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살렸다.
그것만으로 충분할 줄 알았다.
서로 목숨을 주고받았으니.
받은 만큼 돌려준 줄 알았다.
그런 환상은.
죽음에 가까운 아르갈의 생명력을 보고 무너졌다.
“너, 흐윽, 너 죽는다니까, 그것밖에 안 되는 생명력이라면…. 흐윽.”
“...그 또한 운명이겠지. 나는 상관없다.”
운명은 무슨 운명!
흑마법사에게 끌려가 긴 시간 동안 고통받았으며.
그 고통 속에서 구원해준 은인이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겨우 되살린 것조차 아주 잠깐의 유예라면.
그건 운명이 아니라 저주리라.
베시아의 얼굴이 한없이 망가질수록, 아르갈은 난감했다.
죽지 않는 불사자를 곧 죽을 것이라 걱정하고 있기에.
불사자라는 사실을 꺼낼 수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답답했던 적은 처음이다.
그녀를 위로해 준거는 어렸을 적부터 그녀를 보살폈던 레베가 주교.
그는 침착하게, 방안을 제시했다.
“베시아, 사람을 되살렸다 했느냐?”
“네, 우윽, 근데 무슨 의미예요. 흐윽, 살려줬더니 곧 죽는데.”
주교는 절대 그렇지 않다 부정했다.
“무의미한 게 아니다. 방법이 있다.”
“....훌쩍, 정말요?”
“수명을 늘릴 수 있는 유물이 있다. 단지 나보다 더 높은 권한이 필요해서 그렇지.”
교회에는 막대한 유물들이 있었다.
그중 수명을 늘릴 수 있는 물건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유물을 쓰려면 주교급이라도 힘들다.
“....성녀, 아니면 최소한 성녀 후보라도 가능하다. 네가 사람을 되살렸다는 증명을 할 수는 없겠지만, 네 기량은 성녀에 가깝다는 게 분명할 테니.”
“그렇다면!”
“하지만 베시아. 알고 있잖느냐.”
주교는 그녀를 걱정했기에, 성급한 결정을 말렸다.
“성녀는 쉬운 길도, 좋은 길도 아니다. 차라리 내가 최선을 다하여 그 유물을 구해주는 게 낫다.”
“우으으….”
“급할수록 돌아가는 게 맞다. 그리고, 내가 듣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나 많구나.”
주교의 시선이 아르갈을 향한다.
두 눈에는 깊은 회안이 담긴다.
차마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 사이에서 떠오른 건 결국 감사함.
제 수명까지 깎아가며 베시아를 구해주었다.
이러한 헌신을 어찌하여 타인에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더없는 은혜를 입은 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대가 지녔던 단검을 보았을 때, 자기희생을 통하여 마기를 얻는 극악한 물건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로 몇 번을 찔렀던 겁니까?”
아르갈은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세 번입니다.”
“...베시아에 의해 되살아났지만 사라진 수명은 돌아오지 못하는군요. 제 이름을 걸고 그대의 수명을 연장할 유물을 가져오겠습니다. 부디 잠시만 기다려주시길.”
주교는 지금 당장이라도 가져가겠다는 각오를 하곤, 이 방에서 나갔다.
이런 난장판을 바라본 아르갈은 조용히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진짜, 안 죽는데.
이걸 어디서 말할 수도 없고.
**
진정은 됐지만, 여전히 훌쩍거리는 베시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하여간, 너는 눈물이 많구나.”
“누구 때문인데!”
발끈하는 베시아의 모습에 피식 웃는다.
“너무 걱정 마라, 적어도 너보다는 상태가 좋으니까.”
“헛소리하고 있네, 엉? 곧 죽는데, 뭐가 좋긴 좋아.”
확실히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산다.
곧 죽는 마냥 슬퍼하던 베시아조차, 수명을 늘릴 방법이 있다는 걸 듣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듯하다.
베시아는 침대맡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앉아봐.”
그녀의 말대로 침대에 앉으니, 뒤에서 끌어안는 감각이 느껴졌다.
힘없는 손길이었지만, 따듯하였기에.
가만히 있었다.
“그때 뛰지 않았던 심장이 아직도 기억이 나.”
내가 죽었을 당시를 말하는 것 같았다.
유일하게 기억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을.
“너무 무서웠고, 끔찍했고, 잊을 수 없어.”
“그런가.”
“고맙다라는 말이라도 한 번 할 걸, 미안하다고 할 걸.”
베시아는 내 어깨 위로 고개를 기대었다.
그녀의 무게는 너무 가벼웠다.
“그렇게 후회했는데, 또 후회하기는 싫어.”
“...”
“이번에는 죽게 놔두지 않을 거야.”
그러한 각오를 듣자니, 어떻게 말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죽지 않는다…. 라는 생각은 접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녀를 위로해주는 것뿐이겠지.
좋은 방향으로다가.
“주교님이 유물을 통하여 해결해주시겠다 했으니 잘 되겠지, 그러면 될 일 아닌가?”
“안 좋은 쪽으로는 고려하지 않는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흑마탑에서도 아르갈, 넌 묘하게 확신만 넘쳤긴 했어.”
어찌 보면 그런 절망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갈 수 있다 확신하긴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난 결국 안 죽는 걸 알고 있기에.
너무 걱정만 하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약간의 힌트 정도는 흘려주었다.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나는 결국 살아날 것이다.”
“무슨 예언자라도 돼?”
예언자는 아니더라도 회귀자 이긴 하다.
실로 비슷한 역할은 할 수 있겠지.
“그리 생각한다면.”
“아니, 말하는 걸 보면 예언자인 줄 알겠네, 깜빡 속아 넘어가겠어.”
그녀는 제 나름의 화를 표현하기 위해 내 목을 조르는 듯 시늉했지만, 그 상태로 목을 졸라봐야 내 몸에 매달린 형태였다.
그런 것 치고는 내 몸이 뒤로 기우뚱하고 넘어갔지만.
...아니 진짜 단검 돌려달라고요.
마기도 없으니까 말도 안 되게 무기력하네.
고개를 돌리자 살벌한 표정으로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베시아가 보였다.
“이 꼴로 응? 상태가 좋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 정도면 그냥 걸어가는 시체인데 안 그래?”
방금까지 시체였으니까.
아, 이건 아닌가.
아무튼 베시아 마저도 내가 심각하다고 판단하고 당장 어디든 가서 몸을 눕히고 치료하라는 소리를 했다.
결국 내가 복귀해야 할 곳은 병실이었다.
사제의 살벌한 경고는 덤이었고.
“다음에도 기어 나오면 전신을 붕대로 묶어서 박아둘 겁니다.”
“넵.”
과거 불사왕 아르갈이라는 경외를 받았던 이 몸의 명예는 어디로 갔는가.
...라고 해봐야 지금은 고작 남작가 공자에 불과했다.
마탑주도 물리쳤지만, 그러한 경력이 어디서 남는 것도 아니고.
“모르겠다.”
이렇게 된 이상 하루는 여기서 더 보내야겠다.
원래라면 바로 복귀할 생각이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단검 없이는 여기서 탈출하기도 힘들다.
유물도 받고, 집으로 보내달라고 하면 되겠지.
그리고 예상보다 더 이른 시간 내로 주교가 돌아왔다.
“결코 잃어버리는 일, 없어야 합니다.”
그는 한 손에는 목걸이처럼 보이는 물건을 쥐고 있었다.
장인의 손길로 한 땀 한 땀 새겨져서 만든 듯한 고귀함을 품고 있는 저 목걸이는 내가 보았던 유물이기도 했다.
과거, 용사 파티의 대마법사가 차고 있던.
별의 근본.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걸 고작 수명 연장으로 쓰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물건이다.
“...너무 과한 것을 들고 온 게 아닙니까?”
“이 물건의 가치를 압니까?”
너무나도 잘 안다.
초월자에 이른 대마법사의 힘을 더욱 증폭시키는 강력한 유물이었기에.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달리 표현했다.
“모르더라도, 한눈에 보기에도 귀해 보입니다.”
“귀함을 넘어선 보물이니 꼭 잘 간직하길 바랍니다.”
주교가 건네준 별의 근본을 들어 올린다.
동그란 크리스털 가운데에 별 모양의 보석이 박혀있었다.
막대한 마나를 품고 있는 가능성 그 자체.
고로, 나는 외부의 마나를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을 얻었다는 뜻이다.
실로 성검, 마검에 비교할 선상에 있는 유물이다.
오히려 이 물건의 가치를 모르는 건 주교였다.
만약 내가 주교였다면, 아무리 은인이라 하더라도 넘겨줄 생각을 못했을 거다.
어찌 되건 감사히 받았다.
이 유물이 있음으로써 새롭게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겨났으니.
목걸이를 차니 무언가 활력이 돌아온 기분이었다.
“마나로 신체에 활력을 불어다 주는 유물입니다. 노화를 막아서 영생을 사는 건 아니겠지만, 인위적으로 줄어든 생명을 복구하는 데 도움이 되지요.”
“그렇군요.”
주교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을 붙잡자 미약한 성력이 내 몸속을 살폈다.
“후…. 정말로 다행입니다. 줄어들었던 생명력이 다시 차오르고 있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습니다. 베시아를 구해주며 소모했던 것을 돌려드렸을 뿐이지요.”
...다시 생명력이 차오르는 거, 아마도 부활 후유증이 줄어들어서 그런 거 아닐까.
그렇다 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유물을 받아놓고 다시 뱉을 순 없으니 조용히 했다.
암, 암, 당사자가 저리 좋아하는데, 초를 칠 필요가 있겠는가.
주교는 방에서 쉬고 있으라고 하며 돌아갔다.
암만 그래도 날 다시 꺼내서 베시아에게 가기에는 저기 바깥에 병실을 지키고 있는 사제에게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야 어차피 안 죽는다고 하더라도, 베시아는 죽을 수 있는 중환자다.
어찌 되건 절대 안정이 필요했다.
아까처럼 멀쩡히 일어나서 이야기 나누는 것도 이상하지.
그래서 여유를 틈타 별의 근본의 진정한 활용성을 시험해보려 했다.
왜 대마법사가 이 유물을 지니고 있겠는가.
마나를 품고 있음은 물론이고, 막대한 증폭까지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마나를 써 본 적은 없지만….”
마기와 근본적인 부분은 비슷했다.
애당초 마법의 극의를 목격까지 한 나로서, 마법을 못 쓰는 건 이상했다.
“그렇다 해서 마나를 몸에 담을 순 없으니.”
마나를 몸에 담는 순간, 마기와 충돌하여 흑마법을 쓸 수 없게 된다.
흑마법으로도 충분히 강력한 마당에 뭣 하러 마법을 배워서 기존의 것을 쓸모없게 만들겠는가.
손가락을 튕긴다.
어설프게 따라 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잘 됐다.
허공에 떠오른 하얀 빛.
흑마법사가 초월에 이르더라도 불가능한 속성 마법.
라이트(Light)
기초 중에 기초지만.
충분했다.
**
“교회조차, 이렇게 썩었을 줄은 몰랐구나.”
충격적인 일들의 연속.
레베가 주교는 더없이 피곤했고, 피곤함에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유물을 얻어 온 것조차 주교가 특별한 것을 지불했기에 얻어 온 게 아니었다.
베시아가 성녀가 될 것을 약속한 것도 아니었고, 주교가 쥐고 있던 특권을 내놓았던 것도 아니었다.
오늘 만났던 추기경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주교님, 베시아 사제가 많이 다쳤다고 들었습니다.’
‘예, 요아스 추기경님.’
‘유물이 필요하다고 하셨지요? 마침 그 소녀에게 도움이 될 법한 유물이 있습니다.’
그러며 추기경은 입이 떡 벌어질 법한 유물을 내밀었다.
중환자를 위해서 주었다기에는 주교마저도 감당하지 못할 별의 근본.
‘이번 일에 대해서 조용히 있어 주셨으면 합니다.’
‘...예?’
‘왕가에서 움직였습니다. 이쯤 마무리하는 게 나아 보입니다.’
주교는 개인적으로 이 사안에 대해서 파헤치고 있었다.
수도 근처에 자리한 흑마탑.
베시아의 경악할 법한 증언들.
그리고, 확신은 못 하지만 이 일에 뒷배라 생각되는 건….
바로 왕가였다.
“그러면 안된다.”
주교는 이를 악물었다.
교회가 도와주지 못할망정.
이 일을 묻으려 하다니.
“왕가가 그럴지언정, 우리가 그러면 안 된단 말이다.”
하지만 별의 근본.
추기경은 이 일에 큰 피해를 본 베시아를 배려하기 위해 쥐여준 것이겠지만, 모든 생명력이 고갈되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소년에게 꼭 필요했던 것.
도저히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하구나.”
당장이라도 성기사단을 끌고 가 왕가에게, 왕족들에게 배교의 죄를 묻고.
교회를 뒤집어 왕가와 결탁해 쌓아둔 부정들을 드러내고 싶었으나.
현실적인 한계에, 당장의 필요성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꺾이지 말아야 할 신념이 무너졌고.
그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말아야 할 굴복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지금 잠시일 뿐이다.”
주교는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인맥, 저력.
이 모든 걸 동원한다면, 부정에 분노할 이들이 모여들 테니.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그리하여 그는 열띤 손놀림으로 집필을 시작했다.
뒤에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