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돌아왔다.
대악마와 계약한 낙인이 지워졌다.
흑마법으로 누적된 저주가 증발했다.
전신에 남아있던 흉터가 말끔히 사라졌다.
두 손을 펼치자 잡티 없는 말끔한 손이 보인다.
“정말 돌아온 건가?”
혹시나 했지만 정말 믿을 수 없었다.
용사가 들어 올렸던 검에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고, 거기에 정신을 잃고 눈을 뜨는 순간 바로 이곳이었다.
얼마나 과거로 돌아왔는지 짐작이 안 됐다.
거울을 보아하니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인체 실험으로 ‘불사’의 저주를 받고 광기에 미친 괴물이 되기 전.
십 년의 시간이 지나 마왕에게 거둬지고 마왕군 간부가 되었으며, 대악마와 계약하고 인류의 주적이 된 불사자 아르갈은 이곳에 없었다.
가문이 불타기 이전, 아직 때 덜 탄 귀족 공자가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불사의 각인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회귀를 하는 바람에 과정 없이 존재하는 이 저주.
끝없는 광기가 동반되는 이 저주는 마치 ‘광기’라는 부분은 깨끗이 씻겨나간 건지 오직 불사성만이 남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저주라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아주 오랜만에 깨끗해진 머릿속에 약간이나마 청량감을 느꼈다.
거울 속에 보이는 입과 눈이 펴져 있는 걸 보면 체감이 된다.
항상, 굽혀진 입꼬리는 올라가지 않았으니.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그러는 와중에 내 머릿속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를 더듬어간다.
내가 몸담았던 귀족 가문은 꽤 건실한 편이었다.
나름 있을 건 다 있는 영지, 세월이 지나 녹슬었지만 고풍스러움을 잃지 않은 저택, 유능한 집사, 착실한 메이드, 시골 영지치고는 높은 수준의 기사단.
그리고 아침이 밝고 내 방문을 두들길 법한 이는, 내 전속 메이드 뿐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도련님.”
“캐론.”
그녀에 대해 많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한 명만을 전문적으로 시중을 드는 시녀를 잘 기억하고 있는 게 이상했다.
단 하나 기억하고 있는 게 있다.
‘그, 만….’
‘왜…. 도련님이 저를….’
달빛 아래에 활활 타오르는 저택이 떠오른다.
숨어있는 이 하나하나 참살하며 살육을 저지르던 그때 그녀를 죽였던 기억 하나만이 내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손으로 가슴을 꿰뚫어 그 속의 심장을 부셨던 기억.
그리곤 중얼거리며 내뱉으려던 한 마디.
“미안하다.”
“네?”
“아니, 아무것도.”
날 지긋하게 괴롭혔던 광증이 깨끗이 씻겨나가니, 별 미련 두지 않았던 과거에 깊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더는 의미 없는 과거 아니한가.
덧없이 털어내고는 캐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시선을 살짝 피하며 몇 가지 사항을 전달해 주었다.
“가주님이 부르셨습니다. 우선 옷차림부터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래라.”
“그리고 도련님 그….”
“뭐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개를 푹 숙인 캐론은 그대로 뒷걸음을 치며 걸어 나갔다.
콧방귀를 뀌며 창밖을 바라본다.
세상이 불타오르고 잿더미가 되던 풍경이 아니었다.
풍요롭게 솟아오른 나무들과 풀잎, 그 한 가운데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사내.
나의 형 아르델.
그 곁에서 예쁘게 장식된 바구니를 열고선 간식을 먹으며 구경하고 있는 소녀.
내 동생 아리엘.
그러다가 두 눈을 감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왜 저 둘을 죽인 내 모습이 떠오르고 있는 건가.
“모르겠군.”
고개를 돌린다.
광증에 시달린 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너무나도 친숙해진 광증이라는 게 없어졌기에 익숙지 않았다.
“세숫물과 옷을 가져왔습니다. 도련님.”
캐론이 가져온 세숫물로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복잡한 건 없으니 이 일련의 과정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는 캐론의 뒤를 따라가 주실 앞으로 도달했다.
과거의 기억이 천천히 되살아났다.
신경 쓰지 않았기에 잊었던 것들이 생각났다.
콧수염을 달고 있는 나이 많은 집사, 그는 가문에 평생을 충성했기에 가문의 가신이었으며 준 귀족의 위치였다.
저택 내부를 돌고 있는 몇몇 기사들. 그들은 내가 지나칠 때 정돈된 자세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잘 닿지 않는 창문을 닦기 위해 의자를 가져다 두고 까치발을 들고 있는 메이드.
굳이 내려와 인사하려는 걸 막으며 걸음을 옮긴다.
저들의 표정은 평온하고 충성심으로 가득했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일가족을 다 죽이고 가문을 지웠으며 이 평온한 저택을 불태웠는가.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왔느냐. 아르갈.”
“아버지.”
표정은 엄격했으나, 두 눈에 담긴 감정은 한없는 애정뿐이었다.
나는 이 집안의 가주이자 아버지를 바라보며 과거 그를 살해하였을 때를 떠올린다.
‘아르갈, 아르갈 브리텐! 죄를 짓고 멀리 떠나고, 다시 찾아온 목적이 이것이었느냐!’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왕족을 살해하려 한 반역의 오명을 짊어지더라도 널 품고서 함께하리라 작정했다. 그런데 그 대가가 바로 이것이었냐!’
‘대체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 가족을, 우리 일가를 그토록 증오했느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증오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고 편안한 집안이었습니다.
이유는 별것 없습니다.
대악마와 계약하려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야 했으니.
두 눈을 만졌다.
눈가에 무언가 맺힌 듯하였으나 여전히 메마른 두 눈덩이만이 잡혔다.
기억났다.
내가 일가를 살해한 이유는 대악마와의 계약 때문이었다.
대악마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길 원했고, 나는 어림짐작으로 ‘가족’이 소중하다고 생각했으니 가족을 몰살했다.
단지 그뿐이다.
정신을 차리자 아버지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느냐? 어디 아픈 곳이 있다면 말해다오.”
“아뇨. 괜찮습니다.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크흠, 괜찮다면 이어 하지. 널 보낼 곳이 있었다.”
아버지는 편지를 펼쳐냈다.
“카리스 자작이 널 부르는구나, 이전부터 혼담이 있었고, 이번에 직접 만나볼 예정인가 보군, 어떠냐? 가보겠느냐?”
카리스 자작이란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자작과 만나고 혼담이 있던 그의 영애와 얼굴을 마주한 뒤…. 돌아가는 길에 나는 납치 당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불사의 저주를 받고 끊임없는 광증에 시달렸다.
너무, 너무 공교로운 타이밍이다.
딱 회귀를 하자마자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니.
그렇다고 회피를 할 생각은 없었다.
찰나, 그리고 아주 긴 고민 끝에 대답했다.
“가겠습니다.”
아버지는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영주와 약혼을 통해 긴밀한 사이가 되는 건 여러 방면으로 도움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버지는 모르고 있었다.
이 결정 하나로 그토록 아꼈던 아들이 괴물이 되었고, 가문을 불태웠으니.
아버지와의 대화가 끝났다.
가주 실에서 나오자 빼꼼 고개를 내민 시선이 보인다.
양 갈래로 묶은 검은 색 머리.
귀엽게 부풀린 두 뺨.
여동생 아리엘이다.
“거기서 뭐 해.”
“오, 오빠? 보였어?”
“그럼 안 보이겠니.”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아리엘은 자연스럽게 그 곁을 따른다.
“아버지가 뭐라 하셔?”
“그렇게 궁금했으면 들어와서 같이 들어도 되는데.”
“그, 그렇지만 아버지는 무섭단 말야.”
“무섭다라….”
거기서 뭘 보면 무서운 거지?
정말 순수히 궁금했으나, 굳이 물어볼 필요성은 못 느꼈다.
종종거리며 내 뒤를 따라온 아리엘은 거듭해서 조잘거렸다.
“그래서 뭐야? 무슨 일인 건데?”
“카리스 자작가에 갈 일이 생겼다.”
“뭐어? 오빠가 거길 간다고? 왜?”
이젠 귀찮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야기를 해 줬다.
“혼약이 있다. 그곳에 있는 영애를 만나고 약혼을 할지, 안 할지 결정을 하겠지.”
“호, 혼약?!”
“뭐 그렇게 놀라냐, 너도 나이가 찬다면 누군가 만나서 약혼을 할 텐데.”
귀족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다.
피와 피로 맺어지는 동맹과 거기에 모이는 힘이 곧 귀족의 힘이 될 거다.
어쩌다 보면 거기서 나온 자손이 두 영지를 합치게 될 상속자가 되어, 더 강력한 영주가 탄생하기도 한다.
그런 일은 보통 없지만.
게다가 내가 기억하기로는…. 여러 일이 있어서 혼약은 취소가 된다.
어차피 혼약은 중요치 않았다.
납치되어서 불사성이 각인되는 그 사건이 제일 중요했지.
아리엘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나, 나는 안 해! 약혼 그런 거 안 할 거야!”
“네 마음대로 해라.”
“그, 오빠라면 동생이 막 나가려는 걸 바로잡아줘야지! 가만히 두지 말고!”
대체 뭘 어쩌라는 건가.
동생의 헛소리는 무시하며 고개를 돌리자 바로 앞에는 흘러내리는 땀에 젖은 형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르델.
과거 그의 죽음은 인상적이었기에 바로 기억 속에서 떠올렸다.
‘브리텐 가문의 명예를 걸고, 널 죽이겠다 아르갈.’
‘아버지를 살해한 죄! 아리엘을 죽인 죄! 저택을 불태우고 브리텐 가문을 모욕한 죄! 그리고…. 어머니를 살해한 죄…. 이 죄를 참회토록 하겠다.’
그는 마지막까지 나와 사투를 벌였다.
수준급의 검사였기에 나는 몇 번이고 그와의 전투에서 죽었다.
불사자의 저주가 없었다면 진작 패배했음이 자명했다.
왕국 수도의 황금기사단에 들어간 그는 가문이 불탔다는 급보를 받고 급히 영지로 돌아와 타오른 저택의 잔해를 보았다.
피눈물을 흘리며 두 팔이 부러져도, 검을 들어 올린 그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아버지에게 들었다 아르갈.”
“그렇습니까?”
“내가 항상 말하지만, 편히 말하거라 아르갈, 하나뿐인 가족끼리 무엇 하러 서로 존칭을 쓰느냐. 편히 지내야지.”
“그치 큰 오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예전에는 무슨 고집인지는 몰라도 과거 나는 아르델을 존경했고, 존칭을 쓰며 형님이라 불렀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이야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알겠어.”
“네가 웬일로? 아무튼, 혼담이 있다고 들었지만, 굳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싫으면 싫다고 거부해라, 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막을 테니.”
“그럼 고맙지.”
어차피 혼담은 깨질 예정이었지만, 굳이 돕는다는데 필요 없다고 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 출발할 거냐? 아버지야 철두철미하니 편지를 받자마자 마차를 준비해 놓았다고 한다. 간다면 바로 갈 수 있고, 하루 이틀 정도야 미룬다면 미룰 수도 있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지금 출발할게.”
“으응? 오빠, 바로 가게?”
아리엘이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바구니 안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간식이 잔뜩 들어있었다.
“같이 간식도 먹고 가 오빠!”
“아리엘 너는 항상 간식만 먹어서 문제다. 식사를 해야 제대로 자라나고 살도 안 찌지 그래서야 훌륭한 영애가 되겠느냐?”
“잔소리 싫어!”
“그만 내려놓고, 아르갈, 식사는 하고 가는 게 어떠냐?”
“바로 갈 생각이라서.”
입맛이 없다.
광증에 시달리는 불사자의 저주보다는 낫다지만, 부작용이 존재했다.
어차피 죽지도 않는 몸이니 수면욕, 식욕 같은 게 상당히 경감된다.
죽지 않으려고 먹고 자는 건데, 안 죽는데 뭣 하러 그러는가.
그런데도 어느 정도 자고 먹지 않으면 사람의 몰골이 기괴하게 바뀌니 적당히 유지는 해야겠지만.
“빠르게 도착해서 카리스 자작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도 방법이지. 네 뜻은 알겠다.”
아르델은 뭐든 상관없다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를 걸어 나갔다.
물론 아리엘의 간식이 잔뜩 담긴 바구니는 한 손에 압수한 체다.
졸지에 간식을 빼앗긴 아리엘이 급히 쫓아가고 나서야 나는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무언가 채워지다 텅 비어버린 느낌.
이 공허함이 너무나도 익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