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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02. 도로시 이지스의 불행한 결혼생활
#Epilogue 02. 도로시 이지스의 불행한 결혼생활
도로시 이지스는 왕국의 모든 남자들을 미치광이로 만들 저주받은 가문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존재 자체가 재앙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살아 숨 쉬는 악몽이었다.
결혼을 하더라도 그녀의 저주는 사라지지 않고 다음 대의 자손에게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미모가 아름답다며 칭찬하더라도 이지스 가문의 여식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안색이 급변하며 달아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주? 그딴 게 뭐 어쨌다는 거냐.」
「너는 내 여자다.」
「잠자코 내 뒤에 서라. 누구도 널 욕할 수 없게 해주마.」
불운한 결혼생활을 앞두던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난 빌헬름 마이어가 왕국의 제 3왕자를 암살하고 브람 시의 모든 유력자들을 복종시키며 단숨에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도로시 이지스는 단번에 그의 매력에 빠졌고 신속하게도 결혼에 골인하였다. 다른 남자들과 달리 그는 그녀의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특별한 하자도 없으며 상냥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은 그냥 그녀 본인의 추억보정과 콩깍지였지만.
“불행해.”
티 테이블에 앉아 다과를 즐기는 우아한 나날이 즐겁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저주는 저주의 신이 된 이후로는 말끔히 사라졌다. 하지만 저주와 무관하게도 그녀의 결혼생활은 꼬였다. 빌헬름 마이어에게는 숨겨진 단점이 있었다.
“대체 이 소녀가 어찌해야 낭군님은 기뻐하시는 걸까.”
빌헬름 마이어는 희노애락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조신하게 뒤를 받쳐주어도 의례적인 감사인사만이 전부였고, 필요한 일은 대신 해준다는 느낌이 전부였다.
딱히 엄중한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건 아니지만 이 남자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건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도로시 이지스의 그런 푸념에 유모는 짧게 대답하였다.
“초월자의 권태기입니다.”
“초월자의 권태기!?”
“빌헬름님은 인간의 몸으로 신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당대 최초의 현인신이자 고대신격마저 무찌르고 그 자리를 꿰어 찬 신화적인 대마인입니다.”
“우우...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나요?”
“문제가 됩니다. 초월자는 인간을 초월했습니다. 인간의 사소한 희노애락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절대부동의 평정심을 지니고 있으며 관심을 사는 일조차 점점 힘들어질 겁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빌헬름 마이어와의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질 수밖에 없다. 그녀는 충격적인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껏 부정하였다.
“그럴 리가 없어요! 이렇게 어여쁜 아내가 있는데!”
“동침 횟수는 어떻게 되십니까?”
“그, 그건...”
한 번이었다. 그마저도 H한 이벤트는 다른 캐릭터시트지를 만들 때 잔뜩 경험해서 성적으로는 완전히 해탈한 수준이었다. 능숙하면서도 기계적인 행위에서는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그 무렵의 빌헬름 마이어의 동기화 비율은 1%였고, 감정은 전해지지 않으며 행동은 하나같이 반 자동화 상태나 다름없이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유모. 제게 여자로서의 매력이 부족한건가요?”
“전혀 아닙니다.”
“그럼 제게 뭐가 부족한 거죠?”
유모와 함께 시중을 들던 시녀 한 명이 불쑥 손을 들었다.
“그건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이 뭔지 혹시 알고 계시나요? 코로셋을 찬 정형화된.. 아아악!”
유모는 문답무용으로 시녀를 집어 들고 창밖으로 던졌다.
시녀는 공중제비를 돌면서 바닥에 착지했다.
그녀는 주먹을 허공에 대고 마구 휘두르며 씩씩거렸다.
“두고 보자 이기! 불행한 망혼에 순응하며 코로셋을 벗어던지지 못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이기!”
도로시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저, 저분은 뭐였죠?”
“아가씨는 몰라도 됩니다. 게이머라는 인종들은 실력은 뛰어나지만 개성이 너무 넘쳐서 탈이군요.”
“페미니즘은 좋은 건가요?”
“하면 기분은 좋아지고 몸도 편해지지만 빌헬름 마이어님께는 확실하게 미움 받게 될 겁니다.”
“흥. 이렇게 차갑게 외면 받는 삶만 사느니 차라리 그러는 편도 나쁘지 않겠죠.”
22세기에도 페미니즘은 존재했다.
그리고 유모는 페미니즘에 맞설 방법도 알고 있었다.
“정 페미니즘을 익히고 싶거든 보수사회의 기득권을 지지하는 최후의 보루인 저를 쓰러뜨리고 지나가십시오.”
“유, 유모를 제가 어떻게 이겨요!”
설득(물리)이었다.
빌헬름 마이어로서는 유모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안도해야 할 순간이었다. 만일 유모가 페미니스트였다면 미궁세계는 페미니즘의 낙원이 되었을 테니까.
“아무튼 빌헬름님의 희로애락이 미약하더라도 완전히 없는 건 아닙니다.”
“정말요?”
“초월자도 강한 감정을 느낄 때에는 감정을 피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극의 강도를 높이면 됩니다.”
“어떻게요?”
“일례로는 보스의 첫 번째 부하인 카이사르님이 있습니다.”
도로시의 안색이 빠르게도 썩어버렸다.
“그 사람에게 배울 건 하나도 없어요.”
“카이사르님이 또라이같다는 사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극렬한 또라이 같은 면모가 보스의 분노를 자극해서 희로애락의 로(怒)를 표출하도록 만듭니다.”
“그럼 저도 그 사람 같은 엽기적인 짓을 저질러야 한다는 건가요?”
“보스의 분노를 자극할 거라면 그렇습니다.”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도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배우자를 분노하게 해서 진심을 확인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사례도 종종 존재합니다. 한번만이라면 시험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듣기에는 퍽 그럴싸하게 들리는 의견이었다.
도로시는 유모의 조언에 수긍했다.
그리고는 카이사르 같은 짓이 어떤 짓인지 고민했다.
다음 날.
도로시는 티 테이블에 빌헬름 마이어를 초대했다.
촤아악!
그리고는 대뜸 그에게 찻잔의 찻물을 뿌렸다.
빌헬름 마이어에게는 불행하게도 도로시의 책장에는 악녀가 잔뜩 나오는 로맨스판타지 소설이 꽂혀 있었다.
악녀들의 가장 주된 또라이 패턴은 찻물 뿌리기였다.
“...도로시. 이게 무슨 짓이냐.”
“흥! 몰라도 되요!”
“내가 뭔가 잘못하기라도 했는가.”
도로시는 서러움에 복받쳐서 소리쳤다.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 부디 내 문제점을 알려다오.”
도로시는 열심히 고민했다.
이쯤에서 속내를 밝히고 용서를 구할까?
아니야.
좀 더 떠보자.
그녀는 악녀들이 카이사르 같은 짓을 할 때의 레퍼토리를 떠올렸다.
“당신은 형편없어요! 밤일도 못하고 언제나 모아이 석상 같은 표정만 짓고 있죠! 절 사랑하겠다던 약속은 전부 거짓말이었던 게 틀림없어요.”
빌헬름 마이어는 얼떨떨해하면서도 내심 반성했다.
자신이 가정에 소홀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미안하다. 사과의 의미로 갖고 싶은 걸 선물해주지.”
“제가 바라는 건 물질이나 돈이 아니에요!”
“대악마 발록의 가죽을 벗겨 만든 발록가방으로도 널 향한 내 사랑의 크기를 증명할 수 없는가?”
“일단 발록가방은 받고 우리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죠!”
“...그거 참 고맙군.”
필사적으로 싫은 척 행세해보았지만 절로 풀어지는 입고리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발록은 빌헬름 마이어가 지상을 초토화시킬 때 필요하다며 손수 제작한 대악마였다. 그런 대악마의 가죽을 벗길 정도라면 지상정복보다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는 게 우선시되었다는 증거다.
기분은 좋아졌지만 정작 경과를 전해들은 유모는 무뚝뚝하게 대답하였다.
“결국 보스의 희로애락을 자극하지는 못했군요.”
“아.”
“아무래도 분노로는 보스를 자극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정도 강도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비싼 물건만 받을 뿐, 결코 사랑은 받지 못할 겁니다.”
유모는 다른 접근방법을 모색하였다.
“이번에는 기쁜 감정을 자극하는 게 좋겠습니다.”
“어떻게요? 낭군님은 안마를 해도 무표정하고 선물을 드려도 별 감흥이 없고 부족한 게 없어서 채워드릴 만한 요소도 없는걸요. 고자도 아닌데 성욕까지 없다고요.”
“성욕은 초월했을지라도 귀여운 무언가를 보고 흐뭇해하는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도로시는 떨떠름해하였다.
“귀여운 무언가요?”
“보스의 두 번째 부하인 리나가 총애 받는 이유가 바로 귀여움 때문입니다.”
“...그게 귀엽다고요?”
리나는 보스 앞에서 보이는 인격과 보스가 없는 곳에서 보이는 인격이 천지차이였다. 속된 말로 내숭이 말도 안 되게 끝내주는 가짜숙녀다.
도로시는 도저히 리나같은 귀여움을 가장할 자신이 없었다.
“가식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아무튼 귀여우면 됩니다.”
“아무튼.. 귀여우면.. 된다... 메모했어요!”
“메모만 하지 말고 가서 직접 귀여운 행동을 취하십시오.”
도로시는 다시금 연애소설을 펼쳤다.
그리고 책으로 귀여움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였다.
다음날 이른 아침.
그녀는 불쑥 빌헬름 마이어의 침실에 들이닥쳤다.
두 눈을 껌뻑거리는 그의 앞에서 쭈뼛거리기도 잠시, 이내 입고 있던 옷깃을 꼭 붙잡고 용기를 쥐어짜내어 숨겨둔 아이템을 장착했다.
고양이 귀에 꼬리였다.
“야, 야옹...”
빌헬름 마이어는 말없이 다가와 그녀를 껴안아주었다.
‘아! 드디어 낭군님의 마음을 움직였어!’
작전은 성공이었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미안하다. 뭔지는 몰라도 네가 이렇게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있는 줄은 몰랐다.”
“아, 아니... 이건... 제가 좋아서 한 거에요.”
“앞으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노력하겠다. 가정에 충실한 남자가 되도록 노력하마.”
빌헬름 마이어는 상냥해졌지만 왠지 모르게 여자로서 패배했다는 자괴감만이 가득했다. 목적을 달성했는데도 도로시는 한층 더 우울해졌다.
“유모. 정말로 제가 매력이 없는지도 모르겠어요.”
“결코 그럴 리 없습니다.”
“세상에는 저보다 매력적인 여자가 더 많을지도 몰라요.”
“제가 보기에 아가씨보다 더 매력적인 여자가 있다면 진즉에 전부 제거했을 겁니다.”
“후후. 빈말이라도 감사해요.”
빈말이 아니다.
유모는 순도 100% 진심이고 몇 건은 이미 저질렀다.
물론 도로시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카이사르님처럼 극적인 또라이짓을 해서 분노를 유도하지도 못했고, 리나양처럼 아주 귀엽지도 않아서 훈훈한 시선을 받기는커녕 동정만 받고 말았어요.”
“그럼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공략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지스가의 장손인 제게 동정심을 유발하는 연약한 행동을 취하라는 건가요?”
“귀족의 자부심이 남편과의 관계개선에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윽.”
도로시는 마지막으로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좋아요. 이번에는 누구를 참고하면 되죠?”
“아가씨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본인의 감정을 참고하고 거기에 솔직해지시면 됩니다.”
“…….”
그래도 도로시는 참고자료가 필요했다.
이번에도 참고자료는 로맨스판타지 소설이었다.
다음날 저녁.
도로시는 빌헬름 마이어와 함께 늦은 저녁에 데이트에 나설 때, 사전에 매수한 악마들이 지하도시의 악마들이 거짓으로 자신을 습격하는 척 연기하도록 시켰다.
악마들은 예정대로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가 당황했다.
설마 지저최강이라 불리는 빌헬름 마이어의 앞에서 그 부인을 욕하라는 정신 나간 의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뒷골목에서 그들을 노려보는 유모도 그 못지않게 무서웠다.
“성적인 매력도 없는 각목년! 나무토막도 너보다는 매력이 있겠다!”
“오죽하면 남편과 성관계도 한 번밖에 못 가졌겠어?”
“킥킥. 나 같아도 저런 여자는 마차 가득 실어서 줘도 안 가진다. 관계를 못 맺을 만도 하네.”
악마들은 물리폭력 대신 언어폭력을 선택했다.
딴에는 눈치를 보고 수위를 낮춘 거였다.
허나 곱게 자란 도로시에게는 무자비한 폭언이었다.
“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훌쩍.. 흐어엉...”
도로시는 사전에 준비한대로 감정선을 자극하며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그간의 서러움이 다 떠오른 탓에 콧물까지 흐를 정도로 리얼리티가 넘치는 울음이었다.
“아, 아니. 이 타이밍에 그렇게 울면 저희가 뭐가 됩니까.”
“이거 돈 받고 한 거에요!”
“죄송합니다, 미궁의 지배자님!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하필이면 이럴 때에 한하여 연기력이 물 올라버린 도로시 이지스 탓에 악마들은 안절부절 못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빌헬름 마이어는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 악마들의 말이 사실인가.”
도로시는 놀랐다.
그의 두 눈에 일찍이 본 적 없던 분노의 불길이 일렁거렸다.
멸혼객이나 악신과 싸울 때에도 보지 못한 눈이었다.
“마, 맞아요..”
“악마들은 위험하다. 왜 이런 위험한 짓을 했는가.”
“이렇게라도 당신의 진심을 알고 싶었어요.”
빌헬름 마이어는 고개를 숙였다.
침묵 끝에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아니에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건 도를 넘었던 것 같아요.”
“미리 깨닫지 못한 내 잘못이다.”
빌헬름 마이어의 진솔한 사과에 도로시는 얼어붙은 마음이 살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날 밤, 도로시는 결혼 이후 처음으로 빌헬름 마이어가 먼저 자신의 방에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흐르는 눈물을 애써 억누르며 그녀는 다짐했다.
웃는 얼굴로 맞이하자.
그런 마음은 고개를 들자마자 싹 사라졌다.
“...그게 뭐죠.”
“채찍이다.”
“그건 아는데. 채찍을 왜...?”
빌헬름 마이어는 대답했다.
“악마들을 동원해서 성적인 희롱을 하게 만드는 상황을 조성한 건 하드한 플레이를 즐긴다는 의미가 아닌가. 맞는 쪽이 되는 건 사양이지만 오늘만큼은 특별히 감수하겠다.”
도로시는 쓸데없는 상냥함에 감사해야할지, 터무니없는 착각에 화를 내야할지 혼란스러워졌다.
고민 끝에 역시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역시 불행해...”
어째서일까.
뜻대로 되지는 않아도 전처럼 마냥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다.
유모는 훈훈하게 웃으며 방문을 닫았다.
“악마가죽으로 만든 채찍이 잘 먹혀서 다행이군요. 힘내십시오, 아가씨.”
한 커플의 애정이 돈독해지는 데에는 세 마리 악마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 작품 후기 ============================
작가는 악마족을 좋아합니다.
이유없이 합법적으로 괴롭힐 수 있는 장난감이라서요!!
악마들의 인권이요? 그딴 건 당연히 없습니다!
다음 에필로그 주역 후보군은 청일과 유모입니다.
허당검사와 인류최강자를 두고 고민하자니 기분이 참 묘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