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오겠다고?”
“콜록…. 응….”
아셀의 상태가 특별히 나아진 건 아니지만, 구태여 수도까지 같이 가겠다며 짐까지 챙겨놓곤 바깥으로 나왔다.
몸도 안 좋으면서 쉴 생각을 안 하고 왜 고집을 부리는 건가 싶었다.
아무리 입학시험을 거치면서 혐성 파티 동료들의 인성이 나아지긴 했어도, 이건 내가 아는 창성이 아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이유가 뭔데?”
“...콜록.”
창성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자신이 동행하려는 이유에 대해서 꺼냈다.
“저번에 상급 마족을 잡을 때…. 내 창에 찔려 죽는 줄만 알았던 녀석이 있었거든….”
“그럼?”
“그걸, 베시아가 살려줬어.”
마음속에서 꺼내지 않았던 무게감.
창성은 의외로 그때 있었던 사건을 계속 담아뒀다.
그녀의 일격을 맞추기 위해, 상급 마족에게 달라붙었던 수험생 중의 한 명을 창성이 찔렀다.
사실상 베시아의 치료가 없었다면, 그 수험생은 죽었으리라.
“...그래서 도와주고 싶어.”
나름 합당한 이유라서 그런지, 나한테 옮을 수도 있다고 반대하던 두 소녀도 지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셀, 생각보다 사람이었네요.”
“그러게, 예상하고 무척이나 달라.”
“...그거 칭찬 맞지?”
칭찬일 거다.
단지 듣기로는 아닌 거 같아서 그렇지.
그렇지만 창성의 의도는 알더라도, 아픈 사람을 데려갈 수는 없잖는가.
여전히 프랑은 독감이 옮을까 봐 우려했다.
“아르갈이 얼마나 약한데요. 베시아도 없는 상황에서 독감 걸리면 정말 꽥하고 쓰러질 수도 있어요.”
“아니, 그 정도까지는….”
“맞아, 아르갈은 프랑도 드는 물건도 못 들 정도로 근력이 약하다고.”
...애들아? 이쯤 되면 날 놀리는 게 아닐까?
예전에는 둘이서 서로 싸우는 줄 알았건만, 시간이 지나니까 둘이서 죽이 척척 잘 맞았다.
아셀은 무언가 짜게 식은 눈으로 날 바라봤다.
“콜록…. 정말?”
“독감만 안 옮기면 될 일 이지.”
그냥 창성을 합류시키기로 한다.
창성의 독기 어린 두 눈을 보니, 여기서 더 막으려 든다면 평생 근력을 놀림감 삼을 것 같았다.
굳이 돕겠다는 사람을 말릴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하루 이틀 만에 싸울 일은 없을테니. 그동안 창성의 질병이 나으면 충분한 전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제안했다.
“마차 두 대로 간다면, 될 거다.”
“돈이 좀 아깝지 않아?”
“어차피 마차를 우리가 준비할 것도 아니고.”
이 커다란 대저택을 운영하는 메이드들에겐 마차 두 대쯤이야 껌값으로 보이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무척이나 부유해 보이는 메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차 두 대 말씀이신가요?”
“부탁 좀 하겠다.”
“금방 준비해 드리죠.”
메이드들은 어디론가 가더니 그새 마차 두 대와 마부까지 뚝딱뚝딱 준비해서 데려왔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듯, 메이드는 더 다양한 옵션을 물어봤다.
“가시는 방향이?”
“...수도로 향할 생각이다.”
“이틀 정도 걸리겠군요. 대단한 호위까지는 필요 없겠군요. 혹시 동행이 필요한 메이드가 있으신가요?”
이 말에 캐론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캐론은 아직도 날 모시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캐론, 너는 이제 영지로 돌아가야지 않겠나.
“캐론 너는 이제 돌아가라.”
“네? 하지만 도련님!”
“너는 오래 있을 만큼 있었다. 뒷 일은 여기에 있는 메이드에게 맡겨도 괜찮다.”
“으으….”
그녀는 세상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다.
너무 과할 정도로 오랫동안 여기에 머물렀으니. 정말로 돌아가야만 했다.
다시 이 저택의 메이드와 눈을 마주하고 필요한 사항을 정리했다.
“두 명 정도면 될 거 같군.”
“너무 적지 않습니까? 도련님으로부터 철저한 보필을 당부받았습니다. 손님분들이 불편한 여행길을 간다는 건, 저희의 책임이 큽니다.”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야영 준비하는데 도와주는 인원 정도면 충분해.”
게다가 아무리 짧은 길이라 하여도, 작정하고 준비하는 순간 필요한 마차나 물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암만 남의 재력으로 호가호위하더라도, 적당한 선은 있는 법이다.
어차피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너무 불편만 하지 않는 정도면 충분하다.
“바로 가면 돼…. 아니구나.”
“아르갈 먹을 죽도 챙겨주시고요. 아프면 안 되니까, 약도 챙겨주고요….”
“이렇게 딱 같이 눕기 좋은 침대 없어? 단둘이서 달라붙어서 자기 좋은 침대.”
...준비는 나만 다 된 거 같고, 다른 두 소녀는 자기들이 원하는 옵션을 하나씩 챙겼다.
프랑은 내가 안 아플 만한 요소를 집중적으로 골랐다.
그리고 라엘리 넌 대체 뭘 원하는 것이냐.
그녀의 음습한 소리를 제지한 것은 프랑이었다.
“라엘리! 아르갈이 기절하고 있었을 때, 할 건 전부 다 했잖아요? 뭘 또 욕심을 부려요?”
“나, 나는 아르갈 혼담 상대거든? 같이 수도로 가는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
“혼담 상대인 거지 약혼 같은 거라도 했어요? 아직 안 했잖아요?”
그거야 그렇다.
라엘리와 혼담을 한 관계이기야 하지만, 딱히 그녀하고 뭘 약속한 관계는 아니었다.
약혼을 한 것도 아닌 마당에, 뭐 그리 특별한 사이라는 보장이…. 그나저나 내가 기절했을 때 뭘 했다고?
“모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출발만 하면 됩니다.”
“...그러지.”
일단 덮어두겠다.
캐론, 프랑, 베시아까지 지켜보고 있던 마당에 이상한 짓은 안 했겠지.
이젠 진짜 가자고….
주교가 오늘내일하는 마당에 여유가 많은 것도 아니고.
창성은 미리 말했던 데로, 따로 마차를 구분하여 탑승했고, 우리 셋은 한 마차에 들어가 앉는다.
캐론은 두 눈이 그렁그렁한 상태로 손수건을 흔들며 나와 작별했다.
“도련님! 영지에서 봐요!”
“그래.”
아주 짧은 휴식을 뒤이은 여정이었다.
주교가 쓰러지고, 베시아가 잡혀간 것이.
커다란 음모가 끼어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과연 이번에도 나 혼자서 죽는 걸로 끝이 날지 걱정됐다.
**
“탑주님,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래? 잘했어.”
흑탑주 티아그리스.
짙은 검은색 머리가 무척이나 매혹적인 그녀는 흑마탑이 아닌, 현장에서 보고받고 있었다.
흑마탑이 무너지고 시간이 흘렀다.
그녀가 땀을 흘러 세워놓았던 탑이 무너졌던 사건은 다시 떠올려봐도 피눈물이 났지만, 최근에는 기분이 좋았다.
“세상에 왕가도 대담하지.”
그녀조차도 마왕군과 왕가가 서로 거래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왕가의 부탁을 받아, 암브로시아를 복구해 주러 왔다는 고위 마족을 보고서 알게 된 것이지, 그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마왕군은 먼 세상의 이야기인 줄 알았으니.
그러며 고위 마족은 재건을 돕는 동시에 한 가지의 부탁을 하였다.
흑탑주 티아그리스가 마왕군에게서 받은 부탁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주교에게 악마의 저주를 심어, 죽도록 유도하는 것.
그거야 탑주인 그녀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직접, 악마에다 제물을 바쳐 저주하면 될 일이니까.
그러나 그녀는 일을 진행하면서 욕심을 더 부렸으니.
단순히 주교를 죽도록 하고 대가만을 받는 게 아니라, 베시아가 처참히 몰락하길 원했다.
그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 마왕군은 거래의 대가를 다른 방식으로 지불했다.
베시아가 무너질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세상에 마왕군이 교회에다 첩자를 심어둘 줄이야.”
내부에 조력자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높은 자리에 있는 조력자가.
조력자의 힘 하나만으로 베시아 사제를 감옥에 집어넣고, 종교재판을 받게 할 빌미를 만들었다.
오직 결과만을 지켜보면 됐다.
흑탑주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으니.
그 뒤로 티아그리스가 할 일은 오직 흑마탑만 재건하면 된다.
마왕군과 왕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건 모두 받았다.
“끄아악!”
“살려줘, 살려주세요!”
“내 아이를 돌려줘!”
죄 없는 평민들이 흑마법사들의 손에 끌려 나갔다.
가장 중요한 건 노예의 보충.
왕가의 암묵적인 허락 아래에 근처의 민가를 적극적으로 털었다.
그걸로 수도 근처에 치안이 불안정하고, 없었던 도적 떼가 생겨났지만 그게 그녀하고 무슨 상관인가?
더 많이, 더 빠르게 노예와 자원을 얻고 무너진 흑마탑이 재건 될 때까지.
그녀는 밤잠을 이루지 않으리라.
“가거라, 리치.”
[주군의 명대로.]
이번 사건으로 죽음을 맞이한 흑마법사를, 리치로 만들었으니.
다수의 장로가 죽어서 타격이 컸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전부 리치로 만들어 뼈가 문드러지도록 굴리면 될 테니까.
“그리고, 가우디움. 인근의 생명체들을 불태워라.”
[그대의 뜻대로.]
여기에 가우디움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한 번 죽었던 존재가, 마기로 기어 붙여져 움직였으니.
더 많은 민가가.
더 많은 희생자가 이 땅 위에서 더욱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끔찍한 죄악이 여기 있는 모두를 뒤덮으리라.
**
먼 거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큰 문제 없이 수도에 도착할 거라고 여겼다.
도적 떼가 마차 주변을 포위할 때까지.
“...저희 수도로 가는 길 맞나요?”
“수도 근처에 도적 떼가 있다고? 황금 기사단은 대체 뭘 하는 거지?”
나도 의아했다.
수도 인근이란 어느 정도 통제와 치안이 좋아야만 정상이다.
매번 근처를 기사단이 정찰 다니고 있으니, 거의 필연적으로 도적 떼란 몰살당하기 마련이다.
“돈과 물건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목숨이다!”
“...어떻게 할 거예요?”
“어쩌긴, 쓸어버려야지.”
스릉-
라엘리는 검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실력만으로 도적 떼를 전부 몰아내긴 힘들겠지만, 여기에 프랑도 있었으니.
“좋아요. 전부 쓸어버리죠! 아르갈은 가만히 있어요.”
“힘들다 싶으면 언제든 불러.”
어차피 나도 프랑처럼 유사 포격기 역할을 해낼 자신이 있었다.
목걸이에 마력을 불어넣자, 대량의 마나가 증폭됐다.
프랑이야 상급 마족을 잡는 과정에서 큰 발전을 거쳤지만, 라엘리는 그런 게 없었으니 여러모로 걱정이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푸욱-
“끄어억!”
푸아악-!
“끄아악!”
서걱-!
“살, 살려줘!”
그녀의 단칼에 도적의 목이 날아갔다.
일반적인 기사도 마나를 활용하는 게 아니면 어려운 묘기다.
신비에 가까운 괴력.
...왜 예전보다도 더 강해진 거 같지.
숨만 쉬면 강해진다. 뭐 이런 권능이라도 타고났나?
그녀가 도적 때 대부분을 썰어버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이 당황해서 구경하고 있을 정도로.
라엘리의 위용에 고개를 숙인 건 결국 도적 떼였다.
넙쩍!
“살, 살려주십시오!”
“어떻게 할까? 아르갈.”
그렇게 태연히 묻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 나는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라엘리, 뭐라도 잘 못 먹었나?”
“응? 왜?”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나와 프랑의 시선이 이상하다면서.
프랑은 분석을 조금 하더니,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급 마족을 상대로 1대1 하면 이젠 그냥 이기겠는데요. 라엘리?”
“이런 잔챙이들이랑 마족이랑 비교하긴 미안하지 않아?”
“그래도, 잔챙이도 수가 많으면 어려워요.”
나도 라엘리가 보여준 무력에 대해서 고민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건 그렇지만, 문제는 해결해야 했으니.
저들 도적에게로 다가가니, 날 보자마자 머리를 박으며 그중 하나가 외쳤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나으리!”
“이유는 듣지.”
귀족마다 도적에 대해서 해결하는 방식이 다르기 마련이다.
두 손을 자르는 귀족도 있으며, 그냥 목을 치는 귀족도 있고, 자비를 베풀어주는 귀족도 있기 마련.
그리고 나는 두 눈으로 직접 저들의 마기를 살필 수 있었다.
마기란 죽음에서도 비롯되기 마련.
만약 저 도적들이 사람을 많이 죽였다면, 저들은 흑마법사가 아님에도 마기가 묻어나왔을 테다.
그리고 저 도적들은 마기가 많이 묻어나왔다.
그러나,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건, 자연적으로 죽음이나, 고통으로 발생하는 마기가 아닌.
흑마법사의 힘으로 발생한 마기였으니.
...수도 부근에.
무언가 이상한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