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블린은 최하급 마물이다.
따져본다면 성인 남자가 중무장했을 때 1대1로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수준.
그렇기에 처음 고블린이 나타났다 해서 분위기가 달라지진 않았다.
마치 흥미로운 것을 본 기분.
그리고 난 이걸 보고 도망친 걸로 기억한다.
예전의 나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와중, 무언가 이상한 걸 느꼈다.
“왜….”
정말 기이하고도 친숙했다.
대악마와 계약했을 때.
그리고 마왕과 마주할 때.
아주 진하게, 아주 더럽게도 느껴지는 그런 감각이.
“마기를 지니고 있는 거지.”
그리 중얼거렸을 때였다.
고작 해봐야 미지한 마물에 불과한 고블린이 가지고 있을 법한 기운이 아니다.
영애는 나의 말에 잠시 고개를 뒤돌더니 천천히 검을 꺼내 들었다.
어찌 되건 마물은 마물.
베어서 죽여야 하는 것.
이 뒤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때의 나는 뒤도 안 보고 도망갔고, 그 뒤에는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됐는지도 모른다.
...진짜로 과거의 나에게 진지한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결과적으론 영애는 한쪽 눈을 잃는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도망친 뒤에 더 많은 마물의 습격이 있는지, 아니면 마기를 지닌 저 고블린이 너무 강했다든지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위기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나도 거의 홀몸에 가깝다.
불사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대악마와의 계약, 죽지 않는 목숨을 걸고 시행하는 흑마법이 있어서 마왕군 간부의 지위에 오른 것이지, 지금 그것이 없다면 사실상 일반인에 가까운 실력이다.
그냥 죽지 않을 뿐이지.
- 끼에에엑!
“큿!”
라엘리는 순식간에 나아간 손톱을 겨우 검으로 쳐내었다.
일반적인 고블린의 속도가 아니다.
하급 마족에 준할 정도라 할 수 있었다.
하급 마족도 기사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긴 하다.
그러나 라엘리는 아직 싹을 틔우는 씨앗.
기사에 준하기는커녕, 일반적인 생도 수준에 불과하다.
-키에엑!
“으읏!”
고블린의 맹렬한 공격에 라엘리는 용맹하게 맞서 싸웠지만, 실력이 부족했다.
게다가 뒤에 있는 내가 신경 쓰여서 그런지 한 눈까지 팔고 있었다.
온전히 싸움에 임하더라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약점을 드러내는 건 치명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게다가 단순히 눈 한쪽이 날아가는 정도가 아닌, 목숨이 위험해 보였다.
고블린의 손톱이 치명적인 방향으로 뻗어갔다.
라엘리는 그걸 막거나 피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원래라면 방관할 생각이었다.
한쪽 눈을 잃거나, 거기에 대응하는 신체 부위에 손상이 와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이른 시점에 죽도록 놔두는 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지금도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마당에, 원래 죽지 않았던 인물이 죽는 건 상상하지도 못할 결과를 나올 것이었다.
그렇기에 손을 뻗었다.
푸욱-!
고블린의 손톱이 여린 신체를 파고든다.
강렬한 선혈이 시야를 흩뿌리고, 나는 조용히 고통을 삼킨다.
광증은 이성을 삼켰지만, 고통마저도 짓이겨 없앴다.
평생을 무감각으로 살아온 나에게 찾아온 강렬한 통증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라엘리는 경악하며 외쳤다.
“아르갈…!”
“정신 차려라!”
정신을 차린 라일리는 고블린이 잠시 나에게 붙잡혔을 틈을 타 검을 휘둘렀다.
아무리 마기를 품은 마물이라도 목이 잘리면 죽는 건 매한가지.
나의 난입을 예상하지 못한 고블린은 그대로 검을 맞고 죽었다.
-댕그랑.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공황에 빠진 라엘리는 그대로 검을 내팽개치고 주저앉았다.
그녀의 맹렬한 두 시선은 커다란 구멍을 내고선 피를 흘리는 내 손에 가 있었다.
복잡한 감정이 얽혀있었으나, 우선은 상처부터 신경 쓰고 싶었는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나는 그걸 쳐 내었다.
착-
“만지지 마라.”
“아….”
제대로 된 지식도 없이 상처를 만지러 들면, 덧나거나 곪아버리는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막고선 치료를 위해 카리스 자작의 영지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러던 와중, 그녀의 한 마디에 고개를 돌렸다.
“미안…. 해요.”
미안하다라.
의아하다.
여기에 미안할 필요가 있겠는가?
정말로 미안해야 할 사람은 과거에 그대의 가문을 씨 몰살했었던 내가 아닌가?
불사자의 죽음보다도 무가치한 건 불사자의 상처다.
이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닙니다. 영애.”
하늘이 어둡다.
구름이 태양을 가렸고, 숲이 희미하게 내려온 빛을 덮었다.
“오늘은 불행한 날이었을 뿐입니다.”
본디 그녀는 한쪽 눈을 잃고 평생을 가문 내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살아갔다.
그런 운명이 뒤틀렸다.
그녀는 행운을 맞이했으리라.
의도치 않게.
“누구의 의도와 상관없이.”
라엘리는 그 말에 두 눈동자가 커지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잘 들리지도 않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정말….”
나는 이미 한번 말했었다.
미안할 필요 없다고.
굳이 다시 말할 필요성은 못 느꼈다.
몸을 돌려 원래 향하려 했던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
라엘리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르갈을 몬스터가 출몰하는 숲속까지 이끄는 건 성공했다.
그러나 나타난 몬스터는 강했다.
고작 해봐야 고블린이었지만, 고블린은 너무나도 잽싸고 강했다.
게다가 아르갈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보다 침착했다.
오히려 고블린을 보고 분석을 했을 정도로.
“왜…. 마기를 지니고 있는 거지?”
마기(魔氣)
그 한 마디가 라엘리에게 벼락처럼 덮쳐왔다.
마기를 지니게 된 몬스터는 마족에 준하는 강함을 지니게 된다.
고작 기사생도 수준의 라엘리가 이겨낼 수 없는 상대.
검의 움직임이, 반응이 점차 지치고 느려지는 반면에, 점점 공격하는 속도가 빨라지는 고블린의 모습에 그녀는 점점 급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렇게 죽는 건가? 아니, 그렇게 되면 아르갈 공자는?’
고개를 돌려 아르갈에게 어서 도망치라는 소리를 치려던 순간이었다.
동작이 무너진 탓에 빈틈을 노린 고블린이 급소를 노려 손톱을 뻗어왔고, 라엘리는 도저히 반응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닿기 직전에 눈을 질끈 감는다.
푸욱!
너무나도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소리.
이대로 죽으리라 생각한 라엘리는 어떠한 고통도, 아픔도 없음을 알고선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앞을 가로막았던 건 어떠한 수행의 흔적도 없는 매끈한 손.
그녀보다도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던 손은 끔찍하게도 고블린의 손톱에 꿰뚫려 반쯤 찢어져 있었다.
선홍색 피가 그녀와 아르갈을 뒤덮었고, 라엘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아르갈…!”
“정신 차려라!”
그는 아프지도 않은지 단호히 외쳤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
아직 부족하더라도 곧 기사의 정점을 찍을 재능을 지녔던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온 정신을 집중한다.
끝을 모아 휘두른 검.
검의 궤적은 무척이나 맑고 깨끗했다.
고블린의 목이 그대로 베어내는 동시에, 라엘리는 무언가 한 걸음 나아갔다는 성취를 느낀다.
방금까지도 그녀의 목숨을 위협했던 고블린은 한낱 시체 쪼가리가 됐다.
그리고 더없이 믿을 수 없던 사실은 그렇게 유약하고, 겁 많던 공자가 그녀를 위해 제 한 손을 희생했다는 점이었다.
아르갈은 반쯤 망가진 손을 바라보며 두 눈을 찌푸렸다.
피는 아직도 흘러나왔고, 상처 속에는 뼈까지 보일 지경이다.
어떻게 처치를 해야 할까, 우선 천으로 묶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그런 고민 끝에 손을 내뻗으려던 참에 아르갈은 그녀의 손을 쳐 내었다.
“만지지 마라.”
그 살벌한 시선에 라엘리는 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져 왔다.
잘못을 지었지만 이를 갚아낼 방법이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끔찍한 상처를 치료할 방법이 없다.
이 모든 게 제 실수와 잘못으로 비롯된 결과.
“미안…. 해요.”
그녀는 잘 벌어지지 않는 두 입술을 열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기를 짜내며 사과를 했다.
그 사과를 받아들여 주었던 걸까? 아르갈은 굳은 표정을 조금이라도 풀고,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아닙니다. 영애.”
넝마가 된 손이 그녀의 심정을 뒤흔든다는 걸 알았는지 손을 뒤로 숨긴 듯 보였다.
차분하게 바뀐 두 시선은 라엘리의 중심을 잃은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
그제야 라엘리는 침착을 되찾았다.
온전해진 이성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되짚을 수 있었고,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더 없는 죄를 저질렀고, 더없는 은혜를 입었다.’
게다가 아르갈은 어느 정도 정황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사실 수상한 점이 없던 건 아니다.
난데없이 어두운 숲속으로 끌고 간 건 바로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어떤 원망 없이 그리 말했다.
“오늘은 불행한 날이었을 뿐입니다.”
“누구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마지막 말이 라엘리의 가슴을 찔렀다.
도저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더없이 총명했다.
‘누구의 의도와 상관없이’
설마 마기가 깃든 고블린이 튀어나올 것이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거기에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는 뜻이었다.
너무나도 자애로웠다.
이제야 한 꺼풀 바뀐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는 남을 위해 목숨을 걸 수도 있으며, 그럴 만한 용기도 지니고 있었다.
겉으로 센 척하는 게 아니라 내면의 강인함을 지닌 자.
그런 이가 눈앞에 있었다.
그렇기에 라엘리는 더없이 후회스러웠다.
그런 이와 혼담을 두고 있었건만, 자처하여 깨려 하다니.
이를 되돌릴 수 있는가, 아니 한 번의 기회라도 주어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 아래에 한 마디라도 더.
사과했다.
“미안해요…. 정말….”
**
일이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카리스 가로 돌아가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자마자 성이 벌컥 뒤집힌 건 오래가지 않았다.
꽤 큰 사고가 벌어지긴 했으니까.
성 내에 거주하고 있는 성직자가 즉시 달려와 내 상처를 보살폈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뒤덮인 늙은 성직자는 나의 상처를 보며 침음했다.
“보통 정신력이 아니구려…. 살점이 헤집어진 끔찍한 상처일지언데.”
주교, 추기경급 사제가 아닌 한 이 정도의 상처는 도저히 한 번에 치료할 수 없었다.
약식이나마 고통을 줄여주고 최소한 찢어진 살점을 얼기설기 잇고, 거기에 붕대를 감는 여러 과정을 거치고서 응급처치를 할 수 있었다.
좀 심한 상처인데다 마물의 마기가 조금 남아서 그런 건지, 상처가 한 번씩 쑤시긴 했다.
확실히 내가 가지고 있던 광증이 온갖 통증을 경감시켜 주기는 했다.
과거의 나는 손이 꿰뚫리기는커녕, 두 팔이 떨어지고 전신이 날붙이에 넝마가 되어 심장이 꿰뚫렸어도 멀쩡히 서 있기는 했으니까.
그렇지만 이 광증이 사라졌다는 것에 어떠한 아쉬움을 지니지 않았다.
너무나 고요한 이 마음이 오히려 적응이 안 될 지경이었으나, 그런데도 편안했기에.
내가 소중했다고 여겼던 이를 죽였을 때 느꼈던 한편의 불편함이 없기에.
그렇기에 만족스러웠다.
잠시 침상에서 쉬고 있을 때 카리스 자작이 찾아왔다.
그는 붕대를 감고 있던 내 손을 바라보더니 허리를 깊게 숙였다.
실로 한 가문의 가주로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미안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모습이었다.
한 손은 가슴에 어깨를 약간 내리고, 다른 한 손은 뒤로 뻗는다.
그건 기사가 다른 이에게 경의를 표하는 자세였다.
“그리고 고맙다. 내 딸아이를 구해주었구나.”
다시 말하지만 아주 별것 아닌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를 구하긴 했으나, 죽어서 생길 변수를 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기에.
그로서 생긴 상처는 더없이 가벼운 관통상 하나.
그 정도 감사 인사를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굳이 주는 걸 받아먹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귀족이 저 정도의 감사를 표했다면, 그만큼 고마움의 표시를 줄 것이 분명하기에.
“아닙니다. 자작님.”
수없이 많은 귀족을 보았고, 그 귀족들을 죽여보았다.
그들이 지닌 매끄러운 혀로 얼마나 많은 이득을 챙겨가는지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굳이 쓰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응당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상처는 충분히 경과를 두고 치료하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치료비 달라’를 길게 표현한 문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