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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03. 검신 청일
#Epilogue 03. 검신 청일
청일은 사문의 유지를 이어받아 오래도록 검술을 연마해왔다. 남들이 학업에 몰두할 시기에도, 놀이를 즐길 때에도, 두근거리는 연애를 경험할 때에도 검을 휘둘렀다.
그에게는 검이 전부였다.
검을 공부하고, 검을 즐기고, 검과 연애...까지는 아니더라도 검이 미소녀가 되는 상상쯤은 하면서 애지중지 여겨보기도 하였다. 이윽고 그는 사문을 배신한 사제를 쫓아 미궁도시에 왔다.
-동족애? 나와 동족이 되고 싶다면 백인베기쯤은 하고 와라.
-리나가 좋아하는 거? 암살!
-도망쳐! 이 새끼들은 매끼 건빵만 주는 또라이들이라고!
그리고 흑산회와 엮이게 되었다. 눈치 챘을 무렵에는 이미 도망칠 수도 없을 정도로 깊게 연루되고 말았다. 결국 그는 흑산회에 들어갔고, 시대를 격변시킬 수많은 사건의 조역이 되었다.
브람시 공성전.
왕국전쟁.
해적군도 정상전쟁.
심층지대 강습전.
고대신격과의 최종결전.
어느 하나도 예사로이 여길 수 없는 커다란 사건만 다섯 가지에나 참여했다. 세간에서는 흔히 영웅이라고 불리고도 남을 굉장한 업적을 이룬 셈이다.
그는 업적에 걸맞은 강함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이 얹혀가는 파티원A가 아님을 몸소 증명하였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 끝에 그는 도달하였다.
검신(劍神).
검사의 길을 걷는 자들이 염원해 마지않는 최고의 경지에.
그러나 노력과 성취가 반드시 비례하리라는 법은 없다.
지금 검신의 성소는 텅 비었다.
역하렘의 신인 쿠로보다도 인기가 없을 정도다.
‘이상해! 이상하다고!’
청일은 초조해졌다.
홍보가 제대로 안 된 걸까?
하지만 검사들은 대체로 남자들이다.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목적지가 있으면 무조건 찾아간다. 번화가 한복판에 성소를 세울 이유가 없다.
설령 여자검사라도 검의 길을 걷는다면 그 시점에서 이미 인내심은 일반남성을 가볍게 상회해버릴 정도로 길러진다. 성소를 찾아오는 일쯤은 그리 문제될 것도 없다.
그렇다고 검의 성소가 천단만애의 절벽 위에 놓여있는 것도 아니고 구불구불 굽어진 용암길을 앞에 두고 있지도 않다.
‘그냥 외각지대일 뿐이잖아!!’
일찍이 그는 홍보비를 아껴서 수련장비나 시설, 수많은 검, 다양한 스킬북을 구매하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성소를 세울 장소는 적당히 인적 드문 외각지대로 골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미래에 대한 자부심도 충만했다. 검의 성소가 들어섰으니 주변 땅값도 급격히 오를 거라고 생각해서 아예 인근의 땅까지 구매해두었다.
허나 성소를 찾는 신도들은 극히 드물고, 인근에 상가나 공방거리, 수련장이 개설되려는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검은 만병지왕이라 불릴 정도로 고수에게 있어 가장 뛰어난 무기였을 터이건만...’
수십 명의 절대자와 수백 명의 초절정고수, 수천 명의 절정고수와 수만 명의 일류고수가 우글거리는 이 미궁도시에서 어째서 검을 쓰는 사람이 이리 적단 말인가.
청일은 답을 찾고자 빌헬름 마이어를 찾아갔다. 그는 떫은 표정을 지으며 즉답했다.
“쓸모없잖아.”
“예!?”
“검 그거 쓸모없다고.”
청천벽력 같은 단언이었다.
“아니, 그, 검 좋은데요. 좋아요. 좋다고요.”
“안 좋은데.”
빌헬름 마이어는 인세최강자이자 현 미궁세계의 지존이다. 당대에 그보다 강한 존재는 단 한 개체도 없으며 미래에도 그보다 강한 자가 나타날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수준이다.
그런 자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검이 쓸모없다고 단언하자 청일은 엄청난 자괴감에 사로잡혔다.
“아, 미안하군. 표현법이 조금 나빴다.”
“역시 제가 잘못 들었던 겁니까?”
“검이 좋고 나쁘기를 따지기 이전에 효율이 형편없이 나쁘다.”
결국 검이 나쁘다는 말이었다.
청일은 울컥했다.
“저 검신입니다만! 보통 그런 거 당사자 앞에서 말합니까?”
“네가 먼저 물어보지 않았는가.”
“그야 그렇지만! 아무튼 검 혐오를 멈춰주십시오!”
“혐오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검에 유감 같은 건 딱히 없다.”
“정말입니까?”
빌헬름 마이어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시커먼 사내자식이 찾아와서 찡찡거리자 혈압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기분이 더러워지고 있음을 깨달은 청일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세상에는 많은 무기가 있고, 그 중에서 전설과 신화에 가장 많이 연루되는 무기가 바로 검이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가.”
“유명세입니다! 신전에 전설등급 검과 신화등급 검도 하나씩 콜렉션처럼 다 모아두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틀렸다.”
그는 청일처럼 검을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전설등급 검과 신화등급 검이 많다는 것은 검이 구시대의 낡아빠진 잔재에 불과함을 의미한다.”
“낡아빠진...!”
“뭐, 검을 쓰는 네 입장에서는 열 받을 이야기겠지. 그래도 이게 사실이다. 한때는 세계를 석권하던 강자들이 사용한 검술이라도 지금은 모두 검문이나 문파가 독식중이지 않는가.”
“외인의 약탈로부터 비전을 지키며 안전하게 이어받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입니다.”
“네 논리 자체가 틀린 건 아니다. 허나 지금은 예외가 있다.”
“뭡니까?”
“격투술이랑 소환술이 유행하고 있다.”
청일은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
“…….”
“…….”
빌헬름 마이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답니까?”
“그렇다.”
“제기랄! 시대의 유행에 뒤처져서 검신이 되어도 신자를 모을 수 없다는 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부족한 게 있으면 고칠 수라도 있지 유행을 대체 어떻게 고칩니까!”
빌헬름 마이어는 시큰둥햇다.
“내가 알 바 뭐냐. 검술은 망해가는 무술이고 검은 망해가는 무기다. 유행을 모르는 궁벽한 벽촌에 가서 검 배우면 밥 준다고 하고 꼬드겨보던지.”
“!!”
청일은 깜짝 놀랐다. 그의 말에서 불현 듯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제 스승님도 궁벽한 벽촌에서 저와 사제를 주워오셨다고 했습니다.”
“나이를 먹었으니 장사가 안 되는 건 알고 있었겠지. 우리가 없을 때에도 브람 시의 주류무술은 검술이 아닌 창술이었다.”
“크윽. 정녕 검술이 부흥할 방법은 없는 겁니까. 기껏 검의 길에서 정상까지 오르고도 따르는 자들이 없어서 신성력도 없이 쓸쓸하게 신성을 상실하는 건 너무 슬픕니다.”
신은 주기적으로 일정량의 신성력을 보급하지 못할 시, 조금씩 신위를 잃는다. 그렇게 상실하는 신위가 일정량을 넘어서면 신위를 상실하고 일개 초월자로 지위가 하락한다.
그래도 반신이라 불리며 신에 버금가는 저력을 지니고는 있지만 신 그 자체에 비하면 손색이 있는 바.
기껏 신이 되고 반신으로 추락해서 좋아할 사람은 없다.
“딱히 없는데. 너 같으면 마왕이 인간시절에 사용하여 군단 차원에서 널리 가치가 증명된 격투술을 익히겠냐. 아니면 별로 눈에 띄지도 않고 가치도 모르는 검술을 익히겠냐.”
“당연히 검술입니다!”
“그럼 너 같은 마이너한 취향의 검 덕후가 모험가 중에서 몇 퍼센트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청일은 입만 우물거리다가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이제 그만 인정해라. 검술은 아주 예전에 망했다. 넌 그냥 애정으로 검술을 연마하는 검 덕후 중의 최강자일 뿐이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신으로서의 여생을 이런 식으로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정 그렇다면 너 역시 거인이 되는 수밖에 없다.”
빌헬름 마이어는 나름 진지하게 부하의 고민에 응해주었다.
“범인은 벽을 만나면 주저앉고 비범한 자들은 벽을 우회하지. 허나 거인은 피하지도 주저앉지도 않는다. 그저 발을 들어 벽을 부숴버릴 뿐이다.”
“!!”
“내 뜻을 이해하겠는가.”
“이해했습니다.”
“그럼 더 이상 알려줄 건 없다. 가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빌헬름 마이어는 내심 생각했다. 카이사르의 격투술을 능가하는 검술을 창안하여 보급하거나 일대일 비무로 카이사르를 꺾을 정도의 거인이 된다면 가능성은 있다고.
극고의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청일의 노력치는 보통이 아니다. 정신 나간 것처럼 날마다 전날의 30%씩 더 강해지는 재능충들의 사이에서 악착같이 버텨내지 않았던가.
청일의 재능이 천재니 신에 준하는 재능이니 하는 것에 비견될 수준일 리가 없다. 녀석은 정말로 순수한 노력과 극한의 인내로 모두와 함께 설 수 있는 힘을 쌓아올렸다.
“그쯤 되면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노력하는 녀석은 싫어하지 않는 편이다.
조금쯤은 기대를 해볼까.
빌헬름 마이어는 속으로 청일을 응원하였다.
* * *
일주일 뒤.
빌헬름 마이어는 어떤 소문을 접했다.
“검신이 요즘 그렇게 핫하다면서?”
“그 작은 것이 그렇게까지 커져버리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
“그건 직접 봐야 해.”
NPC 하수인부터 게이머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셋 이상만 모이면 언제 어디서든 청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지간히도 극기에 가까운 노력을 해낸 모양이었다.
빌헬름 마이어는 괜히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 놈이 내 부하다, 라고 자랑할 거리가 생긴 덕분이었다.
“거기 하수인들.”
“헉! 대신님을 뵙습니다.”
“청일의 신전에 방문하고 싶다. 안내해라.”
하수인들은 군말 않고 그를 안내하였다.
청일의 신전은 이전과 같은 위치에 자리해있었다.
요행보다 실력으로 위기를 타개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심지어 신전은 천장 부위가 다 뚫려있다.
검을 연마하다가 천장을 아주 박살을 내놓은 모양이다.
잘 보면 단단한 플로어 천장도 조금 박살나있다.
“보스! 안 그래도 찾아뵈려 했는데 다행입니다.”
“성과는 있던가.”
“예! 덕분에 검술에 입문하는 거인들이 대거 늘어났습니다.”
응?
좀 뜬금없긴 해도 거인들이 검술 좋아할 수도 있지.
빌헬름 마이어는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았다.
“모처럼의 외유다. 시연식을 보고 싶군.”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지요.”
정해진 장소가 아니면 함부로 펼칠 수 없는 필살기를 연마해낸 모양이다. 카이사르의 백보무투술을 이길 정도로 막강한 검술을 창안하였을 텐데 과연 어떤 검술일지 궁금해졌다.
“흐아아아압!!”
청일이 기합을 내지르자 주변에 모여든 거인관중들이 오오,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시작됐다! 거검술이다!”
무지막지한 근력으로 펼쳐내는 검술인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는데 청일의 몸이 갑자기 커져보였다. 기분 탓 같은 게 아니라 진짜로 커지고 있다.
10m, 20m를 뛰어넘어 단숨에 50m급의 세계를 멸망시킬 것만 같은 거대한 거인이 되었다.
“???”
얼이 빠져서 멍하니 쳐다보는데 청일이 근처의 거대동상이 들고 있던 검을 뽑아서 위력적인 검술을 펼쳐보였다. 대기가 찢어지듯 파공음을 울리고 세상천지가 맹렬히 진동하였다.
꽈과광...!
벽력같은 굉음과 함께 커다란 검이 패도적으로 미궁천장을 긁어내었다. 관중들은 열렬히 환호하였다.
‘시발. 진짜 거인이 됐잖아.’
비유적인 의미의 거인이 아니라 진짜 거인이 됐다. 근데 그 어필이 거인들한테는 먹히고 있다.
“거인이 검을 휘두르는 게 저토록 호쾌해 보일 줄은 몰랐어!”
“이쑤시개 같은 무기라고 생각했는데 크기가 커지니 의외로 근사하군.”
“저 커다란 무기를 휘두르는 것도 수련이 되겠어.”
시연식을 마친 청일이 거인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다가왔다.
“어떻습니까, 보스.”
“어... 그거 참 인상적이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보스의 조언을 잊지 않고 더 큰 벽을 짓밟을 수 있는 거인이 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그만 둬 미친 새끼야.
거기서 더 거치면 미궁 무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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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매너리즘이 느껴지는군요.
다음 에필로그는 분발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