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는 이러한 참사를 예상했었다.
그러며 예상이 부디 틀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항상 그녀의 뒤를 쫓는 커다란 마기.
중급 마족이랑 비교도 할 수 없는 힘.
그 존재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와서, 결국 등장했으니.
그리하여 절망을 주었다.
검은 흉갑을 껴입고 나타난 상급 마족은 실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남에게 의존하고 싶었다.
다시 혼자 일어서고.
또다시 혼자서 뒤엎고자 검을 들어 올리고.
혼자서 모두를 구원하고.
이를 반복하기에는 그녀도 무언가 지쳐가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여기서 한 발자국만.
누군가 더 죽음을 맞이하고, 그녀가 더는 버티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면.
그녀는 무너지리라.
시선이 다른 이에게로 움직였다.
그러한 절박함 속에서, 그녀가 원했던 건 구원이었다.
매번 남을 구원 하는 게 아닌, 구원받고 싶었다.
시선이 옮겨졌다.
“부디….”
아르갈을 바라보았다.
그와의 인연은 정말로 기이했다.
꿈속에서는 그가 수도를 무너뜨린 악인이었다면, 지금은 헌신적으로 용사를 돕는 조력자이자 그녀의 구원자였으니.
이런 간극은 어디서 나오는가.
용사로서, 남에게 의존하면 안 되겠지만, 이번만큼은 의존하고 싶었다.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흔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커다란 마나의 움직임이 흐른다.
미리 준비라도 해 놓았는지, 그의 목걸이는 폭포수처럼 마나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 마력을.
제 신체에다 불어넣는다.
곁에 있던 프랑이 깜짝 놀랐다.
“잠깐만요. 아르갈!”
마력, 신성력, 마기 전부 다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용사에게도 충분히 저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몸 전반이 망가질 정도의 신체 강화.
만약 이 싸움이 끝나더라도, 그는 한동안 거동조차 못 할 것임을 용사는 깨달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은 남에게 의존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르갈은 모든 여력을 다했다.
이 한 번의 전투에 제 목숨을 걸었다.
죽을 수도 있음을 알고도.
가장 먼저 나선 것이다.
다시 손을 움직여 수험생 하나를 죽이려던 상급 마족에게 아르갈은 일격을 날렸다.
그의 단검이 상급 마족의 손에 부딪혔다.
퍼걱!
[넌, 무엇이냐.]
용사는 항상 누군가에게 등을 보였다.
약한 자, 핍박받는 자, 다친 자, 선한 자.
그리고 아르갈의 등 뒤를 보았다.
그 소년의 등은 참으로 무거운 짐을 짊어진 듯싶었다.
도무지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차라리 마주 선다면 마주 섰지.
아르갈은 일어선 용사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마치 그런 게 익숙한 듯이.
격려해 줬다.
“혼자 짊어질 필요 없다. 용사.”
“...아르갈.”
용사는 저 한 마디에 이루어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머리끝까지 몰려들었다.
혼자 짊어지려 했다.
혼자서 이겨내려 했다.
그러나 짐을 들어주는 사람이 한둘씩 늘어나다 보면.
그 짐은 가벼운 깃털이 되리다.
뒤이어서 라인하르트가 검을 꺼내 들었다.
-스릉.
“여기서 다 죽는다면 수지타산이 안 맞는군.”
겨우 수험생들을 살려서 여기까지 왔더니만, 죽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항상 이성과 현실을 바라보았던 그가, 상급 마족 상대로 검을 들어 올렸다.
아셀이 창을 맨손에다가 만들어냈다.
“...이길 수 없는 적에 대한 사투.”
그녀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마음에 들어.”
프랑이 커다란 마나를 모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으로 가득 찼다.
“무리만 하지 마요. 아르갈.”
수험생들이 죽음을 각오했다.
“검을 들어!”
“여기서 살아남는 거야!”
“이게 진짜 마지막이다!”
하나같이 검을 들고 마법을 준비했으며, 실로 그 전의란 하나의 군대에 가까웠다.
어차피 벗어날 수도 없는 낭떠러지.
검 한 번 휘두르고 떨어지리다.
검성이 외쳤다.
목에 핏대가 생겨날 정도로.
그 열기가 폭탄처럼 터져나갔으니.
“적은 오직 하나!”
마력이 담긴 목소리가 이 공간 모두에게 들려온다.
“절대 물러서지 말아라!”
결의를 다지고, 죽음을 각오하여 이 자리에 선다.
“그렇다면 모두가 살 수 있다.”
숲 근처 아주 평화로웠던 평야 위에.
목숨을 건 사투가 시작됐다.
수험생들의 함성이 이 땅을 진동시켰다.
**
뭐지?
왜 다 나서서 상급 마족이랑 싸우려는 거지?
나야 당연히 앞으로 나선 것에 불과했고, 좀 지쳐 보이는 용사를 위로해주었을 뿐이다.
겸사겸사 전신에 무리가 올 정도로 신체 강화도 하고.
그런데 그 모습에 모두가 감동이라도 한 모양이다.
검성, 창성, 프랑, 라엘리.
그 네 명은 물론이고 수험생들까지 전부 격양되어 검을 뽑아 들었으니.
이런 효과를 기대한 적은 없지만 어찌 되건 잘된 일이다.
굳이 마기까지 활용해서 상급 마족을 잡을 필요는 없어졌으니까.
이 정도 전력이면 상급 마족을 충분히 잡을 만하다.
상급 마족이 무서운 이유는 작정만 하면 손짓 한 번으로 적을 죽여서 그렇다.
그런 압도적인 모습이 저항할 의지를 낮췄다.
하지만 모두가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든다면?
정말 이길 수도 있었다.
용사의 각성이나.
나의 흑마법 사용 없이.
이 점을 상기시키며 가장 먼저 마족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뛰어들었다.
[불나방 주제에, 굳이 죽겠다면야.]
마족이 들고 있던 검이 움직였다.
신체 강화를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눈에 안 보일 지경이다.
확실히 상급 마족이다.
휘익-!
그렇지만 나는 그보다 더한 것을 회피했으며, 또 이기기도 했다.
고작 눈에 안 보이는 검이란, 전성기 검성이 지닌 무적에 가까운 검술에 비하면 하찮았다.
피하고, 또 피하고.
그리고 나의 마법 또한 활용됐다.
플래시(flash)
마족의 눈앞에 터져버린 강한 빛.
마족은 눈을 감싸며 괴로운 소리를 내었다.
[끄어어어억!]
파각!
그러는 동시에 공격이 쏟아졌다.
용사의 검이 갑주에 흠집을.
검성의 검이 타격을.
창성의 창이 한 점을 찌른다.
프랑의 마법이 밝은 빛을 내며 정확히 마족을 노리고 발사했다.
사방에서 얻어맞는 마족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다시 내가 앞에서 교란을 시켰다.
[크윽, 이런 날파리 같은!]
“날파리 한테 얻어맞고 있으면서?”
마족의 검이 사방으로 날아왔지만, 내가 눈먼 검 따위에 맞을 실력이 아니었다.
점차 마족의 시야가 밝아지고 있는지, 검이 살벌하게 내 목을 향하여 움직였지만, 이 또한 맞을 이유는 없었다.
상급 마족과 싸우는 패턴은 일방적이었다.
내가 시선을 끌다가 마족의 시야를 빼앗는 마법 한 방 쏘고, 마족이 거기서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공격을 쏟는다.
이렇게 무한히 반복할 수만 있다면, 손쉽게 잡을 순 있겠지.
하지만 난 알고 있다.
결국 이걸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내 몸이 가면 갈수록 관절부터 붕괴하고 있음을 알았다.
반대로 상급 마족은 아직 건재했다.
그 이유야 단순하다.
모든 피해를 흡수하는 물건이 있었으니.
흑색 갑주.
대전쟁 당시, 공포의 상징이었던 것.
저것을 부숴야만 했다.
**
[끄아아악! 개자식들!]
상급 마족은 한 대씩, 한 번씩 얻어맞는 걸 반복 당했다.
고작 개미들이 물어뜯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쌓이다 보니 갑주가 점차 무너지고 있음을 모두가 알아보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많은 활약을 보인 건 아르갈.
그는 쉼 없이 마족 앞에서 시선을 끌었고, 적당한 타이밍에 빠져서 수험생들의 공격을 유도했다.
그렇지만 프랑의 눈에는 보였다.
점차 고갈되고 있는 마나.
과부하로 인해 삐걱거리는 신체.
아르갈은 곧 한계에 다다를 것이고, 그렇다면 그때부터 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다.
저 상급 마족 앞에서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것이 프랑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아르갈! 거기까지 하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요!”
“...그러지.”
그는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분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라인하르트에게 신호를 주었다.
라인하르트는 긴장하며 상급 마족 앞에 섰다.
잔뜩 분노한 마족은 라인하르트와 마주하자마자 강력한 공격을 그에게 날렸다.
쾅-!
한 번.
단 한 번에 그의 자세가 흔들린다.
콰각!
두 번.
훌륭했던 명품 검이 망가진다.
콰득!
세 번.
완전히 무너져, 검이 아래로 내려갔다.
검을 맞대며 완벽한 반응을 보였으나, 힘의 격차가 여실히 느껴졌는지,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게다가 한 번 더 움직이는 마족의 검은 검성조차 반응하기 어려웠다.
그대로 맞는다면 몸이 반으로 두 동강 날 일격이 내려왔다.
그걸 막아주었던 건 아셀.
그녀마저도 이번 한 번이 한계이지, 또 한 번 더 저 검과 부딪친다면 무너질 것이다.
콰아아악!
“으윽! 정신 차려….”
“답이 없군….”
뒤로 물러난 라인하르트는 너무 심각한 격의 차이에 어찌 방법이 없음을 느꼈다.
다음으로는 용사가 마족 앞에 섰다.
마족은 분노에 가득한 상태로 검을 움직였다.
아르갈은 용사와 같이 합공에 들어가지 않고 조언했다.
무언가 준비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의 목걸이가 세차게 빛을 내고 있었으니.
“용사, 검을 막는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무조건 흘리거나 회피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몸을 내던진다는 느낌으로 공격해라.”
용사는 마지막 말을 이해 못 했다.
몸을 내던져라?
실로 위험한 말이었다.
검과 검 끝이 맞부딪치는 싸움에서 그런 짓은 동귀어진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할 이유가 없기에.
그는 용사가 죽기를 바라는 건가?
...그러나 여태껏 해왔던 행동을 바탕으로 그녀는 아르갈을 신뢰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 그대로 용사는 몸을 던졌다.
마족과 함께 검으로 춤을 추리다.
막는 것이 아닌 갑주에 검을 찔렀고, 조금이라도 더, 더 많이 마족의 갑주를 무너뜨리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러니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마족의 검은 번번이 그녀를 지나쳤다.
휘익-! 휘이익-!
“도대체?”
이것도 한두 번이지, 여러 번 반복되니 그녀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마족의 검에는 살심이라는 게 없었다.
무언가 의도적으로, 그녀를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용사가 저렇게까지 몸을 던질 줄 몰랐던 마족은 더없이 당황스러워했다.
마족은 결코 용사를 죽일 수 없었으니까.
그러한 틈을 타서 아르갈은 움직였다.
그의 신체에 세 배는 넘어보는 크기의 마법진이 생겨나더니, 거기서 솟아오른 푸른색의 사슬이 마족을 속박했다.
“이때다. 아셀.”
가장 강력한.
그리고 이 많은 인원 중에서 최고의 한 방을 지닌 것은 바로 아셀.
저 견고한 갑주를 뚫을 수 있는 건, 오직 그녀 혼자뿐.
아르갈은 알고 있었다.
아셀이 회귀 전에 일 점 찌르기로 저 갑주를 부쉈다는 사실을.
지금이 아니면 갑주를 깰 수 없었다.
아셀이 공격을 쏘아낼 때, 준비 동작이 길고 흘러나오는 살기가 매우 강렬했다.
완벽히 묶어낼 수단이 아니라면, 무조건 마족은 공격을 피할 것이다.
아르갈의 신호에 맞추어 그녀는 일 점 꿰뚫기를 준비했다.
두 눈을 또렷이 적을.
다리의 근육이 몸을 지탱하며.
상체는 흐르는 물처럼.
강렬한 살기와 힘이 한 지점에 모인다.
마족이 마지막까지 발악했다.
[네놈, 네놈들이 감히이이이이!!]
일 점을.
꿰뚫는다.
푸아아악-!
그러나 이 공격은 허무하게도.
“빗, 나갔어….”
허공을 내지르고 말았다.
아셀은 안타까움 가득한 목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 이유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르갈은 주저앉았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못 버텼다.”
완전히 힘을 잃은 전신.
마지막 마법에 모든 걸 쏟아부은 동시에, 신체를 지탱하여야 할 마나 조차도 고갈 났다.
다시 별의 근본에서 마나를 끌어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이미 몸이 망가졌기에 마법을 쓰기에도 여력이 없었다.
계산 착오였다.
예상보다도 그의 몸이 못 버텼고, 생각보다도 아셀의 일격이 늦었다.
몇 초간의 시간은 벌었지만, 창성의 일격이 온전히 닿기도 전에 마족을 묶고 있던 사슬이 풀려난 것이다.
[흐, 흐, 흐. 하하, 하하하하하!]
마족이 웃음을 지었다.
결국 그가 이 싸움에서 승리했기에.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잔챙이들이 무슨 소용인가, 가장 최대의 강적이 저렇게 주저앉았다.
무려 용사보다도, 껄끄러웠던 상대가 말이다.
그렇게 웃어젖히던 마족은.
모두의 몸이 굳어버릴 정도로 살벌한 살기를 흘리며 말했다.
[다른 것은 살아남아도, 넌 무조건 죽을 것이다.]
검에 강력한 힘이 깃든다.
아르갈은 회피할 방법이 없었다.
급하게 단검으로 손을 찔러, 마기를 끌어올 시간조차 없었다.
저 뒤에서 용사가 달려들었으나, 마족의 검이 더 빨랐다.
푸욱-
검이 몸을 꿰뚫는다.
아르갈의 두 눈이 크게 뜨인다.
검에 베인 건, 그가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에 몸을 던진 소녀가 피를 흘리며 말했다.
“내가, 말했지….”
라엘리는 제 몸을 꿰뚫은 검을 두 손으로 잡는다.
“지켜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