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잘 못 보고 있는 거지?
그녀는 생각했다.
화려하게 날아오르다 추락하는 새처럼.
한순간에 모든 생명력을 잃고 쓰러지는 아르갈을 보며.
“아, 으, 아….”
베시아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아르갈이 죽기 직전에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 했을까?
미안하다고 해야 했을까.
그런 고민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미 그는 죽었으니까.
“하여간 미친놈.”
티아그리스는 사실상 전투가 끝났음을 알고, 지상 위로 내려왔다.
검은 로브가 흔들리며 얼굴 전체를 뒤덮던 모자 부분이 벗겨졌다.
복잡미묘한 표정을 한 흑발의 미인이, 저 둘을 주시하고 있었다.
“너, 너만 아니었어도.”
베시아는 갈 곳 없는 후회와 증오를 티아그리스에게 쏟아내려 한다.
막대한 성력이 탑주를 겨냥하고 있었다.
하지만 티아그리스는 베시아의 말을 냉혹하게도 부정했다.
“하! 그럼 탑주로서 흑마탑을 무너뜨린 범인을 놔두라고? 그와 충돌하는 건 예정된 일이었어, 오히려 너로 인하여 그가 죽은 게 아닐까?”
“뭐?”
“기물에 의존한 듯 보이나, 흑마법 재능은 상당한 수준…. 솔직히 말하자면 혼자서 탈출하려고 했으면 나도 못 막아, 근데 옆에 짐 덩어리를 달고 있네?”
티아그리스의 한 마디 마디가 베시아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아르갈이 혼자서 빠져나가고자 했으면, 단 한 번의 칼질로 그는 자유의 몸이 됐으리라.
단지 얼굴을 본지 하루밖에 안 된 소녀를 구하고자.
제 목숨의 바닥까지 긁어서.
흑탑주를 만난 최악의 상황을 극복해내고.
그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하고자 한 이유는 없었다.
사람을 구하는데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 사실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성직자인 그녀보다도.
더 헌신적이었으며.
더욱더 희생적이었으니까.
“으, 으으윽.”
“죽이고 싶어도 악마 때문에 건들지도 못하고 환장하겠네…. 그냥 오늘은 운수 안 좋은 날이라 치자고.”
“어딜 갈려고…!”
“어머, 그래서 날 죽이려고? 눈빛이 아주 살벌하네…. 근데 어쩌지? 난 싸울 생각이 없는데?”
만약 충돌이라도 하는 순간, 악마가 끼게 되므로 티아그리스만 손해를 본다.
더없이 냉정한 이성을 지닌 흑마법사로서, 무엇 하러 그런 손해를 감수하려는가.
티아그리스는 그저 잔잔한 미소만을 지으며 마기의 폭풍을 만들었다.
흑마탑은 반파 당했고, 그녀가 가야만 수습할 수 있는 붕괴였다.
여기서 발이 묶여있을 수 없겠지.
“귀여운 성직자, 나중에 보자고, 우린 언젠간 다시 마주할 듯싶으니.”
“가지마!”
“칭얼거리기는.”
티아그리스가 떠나자 베시아는 허망한 눈으로 흑탑주가 떠난 자리를 바라봤다.
방금까지 싸웠던 적이, 증오할 수 있었던 상대가 사라지니 잔혹한 사실만이 남아있었다.
차갑게 식어있는 체온이 느껴진다.
그의 몸에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심장은 뛰지 않았으며, 숨도 쉬지 않았다.
모든 정황이 온전한 ‘죽음’만을 의미하는 아르갈을 바라보던 베시아는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괴로움에 버틸 수 없었다.
그래서였던가.
그녀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판단을 하였다.
“죽지 마….”
이미 죽은 시체에 성력을 쏟아붓는 것.
하면 안 될 짓이고, 의미도 없는 짓이다.
게다가 이런 몸 상태로 성력을 쏟았다간,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에도 베시아는 힐을 멈추지 않았다.
살아날 때까지.
그의 심장이 다시 뛸 때까지.
이조차도 결국 무의미한 것.
베시아는 제 시야가 점차 흐릿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기적은 없었고 예정된 결말만이 기다렸다.
“멍청한 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의 희생조차 무의미하게 만드는가.
“바보같은 년….”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못 해서 죽고 나서 후회하는가.
“그냥 모지리….”
너는 왜 날 위해 죽고자 했는가.
이유를 몰랐다.
이유가 없다고 했으니까.
“나도 이유 없어.”
사람 살리는데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지?
그러니 신이시어.
제발.
최후가 다가옴을 느꼈다.
바보같은 짓을 했고 바보같이 죽는다.
그녀는 그렇게 기억되고 죽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다 이상함을 느꼈다.
곧 끊겨야 할 성력이 멈추지 않는다.
무한한 샘물 아래에서 퍼오는 것처럼.
그녀는 성력을 끊임없이 내뿜고 있었다.
“어?”
어느 순간, 막대한 성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과연 한 명의 성직자가 쏟아부을 법한 성력인가 싶을 정도로 베시아는 의아했다.
이 정도면 최소 주교급….
아니 그 이상이었다.
어지간한 반송장도 순식간에 깨어날 법한 성력을 넘어서서, 강렬한 빛으로 아르갈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된다.
베시아는 자신이 각성했음을 깨닫는 동시에….
뛰지 않을 심장이 뛰기 시작했음을 알게 됐다.
“살, 살렸다.”
기적중에 전설급 기적.
역사적으로 성녀, 성자만이 일생에 단 한 번 쓸 수 있다던 기적.
죽은 자를 살리는 레저렉션.
성력의 힘으로 사람을 되살렸다는 게 알려지는 순간, 어떤 절차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당사자는 즉시 성녀, 성자가 된다.
아무도 없는 둘만의 공간에서 사람을 살렸으니 이를 증명하는 건 쉽지 않겠지만, 베시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르갈을 살렸으니까.
날 위해 희생한 사람의 심장을 뛰게 했으니까.
그러나 기쁨에 취할 틈도 없는 베시아는 아르갈을 꽉 부여잡고 이곳에서 멀리, 최대한 멀리 나아가기 위해 끌고 가기 시작한다.
티아그리스가 공격할 수 없는 대상은 오직 베시아.
만약 그녀가 돌아와서 아르갈이 되살아났다는 걸 알게 되면, 똑같은 참상이 반복될 게 분명했다.
기쁨 이후에 찾아온 건 고통이었다.
긴 감옥 생활로 그녀는 근육이 다 빠져나갔고, 오랫동안 굶주렸었다.
쓰러진 이를 끌고 가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오직 성력으로만 버티는 중이었으니, 그 이상의 고통이 그녀를 괴롭혔다.
성기사도 버틸 수 없는 고행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주교님.”
그녀는 신을 부르짖지 않은 기간이 꽤 지났다.
오직 방금.
아르갈을 살리기 위해 잠시나마 기도했을 뿐.
그녀는 이제는 신을 바라지 않았다.
“레베가 주교님, 보고 싶어요.”
그저, 어렸을 적부터 보살펴주었던 주교를 다시 보고 싶었다.
**
“철수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성기사는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실종한 성직자를 찾기 위해 무려 한 달 내내 지속된 탐색.
가져온 식량도 다 쓰고, 성기사들의 사기도 많이 떨어졌다.
아무리 주교라 하더라도, 이 이상 성기사단을 운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아무런 진전도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주교님. 도저히 작은 흔적조차도….”
“으음.”
레베가 주교는 겉으로는 진중해 보였으나, 그 속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딸처럼 아껴왔던 아이.
베시아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으니까.
“딱 일주일만….”
“...”
“일주일만 더 합시다. 그런데도 진전이 없으면 철수하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주교님.”
주교에게서 보이는 간절함을 느낀 성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고생하고 있는 성기사 본인이라 해도 찾기 싫겠는가.
흔적 하나하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모두가 베시아의 실종에 절박함을 느끼고 있다.
“도대체 어디로 갔느냐…. 아이야.”
주교는 참담한 심정으로 숲 속을 바라보았다.
베시아는 수도 근처에서 성기사들과 순찰 임무를 돌던 중 돌연사라진 것이었다.
주변 성직자는 모두 멀쩡히 있었는데, 그 아이 하나만 사라져버렸다.
이 기이한 일에 아마 베시아가 교회에 대해 지루함을 느껴 떠났다고 추측하는 성직자들도 많기는 했다.
그러나 레베가 주교는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한다.
“만약 그러하다면 내게 언질이라도 주었을 텐데.”
매번 틱틱 거리는 아이이긴 했지만, 어릴 적부터 직접 키워준 레베가 주교에게만큼은 살가웠다.
그런 아이가 마치 아버지와 다름없는 그에게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다니.
이는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 확신했다.
주교의 고심이 깊어 오던 와중.
저기 먼 곳에서 커다란 마기의 폭풍우가 터져나갔다.
“주교님! 저기 먼 곳에서 마기의 폭풍이 치솟았습니다!”
“느꼈습니다.”
그래,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교주는 의지를 돋구며 성기사단에게 명령을 했다.
“신의 명에 따라 악을 처단합시다.”
“알겠습니다. 주교님!”
기사단 하나가 저 커다란 폭풍이 쏟아지던 곳으로 향했다.
베시아의 흔적이라도 발견하길 바라며.
**
지나칠 정도로 치명적이거나, 흑마법으로 인하여 모든 생명을 소진하였을 때.
나는 그럴 때마다 잠시 가사 상태에 빠진다.
아니 달리 말하자면 잠시 ‘죽는다’라고 할까.
숨도 못 쉬고, 심장이 뛰지도 않는.
그런 죽음에 다다른 상태.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그런데도 결국 깨어났고, 다시 심장은 뛰었으며, 숨이 다시 쉬어졌다.
아무리 죽어있는 상태에서 몸체를 훼손한다고 한들, 모든 살점이 다시 달라붙어 온전한 몸으로 돌아왔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니 그것을 저주라 하니.
또한 죽길 원하지 않기에 죽음에서 돌아왔으니 달리 말하자면 축복이리라.
두근-
두근-
맥박이 느껴진다.
완전히 꺼져버린 생명의 초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의식이 돌아오는 동시에 강력한 성력이 쏟아짐을 느낀다.
설마, 나한테 치유를 걸고 있는 건가?
왜 그런 짓을 하지.
그러다 성력 고갈로 죽으면 어쩌려고.
맥박은 뛰더라도 아직 몸이 완벽히 되살아 난 건 아니었다.
아직은 움직일 수 없다는 이야기.
내 심장이 다시 뛰고 있다 보니, 되살아났다 생각한 건지 베시아는 내 몸을 질질 끌고 갔다.
...저렇게 무리하다가 갑자기 급사하는 게 아닐지.
하는 수 없었다.
온전히 되살아난 건 아니지만 최대한 몸을 움직여, 제 몸을 혹사하고 있는 베시아를 제지하기로 했다.
“...그, 만.”
“아!”
내가 입을 열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내 몸을 내려놓는다.
딱딱히 굳은 근육을 움직이며 몸을 일으킨다.
확실히 부활한 지 얼마 안 돼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다.
아까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이는 베시아를 바라보며 질책했다.
“기껏 살려줬는데 그러다 죽으려….”
“흑, 흐윽!”
그러던 순간 베시아가 날 껴안고는 울고 있어서 뭐라 말을 하지 못했지만.
“미친, 놈아, 대체 왜ㅡ 훌쩍, 그렇게 혼자 다 떠안고 죽으려 한 거야?”
“...”
설명하기 참 애매하다.
내 의도와 생각을 말하려면 불사성을 꺼내야 하는 데 그걸 내놓을 수는 없으니까.
이럴 땐 항상 떠올랐던 건 용사다.
내가 알고 있는 이들 중에서는, 제 목숨을 걸며 남을 구하는 사람이란 용사 외에는 없었으니까.
용사는 이럴 때 뭐라 했던가.
‘그것이 내 의무니까.‘
...이건 나와 맞지 않는다.
다시 생각해 보더라도 그녀가 했던 말 중에서 나와 딱 떨어지는 말은 별로 없었다.
애초에 용사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며, 막대한 의무를 지고 있었다.
내 입장을 정리하기 힘들어서 가만히 있다 보니, 베시아가 진정을 할 때까지 이 상태가 유지됐다.
그녀에게 풀려난 건 3분 정도 지나서이다.
베시아는 자기 추태를 알았는지 두 뺨을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약간은 어색해졌지만, 어차피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흑마탑에서 탈출했으니.
과거에 5년 동안 노예 신세를 졌던 흑마탑에서.
단 하루만에 빠져나갈 수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어찌어찌 일으키며 말한다.
“돌아가자.”
“....응!”
풀썩-
당당히 나아가는 척하더니 베시아가 먼저 바닥에 주저 앉았다.
날 끌고 가느라 체력을 다 쓴 모양.
헛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찌 되건 끌어올려서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나조차도 근육이 굳은 상태.
서로서로 동여매고 걷는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베시아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집, 집으로 가자!”
지하 감옥에서 고통스럽게 죽었던 그녀의 운명이.
뒤바뀐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