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외전 1. 보스의 크리스마스는 우울하다
(※보스의 리나를 향한 호감도가 낮은 시점)
(※작중에서는 챕터 2와 챕터 3 사이 무렵입니다.)
아지트에서 하릴없이 개인정비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와아!”
리나가 해맑은 탄성을 내지르며 창밖을 가리켰다.
새카만 밤에 하얀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다.
“보스! 눈이야! 눈이 왔어!”
“개 같은 새끼.”
“!?”
“아. 칭찬이다. 애완동물은 개가 최고지.”
“정말? 와아! 리나는 기뻐!”
개처럼 순진한 리나와 개 같은 성격의 카이사르.
이게 내 부하다.
나는 이 두 마리의 개X끼들과 함께 썩어가고 있다.
“보스! 놀자, 놀자! 놀자아~. 응?”
리나가 내 팔을 마구 붙잡고 흔들었다.
보고서 위를 춤추듯이 움직이던 만년필이 휙 어긋났다.
개빡쳐서 미간을 구기자 리나가 조심스레 내 눈치를 봤다. 그러더니 한결 안심하며 내 팔에 엉겨 붙었다.
“와아! 보스는 착해! 리나가 나쁜 짓을 해도 혼내지 않아!”
아. 나 동기화 비율이 1%라서 얼굴 표정이 없지.
무표정한 게 호구처럼 보였나보다.
“리나. 오늘따라 왜 이리 저능아 처럼 구는 거냐.”
“눈이잖아! 눈이 왔다고! 어떻게 실내에만 있어!”
“밖에 나가고 싶냐?”
“응!”
“눈이 왔는데 나가서 뭘 하고 놀겠다는 거냐.”
“눈이랑 놀면 되잖아!”
“…….”
그것참 천진난만한 16살 소녀다운 발상이군.
비꼬려던 말을 절제했다.
리나는 어린 나이부터 암살자로 길러진 아이다.
분명 아이다운 시간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겠지.
여기는 어른의 무신경함이 아닌 이해심을 발휘할 때다.
“좋다. 놀이기구를 주지.”
“와아!”
“이걸 들어라.”
나는 리나와 카이사르를 데리고 아지트 입구로 나왔다.
“이제 뭐해? 뭐해?”
나는 삽을 땅에 꽂고는 말했다.
“치워.”
“…….”
퍽퍽
고요한 겨울밤에 삽질 소리가 파묻혔다. 동기화 비율 1%인 나는 추위도 둔함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리나는 벌써 울상을 지으며 삽을 바닥에 퍽 찔러넣었다.
“즐겁지 않아!”
“눈을 가지고 놀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건 노는 게 아니야!”
나는 넌지시 물었다.
“눈을 가지고 노는 건 어떻게 노는 거지?”
“뭉쳐서 던지기! 눈사람 만들기! 뒷골목 애들이 그러고 노는 걸 봤어!”
“그럼 삽으로 대량의 눈을 퍼라. 그걸로 거대 눈을 뭉쳐라.”
“……!”
“그걸 던지거나 눈사람으로 만드는 건 말리지 않겠다.”
“와아아!”
리나는 무척이나 기뻐하며 삽질을 했다. 결과적으로 삽질을 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자의적인 삽질이라는 점에서 일의 능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보스. 저는 눈을 던지고 싶지도 않고 눈사람을 만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럼 뭘 하고 싶은가.”
“뭔가를 부수거나 누군가를 때리고 싶습니다. 흔적도 없이 박살 내서 이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습니다.”
“그럼 리나가 눈사람을 만드는 걸 도와라. 그리고 다 만들어진 눈사람을 부숴라.”
“그거 재밌겠군요.”
카이사르의 삽질 속도가 3배 빠르게 상승했다!
‘이거 좀 미안해지는데.’
뭐 그런다고 리나가 울지는 않겠지.
울면 카이사르가 나쁜 거니까 나랑은 관계없는 거다.
응, 그럼 구경이나 하자.
창고에서 테이블과 의자, 파라솔을 꺼내와 아지트 입구에 설치하였다.
따스한 차를 끓인 주전자를 가져와서 테이블 위에 놓고 한 잔씩 차를 홀짝거리자 미미한 온기가 온몸에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리나와 카이사르가 삽질을 하다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보스 거기서 뭐 해?”
“차를 마시고 있다.”
“아니. 리나는 삽질하는데 보스는 왜 안 하냐고.”
나는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보스니까.”
“씨잉! 나중에 뭉친 눈 던지고 싶다고 해도 못 던지게 할 거야! 눈사람도 못 만지게 할 거야!”
“그것참 아쉽군.”
카이사르는 애꿎은 우편함을 걷어찼다.
쾅! 뻐억!
담벼락을 뚫고 날아간 우편함이 뭔가에 부딪혔다.
붉은 액체가 하얀 눈밭 위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색한 정적이 이어졌다.
카이사르는 슬그머니 담벼락으로 다가가서는 땅에 대고 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잠깐 정지. 지금 뭐하는 거냐.”
“잠시 묻을 게 생겼습니다.”
“설마 시체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카이사르는 삽으로 흰 눈을 퍼서는 붉게 물든 눈을 덮었다.
“기분 탓입니다.”
“아닌…….”
“기분 탓입니다.”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삽으로 내 머리를 후려갈길 기세였다.
설마 저딴 새끼가 쑥스러워할 리는 없겠지.
약골 보스 주제에 띠껍게 굴지 말고 그냥 모르는 척하라는 건가 보다.
“에휴.”
리나가 내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네가 보스에게 점수를 못 따는 거야.”
“그리고 넌 절벽 꼬맹이지.”
“뒤져 개새X야.”
칼과 암기를 번뜩이며 격전을 벌이는 놈들을 뒤로한 채, 반쯤 눈밭에 파묻힌 시체를 확인해보았다. 자세히 보니 이 녀석, 산타클로스 옷을 입고 있다.
혹시 크리스마스 기념 이벤트 아이템인가 싶어서 일단 옷을 벗겨보려는데 산타 복장을 한 시체랑 눈을 마주쳤다.
이 새끼, 아직 살아있다.
“!?”
목 끝까지 튀어나오려던 비명을 간신히 참았다. 산타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리며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무언의 호소를 해왔기 때문이다.
녀석은 카이사르를 의식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길 가던 산타를 우편함으로 패는 새끼한테 산타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는 건 위험하게 여겨졌다.
저 싸이코 새끼는 지가 무슨 황소라도 되는 것처럼 시뻘건 새끼가 아직 살아있다며 막 달려들어서 모가지를 따버려도 이상할 게 없는 학살자다.
“보스. 거기서 뭐 하십니까?”
“잠깐 시체를 확인했다.”
“제 처리가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저 새끼 지금 자기가 산타를 한 방에 죽이지 못했다고 의심하는 거냐고 따지는 건가.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제가 시체의 상태를 확인해보겠습니다.”
이 자식, 역시 시체라고 생각하고 있었구먼!
제 입으로 시체라고 말했다고.
그보다 이거 살아있는 거 들키면 삽으로 푹 찍고 ‘역시 제 처리는 완벽합니다.’ 따위 지껄이는 거 아니야?
‘미안하다. 그래도 이게 덜 아플 거다.’
퍽!
나는 뒷발로 고개를 젓는 산타의 머리를 걷어찼다.
산타는 코피를 흘리며 신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어설프게 위력이 약해서 기절하지 않았나 보다.
퍽퍽!
다시 세게 걷어차자 산타가 울음을 터뜨렸다.
산타가 내 다리를 붙잡았다.
나는 깜짝 놀라서 겁나 세게 산타를 걷어찼다.
뻐억!
산타가 쓰러졌다.
“…….”
계획대로 무사히 기절한 것 같다. 삽을 들고 산타를 묻는 척하면서 적당히 거리 밖으로 굴려서 내보내려는데 대뜸 카이사르가 미간을 구기며 다가왔다.
저리 꺼지라고 빤히 쳐다봐도 꿈쩍도 않는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게 부하의 의무이듯 집 앞에 쓰러진 시체를 치우는 것도 부하의 의무입니다.”
“으음. 그래도 고생하는 부하를 보니 마냥 두 손 놓고 가만히 있기는 심심하더군.”
“보스. 지금 설마 제가 못 미더워서 직접 시체를 치우려고 하시는 겁니까?”
응. 근데 그렇게 말하면 삽으로 나 후려칠 거지?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해라.”
자포자기하고 시체를 카이사르에게 넘겼다.
테이블에 돌아와 의자에 앉는데 뭔가 엄청난 광경이 보인다.
높이 10m의 거대한 눈더미가 쌓였다.
“흥흥흥~ 즐거운 눈사람 만들기~”
“…….”
저러고 있는 꼴을 봐봤자 나만 심란해진다.
에라 모르겠다.
다 때려치우고 들어가서 잠이나 자자.
[수면모드에 돌입합니다.]
[이벤트가 발생하거나 피로가 모두 회복되기 전까지 수면상태를 유지합니다.]
* * *
[이벤트가 발생했습니다.]
[수면이 종료됩니다.]
시야가 좌우로 마구 흔들린다.
옆을 돌아보자 초롱초롱한 눈을 한 리나가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며 내게 말했다.
“봐봐, 보스! 자이언트 레이고드 킬빌 데빌카이저 1호가 완성됐어!”
뭐냐, 그 X나 세 보이는 이름은.
부스스한 눈을 껌뻑거리며 반쯤 끌려가다시피 따라갔다.
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칼바람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맞이하였다. 멍하니 고개를 위로 들어 올리자 높이 10m의 거대한 마초상이 완성되어져 있었다.
동쪽 지구에 사는 NPC들은 지나가면서 흘낏흘낏 구경하기도 하고 아예 직접 와서 만져보기도 했다.
심지어 입구에서는 레이브가 표를 끊고 입장권도 팔고 있다.
“뭐냐 이건.”
“자이언트 레이고드 킬빌 데빌카이저 1호야!”
“그니까 이게 눈사람이라고?”
거인을 통째로 얼려서 상반신만 세워둔 것처럼 굉장한 퀄리티의 눈사람이 완성되었다. 근육의 모양을 따라 생기는 굴곡과 역동적인 형태가 눈의 거인이라도 보는 것 같다.
역동적인 생김새는 그렇다고 치자.
주변에 모여든 인파는 뭐냐. 거의 삼백 명이 넘어가고 있잖아. 길거리 라이브 공연을 해도 이 정도는 못 모은다고.
“들었어? 여기가 얼음조각사가 사는 집이래.”
“흑산회 아지트라는데?”
“미술길드인가 봐. 저 흉상 박력 넘치는 거 봐.”
백보 양보해서 거기까지는 납득했다고 치자. 근데 집 주변에 눈이 죄다 자이언트 뭐시기한테 사용됐잖아. 그럼 산타는 지금 어디에 묻혀있는 거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신속하게도 산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이언트의 역동적인 등 근육 사이로 팔이 튀어나와 있다.
“어이, 리나.”
“응!”
“저거 뭐냐.”
리나는 팔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는데? 보스가 앞마당에 묻어둔 시체라도 눈더미에 같이 딸려 나온 거 아니야?”
“저걸 만든 건 너였지 않은가.”
“바보 살인광도 도와줬어! 이왕이면 커다란 곳에 숨기는 게 좋다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던데, 그래도 덕분에 엄청나게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 수 있었어!”
개X끼야.
눈에 띄지 않게 얼음조각상 속에다 산타 넣지 말라고.
저거 녹으면 더 눈에 띄잖아.
“카이사르.”
“예, 보스.”
“영업 끝이다. 문 닫고 다 쫓아내.”
그나마 말이나 잘 들으니까 다행이지. 순순히 관람객들을 쫓아내고자 힘을 썼다.
“갑자기 이러는 법이 어딨어! 우린 손님이라고!”
“우아앙! 아빠아아아! 자이언트 보고시퍼어어어!”
“관람비라도 돌려줘! 돈만 받고 쫓아내는 건 사기야!”
카이사르는 박력 넘치게 항의하던 남자의 머리를 집어 그대로 들어 올렸다.
“정 원한다면 관람비는 돌려주지. 네놈의 장례식장에서.”
“사, 살려주세요오오!”
관람객들은 혼비백산하며 달아났다.
“…….”
이걸로 괜찮은 걸까.
왠지 모르게 심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저걸 부숴라. 그리고 시체를 다른 집에 치워라.”
“안 됩니다.”
“뭐?”
“자이언트 레이고드 킬빌 데빌카이저 1호는 제 필생의 역작입니다.”
“…….”
갑자기 예술가의 혼을 발휘하지 마라.
숨겨진 재능 같은 거 내세워도 인정하지 않을 거다.
“치워.”
“싫습니다.”
“치우지 않으면 네 서열은 리나보다 밑이다.”
카이사르는 주저하지 않고 삽으로 조각상을 박살 냈다.
“꺄아악! 뭐하는 짓이야아아아!”
“비켜라. 보스의 명이다.”
“보스으으! 바보 살인마 좀 말려줘어어!”
눈물을 글썽거리는 리나를 슬며시 외면하였다.
“미안하다.”
“보스…?”
“자이언트 레이고드 킬빌 데빌카이저 1호는 우리들의 안전한 미궁도시 생활을 위해서 죽어줘야겠다.”
카이사르의 삽에 조각상이 완파당하고 리나는 엉엉 울며 레이브는 안절부절못하는 혼돈과 카오스의 앞마당 상태를 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던 와중이었다.
대뜸 경비대가 출동했다.
경비대원들은 성큼성큼 마당에 발을 들였다. 설마 산타의 팔을 본 관람객이 있었던 건가? 대체 얼마나 주고 경비대원을 매수할 수 있을까? 오만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자이언트 어쩌고 하는 거 다시 만들 수 있습니까?”
“뭐?”
“시장님께서 조각상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들키진 않았나 보다. 나는 안도하며 대답했다.
“꺼져.”
경비대원들은 시무룩해 하며 돌아갔다.
산타의 시체(?)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무사히 옆집에 갖다버릴 수 있었다. 울며불며 난리를 부리는 리나에게 솜사탕을 물려주고서야 겨우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하루였다며 아지트에 들어오자 시계가 보였다. 크리스마스가 지났다.
“X발.”
언제나처럼 X신 같이 우울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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