긴 악마 한 마리를 찾아내고는 그대로 양손에 하나씩 움켜쥐었다.

퍼엉!

[카이사르가 악마작곡가 샌드와 디오니소주를 살해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시체를 내던지며 악마 군악대에게 버럭 소리쳤다.

“보스가 전혀 기뻐하지 않으시잖아! 두 번 다시 이딴 쓰레기 같은 노래를 들이밀지 마라! 악마에게 어울리는 음악은 역시 락과 데스메탈뿐이다!”

락과 데스메탈이면 괜찮은 게 아니다.

그냥 노래하지마라.

덤으로 이왕이면 안전거리 1km 유지하게 멀리 좀 꺼져주고.

아무튼 겁에 질린 악마 군악대는 덜덜 떨며 대열로 돌아갔다.

카이사르는 손에 피칠갑을 한 채로 돌아왔다.

녀석은 인간 시절처럼 띠꺼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이걸로 설명은 충분히 되었습니까?”

“충분하다.”

하나도 안 충분한데 전담코치랍시고 붙인 모자이크녀도 카이사르보다 조금 덜한 또라이 새끼라는 걸 잊고 있었다. 또라이한테 또라이 케어를 맡겨봤자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할 리 없다.

그냥 전후사정을 듣는 건 다 때려치고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악마들은 모두 네 통제 하에 있는가.”

“그렇습니다.”

“좋다. 그럼 악마군단을 거느리고 내 군세에 합류해라.”

“알겠습니다.”

[카이사르와 악마군단이 합류합니다.]

[아군의 사기가 오르지도 않고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인간들과 악마들이 서먹해합니다.]

대뜸 인간과 악마 몇이 죽어나가더니 서로 동료가 되었다.

인간들과 악마들은 굉장히 혼란스러워했다.

그건 지금까지 나를 따라온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보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입니까?”

“귀여운 리나도 하나도 이해가 안 돼!”

“악마들을 믿어도 괜찮습니까?”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해.

“카이사르가 카이사르다운 짓을 했을 뿐이다.”

부하들은 납득하였다!

“하긴. 카이사르라면 악마 좀 부하로 거느릴 수도 있죠.”

“저 학살광이라면 그럴만도 하지.”

“악마들이 아무리 잔혹해봤자 카이사르보다는 덜하겠군요.”

게이머들은 어째서 부하들이 납득하는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저 자는 가후를 죽였습니다. 이대로 살려두어도 괜찮은 겁니까?”

“저희 군의 사기는 어쩌실 겁니까.”

“이건 불공평합니다. 가후가 좀 모자란 컨셉충이기는 해도 저희들에게는 괜찮은 동료였습니다. 이런 개죽음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게이머들은 언제 자기들도 카이사르에게 카이사르한 짓을 당할까 두려웠는지 거세게 항의하였다. 꼴을 보아하니 카이사르와 함께 다니기는 글러먹은 것 같다.

“그렇군. 너희들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수많은 악신의 추종자들과 소신격에 맞서 용맹하게 싸워왔었지.”

“맞습니다! 저희의 공을 헤아려주십시오!”

“분에 넘치는 경험치와 특전, CP도 잔뜩 받았을 테고. 지금 죽어도 다음번에는 인계CP도 더욱 늘어나겠지.”

게이머들의 얼굴이 일제히 얼어붙었다.

빌헬름 마이어가 게이머였다.

충격적인 사실에 놈들이 놀라는 사이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가후의 추종자들을 제거해라! 분에 넘치는 공을 세우고도 감히 나의 첫 번째 부하를 능멸하려 한 죄, 죽음으로 갚아라!”

흑산회 정예파티는 주춤거렸다.

“그럼 저희는요?”

“너희가 가후의 추종자였냐?”

“아니요.”

“그럼 같이 공격해.”

“인류의 배신자, 가후의 추종자들! 모두 죽여주마!”

쿠로가 검을 뽑아들며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흑산회 정예파티도 뒤늦게 달려들고, 악마들이 그 뒤를 따랐다.

악마군단이 합류했으니 게이머들이 없어도 순조롭게 공략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저놈들이 하는 짓도 별로 없으면서 업적보상은 나눠 갖는 게 베알이 꼴려서 죽이게 한거였다.

근데 이 중에 두 명 스파이가 보이는 건 기분 탓이냐.

“힘내라, 힘! 주인님 파이팅!”

“…….”

모자이크녀는 자연스럽게 응원모드에 들어갔다.

“죽어라, 배신자들!”

“배신자는 무슨! 그러는 너야말로 게이.. 컥!”

쿠로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는 게이머를 순식간에 살해했다.

그러나 그 게이머의 발언은 모두의 귓가에 들렸다.

악마들이 거대한 무기를 들고 쿠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쿠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흉흉하게 두 눈을 부릅떴다.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그렇다! 나는 게이다!!! 그러니 죽어라!!!”

“!?”

게이머들은 쿠로의 비정한 발언에 말문이 막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쿠로는 게이머들을 죽여나갔다.

쿠로의 활약을 보며 악마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 게이였군!”

“게이라고 악마들이 박대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악마들은 오히려 성소수자에게 관대하다. 게이라면 우리의 동료가 될 수 있지.”

“가자! 게이에게 뒤쳐져서는 안 된다!”

악마들은 게이에게 우호적이었다. 쿠로는 무사히 그들의 동료로 인식될 수 있었다.

게이머들은 이럴 순 없다며 뒤늦게 용서를 구하거나 결사적인 항전을 벌였지만 애초에 당해낼 수 있는 전력비가 아니었다. 불과 1분 만에 게이머들은 모두 전멸했다.

“하일 빌헬름 마이어! 하일 카이사르!”

“위대한 게이 동료에게 영광이 함께하기를!”

“그대의 용맹함에 감탄했다네, 게이.”

그리고 쿠로는 게이가 되었다.

============================ 작품 후기 ============================

쿠로 변천사

1. 핵과금게이머들의 연합 <길드>의 지부장

2. 브람 시 시장 브람베르크를 죽인 자

3. 빌헬름 마이어의 쓸만한 부하

4. 존재감이 흐릿해져가던 잉여

5. 불량배송

6. 용맹한 게이

미안하다 쿠로야!!

작가가 잘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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