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끝에 다다른다.
어렴풋이 타오르는 불꽃은 온 세상이 잿더미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있다.
“이제 마지막인가.”
온통 피로 물든 참혹한 전투의 흔적.
그조차 남지 않고 모든 게 사라지고 있었다.
바닷속에 가라앉는 배처럼 고요히 무너진다.
거기에 남아있는 건 분노와 절망이라는 엉겨진 감정들.
끝이었다.
모든 걸 건 최후의 전쟁에서도 마왕에게 패배했다.
역대 가장 온화하고 평화로웠다고 하던 공정의 마왕은 가면을 벗는 순간 최흉의 마왕이 되었으니.
결국 세상을 멸망시키는 과업을 이루었다.
“이게 그 결과더냐.”
한때 마왕과 뜻을 함께했었다.
마왕 아래에 쉼 없이 죄를 뒤집어쓰며 간부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되돌아온 건 마왕의 뒤통수였다.
모두를 배신하고 세상을 멸망시킨 마왕은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듯 자신이 가장 먼저 소멸하고 말았다.
그리고 저 앞을 바라본다.
나야 특수한 경우였으니 지금껏 살아남았어도, 저 건너편에는 아직도 이 세상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생존자가 존재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피로 눌어붙은 노란 머리, 푸른색 눈동자, 신이 조형했다 하더라도 믿을 법한 이상적인 외모.
그러나 지금은 가련한 소녀.
마왕의 대적자.
그러니 용사.
“당신, 아직도 살아있네요.”
팔 한쪽이 없었다.
한 눈이 비어있다.
옆구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커다란 흉기가 어깨로부터 관통하여 몸속 어딘가에 파고들었다.
오직 멀쩡해 보이는 건 두 다리뿐.
전투를 처음부터 보았던 나는 왜 저런 흔적이 남아있는지 알고 있다.
철저한 계산 아래에 내놓은 상처들.
하나하나 치명적이지만 그런데도 검을 쥐고 휘두를 수 있으면 만족하기에 남긴 고통.
그런 치열한 사투를 한 용사는 결국 패배했다.
그런데도 용사이기에 마지막까지 생존했다.
용사의 모든 동료가, 성녀, 대마법사, 검성이건 모두가 죽었을 때.
그녀 혼자만이 살아남았다.
용사의 물음에 나는 대답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만이 가진 저주받은 힘.
‘불사자’이기에 그렇다.
“죽지 않는 몸이니.”
“그건 알고 있어요. 불사자 아르갈.”
“그래서 나에게 왜 온 거지?”
“가장 앞서서 마왕과 싸운 것이 당신이니까.”
용사의 한쪽밖에 남지 않은 푸른 눈을 바라본다.
그렇게 지고도, 세상이 멸망에 다가왔음에도 눈동자는 빛을 잃지 않았다.
아직도 희망이 남아있는 건가, 희망과 정의의 상징인 용사이기에 아직도 놓고 있지 않은 건가.
그렇기에 저 눈동자는 날 증오했다.
용사는 나를 증오할 수밖에 없다.
마왕의 명령을 따라 그녀의 동료를 죽이고 고문했으며, 온갖 죄를 저질렀으니 가히 심판해야 할 죄인이다.
죄악으로 여기는 흑마법에 손을 댔으며.
부모와 형제를 죽였고.
강력한 악마와 계약을 했으며.
마왕에게 배신당했다 하더라도 결국 멸망에 이바지한 조력자였으니.
용사가 나에게 다가왔을 때 직감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날 심판하기 위해 왔다고.
- 스릉.
아직도 성검은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멸망이 다가오는 데에도 그 힘을 잃지 않았다.
저거라면 나의 불사성을 끊을 수 있을까.
검을 나에게 겨누며 용사는 묻는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얼마든지.”
“당신은…. 후회합니까?”
“...”
내 가슴을 울리게 하는 물음이었다.
예상했던 질문이 아니다.
참회.
용서.
뉘우침.
그러한 것이 아닌 단지 후회를 했냐고 물었을 뿐이다.
끝없이 나아가고 나아갔다.
그 모든 죄악을 짓고도 하염없이 나아간 뒤에 받은 질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후회라.
“한 적 없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살아온 모든 삶에 대해 후회하지 않습니까?”
“용사여, 이상한 걸 묻는구나,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마왕과 싸운 건 그녀가 모든 걸 배신하고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기 때문이지, 후회했기 때문에 사력을 다하여 마왕을 막으려 한 게 아니다.”
“그렇습니까?”
용사는 검을 거둬들였다.
의아한 시선을 용사에게 보내자, 그녀가 쥔 성검은 기이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아르갈, 또 한 번 주어지는 기회를 새로 써나가세요. 돌아간다면…. 그 생각이 변하길 바랍니다.”
“잠깐, 그게 무슨 소리지 용사? 대체 뭘 할 생각인가.”
“저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그건 다른 사람에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남은 건 당신뿐이군요. 멸망했음에도 아직 생을 유지할 수 있는 불사자 이기에.”
용사의 한쪽 눈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반쯤 고장 난 것 같은 머리를 굴리며 용사가 한 말을 해석했다.
“돌아간다는 건, 과거로 회귀를 한다는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왜 그런 기회를 주는 거지?”
용사가 그런 권능을 가졌는지는 둘째치기로 한다.
애초에 신에게 힘을 받아서 천하무적에 가까운 존재였으니 그런 힘쯤이야 하나 정도는 있을 법하다.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자 원수를 상대로, 그런 기회를 소모하는 것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그대로 끝이라 하더라도.
“마지막 발버둥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
애초에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남들에게 헌신하고 희생하는 용사와 마왕군의 간부였던 나와의 생각이 도저히 같을 수는 없었다.
원수를 회귀시켜서라도 멸망을 막고 싶은 것이 용사의 마음일 테다.
“하나는 약속하지.”
하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나는 아주 탐욕스럽게 용사의 결정을 받아들인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마왕, 그 자식을 죽이겠다.”
“그것만이라도 충분해요.”
처음 얼굴을 마주할 때부터 굳어있던 용사의 얼굴은 어렴풋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