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아, 진짜 기네요.”
캐론은 저 기다란 줄에 탄식하기보다는, 감탄하였다.
저렇게 많은 사람은, 평생을 시골에서 살아온 캐론에겐 여태껏 보지 못한 광경이다.
나는 캐론에게 말했다.
“너도 시험 봐 볼래?”
“네에?!”
캐론은 깜짝 놀라면서도 약간 고민을 하는 기색이 보인다.
귀족도 아닌 평민이 아카데미를 입학하고 졸업하면, 탄탄대로를 걸어갈 수 있었다.
관료가 될 수도 있고, 공을 세워서 귀족이 될 기회도 주어진다.
장난이 아닌 진심이다.
만약 캐론이 시험을 원한다면, 기회를 줄 거다.
그렇지만 캐론의 태도는 단호했다.
“저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브리텐 가문을, 도련님을 모시고 싶어요.”
“그렇다면야.”
그래, 너는 메이드였지.
평생 우리를 모시고 싶어 하는 메이드.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겠다 캐론.
그녀는 숙소를 잡기 위해 먼저 자리를 떠났다.
시험의 신청은 어디까지나 본인이 해야 하는 일.
굳이 캐론을 옆에 붙여둘 필요는 없었다.
그나마 평민에 비하면 귀족들이 서야 할 줄은 꽤 짧은 편.
귀족들이야 당연하게 다니는 아카데미라 하더라도, 평민에게는 출세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런 만큼 아카데미에 입학하고자 하는 평민들이 상당히 많았다.
“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대리 등록도 못 하게 하는 꼰대들 개 짜증 나네.”
그러는 반대로 귀족들은 반의반도 안 되는 줄을 기다리는 것에 온갖 짜증을 부렸다.
아카데미 과정에 진심인 귀족들도 있지만, 그게 아닌 귀족들도 많았다.
자기 영지 내에서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는데, 뭐하러 모든 학생이 평등한 아카데미에 머물고 싶겠는가.
어찌 되건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내 차례까지 도달했다.
접수원이 날 불렀다.
“다음, 오세요!”
의자에 앉자 접수원이 물었다.
“이름이 뭐죠?”
“아르갈 브리텐입니다.”
“귀족이시기에 시험은 자동 통과될 수 있으나, 시험을 치르고 상위 성적을 받아서 종합반에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시겠습니까?”
귀족은 기본적으로 아카데미를 다녀야 하기에 시험에 떨어져도 자동 통과였다.
그러한 귀족은 보통, 귀족 반이라 불리는 귀족들만이 속한 반에 들어간다.
하지만 종합반.
시험을 통과한 귀족, 사제, 평민 상관없이 모두가 속하는 반.
아무리 귀족이라 하여도 종합반에서 입학하고 졸업해야, 제대로 아카데미 과정을 치렀다고 취급해 주었다.
“종합반에 들어가겠습니다.”
“다음으로, 실기를 치르겠습니까? 이 실기에서 부상이나 사상자까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아카데미 입학시험의 꽃.
그러며 동시에 매년 논란을 일으키는 시험.
실제로 몬스터를 잡고 싸우는 실기 시험이었다.
“하겠습니다.”
이걸 하지 않으면 1반에는 절대 들어갈 수 없었다.
1반은 그 무엇보다도 무력을 중시하는 곳.
전통적으로 용사가 들어가는 반이자, 용사 동료들이 모이기에, 어찌 보면 무력이 최우선 순위였다.
그래서 다양한 실기를 하기도하고.
입학시험의 실기는 워밍업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런 만큼 최상위권만 모으고, 거기에 귀족과 왕족까지 끼는 거지.
내 손에 입학시험 번호표가 주어졌다.
종이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어두고는 아마 숙소를 잡고 돌아온 캐론을 보려 했던 참이다.
“이런 개년이!”
꽈악!
무척이나 화나 보이는 목소리로 귀족은 제 앞에 있는 사람의 어깨를 꽉 누르며 말했다.
“별 볼일도 없는 것이 내 앞을 새치기 해?”
처음은 말다툼이었는데, 이젠 싸움으로 번지는 모양,
귀족들만 모여있는 공간이라 그런지 주변인들은 다소 방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나야 그러건 말건 바깥으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얼굴이 어디선가 익숙하다.
“별 볼 일 없다라.”
어깨를 저리 강하게 쥐고 있음에도 표정 하나 안 바뀌는 소녀.
감정이 없다시피 한 무뚝뚝함.
그런데도 지닌 확고함.
맹독 같은 보랏빛 머리카락과 어두침침한 검은 눈.
누가 보더라도 음침해 보이는 인상.
용사의 동료 중 하나.
창성(槍星)이다.
...왜 창성이 저기서 저러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차근차근 해명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잠시 줄을 이탈했을 뿐이지, 내가 너의 앞에 있었다는 사실이야 잘 알고 있지 않아?”
“줄에서 벗어났으면 다시 뒤로 돌아가야지!”
“최소한의 융통성마저 없나? 급한 일이 있어서 잠시 줄을 벗어난다고 다시 처음부터 줄을 서야 한다면, 계속 참아야 하는 건가?"
서로 일리 있는 말을 하고 있기에, 귀족들은 딱히 어느 편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지루한 줄 서기에서 흥밋거리가 하나 생겼기에 열심히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창성 네가 융통성을 꺼내기에는.
융통성 없기로는 그대가 끝장판 아니었던가.
그러는 와중에 먼저 욕지거리를 박았던 귀족이 손을 내저었다.
이런 일로 더는 싸우고 싶지 않은 모양.
현장에 있는 관리인들도 더 일이 커질까 봐 접근했다.
“되었다. 너 같은 놈과 말을 더 나누어봐야 뭣 하겠나.”
“어디서 발을 빼려 하는가?”
“뭐?”
창성은 손을 움직이자 자연스럽게 기다란 창 하나가 생겨났다.
..창성의 유물이다.
창의 단점인 들고 다니기 불편한 점을 해결해주는 좋은 유물.
그녀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평생 함께했던 창을 소녀였던 시절부터 들고 있었다.
그리고 창성은, 자신의 모욕을 못 참는 편이다.
가족 욕이나 친구 욕은 참거나 신경 안 써도.
그러니까, 그냥 꼴통이다.
“날 모욕했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하, 네가?”
스릉-
창성에게 도발이 걸렸던 귀족은 곧장 검을 꺼내 들었다.
갑자기 시작된 귀족끼리의 결투.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에 많은 시선이 쏠렸다.
창성의 워낙에 괴이한 성격을 자랑했다.
강자라면 오히려 좋다고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게 바로 그녀다.
그럼 만일 약자가 앞에 있다면?
창이 한 번 움직이자 귀족의 검이 날아갔다.
땡강!
“어…?”
그리고 창대가 보이지 않는 속도로 귀족의 두개골을 가격했다.
퍽-!
“끄억!”
털썩.
단 두 번의 휘두름에 끝나버린 결투.
역시 창성은 창성.
훗날 마왕군 간부들의 목을 날려버린 그녀의 재능은 벌써 빛이 나고 있었다.
상대가 고작 기사만도 못한 실력이라 해도, 두 합 만에 때려잡는 건 기사를 뛰어넘는 실력이라는 방증.
그런 이들만이 제1반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자기 차례가 다가온 창성은 유유히 접수대 앞에서 제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저…. 이름이 뭐죠?”
“아셀 몬트로즈.”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보통, 별의 칭호를 받는다면, 창성 외에는 이름으로 불릴 일이 없어서다.
“도련님.”
“아, 그래.”
너무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던가.
캐론이 숙소를 잡고 돌아왔다.
“괜찮은 숙소를 잡았습니다. 워낙에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자리가 동나긴 했지만, 있긴 있더라고요.”
“수고했어.”
여기서 더는 머물 이유는 없으니 몸을 돌렸다.
시험 접수 때부터 창성을 목격했다니.
괜찮은 소득이다.
**
“준비는 다 됐나?”
보기 드문 미청년인 그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한쪽 뿔이 부러진 괴이한 존재가 말했다.
[그렇소이다. 왕태자여.]
“이렇게까지 해서 아카데미를 박살 낼 필요가 있는가? 실로 이해가 안 된다.”
[우리의 주적이 자라나는 곳이기에. 어쩔 수 없소이다.]
“그렇다면 용사 하나만 죽이면 될 일이지.”
[용사는 지금 죽일 수 없소.]
“...그 또한 더욱 이해가 잘 안 되는군.”
왕태자는 더 생각하기 싫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암브로시아가 무너져서 손해가 꽤 크기에, 해결을 부탁하지."
[마왕님의 천칭으로 알아서 계산될 것이오.]
”...그 천칭, 참 만능이긴 하지.“
천칭.
이번 대 마왕의 고유 능력이자 절대적인 거래의 기준.
무엇을 주건, 그 가치에 걸맞은 대가를 치른다.
현 마왕이 공정의 마왕이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암브로시아의 뒤를 파는 주교가 있다. 이름은 레베가 주교, 왕가가 직접 간섭까지 했음에도 간이 꽤 크더군.“
[그 또한 처리하겠소, 두 가지 방안을 제시하지. 빠르지만 소란스럽게, 느리지만 깔끔하게.]
”느리지만 깔끔하게,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는 건 벌집을 쑤시는 것이니.“
한쪽 뿔이 부러진 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사라졌다.
왕태자는 중얼거렸다.
”아카데미 인원의 절반 이상이라….“
마왕군 쪽에서 요구한 것은 단순했다.
거의 씨 몰살에 가까울 정도로, 아카데미를 망가뜨릴 테니, 왕가는 가만히 있어 달라는 요청.
여기에 지급한 대가가 거대했기에, 왕가는 기꺼이 수락했다.
그러면서 가장 큰 위협인 용사는 죽이지 않는다니.
마왕군의 판단은 기이했다.
”어떤 미래를 가져다줄지도 모를 유망주에, 목멜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왕가는 암브로시아가 가져올 영생의 축복에 무한한 영광을 누릴 테니.
왕태자는 그리 확신하며, 몸을 돌렸다.
왕가는 천칭의 거래 아래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
시험은 금방 시작했다.
워낙 다양한 사건사고를 겪은지라, 신청 접수 막바지에 도착한 덕분.
사실, 엄연히 따지자면 실기를 신청한 학생들은 필기시험에 그리 열정적으로 할 필요가 없었다.
이건 관료, 장교, 마법사, 마법 연구자가 될 인재를 거르는 작업.
기사 같은 다양한 전투직인 이들은 실기에 목숨을 걸면 됐다.
암만 1반이라도 마찬가지.
모든 것이 최고점이어야만 속할 수 있지만, 실기에서 압도적이면 1반으로 억지로 데려간다.
"적당히 해야겠어."
그리하여 시작한 필기시험.
조금이라도 부정을 저지르면 바로 참수시키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시험관들을 살피며 그들이 나눠준 시험지를 받았다.
역사, 사회, 수학, 외국어 같은 기본적인 시험 과목은 지루하기도 하고, 솔직히 잘 알지도 못했다.
이 부분이야 관료만을 위한 시험.
그쪽 방향을 원하는 게 아닌 이들은 아예 덮어버리고 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야 대충 끄적거렸다.
어차피 중요한 부분이 아니기도 하고.
그런 와중에 뒤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후후후, 이거 완전 쉽네요. 정말.“
어떤 소녀의 목소리.
얼마나 자신감이 넘친다면 저런 말을 할까.
고개를 슬쩍 돌려 살펴보니, 머리에 커다란 고깔모자를 쓴, 전형적인 마녀의 인상을 한 미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동글동글한 얼굴, 뾰족한 눈 끝. 두 눈은 은은하게 노란색이었으며 머리카락은 검은 단발이었다.
다소 인상적이지만 따로 기억이 나는 존재는 아니다.
보통이라면 일찍이 죽었거나, 별 볼 일 없는 사람이거나 둘 중의 하나.
내 뒤에 있던 소녀는 10분도 안 돼서 시험지에 모든 답안을 체크해 내려갔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만약 저 소녀가 전부 정답을 맞히는 중이라면, 조금은 가져가 볼까.
흑마법 중에서는 극한의 은밀성을 지닌 흑마법도 있다.
물론 마기를 활용하기에 대부분은 들키지만, 그조차 어느 정도 수준이었을 때.
흑마법을 사용한다.
품속 단검에서 은밀히 흘러나온 마기는 궁극의 경지에 맞춰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눈알을 만들었다.
그 눈은 내 시야와 연동되어서 모든 게 보이기 시작했다.
눈알은 시험장의 허공을 부유하고 있음에도, 그 어떤 시험관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때 초월에 가까웠던 흑마법사가 진심으로 커닝하면, 막을 방법이 있겠는가?
그건 결과를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며, 실제 결과도 마찬가지다.
모든 시험의 정답을 저 소녀에게서 가져왔다.
소녀야 매 순간순간 자신감 넘치게 정답을 쓰고 있으며, 그 답안은 내가 보더라도 합리적이다.
그리고 시험의 막바지.
누군가에겐 가장 중요한 시험이기도 한 것.
마법학 시험.
최강의 난이도, 아카데미 역사상 아무도 만점을 받지 못한 극악의 시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커닝을 하려 했지만, 마법학 시험지를 받아든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이거 내가 다 풀 수 있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