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부하들이 미친듯이 유능하다-221화 (221/224)

[225] 외전 12. 어느 추운 날

(※한파가 몰아치는 어느 날의 일상)

(※작중에서는 챕터 5와 6 사이의 무렵입니다.)

신년을 맞이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다음 한 해를 준비해야 하는 어느 날. 우리 흑산회가 하는 일은 영업장을 돌아다니는 것도, 덕담을 주고받는 것도 아니다.

“추워!”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틀어박히는 것이다.

“겨울은 다 지났는데 날씨가 왜 이래?”

리나의 투덜거림도 딱히 이상한 건 아니다.

겨울은 지났다.

하지만 정작 날씨는 역대급으로 춥다.

-크하하하하! 모조리 얼려버려라!

-세상은 나의 것이다!

[월드보스 동장군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추위가 한층 거세집니다.]

흔히 비유의 의미로 동장군이 왔다는 말을 쓰지만 여기는 게임 속. 단순한 비유가 실제가 되어버렸다.

겨울도 지난 초봄부터 왜 이러냐고 묻는다면 월드보스 레이드를 하겠다고 깝친 게이머 공격대한테 따져야 한다.

레이드는 실패했고 얼떨결에 잠에서 깨어난 동장군이 미쳐 날뛴 결과가 이 모양이다.

“보스, 난로 말고 뭔가 따뜻한 거 없어?”

“없다.”

천하대장군 못지않은 이벤트용 월드보스 동장군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지만 우리는 그저 시큰둥할 따름이었다. 저딴 괴물을 잡겠다고 뛰쳐나가는 건 멋모르는 게이머들뿐이다.

NPC인 리나나 탑 게이머인 나는 모포를 하나씩 뒤집어쓰고 방에 박혀있는 것만으로도 한계다.

사각 사각

문득 천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위를 쳐다봤다.

견습암살자들이 단검으로 글씨를 새기고 있었다.

“너네 뭐하냐.”

암살자들은 우물쭈물 거리다가 대답했다.

“유언을 새기고 있습니다.”

“…경호임무는 관두고 난로 앞에 내려와라.”

자그마한 암살자들이 줄사다리를 내리더니 졸졸 내려왔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난로 앞에 손을 들이미는 모습을 보니 참 가엽다는 생각만 든다.

동장군이 날뛰는 건 딱 하루만이니 오늘 하루는 꼼짝 말고 여기에 박혀있어야지.

동기화 비율 1%는 추위도 덜 느끼지만 압도적인 추위가 선사하는 상태이상은 예외다. 이런 날씨에 객기를 부렸다가는 문자 그대로 얼어 죽는다.

“오늘 따라 카이사르가 보이지 않는군.”

“아침에 수금하러 갔어!”

“…이 날씨에?”

우당탕탕.

현관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린다.

나와 리나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서로에게 말을 건넸다.

“네가 가라.”

“시러! 보스가 가면 안 돼?”

결국 우리는 담요를 이불처럼 뒤집어쓴 채, 사이좋게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전신에 서리가 낀 처참한 몰골의 카이사르를 발견했다.

“수금을 50%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용케도 이 날씨에 50%나 마치고 돌아왔군.”

“나머지 50%도 마치고 오겠습니다.”

곧 죽을 것처럼 덜덜덜 떨면서 뭔 소릴 하는 거냐.

성냥팔이 소녀도 너처럼 가엽지는 않겠다.

“됐다. 그냥 앉아있어라.”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카이사르는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오늘 수금을 마치지 못하면 연합기관에 지불할 난로 임대료가 연체됩니다.”

“까짓것 그냥 더 내지 뭐. 난로 연체비가 얼마나 한다고.”

“오백만 골드입니다.”

카이사르의 쿨한 대답에 오한이 절로 치밀었다.

“뭐야 그게. 왜 그렇게 비싸.”

“조직원들에게도 5인당 1난로를 배분했습니다.”

“아.”

지난겨울에 덜덜 떠는 조직원들이 불쌍해서 날이 추우면 난로를 배급하라는 말을 했었지.

“연체비는 얼마냐.”

“하루당 원금의 10%입니다.”

게임 속 난로는 고급 아티펙트다.

그딴 걸 수천 개나 임대했으니 살인적인 가격이 뜨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문제는 지금 연체비를 지급할 만큼 흑산회 재정이 풍족하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수금을 해야겠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창밖에서 호쾌한 웃음소리가 온 세상을 집어삼킬 기세로 울려 퍼졌다.

-전부 얼려버려라!

[동장군이 폭주합니다!]

[Big Wave!]

[경이로운 한파가 온 거리를 휩씁니다.]

“…….”

역시 무리.

이 날씨에 수금에 나섰다가는 정말로 얼어 죽는다.

“자잘한 수금은 모두 마쳤습니다. 남은 수금처는 가장 큰 돈을 지불해야 할 연합기관 뿐입니다.”

“바보! 그럼 처음부터 거기를 가면 됐잖아.”

“거기가 제일 거리가 멀다.”

카이사르의 진지한 대답에 리나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보스.”

나는 머리를 쥐어 싸매다가 답을 찾아내었다.

“방법이 없지는 않다. 창고에 넘쳐나는 아티펙트를 두르면 한 사람의 추위저항을 50% 올리고 재생력을 30% 상승시킬 수 있다. 아이템을 몰아주면 한 명은 왕복이 가능하겠지.”

“그럼 그건 누가 갑니까.”

“나를 대신하여 거금을 운반할 수 있는, 그러면서 신체 능력 또한 우수한 최측근이 가야겠지.”

그냥 카이사르 네가 가면 안 되냐. 그렇게 말하기에는 피부가 창백하게 질린 카이사르의 낯이 너무 처참해보였다. 시선을 마주친 리나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저어보였다.

“어쩔 수 없군. 내가 가는 수밖에.”

“그건 안 돼! 보스는 정말 죽을지도 몰라! 세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얼음조각상이 되어버릴 거라고!”

“새끼 잉어보다 연약한 보스에게 맡기느니 저희 둘 중에 한 명이 가겠습니다.”

이놈들의 머릿속에서 난 얼마나 추위에 약한 존재로 각인되어져 있는 거냐. 그딴 거 상관없이 그냥 안 나가서 좋지만.

“바보 카이사르! 대결이다!”

“좋다. 쳐죽여주마.”

대뜸 카이사르가 도끼를 쳐들었다.

리나는 울음을 터뜨리며 내 등 뒤에 숨었다.

“우와앙! 보스, 카이사르가 귀여운 리나를 괴롭혀!”

“…네가 대결하자고 했잖아.”

그게 물리적인 대결을 원한 건 아니었겠지만.

“카이사르. 사망자가 나오지 않는 방법으로 대결해라.”

“걱정 마십시오, 보스. 전우의 정을 생각해서 팔 하나를 베는 선에서 그치겠습니다.”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아. 오히려 엄청나게 걱정된다.”

이 녀석의 전우애는 얼마나 피에 물들어있는 거냐.

“잠깐. 저건 어떠냐.”

나는 심심풀이 삼아 탁상 위에 올려둔 체스판을 가리켰다.

“체스를 둬서 지는 자가 수금을 하러 나가는 거다.”

“좋아!”

“보스가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리나와 카이사르의 승부가 시작되었다.

시작은 리나의 턴.

“똑똑히 보라고! 암살자의 저력을!”

리나는 좌측 끝의 폰을 들고 체스판 밖을 빙 둘러서 돌아가 카이사르의 킹을 잡았다.

“잡았다!”

“크윽.”

뭘 기뻐하고 분해하는 거냐. 저 멍청이들은.

완전 엉망진창이잖아.

“참고삼아 묻겠다만, 각자의 체스경력은?”

“1분!”

“처음입니다.”

1회전 체스대결은 무승부로 강제 종료되었다.

“체스보다 쉬운 초보자용 게임을 골라야겠군.”

나는 트럼프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거라면 간단하겠지.”

“리나도 알아! 범죄길드에서 종종 가지고 놀았어!”

“저도 뒷골목의 노름판에서 쓰인 걸 보았습니다.”

뭔가 걸리는 게 많은 대답이었지만 체스처럼 엉터리 대결이 되지는 않겠지.

“좋다. 그럼 종목은 포커다. 내가 사회자를 맡도록 하지.”

나는 두 사람에게 카드를 배분하였다.

“선공은 카이사르다. 카드를 교환하겠는가.”

“공격하겠습니다.”

“…뭐?”

카이사르는 대뜸 테이블 위에 K 2장을 내려놓았다.

“트리플을 공격표시로 내려둔 채 턴을 종료하겠습니다. 이번 패에 거는 부위는 팔뚝의 살점 500g입니다.”

“으윽! 리나는 카드 한 장을 수비표시로 내려놓고 랜덤카드를 받아 필드에 내려두겠어!”

“잠깐.”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너희들. 정말로 포커의 룰은 알고 있는 거냐.”

두 부하들은 당당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각 턴마다 2장의 패를 제시하고 신체부위를 배팅한 뒤, 배팅에서 이긴 만큼 상대의 신체부위에 대한 소유권을 지니고 그만큼의 돈이나 노동을 요구하는 내기 아닙니까.”

“당연하지! 암흑포커는 암살단에서도 정식으로 채용한 놀이라고! 카드를 한 장 받을 때마다 배팅한 신체부위의 가치가 10%씩 줄어들지만 역전의 기회를 노릴 수 있는 거잖아!”

그딴 포커 몰라.

왜 갑자기 암흑의 도박사 같은 게임을 하는 건데.

“통상 포커로 진행해라.”

“그런 건 힘없는 쭉정이들이나 하는 나약한 게임입니다.”

“보스는 리나가 귀여운 여자아이라고 얕보는 거야!?”

어째서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다.

결국 2라운드 암흑포커도 무승부로 강제 종료되었다.

“어쩔 수 없군. 그냥 간단하게 가위바위보를 해라.”

카이사르와 리나의 낯에 긴장감이 일었다.

“과연 인외마도의 길을 걷는 보스답습니다. 그런 무시무시한 악마의 게임을 종용하시다니, 새삼 탄복했습니다.”

“보스… 리나가 죽으면 주방에 남은 솜사탕은 부단주가 먹게 해줘.”

뒷골목에는 암흑의 가위바위보라도 있는 거냐.

이딴 식이어서는 언제까지고 승부가 나지 않는다.

나는 사태를 강제로 진전시킬 마법의 말을 내뱉었다.

“한 번만 더 이상한 소리를 하면 두 사람 다 내보내겠다.”

카이사르와 리나가 동시에 혀를 찼다.

이 녀석들, 둘이서 짜고 치고 있었던 거였냐!?

“어쩔 수 없군. 비정한 승부의 세계에서 물러섬은 없는 법. 이렇게 된 이상 전력으로 가위바위보에 임하겠다.”

“흥! 바보 주제에 기고만장하지 말라고. 리나는 가위바위보에서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으니까!”

두 사람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생사대적을 앞둔 기세로 서로를 노려보기도 잠시.

“가위, 바위, 보!”

섬전 같은 빠르기로 두 사람의 손이 움직였다.

바위와 보.

리나의 승리였다.

“헤헹! 리나가 이겼지롱!”

“무슨 소리냐.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웃음기 하나 없는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바위는 네년의 얄팍한 보를 부숴버릴 수 있다.”

“그, 그런 게 어딨어!”

“덤벼라. 네놈의 손바닥을 내 주먹으로 분쇄해주마.”

“으아앙! 보스, 카이사르가 리나 괴롭혀!”

“비겁하게 숨지 말고 당당하게 나와 자웅을 겨루자!”

네놈이 훨씬 더 비겁하다, 이 멍청아.

나는 심판을 내렸다.

“승자는 리나다. 카이사르, 네가 수금에 나서라.”

“납득할 수 없습니다.”

“실망스럽군. 너는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인배였는가.”

카이사르는 진심으로 억울해하였다.

“리나의 민첩함은 제가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제가 무엇을 내든 간에 리나는 손을 뻗는 와중에 이를 간파하고 순식간에 다른 모양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맹점이었다.

“리나의 장기인 민첩함이 통용된다면 동시에 제 장기인 근력 또한 반영될 수 있는 승부여야 공평하지 않습니까.”

“으윽!”

양심에 찔려하는 리나의 모습을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장기를 동시에 보일 수 있는 게임은 아무리 생각해도 생사투 외에는 없다.

수금하러 보낸답시고 사람 한 명을 초죽음으로 몰아넣고, 심지어 아티펙트를 주렁주렁 매달아 강추위에 내보내라니.

아무리 이놈들의 악행에 적응이 된 나라도 양심에 찔린다.

“귀찮군. 연합기관의 수금은 그냥 리나가 가라.”

“보스! 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눈물을 글썽거려도 소용없다. 카이사르는 이미 강추위를 뚫고 고생하고 왔으니 이번에는 네가 수고해라.”

진즉에 이렇게 결론을 내릴 걸 그랬나.

한참을 엉겨 붙으며 잉잉거리고 징징거리던 리나는 결국 뚱한 표정이 되어서 방한복에 아티펙트를 잔뜩 껴입었다.

리나는 체력 면에서는 카이사르보다는 못해도 기동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나니 대신 내보내도 문제는 없을 거다. 실은 이미 높은 통찰력을 통해서 시스템의 확답도 받아냈다.

“두고 봐! 오늘의 원한, 잊지 않겠어!”

리나는 카이사르를 향해 악담을 퍼부었다.

“네가 잠든 사이에 심한 짓을 해줄 거야!”

“가소롭군. 무슨 짓을 하겠다는 거냐.”

“네 얼굴에 낙서를 해주겠어!”

…니가 애냐?

당연히 카이사르는 시큰둥한 기색이었다.

“립스틱으로!”

카이사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비열한 녀석. 어떻게 그런 수치스러운 짓을!”

“흥! 이미 늦었어! 네 얼굴은 추잡한 핑크색 립스틱으로 범벅이 될 거야!”

립스틱에 대한 공포심을 드러내는 카이사르를 무시한 채, 리나가 뛰쳐나갔다. 카이사르는 허탈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명예로운 학살자로서의 인생도 여기까지인가.”

“…….”

“두 번 다시 검을 쥘 수 없는 몸이 되겠군.”

정말로 난해한 고민이다.

이 녀석의 고민에 눈곱만큼도 공감을 못하겠어.

벌컥

바로 그때, 방금 뛰쳐나간 리나가 금세 돌아왔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른데.

“어… 저기, 보스. 딱히 연합기관에 갈 필요가 없겠는데.”

“뭐?”

“방금 연합기관에서 온 전령이 이걸 건네줬어.”

스위치다.

콕 누르자 대뜸 허공에서 돈주머니가 떨어졌다.

“…….”

우린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냐.

허탈함에 사로잡히기도 잠시, 카이사르가 진심어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지 않아도 되겠군.”

“흥! 다음에 리나를 또 괴롭히면 얼굴을 립스틱으로 떡칠해버릴 테니까. 단단히 각오해두라고.”

“순순히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명예로운 학살자의 길을 걷지 못하게 된다면 나 역시 네놈들의 휴게실에 설치된 솜사탕 기계를 박살 내버리겠다.”

리나는 정말로 서러움에 가득 찬 울음을 터뜨리며 내 어깨에 매달렸다.

“으아앙! 보스으! 저 바보가, 바보가!”

“…….”

두 바보의 바보짓도 이제는 꽤나 익숙해졌다. 조금 귀찮기는 해도 한편으로는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랜 숙원인 미궁을 정복하고 모든 여정을 마친 뒤에는 이 멍청이들과 함께 이런 바보 같은 나날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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