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안 죽는다니까-25화 (25/69)

상처투성이인 창성을 어찌어찌 수습해 주었다.

근처에는 검성이 팔짱을 끼며 망을 보는 중이고, 프랑이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 주었으며, 라엘리는 잠시 바닥에 앉아 가방에 든 짐을 갈무리했다.

아무래도 그녀가 내 가방까지 두 개를 동시에 드는 것보다는 짐을 한 가방에 몰아두는 게 나았다.

...여기에 성녀와 대마법사만 있으면 사실상 용사 파티 아닌가?

용사 없는 용사파티라.

이런 일이 생기기도 하는구나.

일단 할 건 해야지.

나는 어느 정도 치료된 창성에게 다가가 말했다.

“감사 인사.”

“...뭐?”

“고맙다고 해야지.”

창성의 다리에 붕대를 감아 준 프랑에게 고마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당연한 이치를 따져 묻자 창성은 제 머리를 감싸며 거부했다.

“시, 싫어.”

“싫다고?”

내가 단검을 슬쩍 들어 올리자, 창성은 몸을 더욱 웅크렸다.

...이거 재미있는데?

회귀 전 그녀에게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없었는데 말이다.

창성은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너, 때문이잖아….”

“나? 이유가 뭐지?”

“너랑 결투하느라 힘을 다 써버려서…. 발을 삐끗했잖아.”

확실히 창성은 창성이다.

지금 와서도 꼴통 같은 인성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한 대 더 후려쳐줄까 고민을 했지만, 이번만큼은 봐주기로 했다.

어차피 창성이 이럴수록 훗날 나에게 인성교육을 제대로 받을 것이다.

검성, 창성의 인성으로 인하여 용사파티가 얼마나 망가졌는가.

검성은 겉은 멀쩡하나 속내가 몸을 배배 꼰 구렁이처럼 더러웠었고, 창성은 사회 부적응자라 봐도 무방했다.

그걸 직접 지켜본 나로선, 이들의 생각과 성격을 최대한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길 원했다.

...오늘과 같은 거듭된 고난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지.

안 그래도 성격 안 좋은데, 더 안 좋아진 셈이다.

프랑은 창성에게 사과를 받건 말건 관심이 없어 보였다.

붕대를 감아 주는 것조차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느낌이지.

사람 대 사람으로서, 대화하려는 노력을 안 하는 중이었다.

“그럼 처음부터 다시 설명 해 볼까?”

어쩌다 보니 창성도 새로 합류했으니 여태껏 했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해 주었다.

창성은 그 말을 듣곤 웅얼거렸다.

“용사에게 합류하는 방법밖에 없네….”

“근데, 우리가 용사와 합류한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용사를 찾아?”

라엘리가 중요한 문제를 꺼내었다.

확실히 우리가 용사의 위치를 모르긴 하지.

그러나 간접적으로 알 방법이 있다.

“마물과 마족들이 한 곳에 몰려들고 있다.”

“그럼 뻔하네요.”

괴물들이 뭣 하러 모여들겠는가.

그곳에 용사가 있기 때문이다.

라엘리는 깜짝 놀랐다.

“그럼 벌써 위기 아니야?”

“아직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이미 꽤 많은 수험생이 죽을 수도 있지 않겠냐는 라엘리의 의문.

아직은 걱정할 필요 없었다.

저 많은 마족 중에서 진짜들은 관망만 하는 중이니까.

여태껏 마기를 숨기고 있었는지, 저 결계가 생기자마자 갑작스레 드러난 존재들이 많았다.

중급 마족은 물론이고…. 심하면 상급 마족으로 추정되는 마기가 눈에 보였다.

상급 마족?

상급 마족은 이야기가 달랐다.

지금의 용사가 전력을 내더라도 이기지 못할 수준 아닌가?

이쯤 되니 이상했다.

어떻게 반 이상 살아나간 거지?

용사 혼자 살아도 기적일 텐데.

여기서 용사가 대오각성이라도 하나.

마왕이 아카데미에 밑작업을 쳤다는 건 확실했지만, 그게 어떤 방식인지는 전혀 몰랐다.

내가 마왕군의 간부가 된 것도, 용사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한 참 지난 시점이기도 하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만큼, 어느 정도 각오는 해야 했다.

용사 앞에서라도 흑마법을 사용할 각오를.

**

마물을 한 차례 막아내긴 했다.

전부 수험생에 불과했지만, 그런데도 전국의 재능있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다소 사상자가 생기긴 했어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 해서 상황이 나아진 게 아니다.

분위기는 최악이었고, 희망은 찾을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마물과 마족이 머무르고 있을지 모르는 숲속에서 갇혀버린 셈.

“하늘 높이 마법이라도 쏘면 시험관이 오지 않을까?”

이런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용사는 그게 의미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결계에 막힙니다.”

도대체 그게 뭐냐는 듯 누군가 물었다.

“결계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용사는 한숨을 쉬었다.

이걸 설명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된 것이다.

이야기해 봐야 이들에게 그 어떤 희망도 줄 수 없었으니.

그러나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이야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수험생 모두의 시선이 용사에게 쏠린 마당에 입을 닫아버릴 순 없으니까.

“이 숲 전체를 뒤덮는 결계가 갑자기 생겨났습니다. 외부에서 물리적으로 뚫기가 거의 불가능한 결계입니다.”

용사가 꺼낸 말은 실로 절망적이었다.

외부에서 그들을 구조할 수 없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은 단 하나였다.

누군가 간절히 말했다.

“요, 용사, 너라면 할 수 있겠지?”

“...무엇을요?”

“우릴 구해줄 수 있잖아? 그치?”

용사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 혼자라면 어떤 고난과 위험이 오더라도 견뎌낼 자신이 있었다.

신에게 받은 가호와 축복받은 신체가 있었으며.

설령 죽음에 가까워져도 한 번은 되살아날 기회도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을 모두 살릴 수 있을까.

그녀 혼자서 저 많은 수험생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물은 사방에서 덮쳐왔고, 그녀는 한 곳만 막아낼 수 있으니까.

용사는 간절히 바랐다.

누구 단 한 명이라도.

비어있는 방면을 막아낼 수 있는 강자가 합류해주길.

그렇다면 나머지는 그녀가 기꺼이 감당하리라.

뼈가 으스러져도, 막아내고 또 지탱하여 버텨서겠다.

이 작은 차이가 여기 있는 수험생들의 절반이 죽느냐, 아니면 대부분이 살아남느냐의 격차를 낳을 테니까.

그리고 이런 역량을 지닌 수험생이 아예 없던 건 아니다.

아셀, 라인하르트, 프랑…. 그리고 그 남자까지.

아르갈.

과연 그가 도와주러 오겠는가?

오히려 본색을 드러내어서, 마족들과 함께 우릴 공격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들었다.

“일단 우리, 뒤로 돌아가자, 숲속으로 얼마 들어가지도 않았으니까.”

또 다른 수험생이 주장했다.

아직 시험이 시작한 지도 하루가 안 지났다.

왔던 길로 돌아가면 빠르게 숲을 벗어날 순 있었다.

그렇게 주장한 수험생에게 용사는 단호히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용사는 저 뒤에서 도사리고 있는 마기를 느낀다.

최소한 중급 마족 수십.

그녀 혼자서 결코 막을 수 없는 폭탄.

저것과 정면으로 충돌하면 분명 다 죽는다.

“아니 도대체 왜? 일단 결계에 도착하고 나서 무슨 방법이라도 써보기라도 하는 게 낫겠지! 뭐가 나올지도 모를 숲을 더 깊게 들어가겠다고?”

“...”

이번만큼은 용사는 이유를 말해주기가 힘들었다.

그들 뒤에 중급 마족 수십이 따라온다?

이야기하는 순간 모두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사기가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박살 나는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직 경험을 전부 쌓지 못한 구원자이기에.

성검조차 받지 못한 용사였기에.

아직 그녀는 누군가를 이끌어야 할 어른이 아니었기에.

어떻게 해야 희망을 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런데도 수험생들을 이끌어야만 했다.

모두를 죽게 놔둘 수 없었으니.

언제나 그렇듯, 용사의 의무가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누른다.

결국에는 진실과 다른 말을 전했다.

“저 뒤에 더 위험한 존재들이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뒤로 가는 길을 차단한 모양입니다.”

“아아…. 이럴 수가.”

최대한 순화해서 표현했지만, 수험생들의 절망이 터져 나왔다.

희망 한 줌 없는 상황에 안 좋은 이야기만 나오니 당연했다.

이러다 다 죽는 게 아니냐며, 벌써 앞으로의 상황을 비관하는 이들도 보였다.

용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험을 막을걸.

아니면 차라리 적극적으로 움직여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S등급의 동료를 영입할걸.

그러나 후회는 늦었다.

“우선, 갑시다. 가만히 있으면 바뀌는 게 없어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이곳을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

“괜찮아 미카론?”

마물의 습격에서 겨우 살아난 블래쉬는 상처를 입은 친구를 걱정하며 물어보았다.

하필 위치도 다리.

뚜벅거리는 미카론을 어깨동무하여 겨우겨우 끌고 가고 있었다.

“끄으, 죽겠어 정말.”

“조금만 버텨봐, 그래도 용사가 있는데 방법이 생기겠지.”

남아있는 희망은 오직 용사 하나.

역사적으로 매번 마왕에게서 세계를 구원하고, 대륙의 최강자로 군림하는 게 용사였다.

지금의 용사가 아무리 어리고, 성검을 받지 못한 상태라도, 그러한 신뢰는 존재하는 법이다.

부상한 사람이 다수 있다 보니, 휴식 시간이 중간중간 많이 생겼다.

게다가 조금 전만 해도 격렬한 전투를 치른 상태.

오히려 급하게 가려고 하면 더욱 문제가 커졌을 거다.

블래쉬는 자리에 앉아서 미카론의 다리를 살폈다.

상처 사이로 흘러나온 피로 붕대가 흠뻑 젖어있었다.

붕대를 갈어야만 했다.

“미카론 너 붕대….”

“그, 미안한데 다 버렸어.”

“이런.”

블래쉬가 가진 의약품은 이미 다 쓴 지 오래였다.

설마 짐이 무거워서 버렸다는 소리가 농담인 줄 알았더니, 미카론도 버린 것이었다.

쓸 수 있는 붕대가 없다.

“...일단은 빌려올게.”

그러나 그에게 의약품을 빌려주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다친 사람은 많고, 다치지 않았더라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블래쉬가 금화를 약속해도 동화 몇 푼에 불과한 붕대 하나 안 내주려 하고 있었다.

그가 한숨을 푹 쉬며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전신을 뒤덮는 공포가 그의 등골을 타고 올라갔다.

그것이 뇌에 닿았을 때, 고개를 돌리니 저편에 보이는 사람의 형체가 있었으니.

형태는 사람이었으나 사람이 아닌 것.

숲에서 걸어 나오는 괴물이 있었다.

[크, 크흐흐 맛, 있어 보이는 것들이, 떼거리로 여기에, 있네 에?]

이 일대를 짓밟는 듯한 압박감.

그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기사 여럿이 달라붙어야 하는 강적.

중급 마족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용사는 바로 뛰쳐나갔다.

어중간한 수험생이 잘 못 달라붙는다면 그대로 죽는 상대다.

여기선 용사가 아니라면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한 판단이었고, 그리해야만 했다.

그러나 적은 중급 마족 하나만이 아니다.

비슷하게나마 사람의 형체를 한 괴물들.

하급 마족들도 한둘씩 나타났다.

용사는 중급 마족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하급 마족도 버틸 수 없는 수험생들에겐 그야말로 위험한 상황.

그우어어어어어!

“크윽!”

-카각!

블래쉬는 검을 뽑아서 마족의 공격을 겨우 막아냈다.

강철과 마족의 손톱이 부딪쳤을 뿐인데, 검의 이가 전부 다 나가버렸다.

테스트를 봤던 당시의 하급 마족보다도 더 강한 상대였다.

마족을 잡았던 수험생은 오직 다섯.

그리고 다섯 중 하나만이 여기에 있었다.

그 하나인 용사는 중급 마족을 상대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수험생들은 마족에 대항할 방법이 없다는 소리.

“아.”

블래쉬는 직감했다.

이 자리가 나의 무덤이구나.

승작의 꿈을 꾸었으나, 이렇게 죽는구나.

쾅- 콰각- 으드득!

몇 번이고 마족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가장 먼저 무너졌던 건 그가 들고 있던 검이었다.

부러진 검날이 허공을 날았다.

마족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괴물이 하늘 높이 손을 들어 올려 사냥감의 최후를 장식하려 했다.

블래쉬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결말을 그려보더라도 자신의 목이 날아갈 것이 확실했다.

저 뒤에 비쳐오는 밝은 빛이 아니었다면.

파각!

“어…?”

마족의 목이 날아갔다.

그건 한순간이다.

힘없이 마족의 시체가 바닥을 뒹군다.

블래쉬는 시선을 돌렸다.

저 먼 곳에 다섯 정도 되는 인영이 보인다.

그중 한 명의 가슴 부근에서, 강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가 누군지 안다.

이 시험에서 가장 약한 사람이라며 모두가 조롱하였고.

마족을 잡아냈음에도 기물에 의존한다며 외면했으며.

기물을 활용함으로써 얻은 결과는 아카데미에서 인정 안 하고 탈락시킬 것이라.

그리 생각했던 상대였다.

그는 블래쉬가 결코 이기지 못할 마족의 목을 단 한 번에 날려버렸다.

그리고 블래쉬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목걸이 위로 손을 올린 아르갈은 말했다.

“쓸어버려.”

유일하게 마족을 죽일 실력을 지닌 S등급의 수험생 전부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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