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 자작에게 아주 흡족한 대접을 받았다.
곧 나의 가문으로 돌아갈 시간이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려는 작정이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누리는 호사는 그리 흔치는 않았다.
어쩌면 내가 강한 힘을 가지고도 권력과 부를 쥐기보다는 광기의 삶을 살아서 더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걸핏하면 죽이고, 싸우고, 무한한 목숨을 걸어온 삶.
그렇기에 조금 더 체감되었다.
너무나도 당연했던 저주들이 사라진 지금.
사소한 모든 것들이 만족스럽게 바뀌었다.
붕대가 칭칭 감긴 왼손을 바라본다.
이건 우연인 걸까.
내가 흑마법을 활용했던 방법 중, 가장 많이 썼던 방법이다.
제례용 단검을 제 손을 찔러 흑마법을 쓰는 것이다.
이른바 ‘자기희생’.
그리고 불사자인 내가 가장 애용하는 방식이었다.
보통의 흑마법사는 그런 자기희생을 쓰면 쓸수록 급속도로 죽음에 가까워진다.
제 수명을 쓰니 당연한 결과다.
그렇지만 나는 불사라는 무한한 바다를 담고 있었다.
거기서 바구니 하나로 물을 퍼내 봐야 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졔레용 단검으로 찌르는 부위는 왼손.
잘 안 쓰는 손을 찌르는 게 당연하다. 찌를 때마다 상처가 나고 그게 바로 치료되는 게 아니니 오른손잡이라면 왼손을, 왼손잡이라면 그 반대쪽을 찌른다.
“공교롭네.”
익숙했다.
붕대로 감싸 먹먹한 왼손의 감각.
상처에서 오는 저릿한 느낌.
마침 고블린에게 찔린 부위도 왼손이었다.
- 벌컥.
그런 생각 하고 있을 즘에 문을 연 이가 있었다.
라엘리.
좀 더 아름답게 꾸민 그녀는 망설임이 담긴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이전과 달리 귀족 영애 티가 났다.
여전히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은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절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르갈 공자.”
작게 미소를 지은 라엘리는 나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굳이 그녀를 위해 한 일이 아니지만, 이 성내에 머무는 모두에게 감사를 받는 상황 자체가.
창문을 닦던 메이드나, 무거운 짐을 들던 하인들 하나하나 ‘아가씨를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
나는 과거에 감사를 받아왔던 적이 있는가.
증오와 원망, 절망의 목소리만 들어왔다.
이 간질거리는 기분은 아마 익숙지 않아서 그런 건가?
“다시 말했듯, 당연히 해야 할….”
“그게 어찌하여 당연한 일이겠습니까.”
매번 그렇듯 똑같은 대답을 하려는 도중에 말을 끊고 들어왔다.
라엘리의 두 눈에 보이는 기이한 열의.
무언가의 의지가 느껴진다.
말뿐인 용서가 아닌, 진정 용서를 받기 위한 그녀의 용기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기사의 충성 맹세처럼, 라엘리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한다.
“당신에게 저지른 크나큰 잘못이 있으니.”
그녀는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당신을 기만하고, 고블린이 나오는 숲에 의도적으로 데려갔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녀가 날 시험하고자, 숲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 그녀의 입에서 정말 죄를 고백할 줄은 몰랐지만.
나는 고민에 빠졌다.
굳이 사과를 받아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악의가 있었다고 남들에게 밝히면, 카리스 자작은 이 일을 덮기 위해 더 많은 대가를 나에게 치러줄 것이다.
...그렇지만 문득 과거 그녀를 죽였던 나 자신이 떠올랐다.
없어져 버린 일이지만, 훨씬 더 큰 잘못을 저지른 건 내가 아닐까.
짧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그러니 부디 용서를….”
“그러지요.”
“정말, 입니까?”
“용서해 주겠습니다. 그리고 고블린에게 마기가 깃든 건 어쩔 수 없는 불행이기도 하지요.”
용서를 해 주겠다는 내 말에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대의 용서와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반드시 갚아 드리겠노라고 맹세합니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하여 그녀의 심정을 완벽히 뒤바뀐 것으로 보였다.
무언가…. 더 커다란 변수가 생겨난 셈.
날 바라보는 집요한 시선이, 단순 감사나 은인을 바라보는 태도라 보기는 힘들었다.
그 감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뒤엎기에는 꽤 늦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떠나시는 시기에 다시 뵙도록 하지요.”
“...그러지요 라엘리 영애.”
“그냥, 편하게 부르시지요.”
이상한 부탁이었지만, 과한 예법을 생략해 달라는 것 정도야.
애초에 동갑이기도 했고.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그래, 라엘리.”
“으, 응.”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금방 몸을 돌리곤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언 듯 보인 라엘리의 얼굴은 아주 약간이나마 붉게 보였었다.
이해를 할 수 없기에 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빨리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다.
**
라엘리는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의 심정을 정리했고, 작금의 상황을 제대로 자기 객관화를 했다.
첫 번째, 그녀는 자신의 혼담 상대를 시험했었고.
두 번째, 그로 인하여 아르갈은 그녀를 구하려다 크게 다쳤다.
그리하여 아르갈은 단 하나의 티끌 없이 완벽한 신랑감이라는 게 증명되었고.
동시에 그녀는 아르갈을 다치게 한 주범이 됐다는 아주 완벽한 비극이 일어났다.
애당초 아르갈은 누가 보더라도 꿇릴 게 없는 혼담 상대였다.
생긴 것도 잘 생겼고, 성격도 좋은 편이었으며, 어떤 사건 사고 이력도 없었다.
그나마 아쉬운 점은 가문이 한미하다는 점이었지만, 좋은 가문의 망나니를 만나는 것보다는 100배 나았다.
카리스 자작 또한 그걸 알기에 과욕을 부리지 않고 혼담을 추진 한 것이다.
유독 영애이면서 기사도 정신이 가득 찬 라엘리였기에 유약하다는 점에 감점을 많이 한 것이었지, 아르갈은 어지간한 영애라면 붙잡아야 할 상대였다.
그런 와중에 단점이라 생각했던 유약함 속에 남을 위해 제 목숨까지 거는 용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라엘리는 아르갈의 모든 것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침실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아르갈의 모습을 본 그녀의 심장이 저절로 콩닥콩닥한다.
마음은 알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다.
우선 그에게 용서를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형식적으로 받아주었을 뿐이라 생각한다.
그런 짓을 하고도 단 한마디의 말로 용서받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장원 내의 기사를 찾아갔다.
그녀에게 가장 가까이 위치한 호위 기사들은 일전의 일로 죄다 중징계를 당했기에 찾아가 볼 수 없었다.
그나마 얼굴이 익숙한 이를 찾아갔다.
“한스, 좋아하는 상대에게 잘못을 빌어야 할 때 어떻게 해?”
“예?”
난데없이 폭탄을 맞아버린 한스는 벙쪄버린 표정을 지었지만, 한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영애의 질문의 본의에 대해 고민을 했다.
당연하지만 지금 혼란스러운 사태에 대하여 한스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혼담을 위해서 찾아온 공자가 다쳤다는 사실이 성 내에 퍼졌으니까.
한스는 조언을 위해 내심 고민을 하다 대답을 내놓았다.
물론 문제가 하나 있다면 한스는 평생 남정네들과 부대끼고 지내며 여자의 토씨조차 모르는 숙맥이라는 점이었다.
그런 것 치고는 영애와 잘만 대화하고 있지만, 그거야 기사들과 무척이나 편히 지내는 라엘리가 이상한 거고.
암만 불편한 상대라도 같이 흙바닥을 구르면 친해지는 법인데, 검을 수련한답시고 똑같이 구르는 영애가 불편하겠는가.
그러니 한스는 자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지 예시를 들었다.
영애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도저히 모르는 문제이니 그랬다.
“저라면 자신의 잘못을 온전히 밝히고, 저지른 잘못만큼 갚아 주겠다고 맹세 할 겁니다.”
“그거 좋은데?”
“예, 그렇지만 아가씨는 입장이 다르시니, 방법을 달리…. 아가씨?”
한스는 금방 사라져 뒤꽁무니만 남기며 뛰어가는 아가씨를 바라보며 머리를 긁었다.
별난 아가씨였지만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별일 없겠거니 하며 제 할 일이나 했다.
라엘리는 아르갈의 침실 앞에서 심호흡했다.
그녀는 다른 영애들처럼 가식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당당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밝히고 용서받는 것이 옳았다.
그렇다고 똑같이 사과만 한다면 아르갈에게 말뿐만인 사과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의 심성이야 착하니 별 일없이 넘어가 주겠지만, 결국 혼담이 좋게 마무리되진 않을 거란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니 당당히 철면피를 쓰고 나선다.
잘못을 밝히고, 그 잘못에 대하여 갚겠다고 나선다.
라엘리는 한쪽 무릎을 꿇고 기사의 맹세를 했다.
영애로써 한껏 꾸며진 소녀가 기사의 검을 차고 기사의 맹세를 하니 언뜻 보면 우스꽝스럽겠지만, 라엘리는 더 없이 진실이었다.
네가 목숨을 걸어주었던 것처럼.
그 한 번의 목숨을 너에게 바치느라.
언제가 되었든.
그리하여 흔들리지 않은 맹세를 하였다.
아르갈은 얼떨떨해하며 용서를 해 주었고 그녀는 만족했다.
마음을 다해 나서니 그 또한 진정한 말을 입에 담은 것이다.
그리고 기쁨과 함께 쪽팔림은 덤이었다.
라엘리는 그날 하루 동안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게 됐다.
워낙 손가락이 오그라드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붉은 홍당무가 된 영애를 바라보며 속닥거리는 기사들의 모습이 더해지자 그녀는 어디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
“아가씨께서 고개를 못 드시는군.”
“한스한테 들었는데, 오늘 공자께 고백이라도 한 모양….”
방금 아르갈에게 했던 맹세에 더불어 또 하나의 맹세를 라엘리는 했다.
“한스, 넌 뒤졌어.”
그런 살벌한 중얼거림을 들은 두 기사는 한스의 명복을 빌기로 했다.
아마, 오늘 병가를 내는 기사가 하나 생길 것 같았다.
**
돌아가는 날이 됐다.
카리스 자작은 치료비를 아주 두둑이 지불했다.
그 증거가 마차에 쌓인 막대한 재물.
영지 재정에 꽤 많은 도움이 될 게 분명한 재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굳이 영지 재정에 보탤 필요 없이, 내가 챙기더라도 상관없는 개인 자산이기도 했다.
돈이라는 건 있으면 있을수록 좋다.
더없이 흡족한 기분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동안 편히 지냈습니다. 자작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무얼, 그대가 해 준 일이 더 크지. 나는 딸아이와 자네와의 관계가 걱정일 뿐이네.”
자작은 내 손을 붙잡으며 무언가의 눈치를 주었다.
혼담에 대한 확언이 필요한 건가?
이 정도의 정성이 들어갔다면 말치레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누군가와 결혼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약혼 정도는 할 수 있었고, 결혼할 시기는 언제든 늦출 수 있었다.
어차피 모든 일은 그 전에 끝날 테니.
“괜찮습니다. 어제 대화를 나누며 서로 편히 대하기로 했으니까요.”
“한시름을 놓을 수 있겠구나, 그럼….”
라엘리가 그 뒤를 따른다.
자작의 반밖에 안 되는 키와 분홍빛 머리카락을 지녔으나, 붉게 타오르는 두 눈은 무척이나 닮았다.
그녀는 조용히 내 앞에 서서 말했다.
“아카데미에서 만나자.”
아카데미.
조금은 기이했다.
본디 아카데미는 귀족가 자제라면 모두가 가는 곳.
최소한의 자금조차 없는 몰락 귀족이거나, 답이 없는 망나니가 아니라면 반쯤 필수적으로 가는 곳이 아카데미였다.
또한 아카데미에는 용사와 그녀의 동료들이 필수적으로 입학하는 곳이다.
회귀 전 그녀와 나는 둘 다 아카데미를 가지 않았다.
나야 납치되어 불사자가 되었고, 그녀는 한쪽 눈을 잃고 성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둘 모두가 가지 않았던 곳을 간다라.
“그리된다면.”
짧게 한 마디를 남겼다.
지금도 확신은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그들에게 납치가 될 터이니.
과거와 다른 대처를 하겠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작별 인사는 마무리 됐고 마차에 탑승했다.
캐론은 그 뒤를 따라서 마차에 들어왔고, 곧 마부가 줄을 내려쳐서 출발했다.
마차가 흔들리자 한쪽 손이 저릿한 것을 느꼈다.
당연했지만 내 손은 여전히 다쳐서 다 낫지 않은 상태였다.
불사자라고 해서 초월적인 재생력을 가진 게 아니라, 오직 죽지만 않을 뿐.
대신, 거의 죽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거동할 수 있는 정도로 돌아오는 건 빨랐다.
붕대가 감긴 손을 바라보고 있자 캐론이 물었다.
“붕대를 갈아드릴까요?”
“아니, 그냥 저릿해서.”
“확인해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아.”
별것 아니었다.
하루 이틀 만에 나을 상처도 아니고, 할 수 있는 치료는 충분히 받았다.
이 이상 해봐야 과도하다.
그렇게 앉아있기를 잠시.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캐론이 마차 내부에 합승했던가? 원래 서먹한 사이였던가?
과거의 기억은 광기에 뭉개져 명확한 것 하나 없었다.
그녀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캐론의 상태는 전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영지로 돌아오는 길에 찾아오는 그들이 문제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