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외전 11. 뜻밖의 악행
(※빌헬름 마이어가 선행을 하고 싶은 경우)
(※작중에서는 챕터 3과 4 사이의 무렵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착해지고 싶을 때가 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마음에 여유를 되찾았거나, 과거의 선행이 떠올라 보은을 한다고 생각할 때가 그러하다.
“선행을 하겠다.”
돈도 많이 벌고 과거에 선행을 받은 기억도 떠올랐으니 지금의 내가 선행을 할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그런 내 발언에 대해 카이사르는 짧게 평가했다.
“보스. 미치셨습니까?”
“…난 멀쩡하다.”
가장 충직한 부하의 반응만 봐도 그간의 행보가 얼마나 악행에 치우쳤는지는 알 수 있었다. 솔직히 하고 싶어서 한 악행도 아니었지만 그런 상황을 이용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카이사르. 인간은 때때로 과거를 돌아봐야 하는 생물이다.”
“그렇습니까.”
“네가 가장 어려운 시절에 네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있던 기억은 있는가.”
“있습니다.”
“만일 이번에는 네가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입장에 처해있다면 이번에는 어떻게 하겠는가.”
카이사르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저 역시 똑같이 할 것입니다.”
“훌륭하군.”
근본부터 썩어빠진 양아치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인간의 마음마저 저버리지는 않았나보다.
“외출이다.”
“어디로 가십니까.”
“모험가 길드로 간다.”
모험가 길드는 내게도 연이 깊은 장소이다.
“모험가 길드에서 수혜를 입은 적이 있으십니까.”
“있다.”
미궁세계 이전, 가상현실게임이 아직 미궁도시이던 시절. 나 또한 초보자였던 입문 시기는 있다.
첫 미궁 탐사에서 쫄딱 망하고 울적하게 의뢰게시판이나 뒤적거리던 무렵, 한 실력자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도 않았겠지.
새삼 감회에 사로잡혀 길드 플로어를 배회하는 초보자들을 바라보던 도중이었다.
“헬렌. 모험가가 되면 뒷골목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비열한 녀석들! 너희들의 수작에는 두 번 다시 넘어가지 않아. 구질구질한 밑바닥 생활은 청산하고 모험가가 되어서 성공하겠어. 네놈들한테 진 빚도 머지않아 전부 청산할거야!”
“크흐흐. 쉽지 않을 거야. 밑바닥 인생은 결국 밑바닥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라고. 창관은 아직 열려있으니 언제라도 돌아오는 게 좋을 거야.”
한 무리의 남자들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모험가를 비웃다가 물러났다. 여자는 애써 심호흡을 가다듬고는 다시금 의뢰게시판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보스. 저 여자를 도와주려는 겁니까.”
“그렇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통찰력을 발휘하면 저 여자를 도와줄 이유는 충분히 찾을 수 있다.
“남자들의 발언에서 여자의 현재 처지는 간단히 짐작할 수 있다. 불리한 처지를 역이용해 빚을 지게 한 뒤, 이를 빌미로 창관에 묶어두게 하려는 수작질이다.”
“그뿐이라면 무시해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중요한 건 여자의 대응방법이다. 무기력하게 자신의 운명이라며 순응하지 않고, 공권력에 기대지도 않으며 모험가길드의 문을 두드렸다. 이 행위의 의미를 알겠는가.”
이놈도 무식하게 생긴 것과 달리 의외로 머리가 잘 돌아간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모험가 길드는 모험가의 탐사행위를 방해하는 모든 간섭행위에 길드 차원에서의 대응에 나섭니다. 여자가 모험가이기를 포기하기 전까지는 저 무뢰배들도 행동을 강제할 수 없습니다.”
“정답이다.”
“마음에 드는군요. 자력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겠다는 정신을 지닌 자들은 싫어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뼈가 느껴지는 발언이다.
“그렇지 않은 자들을 본 적이 있는 모양이군.”
“보스와 만나기 전, 고향에 두고 온 패배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됐느냐고 묻지는 않겠다.
당장 브람 시의 뒷골목만 해도 죽은 생선 같은 눈을 한 NPC들이 널리고 널렸다.
“그럼 저 여자에게 백만 골드를 주는 겁니까?”
“…그런 미친 짓은 안 한다.”
선행한다고 했지 호구 짓 한다고 한 적 없다.
“잠자코 따라와라.”
나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헉! 빌헬름 마이어다!”
“암흑가의 초신성!?”
“악마와 계약한 마인 카이사르까지 있어!”
모험가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도시 전역에 파다하게 퍼진 악명의 영향이었다.
헬렌이라는 모험가 또한 소스라치게 놀랐다.
꼭 자동차와 마주친 사슴 같은 표정이다.
아니면 천재지변과 마주한 무기력한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으읏… 어째서 저런 거물이 여기에 있는 거야…….”
헬렌은 눈치를 보다가 슬쩍 옆으로 물러섰다.
우리가 게시판을 보러 온다고 생각했나보다.
당연히 목적은 그녀였기에 방향을 틀어 그녀에게 향했다.
“우우.”
헬렌은 울상을 지었다.
주변에 도움이라도 요청하고 싶은 기색이지만 그녀 옆의 모험가들은 진즉에 멀찍이 떨어진 뒤였다.
“저, 저한테 무슨 용무이신가요.”
“헬렌. 네 이야기는 들었다.”
“설마… 절 납치하러 온 건가요!?”
헬렌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에 구경꾼들이 일제히 경악했다.
아니다, 이년아.
날 뒷골목의 무뢰배들이랑 동급 취급하지 마라.
“오늘 하루, 너는 우리와 한 파티로 활동한다.”
“네에에!?”
느닷없는 내 폭탄선언에 헬렌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넙죽!
헬렌은 바닥에 엎어져서는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전 노예가 되기 싫어요! 살려주세요!”
“…그런 게 아니다.”
“절 악마소환의 제물로 삼으려는 거죠? 싫어요! 안돼요!”
다짜고짜 애원부터 하는 이유는 짐작이 간다.
얼마 전에 딴 칭호 때문이다.
[칭호 명 : 슈퍼빌런]
[칭호 효과 : 당신이 행하는 모든 행동은 사람들에게 슈퍼빌런의 행동으로 각인됩니다. 착한 짓도 나쁘게 보이고 나쁜 짓은 끔찍하게 보이며 끔찍한 짓은 절망적으로 보입니다.]
선의가 악의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업보라고 생각해야지.
그래도 진심은 전해진다.
나는 침착하게 악의가 없음을 해명하였다.
“제물이 필요하다면 너보다 건장하고 강한 모험가들을 미궁 속에서 납치했을 거다. 정말로 네가 악마에게 제물로 바쳐질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그렇지만요…….”
“방금 전, 뒷골목의 무뢰배들을 상대로 네가 보였던 자력으로 뒷골목 생활을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높이 평가했을 뿐이다. 다른 의도는 없음을 받아들여라.”
헬렌은 막막한 심정이 느껴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그럼 전 뭘 하면 되나요?”
“그렇군. 여기서는 모험가로서의 네 역량을 가늠해볼 필요가 있겠지.”
나는 다시금 폭탄발언을 내던졌다.
“네가 파티장이고 나와 카이사르가 파티원이다.”
“네에에에에!?”
“의뢰를 골라라. 그리고 미궁에 내려간다.”
구경꾼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아가씨! 당장 그만둬! 말도 안 되는 함정이 틀림없어!”
“저 사람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암흑조직의 보스라고!”
“미궁의 중층부까지 내려가서 여자를 버리려는 건가!?”
아, 이거 좀 빡치네.
성가신 방해꾼들의 입을 다물게 할 심산으로 카이사르에게 눈짓을 했다.
카이사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패를 꺼내 들었다.
“나는 탱커다.”
“…….”
포지션 설명하라고 한 거 아니다, 이 멍청아.
“저, 저… 그럼 보스는 어떤 포지션인가요?”
“도적.”
리나는 장기출장을 보냈기에 도적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레이브는 아직 만능도적이 되기 위한 교본공부 중이다.
고로 통찰력이 높은 내가 도적 역할을 수행하기에 걸맞다.
“어,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제가 공격수 역할을 수행할게요.”
그렇게 우리들의 3인조 급조파티 미궁 탐사가 시작되었다.
“이, 이번 임무는 B1 층에 서식하는 미궁쥐 30마리를 토벌하고 징표로 꼬리 30개를 가져오는 거예요.”
헬렌의 말에 카이사르가 역정을 부렸다.
“네놈! 감히 보스에게 그딴 허접한 의뢰를 가져오다니. 죽고 싶냐!”
“히이익! 그럼 어쩌라고요!”
“당장 모험가길드 특급의뢰 게시판에 가서 유령도시의 엘더리치 섬멸전이나 기간티스의 일곱 기둥 정도 되는 극악무도하며 무자비한 난이도의 의뢰들을 가져와라!”
죽어.
그딴 거 하면 나 죽는다고.
“이걸로 되었다.”
“보스!”
“이 파티의 파티장은 우리가 아닌 헬렌이다. 파티원이 파티장의 의견을 존중하지 못해서야 어쩌겠다는 거냐.”
카이사르는 차갑게 냉소하였다.
“파티장이 흔들리는 파티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이유나 확고한 의지를 표명해야 합니다. 시정잡배들의 지껄임 따위에 눈이 먼 애송이는 믿을 수 없습니다.”
어라. 이 녀석 봐라.
싫은 티 팍팍 낼 때는 언제고 꽤나 본격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기색이 뚜렷하다.
고향에 두고 왔다던 옛 인연들이 생각난 걸지도 모르겠다.
“저, 저는 제대로 자신의 의지로 결정을 내렸어요!”
“그럼 말해라. 보스에게 이딴 무례한 임무를 수행하게 만든 이유를.”
헬렌은 두 눈을 꼭 감고 심호흡을 했다.
이내 눈을 부릅뜨며 카이사르의 위협적인 눈초리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내심을 밝혔다.
“당장 상층부 밑으로 진출해서 큰 성공을 거두거나 중층부의 전투법을 배우더라도 결국 혼자가 되면 제가 있어야 할 곳은 미궁 상층부에요. 제게 필요한 상층부의 지식을 배우고 싶어요.”
역시 내 사람 보는 눈은 틀리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미궁쥐 토벌을 시작하였고…
“빨라!?”
헬렌의 비명대로 쥐가 너무 빨라서 한 마리도 못 잡았다.
“으으! 카이사르님. 여기서는 탱커의 어그로 스킬을 활용해서 미궁쥐를 유인해주세요!”
“알겠다.”
카이사르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대뜸 어마어마한 목청으로 사자후(獅子吼)를 부르짖었다.
“덤벼라아아! 쥐새끼들아아아아아!”
찌이잉.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에 미궁쥐 한 마리가 혼비백산하며 쥐구멍 옆에 있는 벽에 잇따라 머리를 부딪쳤다. 일시적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할 정도의 혼란에 빠진 모양이다.
“에이잇!”
헬렌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꽈당
그리고 자빠져 넘어졌다.
[헬렌(혼란 중)]
너도 걸린 거냐…
“으으, 죄송해요. 이렇게 된 이상 파티에서 가장 균형감각과 민첩성이 뛰어난 도적이 미궁쥐를 잡아주세요.”
“문제없다.”
나는 자신 있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
아니, 안 되겠는데.
몸이 기울었잖아.
이거 100% 혼란 걸렸다고.
“여기서는 투척으로 잡아주지.”
걸음을 내딛다가 넘어지는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공격이 빗나가는 편이 낫다.
휙! 퍽!
힘껏 던진 단검이 어디론가 날아가 박혔다.
물론 동굴쥐의 머리통은 아니다.
“저, 빗나갔는데요.”
“동굴쥐를 노리고 날린 게 아니다.”
대충 뒤편에 매복한 적을 쫓아낸 거라고 말하려던 순간.
“커헉!”
[당신은 지나가던 모험가A를 죽였습니다!]
불운한 모험가 한 명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졌다.
“어… 이건… 그러니까…….”
카이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모험가를 노린 것이군요.”
“그렇다.”
“그럼 저 모험가는 어째서 노린 겁니까.”
그런 거 묻지 마.
나도 몰라.
“역시 어울리지 않는 선행을 하느라 뒤틀린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무고한 모험가를 살해한 것입니까.”
“아니다!”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반박이군요. 걱정 마십시오, 보스. 제 입은 무겁습니다. 그리고 파티장 또한…….”
헬렌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피에 미친 살인귀를 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입은 무거워 보입니다.”
“…….”
난 지금 쟤 눈에 얼마나 나쁜 새끼로 보이고 있을까.
[빌헬름 마이어의 악명이 50 상승합니다.]
악명 50만큼 나쁜 새끼로 보였다고 알려줘서 겁나 고맙다.
망할 시스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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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불쌍한 초보모험가를 돕겠다는 선의로 비롯된 미궁 탐사는 예상치 못한 실수로 사망자를 만들고 말았다. 더 이상 미궁쥐의 꼬리 따위는 우리들의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이제 어떡합니까?”
카이사르는 재차 물었다.
“다행히도 시체를 유기하기 좋은 미궁에서 저지른 살인입니다만, 이 살인에 뭔가 의미라도 있는 겁니까?”
없어.
그냥 상태이상 혼란 때문에 공격이 빗나간 거야.
“그러는 너야말로 사자후는 왜 내지른 거냐.”
“탐사가 지루해서 돌발 사태를 만들어봤습니다.”
이거다.
나는 냉큼 그 말을 받아들였다.
“과연 내 부하답군. 같은 목적으로 다른 사태를 만들다니.”
적당히 묻어가려는 시도였지만 헬렌의 표정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공포에 휩싸였다.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다니, 역시 흑산회 보스… 조금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언제 무슨 이유로 살해당할지도 몰라…….”
딴에는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작게 중얼거려도 다 들린다.
그보다 나 완전 쓰레기로 낙인 됐네.
카이사르는 괜찮은데 난 왜 안 괜찮냐고 따지기에는 일으킨 사고의 크기가 달랐다.
“자, 파티장. 예상치 못한 사고로 모험가가 죽는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돌발상황에서 너는 어찌할 테냐.”
여기까지 일이 꼬인 이상, 뻔뻔하게 나설 수밖에 없다. 나는 이판사판으로 당당하게 헬렌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모, 모르겠어요.”
“그럼 네 미래의 파티원은 돌발 사태에서 네 공격명령만 믿고 공격을 시도했다가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려 모험가의 길을 걷지도 못하겠군.”
“아아아! 그러려던 의도가 아니었어요!”
“네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불쌍한 파티원이 평생 모험가의 길을 걷지 못하고 수렁에 빠져 암흑가의 밑자락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거라는 사실이지.”
“그런 건 안 돼요!”
나는 새파랗게 질린 헬렌을 향해 나직이 선언했다.
“그렇다면 네 능력으로 운명을 바꾸어보아라. 이 상황에서 너는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인가.”
헬렌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비장한 어조로 선언했다.
“시체를 은닉하고 도망치죠.”
“필요하다면 범죄행위라도 저지르겠다는 건가?”
“물론이죠. 저 모험가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죠. 밑바닥 생활이 얼마나 처참한지 알고 있는 이상, 제 사람들을 그런 곳에 빠뜨릴 수는 없어요.”
“훌륭한 각오다.”
미궁쥐나 잡는 화목한 의뢰는 어느덧 시체를 은닉하는 음험하고도 위험천만한 임무로 돌변했다. 다행히도 우리들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고, 무사히 지상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많은 걸 배웠어요. 감사합니다.”
“아니, 뭘 이런 걸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미궁에서는 언제나 원치 않는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 잘못된 명령이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킬지도 모른다는 것,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냉정하게 대처하면 된다는 것…….”
“어… 뭐… 그거 잘됐군.”
“이런 처참한 실패는 어디 가서도 배우지 못할 소중한 교훈을 남겨주겠죠. 보스의 깊은 뜻을 이제야 알 것 같아요.”
헬렌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오늘 하루, 진심으로 고마웠어요.”
“무슨 소리냐.”
나는 뚱한 어조로 대답했다.
“파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네? 하지만 파티는 오늘 하루만이라고…….”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법만을 배웠을 뿐. 네게는 아직 가르침이 필요하다. 마침 하루가 모두 가기까지는 앞으로 12시간은 더 남은 모양이군.”
“보스…!”
“밤은 길다. 졸음에 굴하지만 않기를 바라지.”
헬렌은 무척이나 감격에 겨워하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게 고마운 마음을 품은 건 틀림없다.
간만에 선행을 베풀 수 있다는 생각에 나 또한 마음이 훈훈해졌다.
“지상에서는 어떤 가르침을 주실 건가요?”
“위기에 대처하는 법은 배웠으니 이제 위기를 일으키는 쪽의 방법을 배워야겠지.”
“네에?”
나는 무뚝뚝하게 선언했다.
“안내해라. 낮의 파락호들이 있는 장소로.”
본래 헬렌이 자력으로 미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쳐주고자 했으나 이에 실패했으니, 대안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바로 문제의 근원인 파락호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헬렌은 불안함과 기대가 반반 뒤섞인 눈으로 우리들을 안내해주었다.
“늠름한 장부님, 저희 가게에서 여흥을 푸시는 건 어떤가요?”
“싸게 해드릴게요.”
차가운 밤거리에서 살색조차 감추지 못할 얇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웃음을 지으며 손짓했다.
카이사르와 나는 조금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창관에 얽매여 원치 않는 웃음을 파는 저들의 눈에는 웃음이 아닌 공허만이 가득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암흑가를 지배하는 1존6강의 일원.
4강, 색마의 영역이다.
“라일라 창관. 그들은 이곳의 포주의 명을 받아 하층민들을 억압하여 강제로 빚을 지게 하는 방식으로 기녀를 모으고 있어요. 저도 조금만 잘못되었다면 지금쯤…….”
“그렇다면 네가 해야 할 일도 알고 있겠군.”
“복수를 원해요. 하지만 창관의 배후에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두려움에 굴해서는 무엇 하나 이룰 수 없다.”
“정말로… 가능한가요?”
“결단을 내리는 건 파티장의 몫이다. 말해라. 너는 이곳에서 무얼 하기를 원하는가.”
헬렌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빚을 없애주세요. 또 가능하다면 그들이 다시는 같은 범죄를 반복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셨으면 해요.”
나는 흔쾌히 그 부탁을 이루어주기로 결심했다.
“카이사르. 파티장의 명령이다. 창관에 쳐들어간다.”
“경비대는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상관없다. 이곳은 힘의 논리에 지배되는 장소. 우리는 그들의 방식을 존중하여 힘의 논리로 응할 뿐이다.”
카이사르는 살벌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명령만을 기다렸습니다.”
콰앙!
정문을 박차고 난입하자 경비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이냐!”
“미친놈. 당장 붙잡아!”
카이사르는 한 마디 대꾸도 없이 대검을 휘둘렀다.
“크아악!”
무자비한 괴력에 경비원 수어 명이 잇따라 쓰러졌다. 창관 내 숙소에서 대기 중이던 병력이 연이어 나타났지만 어느 누구도 카이사르에게 맞설 수는 없었다.
“힘이 없기에 당했다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모든 적을 무찌를 수 있는 힘을 길러라.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하다면 그만한 힘을 지닌 자를 끌어들여라.”
“아아… 저렇게나, 저렇게나 간단히…….”
“이것이 암흑가의 생리이자 위기를 일으키는 방식이다. 법도 도덕도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만 가능한 유일무이한 대응책이다.”
삽시간에 이십 명도 넘는 장정들이 죽어나갔다. 기녀들과 손님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지만 카이사르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지배인실을 향해 전진하였다.
“웬놈들이냐! 이곳이 색마님의 영역임을 알고도 감히 살겁을 펼치려 드는 것이냐!”
“닥쳐라. 내가 따를 남자는 오직 보스뿐이다.”
콰앙!
카이사르의 도끼가 지배인을 스쳐지나가 벽에 틀어박혔다.
폭음과 함께 벽이 산산이 부서졌다.
드드드드드.
어찌나 강맹한 공격이었는지 건물 전체가 미미하게 떨렸다.
지배인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미, 미친…….”
“기녀들의 빚을 기재한 장부와 차용증을 내놔라.”
“안돼! 그런 짓을 했다간 위에서 보복을…….”
콰아앙!
드드드드드…
순식간에 얼굴이 반쪽으로 줄어든 것처럼 핼쑥해진 지배인이 장부를 들고 왔다.
“여, 여깄습니다.”
카이사르는 장부와 차용증을 모조리 불태웠다.
불은 단숨에 창관 내부로 번졌다.
“아아아! 불을 꺼야해. 불을… 컥!”
지배인이 투척용 도끼에 맞고 죽자 어디선가 비명이 들렸다.
눈에 익은 무뢰배들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으아아아아!”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더냐.”
카이사르가 촛대를 들고 있는 힘껏 내던졌다.
콰앙!
무뢰배들은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줄줄이 촛대에 꿰뚫려 벽에 처박혔다.
“이런 짓이 가능한 사람이 따로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맛보기라고 생각해라.”
이딴 짓이 가능한 초보모험가가 있을 리가 없지.
그런 놈이 있으면 당장 내가 영입할 거다.
[라일라 창관이 파괴되었습니다.]
[흑산회의 악명이 1000 상승합니다.]
불타는 창관을 올려다보며 헬렌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꿈만 같아요.”
“꿈이 아니다.”
“제가 두 분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요?”
아니, 솔직히 불가능한데.
그렇다고 이 타이밍에 그걸 대놓고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죽을 각오로 노력만 한다면.”
“저, 힘내볼게요!”
환히 웃는 얼굴이 지금까지는 몰라보도록 아름답다.
역시 여자는 웃는 얼굴이 제일이다.
저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같은 짓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꺄악! 불이야!”
“어떡해! 불이 번졌어!”
옆 창관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달아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훈훈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안 돼! 불길이 너무 거세!”
“이쪽 거리는 포기해! 불길을 잡기에는 너무 늦었어!”
“무슨 소리야! 이대로는 뒷골목이 전부 불타 사라진다고!”
뒷골목의 인간들 중에 그나마 똑똑해 보이는 자가 말했다.
“거리의 간격을 보라고. 바람의 흐름이 북서풍인 이상, 인접한 거리까지 불탈 일은 절대로 없어.”
“으으.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남자의 발언에 주변인들이 한숨을 내쉬던 도중이었다.
휘이이이잉!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며 불길이 인접거리를 덮쳤다.
“으아악! 동남풍이다!”
“이런 바보 같은! 이 계절에 동남풍이라니, 말도 안 돼!”
“개X끼야! 바람 안 분다며!”
“함정이다! 엄청난 지략가가 벌인 함정이 틀림없어!”
“도망쳐! 여긴 틀렸어!”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헬렌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저… 이것도 보스의 활약인가요?”
“어… 뭐, 그렇다.”
“대단하세요! 보스는 천문지리에도 통달하셨군요!”
선망어린 표정을 보니 양심이 찔린다.
내가 무슨 제갈공명이라도 되는 줄 아나보다.
“저, 보스.”
“뭐냐.”
“이제 슬슬 멈춰주시면 안 될까요. 저거 더 번지면 하층민들이 거주하는 거리까지 덮치는데요.”
아차. 나는 뒤늦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분위기를 타서 무심코 허세를 부린 것이 실수였다.
방금 전에 내가 일으킨 바람의 변화라고 말한 탓에 이 화재는 전적으로 내가 유도한 소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 화제를 통제할 방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불가능하다.”
“예!? 안돼요! 무고한 사람들의 집이 불타 없어져요!”
“그래도 안 된다.”
헬렌의 얼굴에 두려움이 번졌다.
“절 도우려는 게 아니었던 건가요?”
바로 그때, 화염병을 든 카이사르가 내 곁에 서며 말했다.
“어리석은 년. 아직도 깨닫지 못했는가. 넌 그저 보스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것을.”
“네에에!?”
“보스의 무자비한 심성에 선행은 어울리지 않는다. 작은 선행은 더 큰 악행을 저지르기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았다는 거다. 믿어서는 안 될 자를 믿은 어리석음을 탓하며 후회해라.”
야이 싸이코패스 자식아.
내가 너 같은 진성 또라이인줄 아냐.
“훌륭한 속임수였습니다, 보스.”
“아니, 이건.”
“보스의 모략에는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헛된 희망을 품은 여자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드는 순간을 위해 큰 그림을 그리는 안배는 단언컨대 보스만이 행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헬렌은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더니 뒤돌아 달렸다.
“아아아! 암흑조직을 믿은 내가 어리석었어! 역시 흑산회는 최악의 조직이었어! 내가 어리석었던 거야!”
“…….”
조직에 돌아오자 부하들이 팡파레를 울리며 환영해주었다.
“역시 보스는 대단하십니다. 색마의 영역에서 화공을 펼치다니, 생각지도 못한 작전이었습니다.”
“이걸로 저희 조직의 악명도 천정부지로 솟구칠 겁니다.”
“암흑가의 방화범들이 잇달아 흑산회에 들어오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전부 보스의 활약 덕분입니다.”
선행 한번 하려고 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악명이 천정부지로 솟구쳤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냥 다 때려 치고 아지트에 처박혀있는 편이 더 낫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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