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안 죽는다니까-38화 (38/69)

“뭘 먹는 게 좋을까?”

예상보다도 메뉴가 다양해서 뭘 먹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커피라는 음료를 아예 처음 입 대보는 건 아니긴 하지만, 광기에 절여진 회귀 전하고, 지금 하고 맛이 다르게 느껴지겠지.

그녀들은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옷을 입어, 미모를 좀 더 빛나게 만들었다.

베시아야 평소에 사제복을 입다 일상복을 입으니 가장 기존과 대비되었고, 프랑은 그녀 스타일답게 귀여운 복장을 하였다.

라엘리야 답답한 걸 싫어하는 성격답게, 반팔 반바지를 입고 나왔다.

패션을 살피던 중, 베시아가 메뉴를 추천해 주었다.

“에스프레소 먹어봐.”

“도련님 그거 엄청 쓴…. 읍!”

“한 번 믿고 먹어보라니까?”

캐론이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옆에 있던 라엘리가 캐론을 제압했다.

...저러다 캐론 숨 막혀 죽겠다 라엘리.

커피의 지식이 풍부하다 못해 넘칠 게 뻔한 프랑마저도 조용히 있는 걸 보면, 뭔가 작당 모의라도 한 건가?

“...한 번 먹어보지.”

“탁월한 선택이야.”

그래도 메뉴로 당당히 올라온 커피인데 아예 못 먹을 정도는 아니겠지.

주문은 끝마쳤으니, 슬슬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로 했다.

베시아에게 물어볼 게 많았다.

“용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응? 그거야 남들 아는 만큼?”

“그럼 용사는 어떻게 선택되고, 어떻게 훈련되는지 알려줄 수 있는가?”

용사에 관해 물어보는 이유는 단순했다.

왕실이 무너지는 그때까지, 용사는 왕실을 신뢰했기에.

많은 사람이 죽은 마당에, 왕태자가 수험생들을 숲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 의심하지 않는다?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다.

세뇌하건, 왕실이 마땅한 근거를 제시하건, 다양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일단 용사는 신탁에 따라서 선택받고,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교육을 받지, 게다가 이번 대 용사는 고아이기도 하니, 용사한테는 교회가 자기 집이나 다름없을걸?”

예상했건만, 확실히 이런 구조라면 용사는 교회를 상당히 신뢰하거나, 의존하고 있었을 거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라났으니, 거의 부모나 다름없는 보육자들이 교회에 포진되어 있기도 하니, 실로 당연한 일.

이런 구조라 하여도, 교회가 신실했다면 큰 문제는 없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의심스러웠다.

레베가 주교가 적극적으로 암브로시아를 캐내고 싶어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교회에서 별 반응을 안 보이는 걸 본다면, 내부부터 무언가 부패하고 있다는 소리.

교회와 왕가가 결탁하거나, 최악의 경우 마왕하고 거래했을 수도.

따라서, 용사는 변질한 교회의 말을 따라서 왕가를 신뢰했을지도 모른다.

“커피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주문한 커피와 디저트들을 내려놓았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이 있다면, 다른 소녀들은 아주 큼지막한 컵에 담긴 커피를 받았다면, 나는 무척이나 조그마한 컵에 담긴 커피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게 에스프레소?

기대감이 잔뜩 담겨있는 주변의 시선을 느끼며, 한 모금 먹어봤다.

후릅-

그리고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커피가 아니라 사약 아닌가?

더럽게 쓰기만 했다.

대체 왜 이런 걸 추천하냐며 불만이 많아 보이는 표정을 하자, 베시아가 까르르 웃음을 지었다.

“푸, 푸흡, 어때? 맛이 없나 봐?”

“맛의 문제가 아니라, 이거 먹을 수 있는 게 맞나?”

“초보자한테는 이게 더 나을 거예요. 마셔보세요.”

그러며 프랑이 자기가 먹던 커피를 내밀었다.

생크림도 올라와 있고, 무언가 달달해 보이는 음료였다.

빨대로 빨아서 먹으니 바닥부터 올라오는 달짝지근한 알갱이의 맛이 일품이었다.

다시 프랑에게 음료를 돌려주니 그녀의 얼굴이 미묘하게 붉었다.

...설마 빨대 좀 같이 마셨다고?

실로 이해는 잘 안 된다.

“맛있네.”

“그걸로 새로 시킬까? 마침 돈은 많잖아.”

라엘리는 검성에게 받은 수표를 슬쩍 보였다.

그래 돈은 많기는 했다.

일개 학생이 쥐고 있기에는 엄청난 돈이었으니.

라엘리의 과소비를 목격한 프랑이 바로 집중 공격에 나섰다.

“그거 집안에다 보탠다고 하지 않았나요?”

“흠, 흠, 반은 보냈고, 반은 내가 생활비로 써야지.”

“생활비로 쓰기에는 집 하나 살 수도 있는 돈을 함부로…. 그래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어요?”

“내 돈은 내가 알아서 쓸 거거든?!”

둘이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천천히 고민해 봤다.

가장 중요한 건 두 가지.

첫 번째로 내가 초월에 이르러야 한다.

마왕을 죽이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

단지 문제가 있다면, 회귀 전이야 각종 편법과 악마의 계약과 주술적인 힘으로 온몸이 넝마가 되어 도달했다면, 지금은 그런 방법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서 올라가는 게 맞다.

나에게 주어진 길은 두 가지, 흑마법사와 마법사의 길.

다만 흑마법사를 혐오하는 용사 앞에서 당당히 흑마법사가 될 순 없는 법이다.

지금이야 단검의 마기만 빌려 쓰는 반쪽짜리 흑마법사라서 변명할 수 있지만, 몸속에 마기가 담긴 써클을 만든다면 그대로 끝장이다.

그렇다면 마법사가 된다?

실로 처음 걷는 길이지만, 마법사의 정점에 이르는 극의를 알고 시작하기에 이점이 많았다.

마법사가 되는 것도 나에겐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하는 순간 흑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것.

강력한 전력 중 하나가 잘려난다는 것이다.

이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고민 없이 몸에 마나 써클을 세길 텐데,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용사의 강함이다.

보통의 용사는 초월자에 이르는 게 순리.

성검을 받는 게 그 기점이다.

그러니 성검을 수여 받는 걸 막아야 하는데.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용사를 죽여도 볼까 고민했으나.

이건 의미가 없었다.

마왕에게는 자신이 내건 천칭의 규칙을 무시할 수 있는 ‘불문율’이라는 권능이 있으니.

용사가 죽어서 마왕도 천칭에 의하여 죽을 위기에 처하면 그 권능을 쓰면 될 뿐이다.

게다가 어떤 방식으로든 용사의 초월을 막아도, 그 뒤에도 여러 문제가 산적되어 있었다.

용사가 초월조차 못 한다면 마왕군 간부는 누가 잡는가.

용사의 동료가 잡아야 하는데, 기존의 전력만으로는 쉽지 않았다.

이쪽이야 갓 초월한 애송이 초월자라면, 마왕군 간부는 100년은 썩은 노련한 초월자였으니까.

그래서 전력을 더 강화해야 한다.

이번에 살아남은 유망주들이 떠올랐다.

그들 모두가 상당한 재능을 지니고 있고.

상급 마족을 몸으로 붙들어 잡으려 한 용기 또한 대단하게 여겨줄 만했다.

분명 마왕이 절반 이상씩이나 죽이려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분명, 키워볼 가치가 있을거다.

쭈르릅-

그런 고뇌에 빠져있으니 금방 커피를 다 마셔버렸다.

물론 새로이 시켜놓은 커피를 다 마셨다.

에스프레소는 싸늘하게 식어있는 채로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

베시아가 번쩍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다른 곳으로 가자!”

“갈 만한 곳이 있기는 한가?”

“아카데미 바로 근처가 성지인데? 학생들이 놀기 좋게 조성되어 있을 건 다 돼 있다고.”

그리 웃으며 베시아가 벌떡 일어나서 카페에서 나가려 들었다.

...너는 그걸 또 어떻게 잘 알고 있는 거지?

평생을 금욕적으로 사는 사제가 맞는 건가.

“내가 맨날 교회에서 탈출해서 놀러 다닌 실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거든?”

“그거 자랑이 아닌 거 같은데요?”

“다른 사제들한테 말하면 부러워하던데?”

그렇게 말하며 나가려는 베시아의 뒤를 따랐다.

당연하지만 아직 몸 상태가 안 좋은 나는 부축해줘야 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건 보통이면 캐론이 해야 정상이지만.

여기에 프랑하고 라엘리까지 달려들었다.

“프랑, 너는 키가 작아서 아르갈이 불편해한다니까?”

“으으읏, 남의 약점을 공격하는 건 그만두실래요?”

“...그냥 제가 모시겠습니다. 도련님.”

의미 없어 보이는 싸움을 하는 그녀들 중에서 결국 날 부축할 권한을 쟁취해낸 건 캐론이였다.

그렇게 가게 바깥으로 나가니, 때마침 비가 주륵, 주륵, 흐르고 있었다.

베시아는 멍하니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랑은 평상복은 입어도 마녀 모자만큼은 놓고 다닐 수 없다는 건지, 마녀 모자의 챙을 붙잡으며 떨어지는 비를 바라본다.

“오늘이 비가 올 날씨던가요?”

“에이, 우산 안 사 왔는데. 그냥 맞고 갈까?”

“...여기 환자가 있잖아요. 비 맞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요?”

비 좀 맞는다고 그까짓 감기에 걸리, 걸리려나?

내 몸이 워낙 약해서 장담을 못 하겠다.

프랑은 당당히 비가 떨어지는 바깥으로 몸을 던진다.

“그냥 제가 우산 좀 사 올게요!”

“프랑, 비 맞는데 괜찮겠어?”

“이거, 방수 모자라서요!”

...그 모자 생각보다 만능이네.

“나도 같이 간다!”

“라엘리 넌, 방수모나 그런 것도 없잖아.”

“괜찮아! 빨리 뛰면 안 맞아!”

...그런 기이한 논리를 펼치며 뛰쳐나간 라엘리.

"저, 저도 가겠습니다!"

게다가 캐론 마저도 우산을 사겠다고 뛰어나갔다.

벌써 저 멀리 나아간 세 명의 소녀들을 지켜보고 있던 와중에, 베시아는 이상한 소리를 했다.

여전히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그녀는 보통 할 일이 없었던 걱정을 내뱉었다.

“뭔가 불길해.”

“불길하다니?”

베시아는 시선을 돌렸다.

어딜 둘러보더라도, 먹구름은 아카데미 인근 전부를 뒤덮었으니.

시야가 다른 곳으로 향하더라도, 비가 안 내리는 곳은 없었다.

“...그냥, 사제로서 느끼는 직감일까.”

“그런 직감은, 마기 말고는 느낄 일이 없지 않나?”

“마기랑 조금 비슷해서 그런 건가?”

베시아는 의아하다는 듯 나에게로 두 눈이 향하였다.

그녀는 내게로 다가와 코를 내밀어 냄새를 맡았다.

“너한테서 나는 마기의 향은 아닌 거 같은데?”

“...그럴 만하지.”

쓰러져 있는 내내, 흑마법을 쓸 일이 없으니, 몸에 감도는 옅은 마기의 향은 다 증발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베시아는 피식 웃으며 마기가 아닌 것을 꺼냈다.

“그렇지만 다른 향이 나는걸?”

...내 몸에 향기라.

내가 그렇게 잘 씻고 다녔던가.

곁으로 조용히 다가온 베시아는 불안함이라는 것을 잠재우기 위해서 인지.

몇 번이고 그 향이라는 것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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