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한 가문의 둘째 공자 주제에, 확실히 무언가 있군.]
어중간한 직위에 있는 자였다면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는 고위 집행관.
머리에 들어있는 사고방식이란, 일반인의 범주를 벗어났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해야 할 첫 번째 순위.
왕가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
거기에 뭘 더 하고, 덜 하는 건 왕가를 위한 방향이 아니라면 불가하다.
그렇기에 단테는 더욱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다.
일개 공자가 집행부의 방식을 알고 있으니.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크, 크윽!”
“으어억!”
으드득!
저항하고 있던 기사들을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짓누른 단테는 날 직시했다.
시선 하나만으로 강력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어지간한 초월자도 척살할 수 있는 용사와 맞싸우고, 세계를 멸망시킨 마왕과도 싸워봤다.
초월자도 아닌 고위 집행관의 압박감이란, 머리 위에 내려앉은 깃털이다.
[너는 대체 뭐지? 마법사의 힘도, 기사의 힘도, 하다못해 다른 신비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 압박을 견뎌낼 수 있는가.]
그는 실험이라도 해보려는 듯, 기사들을 압박하자 곧장 반응이 왔다.
안 그래도 그림자에 짓눌리던 와중인데, 숨 막히는 압박감까지 오자 혼절할 지경이다.
그렇기에 더욱 이상해 보이겠지.
기사도 못 버티는 살기에 반응조차 하지 않았으니.
그러니 대답 해 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런 힘 없는.
불사자일 뿐.
“그러니 네가 해야 할 일을 하여라, 집행관.”
잔뜩 굳어있는 그의 표정은, 오히려 나에게 압박받고 있는 모양새였다.
내 말이 옳다는 걸 알면서도, 꺼림칙하기에 하고 싶지 않은.
그는 결국 수긍했다.
여기서 그가 기사들과 캐론을 전부 죽이겠다 작정했다면, 나도 기존의 계획을 틀었겠지.
[그래, 내 할 일을 하지.]
기사들을 뒤덮던 그림자가 흩어진다.
그림자의 힘이 옅어지자 단테의 전신을 뒤덮던 그림자도 약간이나마 사라졌다.
전신에 쓰인 문신.
각종 기괴한 장신구.
주술사를 상징하는 형태를 뒤덮고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그의 나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가자꾸나.”
집행관이 보여준 모습은 무척이나 의외였다.
제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목소리 또한 변조 없이 내놓았다.
은밀함이 가장 중요한 집행관답지 않은 행동이다.
그가 손짓하자 바닥부터 올라오는 강력한 힘을 느낀다.
모습을 드러낸 정확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본인의 정체를 숨길 여유조차 남기지 않고, 날 완벽히 구속하기 위함이다.
거의 봉인에 준하는 정도.
이것만큼은 흑마법을 동원하는 게 아니면 막을 수 없는 강력한 주술이다.
아니,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약간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지만, 어찌 되건 의도한 데로 됐으니 다행이라 할지.
그러던 와중에도 날 지키기 위해서 뼈가 으스러진 와중에도 움직이려는 기사가 보였기에 말했다.
“기사들은 가만히 있어라, 고위 집행관은 너희가 감당할 수 없다.”
집행관이 무언가 집중하고 있으니 가장 취약할 때라 생각하고 공격할 모양이었지만, 너희 그러다가 다 죽는다.
고작 그런 거에 죽을 놈이었으면, 진작 대악마와 계약했던 과거의 내가 다섯 번씩이나 죽으면서 이놈을 죽였겠나.
확실히 몸소 앞서서 집행관의 무서움을 알고 있던 기사들은 만용을 부리지 않았다.
물론,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라도 떨어진다면 달려들 기세였다.
그런데도.
내게 다가온 이가 있었으니.
“도련님.”
아까 까지만 해도 그림자에 목이 졸려서 그런지,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집정관이 온 신경을 다하여 날 그림자에 봉인하려는 상황인지라, 잠시나마 대화가 가능한 순간이었다.
“...왜 울고 있지.”
캐론의 두 눈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광증으로 인하여 감정이 무감각했어도,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알지 못하게 됐어도,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녀는 날 위해서 슬퍼하고 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의심하고 있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보여준 모습은, 그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도저히, 그 유약한.
아르갈 브리텐의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강단 없고, 개미 한 마리 못 죽인다는 사실쯤이야, 캐론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아뇨, 도련님은 도련님이 맞아요. 달라졌을 뿐이죠.”
“...왜 그렇게 생각했지.”
“제가 아는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절 구하려 하지 않았겠죠.”
“사람이 남을 구할 수도 있다.”
마치 용사처럼 말이다.
그러나 캐론의 질문이, 송곳처럼 나를 찔렀다.
“그러나 지금의 도련님은 그게 아니잖아요?”
모든 것을 죽여왔다.
내 삶은 누군가를 돕기보다는, 살육을 반복해 온 삶이다.
캐론의 질문에 내 마음이 진솔히 답한다.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결코 누군갈 구할 일은 없었다.
나는 왜 캐론을 구했는가.
고작 해봐야 메이드.
그녀가 없어진다 해도 문제가 되는 건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구하려고 해서 계획에 지장이 갔으면 갔지.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구하고 싶었다.
내 마음이, 모든 것을 죽이고자 했던 그 마음이.
누굴 구하고자 한 것이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 건가.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
집어삼켜져서 사라졌던 것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다.
너무나도 사소했고.
별것 아닌.
애정 하나가.
혼란 속에서 그림자가 점차 날 삼켜가고 있음을 느낀다.
남은 시간이 길지는 않다.
“...돌아오겠다 캐론.”
“꼭, 돌아오세요. 도련님. 안 오시면, 찾아갈 거니까요.”
“그럴 필요는 없을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림자가 내 시야를 완벽히 가렸다.
**
차가운 바닥이다.
아니 엄연히 따지면 익숙한 바닥이 아닐까.
내 삶의 절반은 푹신한 침대가 아닌 딱딱하고도 거친 밑바닥이었다.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키며 천천히 이곳을 살폈다.
흐릿한 기억에서, 그나마 명확히 남아있는 장면.
신기할 정도로 친숙할 지경이다.
옷은 벌써 갈아입혀졌는지, 무채색의 가운이 몸을 덮고 있다.
부스스한 머리를 내려 앉히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이곳에서 몇 년 동안 있었던가.
5년? 6년?
광증 때문에 무엇 하나 정확한 기억이 없었다.
천천히 떠오르지 않는 것들을 더듬어가며, 이곳에서 뭘 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나씩 생각해내던 와중이다.
터벅, 터벅.
이 지하실의 감옥으로 찾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나의 사고를 정지시켰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언 듯 보이는 실루엣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상대였다.
처음은 분노였다.
내 평생을 불사의 삶을 살게 했던 상대를, 회귀를 통해 수십 년이란 시간을 넘어 다시 만나다니.
다시 마주하는 순간, 분노에 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다음은 희열이었다.
또 한 번 더.
그놈을 죽일 수 있으니까.
다시 생각 해보더라도 너무 깔끔히 죽었다.
나와 같은 고통은 받지 못할지언정, 그 비슷한 정도는 가야 할 텐데.
그런 기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사 가우디움.
불사의 실험에 성공하고 나를 노예 겸, 고기 방패 겸, 실험체로 써먹었던 자.
불사자는 아주 유용한 노예다.
함부로 다뤄도 죽지 않았고.
어떤 위험한 전투라도 강력한 공격을 맞아줄 수 있으며.
죽지 않기에 실험으로도 쓰기 좋았다.
증오를 곱씹는다.
날 끌고 가며 부작용 없는 불사성을 이룰 수 있을지 실험을 거듭하던 가우디움은 결국 내 손에 철저히 찢겨 죽었으니.
이번에도 그 결과는 같으면서도, 더욱 이르게 다가올 거다.
“네가 새로 들어온 실험체인가?”
전형적인 흑마법사의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눈알을 굴리며 날 살폈다.
사람을 보는 시선이 아닌, 새로 들어온 고기의 품질을 살피는 모습이다.
“이번에는 얌전한 놈이라서 좋군.”
이런 상황에서도 가만히 있던 게 마음에 들었는지 낄낄 웃으며 감옥의 문을 열었다.
감옥의 문이 열리고 면대면으로 마주한 상황에서도 별 행동을 보이지 않으니 가우디움은 흡족해한다.
처음은 가만히 있다가 이럴 때 급습하는 실험체도 다수 있었다.
저절로 떠오른 기억이기도 하다.
불사의 저주를 받고, 그의 노예가 되면서 조교와 비슷한 위치로 나 역시 실험체를 다뤘으니.
당연하게도 평범한 사람에서 실험체의 위치로 떨어진 이들의 저항은 치열했다.
“나는 상벌이 명확한 사람이라네, 말 잘 들으면 소소하게나마 보상을, 반항하면 벌을 주지. 좋은 예시 하나 보여줄까?”
감옥 밖으로 나가게 한 다음 건너편의 감옥을 보여주었다.
그 옆에는 어떤 소녀가 보였다.
고문이라도 받았는지 어느 한 곳이라도 성한 부위가 없었다.
기억에는 없었다.
너무 일찍 죽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저 지경이라면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일어나거라.”
그러자 소녀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상태는 엉망이었지만 두 눈에는 기세가 살아있었다.
정신력이 강한 건지, 아니면 고집이 센 건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목에 차고 있는 죄수 목걸이는 평범하지 않은 형태인 것을 본다면, 아마 마법사나 사제와 같은 특수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그걸 차단하는 용도일 거로 추정된다.
“날 따를 생각은 있는고?”
“하, 인의를 져버린 것들이, 지옥에나 떨어져라.”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저 소녀 또한 귀족이거나, 사제와 같은 특정 직위에 있을 거란 점이다.
그러지 않는 한 저런 태도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귀족이라면 노예가 될 수 없다는 자긍심에.
사제라면 흑마법사에 굴복하여 신앙을 저버릴 수 없으므로.
“흐흐, 네 뜻이 그렇다면야.”
흑마법사는 무언가 주문을 외웠다.
고문 마법.
흑마법은 그 무엇보다도 영혼과 직결된 힘이었기에, 누군가를 끔찍한 고통에 몰아넣는 것 하나만은 극에 이르렀다.
1분, 아니 10초면 정신이 나가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흑마법이 발동하자 소녀는 간질에 걸린 사람처럼 발작하기 시작했다.
...저 정도라면 분명 사제일 것이다.
아무리 자긍심 높은 귀족이라도 고문마법은 이겨낼 수 없다.
광신에 이르러 신앙을 져버릴 바에는 죽어서 신에게 귀의하겠다는 사제들만이 버틸 수 있는 고문.
그렇기에 내가 기억하지 못할지도.
저러다 죽었을 테니.
“잘 보았나? 말만 잘 들으면 저런 고문을 받을 필요도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당장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필요한 물건을 얻고, 그를 죽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가만히 굳어있는 것에 겁이라도 먹었을 거라 지레짐작한 가우디움은 실실 웃으며 손짓으로 감옥에 되돌아가라 한다.
감옥에 들어가 있자 그는 금방 사라졌고, 오직 건너편에 고문마법으로 기절한 소녀의 인기척만이 느껴졌다.
여기서 나는 고민했다.
저 성직자를 살릴지 말지.
이름도 잘 모르는 이를 살린다는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꽤 어색한 사실이었지만, 그런데도 이득이 될 부분이 있었다.
나는 어찌 되건 흑마법을 체득하고 활용할 것이다.
그러나 흑마법은 한 번이라도 쓰면 영구히 흔적이 남는 극악의 힘.
최대한 늦게 활용하려고 지연하고 있긴 하지만, 한 번이라도 쓰는 순간 성직자나 용사라거나 신성과 관련된 이들은 내가 흑마법사라는 걸 알아볼 거다.
그렇기에 단 한 명이라도 성직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신성으로 마기를 뒤덮는다면 용사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면, 알아보기 힘들 테니까.
그러나, 흑마법사를 광적으로 혐오하는 성직자에게 도움을 받으려면, 최소한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은혜를 입혀야 했다.
그래서 일단 말을 걸어봤다.
“거기 괜찮나?”
“에구구…. 시발, 개같은 흑마법사 새끼, 내가 꼭 다 불살라버린다.”
“...”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