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씨, 고개를 처박아서 그런가, 입 다 돌아가겠네.”
“거기, 내 말 들리면 대답이라도 해 줄레?”
“흑마법사 앞에서 고개 숙인 배교자한테 할 말 없거든?”
말하는 거 보면 성직자가 맞기도…. 한 거 같은데.
어쨌건 정신력이 참 대단한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고문 마법 한 번에 일주일은 앓아눕고,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릴 텐데, 저 소녀는 대범히 욕이나 내뱉고 있었다.
말투는 저리 가벼워 보이더라도, 자질만큼은 좋을지도 모른다.
끈기와 인내 또한 재능이니까.
“...마음대로 생각해라, 그래서, 그러다가 죽을 생각은 아니겠지.”
“죽긴 누가 죽어? 나 아직 멀쩡하거든?”
“아니, 3일은 갈까? 제대로 먹은 것도 없지? 피골이 앙상하던데, 그 꼴로 고문 마법을 버틴다니 그건 대단하네.”
“흥이다.”
말을 더 이으려던 순간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분위기.
계단을 타고 가우디움이 내려왔다.
“먹거라.”
그는 나에게 하얀색 빵 하나를 던졌다.
말 잘 들으면 준다는 보상이 이런 것이겠지.
방금 구운 듯 따듯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빵이다.
그런다 해서 식욕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네 식사는 없다.”
그리고 여전히 반항하던 소녀에게 주어지는 음식은 없었다.
그녀가 귀하게 쓰일 만한 실험체라면 죽지 않게 관리를 하겠지만, 가우디움의 눈치를 보아서는 그 정도 가치는 없는 모양.
애당초 실험체를 꾸준히 가져와 주는 집행부가 있었으니, 고작 노예 하나에 신경 써줄 필요가 없던 거다.
그게 사제출신이더라도.
가우디움이 돌아가자 묵직해졌던 분위기가 사라졌다.
나는 못 한 말을 잇기보다는, 손에 들려있는 빵을 건너편으로 던져 주었다.
“먹어.”
“배교자가 주는 동정은 필요 없어.”
“그러다 정말 죽는다. 네 몸 상태는 네가 잘 알 텐데.”
“...”
철창 앞에 떨어진 흰색의 빵으로 내뻗는 손이 보인다.
그 손은 보는 내가 안타까울 정도로 앙상했다.
으적- 으적-
하얀 빵을 순식간에 씹어 삼킨 그녀는 몇 번 망설이는 듯했지만, 조용히.
나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한다.
“...고마워.”
이런 걸로 고마워할 필요는 없었다.
흰 빵을 씹건, 모래알을 씹어 삼키건 나에겐 별 차이도 없었다.
최소한의 외견을 유지하기 위해 뭐라도 먹긴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굶으면 죽을 수도 있는 소녀와 나하고 먹을 것의 가치는 달랐다.
간단한 통성명이나 한다.
성직자 하나 구하기로 했으니,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나는 아르갈, 네 이름은?”
“베시아.”
“죽을 생각이 아니면 어느 정도 흑마법사의 말을 들어라. 짧게나마 살아는 있어야지.”
“내가 그 족속들을 모르겠어? 어차피 버텨봐야…. 죽거나, 죽는 것보다 더 안 좋은 꼴을 당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차라리 죽고 말지.”
머릿속으로 시간 계산을 했다.
가우디움의 실험체로 오랫동안 머물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치밀어오르는 얼굴을 당장이라도 찢어 죽였다면 죽였지, 뭣 하러.
게다가 캐론에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그래놓고 한 달, 두 달 걸리면 그건 약속을 지킨 게 아니다.
최소 일주일.
일주일 안으로 복귀해 주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건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이니까.
“이틀, 아니 단 하루만 버티면 방법을 만들어주지.”
“생뚱맞은 소리를 하고 있네, 네가 뭐라고 하루 안에 방법을 만들어와? 어디 공작가 공자님이라도 되나 널 구하려고 소드마스터라도 강림하게?”
“거기에 준하는 상황이 생길 거다.”
“...뭐?”
내가 작정한다면 암브로시아의 본거지를 몰살은 못 해도 반파시킬 수 있었다.
왕국의 집행부도 아니고, 고작 흑마법사의 총본산 하나쯤이야 전력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원래라면 완전히 섬멸시킬 생각이었으나, 그러면 필연적으로 집행부와 싸워야 했고, 집행부도 죽이다 보면 왕국의 소드마스터가 강림할 것이다.
어떻게 아냐면, 직접 그렇게 경험했기 때문.
왕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집행부를 죽이다 보니, 결국 소드마스터와 마주했다.
게다가 캐론하고의 약속, 그리고 저 성직자의 얼마 안 남은 생명 끈이 문제였다.
삼일 정도만 방치해도 저 소녀는 분명 죽는다.
그 중간에 가우디움이 소녀를 고문이라도 하는 순간 그 시간은 더더욱 단축되리다.
삼일이란 시한부를 둘 정도로 그녀는 쇠약했다.
그걸 압도적인 정신력으로 커버치는 것이지, 어느 순간 쓰러져서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에 빠지던 중에 베시아는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그…. 혹시 어디 공작가…. 죠?”
그냥 귀족도 아닌 공작가의 공자면 암만 사제라도 대가리를 박아야 할 상대였다.
할 만한 착각이긴 한데, 어쨌건 불필요한 오해이니 빠르게 정정했다.
“그냥 한미한 남작가 가문이다.”
“에이씨, 오해했잖아, 게다가 한미한 가문이면 좋은 구조대가 오긴 오겠어?”
“다른 방법이니까 걱정 말고 살아남아 있기만 해.”
“괜히 기대했네.”
정신력이 강한 베시아 조차도, 자력으로 탈출하는 건 진작에 포기한 모양새다.
그럴 만하다.
오직 가우디움이란 흑마법사만 있다면 모를까, 여긴 수백의 흑마법사 집단이 모인 곳이다.
그들이 도사리고 있는 한, 힘없는 노예들이 폭등을 저질러도 전부 죽는 미래만이 기다릴 뿐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희망을 얻었던 건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서로 간의 작은 숨소리만이 들렸다.
아무런 빛도 통하지 않는 지하감옥이었기에 시간 감각이 없었지만, 그래도 하루 정도는 지날 법한 시간이었다.
고요함에 질려갈 즘에 가우디움이 내려왔다.
“흐흐, 잘 잤나?”
그는 실실 웃으며 내 앞에 나타났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피식 웃으며 건너편 쪽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베시아 앞에서 어제와 똑같은 물음을 던졌다.
“날 따를 생각은 있는고?”
한 번만 고개를 숙여라.
그러면 내가 구해줄 수 있으니.
가우디움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듯, 나 또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가 어제 했었던 말이 통한 건가.
“그리…. 하겠습니다.”
고개가 꺾이는 순간, 꽉 막혀있던 댐이 무너져내렸다.
감정의 격류가, 소녀를 뒤덮었다.
아무리 강인한 정신이 저 자신을 포장하고 있더라도.
남들은 진작 포기할 고통을 겪어왔다.
“그러니, 살려주세요.”
두 마디에 울음기가 가득해졌다.
연기 따위도 아닌 순수한 진심.
소녀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런데도 신을 저버리고 싶지 않기에, 신앙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에, 내내 속으로 신을 부르짖으며 참아온 한 마디.
과거에는 그 한마디를 하지 못하여 죽음을 맞이했겠지.
“크흐흐, 하하하하하하!”
가우디움은 광기에 찬 웃음을 지었다.
항상 제 위에서 고고하게 서던 사제가 고개를 숙였으니, 기쁨에 찬 모양이다.
“흐, 흐…. 그래, 둘 다 나오거라, 보여줄 게 있다.”
감옥의 철창이 열리고, 나와 베시아는 감옥에서 걸어 나왔다.
베시아는 도저히 기운이 없는지, 몸을 겨우 가누는 걸음걸이였지만, 어찌어찌 따라갈 수 있었다.
가우디움은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우리는 불사를 연구한다. 죽음을 극복하는 궁극적인 흑마법, 사실 흑마법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지, 주술, 대악마, 인신 공양, 악신. 그 무엇이라도 불사에 가까워지기만 한다면 기꺼이 담아낼 것이다.”
소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제로서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이다.
사람으로서 정해진 수명을 살고 떠나는 것이 신이 내려준 운명임을 믿고 있는 그들이기에.
“그리고 나는 이 연구의 끝이 다가옴을 직감했다. 그래, 머지않았어, 너희 둘 중의 한 명이 불사자가 될 수도 있으리라, 나에게 잘만 협조한다면 영생을 살며, 무한한 힘과 권력이라는 영광 속에서 신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불사자가 되었으며.
용사에 의하여 이곳에 되돌아왔으니.
“그 영광의 첫걸음이다.”
얼마나 많은 거금을 들였는지 예상이 안 가는 제단이었다.
과거에는 뭐가 뭔지 몰랐지만, 흑마법사의 눈으로 저 제단을 보니 얼마나 호화스러운지 알 수 있었다.
수천 명에 가까운 인간의 피를 덧칠해 말렸고, 그 위에는 수백의 아이의 피가 담겨 있었다.
그 피를 바친 아이와 인간의 뼈를 갈아서 제단을 만들었고, 그 위에는 악마의 뿔이 기형학적으로 조형되어 있었다.
제단에 새겨진 정교한 문장까지 고려하면 제 삶을 갈아 넣지 않는 한 이루어질 수 없는 수준이다.
“기일은 한 달 뒤.”
의식의 첫 번째 단계로서, 대상자의 피를 흩뿌려야 한다.
나 역시 똑같은 과정을 거치고 의식을 치렀으니 가우디움이 그리할 건 분명했다.
여기에 변수가 하나 있다면.
“너는 한 달은커녕 하루도 못 버티겠군.”
“...”
“쯧, 포션을 좀 가져오지. 도중에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
그러며 가우디움은 자리에서 떠났다.
베시아의 상태가 너무 안 좋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가우디움이 자리에서 떠나니 베시아는 그 자리에서 곧장 주저앉았다.
소녀는 더는 버틸 만한 체력이 없었다.
절망을 뒤집을 만한 희망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면.
“...그래서 방법이 뭔데.”
그러고 보니 이렇게 마주하고 대화는 건 처음인가?
아무리 상태가 안 좋아도 소녀의 외모는 눈에 띄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은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성녀의 상징.
약간의 이상함을 느끼면서, 그녀에게 말한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라.”
“기다려? 뭘 하려고?”
“곧 알게 될 거야.”
나는 가우디움이 나가면서 잠가놓은 문을 열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잠금장치.
이 문을 얼마나 많이 닫아보고 열어봤겠는가.
덜컹-
“뭐, 뭐? 너 어떻게 알고….”
“쉿.”
그녀가 따라오면 안 된다.
나의 주 무장을 가져와야 했고, 그게 있어야 이곳을 박살 내고 탈출 할 수 있을 테니.
이런 사정을 설명하기에는 언제 가우디움이 돌아올 줄 몰랐기에, 최소한의 설명만 해 주었다.
“기다리고 있어라, 금방 돌아올 테니.”
“아니, 뭘 할지는 알려주고 가야…!”
쿵-
문을 닫고 나가자 암브로시아의 전경이 보였다.
어두운 지하세계.
흑마법사만을 위한 마탑.
바쁘게 길을 지나가는 흑마법사들이 보인다.
혼자 있는 노예의 모습을 보고 잠시 시선을 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멀쩡히 문을 열고 나온 걸 보았기에 곧 신경을 껐다.
암브로시아가 처음 형성되었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노예를 조교처럼 쓰는 흑마법사도 있었다.
나 말고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노예 또한 존재한다.
여기에 필요한 건 오직 당당함 하나.
두려움을, 공포를, 무서움을 지니고 움직이면 오히려 더욱 위험했다.
더 깊은 지하층으로 내려간다.
계단을 내려가며 암브로시아의 보물이 저장된 공간까지 이동한다.
여기도 무척이나 익숙했다.
흑마법사 각자의 보물을 등록하여 보관하는 곳.
이 또한 들어가는 데 전용 암호가 필요했지만, 암호야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긴 생활을 해왔으니, 실로 집이라도 돌아온 마냥 너무나도 익숙했다.
당연하지만 관리자가 있었다.
“너, 뭐냐.”
“가우디움 님의 명령에 따라서 가져올 보물이 있습니다.”
“그러냐? 너 같은 노예는 처음 보는데….”
관리자는 내 얼굴을 유심히 뜯어봤지만, 항상 무표정한 내 얼굴에서 무언가 불안함이나, 걱정 같은 걸 엿볼 수가 없었다.
“좋아, 암호나 적어라.”
그는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고, 나는 가우디움의 전용 보물 방 암호를 적어냈다.
능숙한 필체로 적어내는 걸 본 관리자는 신뢰성이 생겼는지 피식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하필 그분의 노예라니, 뭐, 최악보다는 차악이 나으려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 없이 쌓여있는 흑마법 도구들의 산을 볼 수 있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단검이 어디 있는 거지?”
평범하게 뒤져서는 찾을 수 없는 지경으로 창고는 정리가 안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