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생각했다.
기이한 녀석이다.
방법이 있다며 간편히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모습을 보며, 베시아 또한 따라가려 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잠금장치가 있었고.
그 소년은 당연하듯이 풀고 나간 거다.
“귀족은 무슨 귀족.”
잠금을 풀어버리는 솜씨를 보아하니 어디 유망주 도둑이 아닐까.
그리 생각한 베시아는 두 다리를 가슴 깊숙이 모아서 바닥에 앉았다.
바닥은 차가웠다.
그렇다고 서 있기는 싫었다.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으니까.
한계에 다다른 체력이 계속해서 그녀의 정신력을 갉아먹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우울했고, 이대로 쓰러져 기절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베시아는 아르갈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은 거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소년이,
이 지옥 속에서 동아줄을 내려주길.
-꼬르륵.
굶주린 뱃가죽을 느끼고 있자니, 그녀는 어제 먹었던 하얀 빵을 떠올렸다.
정말 오랜만에 먹었던 빵 하나는 지나칠 정도로 달콤했다.
만약 돌아간다면, 흰 빵보다 더 맛있고 달콤한 케이크를 산처럼 쌓아서 매일같이 먹고 싶을 정도로.
성직자가 그런 사치를 부릴 순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고생을 하고 돌아간다면 분명 해 주지 않을까?
인자하신 라베가 주교님에게 부탁드린다면 배가 터질 정도로 먹여주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하던 와중, 그런 기분을 급격하게 바닥으로 처박는 존재가 돌아왔다.
덜컹-
“쯧, 고작 포션 하나를 주기 싫다고 얼마나 실랑이하는지.”
가우디움은 한 손에 포션들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났다.
방 내부를 살피다가 베시아에게 한 병 던져주었지만,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가우디움이 말했다.
“뭐야, 그 녀석 어디 갔느냐.”
사라진 아르갈에 대한 물음이었다.
베시아는 여기서 솔직히 말해야 할지, 거짓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지만, 사실 거짓말을 하려 해도 할 만한 말이 없었다.
그냥 문을 열고 나가버렸으니까.
땅으로 꺼져버렸다고 할 순 없잖는가.
게다가 베시아는 아르갈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
“...문 열고 나갔어요.”
“흐,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어찌 되건 말썽이군.”
가우디움은 손가락을 슬슬 돌렸다.
흑마법으로 아르갈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다.
검은색 마법진이 손 위에서 나타난다.
“목에 달린 족쇄는 장식품으로 보는 건가? 문은 어떻게 열었는가 싶긴 한데, 도망가봐야 이 마탑 내에서 갈 곳이…. 뭐지?”
그는 두 눈을 찌푸리며 의문을 느꼈다.
보통이라면 이곳이 지하임을 알고 빛이 쏟아지는 위쪽으로 향할 테다.
그렇지만 아르갈은 더 깊은 지하 아래로 내려갔다.
가우디움은 이에 흥미로워하며 중얼거렸다.
“어찌 되건 상관없겠지, 본보기로 써먹으면 될 일이야, 소녀, 그동안 네가 보여주었던 모습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베시아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이해하지 못하다가 곧 알게 됐다.
고문 마법을 아르갈에게 쓰겠다는 소리.
극악한 고통 아래에 사람이 어떻게 발버둥 치는지 구경시켜주겠다는 악랄한 짓이었다.
가우디움은 그녀에게 따라오라 손짓을 했지만, 소녀는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주저앉았다.
“쯧, 그러고 보니 제대로 걷지도 못할 꼴이군, 먼저 마셔라.”
가우디움은 베시아에게 핏빛의 붉은 물약을 던져준다.
그녀는 고민했다.
이걸 마시는 게 맞는지.
그렇지만 너무 목이 말랐던 베시아는 물약이라도 감지덕지하며 꼴깍꼴깍 마셨다.
여태껏 흑마법사가 뭘 주건, 마시지도 먹지도 않았지만, 이미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한 이상, 그런 선을 지킬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래도 가우디움이 물약에 장난질은 안 쳐놓은 건지, 베시아는 곧 활력이 솟아났다.
그렇게 가우디움의 뒤를 따라가며 보이는 광경에, 베시아는 기겁했다.
‘이런 지하공간이 있어?!’
높디높은 정상에서 마법을 연구하는 마법사들의 마탑이 있다면, 흑마법사는 이에 반대로 남들의 시선을 피해 땅굴을 파고 내려갔다.
흑마탑이라 불리기도 하는 것이며, 이러한 구조물은 어느 왕국이건 교회건 토벌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의 규모로 이루어진 흑마탑은 왕국의 용인이 없다면 불가능했다.
이 수많은 흑마법사가 먹고사는데 얼마나 많은 식량 자원이 필요한가.
최소한 상단 규모의 거래가 오고 가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왕국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야 절대 타협 불가일지라도, 왕국은 정치적으로 흑마법사와 협상을 할 수 있다.
왕국의 허가 아래에 이 흑마탑은 존재하는 것이다.
베시아는 여기에 얼마나 큰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지 두려워하며 가우디움의 뒤를 따른다.
가우디움은 아르갈을 어떻게 굴복시킬지 기쁘게 고민했던 것도 잠시, 그 방향이 더없이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자, 그의 얼굴은 딱딱히 굳었다.
종착점은 마탑의 보물을 저장하는 창고.
더없이 안전하며, 흑마법사 고유의 암호로 보관된 곳이기에 그 암호를 알고 있지 않은 한 절대 출입이 불가하다.
가우디움은 그 앞을 지키고 있는 관리자를 흑마법으로 옥죄었다.
“히, 히익 가우디움님!”
“그놈, 여기에 들어갔나?”
“노예 말입니까? 바, 방금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들어간 거지?”
“예?”
관리자는 당연한 사실을 대답했다.
“암호를 적어서 냈기에 통과시켰죠. 가우디움님이 보내신 것 아닙니까?”
“무슨 개소리야, 난 그놈을 보낸 적 없다. 게다가 방 안에 가둬놓은 마당인데….”
그는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어제 들어온 노예가 자신의 보물 창고 암호를 알 리가 없는 건 당연한 일.
관리자가 실수한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는 한 그의 머릿속 말고는 존재할 수 없는 암호를 아르갈이 대체 어찌 알고 있겠는가.
“나중에 보세나 관리자, 죄의 경중에 따라 자네는 죽을 목숨이니.”
“저는 억울합니다!”
“그건 나중 일이고 우선 창고 안으로 들어가지.”
그는 대충 종이에 암호를 끄적인 다음에 관리자에게 던져주었고, 관리자는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아닌데, 분명 맞는데….”
가우디움은 저러고 있는 관리자를 당장이라도 쳐 죽이고 싶었지만, 더 급한 일이 있기에 보물 창고에 들어갔다.
그러자 정말로 아르갈이 그곳에 있었다.
검은 머리, 허름한 실험복.
흑마법 관련된 보물의 산 앞에 가만히 서 있던 소년은 가우디움이 들어왔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가우디움은 다행히 저 노예가 보물에 별짓은 안 했다고 안도를 하는 동시에, 진노를 느끼며 가장 최악의 고문 마법을 준비했다.
“네가 한 짓에 대가를 치를 준비는 되었지?”
“쓸데없는 짓이었어.”
“뭐?”
“시간을 뛰어넘었어도 영혼의 연결은 유지되어 있다.”
아르갈은 한 손을 뻗었다.
“그래도 하나 배웠군, 아예 의미가 없던 건 아닌가?”
제 주인의 의지에 따라 가장 밑바닥에 파묻혀 있던 보물 하나가 솟아올랐다.
그건 아주 허름한 단검이었다.
온통 녹슨 때가 묻어있으며, 디자인조차 투박하기 이를 것 없었다.
이걸 보물이라기보다는, 그냥 골동품이라 불러도 이상할 게 없는 것.
그걸 본 가우디옴은 끌끌 웃으며 아르갈을 조롱했다.
“여길 어떻게 오고, 또 상황에 딱 떨어져 맞는 유물을 손에 넣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제 수명을 갈아서 이곳을 탈출할 생각이더냐?”
“...”
“케르시아의 제단검, 제 손을 찌를 때마다 수명을 갉아 먹고, 강력한 흑마법을 쓸 수 있는 검, 그걸로 여길 나가봐야 일 년도 못 살고 죽을 게 분명하다. 차라리 내 뜻을 따라서 영생을 사는 게 낫지 않을 터냐? 만약 불사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그 단검을 선물로 주겠네.”
이에 베시아는 기겁을 했다.
방법이라는 게 바로 저거였던 건가?
제 수명을 대가로 쓰는 단검이?
“게다가 흑마법도 평생 쓴 적 없는 아해가 강대한 힘을 제대로 다루겠는가? 결국 나에게 저지당해서 죽을 게다. 지금이라도 내려놓으면 약속하지, 너에게 해를 끼치지….”
“두려운가?”
짧게 읊조린다.
가우디움의 자존심을 건드는 한 마디.
“....뭐라 하였느냐.”
“흑마탑 장로인 그대가 고작 이것 하나로 두려워하는가? 확실히 그렇긴 하지, 안 질 자신은 있어도 피해 없이 이길 자신은 없으니까.”
“네가 입이 뚫려 있다고 함부로 떠드는구나.”
“근데 네가 오해하는 게 하나 있어.”
푹-
“너는 날 이길 수 없다.”
아르갈은 제 손에 단검을 찔렀다.
베시아는 두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가우디움의 말 데로라면 막대한 수명이 대가로 필요했다.
그녀는 그러한 희생을 하겠다는 아르갈의 모습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이게 차라리 나아서?’
흑마법사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자유로운 인간의 삶이 짧더라도 더 낫기에?
막대한 마기의 폭풍이 주변을 덮었다.
베시아는 안 그래도 몸이 허약한데 사제에게 취약한 마기가 주변을 뒤덮으니 혼절할 지경이었다.
“꺄아아, 미친!”
얼떨결에 휩쓸린 베시아는 본능적으로 욕을 내뱉었다.
이러다가 정말로 죽는 게 아닐까, 눈을 질끈 감은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이 올라갔다.
그 손은 생각보다 따스한 손길이었다.
“가만히 있어라, 흑마법사를 죽이고 올 테니.”
“....너.”
베시아는 아르갈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한 손에는 단검에 찔려 피가 쏟아지고 있었고, 마기에 침식된 신체는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제야 베시아는 깨달았다.
진정 그는, 날 구하려 하는구나.
제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이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는구나.
“죽으면…. 가만, 안 둬….”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기절했다.
**
불사자에게 죽으면 가만 안 둔다는 이상한 소리를 한 베시아를 뒤로 놔두고, 가우디움과 마주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전능감이다.
불사성을 얻은 이후 평생 가까이했던 마기.
지금 되찾아온 마기의 힘은 일단 다루는 데 집중했다.
본디 흑마법사도 순수하게 마기를 몸에 담지는 않는다.
정제되지 않은 마기는 인체에 극악한 독이었으니까.
어느 한 곳에다 잘 포장해서 담아두거나, 아니면 신체 외부에 두거나.
두 가지 방법을 활용하는 편이었다.
나야 불사자 이니 마기를 몸속에 대충 두더라도 별문제는 없겠지만, 문제가 있다면 사람의 몸이 거의 시체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살아있어도 산 게 아닌 존재가 되기에는, 아카데미도 갈 것이고, 용사를 도울 생각인 마당에 그리할 만한 짓은 아니다.
그래서 마기는 다른 곳에 담아두기로 했다.
가장 좋은 마도구가 있었으니까.
-우우우우웅
마기를 단검에 집중한다.
이러면 단검 하나 없어졌을 때 무력화될 가능성이 크지만, 어차피 항시 몸에 지니고 다닐 단검이었으니 큰 상관은 없었다.
검은 구름이 단검 속으로 흡수되자, 난장판이 된 주변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그리고 몸을 추스른 가우디움이 앞에 나타났다.
“....써 본 적이 없어서 몰랐지만, 친절히 마기까지 모아주는 효과가 있었군, 초보자가 쓰기에는 딱 좋겠어.”
“확실히 착각이 많아.”
단검을 빙그르르 돌렸다.
연기처럼 흘러나오는 마기가 동그란 원들을 그렸다.
단검을 몇 번 그어내자 순식간에 높은 수준의 마법진을 그려진다.
가우디움의 두 눈에 당황스러움이 깃들었다.
“흑마법을 쓰는데 보조까지 해 준다? 거의 마검에 가까운 전지를 가지고 있군. 예상보다 엄청난 보물이었어, 확실히 예상외야.”
결코 내가 했을 거라 생각은 못 하는 모양.
그럴 만도 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기는커녕 마나도 없는 무능력자에 가까운 귀족 공자가 갑자기 수준 높은 흑마법을 구사할 줄 알았겠는가.
“기물에 의존하여 날 이길 수 있을까?”
암브로시아 내에서 실력만 따져도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수준인 흑마법사답게, 내가 구사한 흑마법에 대응하는 파훼법을 쏘아내기 시작했다.
계속하여 파훼 되자 그의 표정은 점차 자신감이 넘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표정도 구겨지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체 왜….”
진정한 성검, 마검이 아닌 그걸 따라 한 것에 불과한 에고소드라면 결국 한계란 존재했다.
가우디움도 내가 쥔 단검이 마검이 아니라는 건 알 것이다.
처음부터 강력한 힘이 주어지긴 하지만, 그걸 정점으로 더 약해지면 약해졌지, 강해질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내 공격이 점차 강해지고 정교해지며, 점점 고위 흑마법이 시전되기 시작하자.
천하의 가우디움도 이상함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단검이 정신없이 움직인다.
높은 수준의 흑마법이면 흑마법일수록, 구현해야 할 마법진은 극한에 이른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효과는 확실한 편.
가우디움이 넘볼 수 없는, 아니 암브로시아의 탑주도 뛰어넘을 흑마법이 형성된다.
“말했잖아.”
이걸로 마지막이다. 가우디움.
이 뒤에는 네가 겪어야 할 지옥만이 남았다.
“너는 날 못 이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