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라.”
“예, 예! 그렇습니다. 나으리!”
한치의 예상도 틀리지 않고, 도적들의 입에서는 흑마법사가 나왔다.
“그, 그놈들이 우리 가족을, 재산을, 그리고 터전을 전부 불태워버렸습니다!”
“수도의 도움은?”
“전혀 받을 수 없었습니다. 도적 떼라면서 쫓겨났으며, 다른 마을에 도움을 요청하려 해도, 대부분은 불타서 잔해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무언가 알 것 같았다.
흑마법사가 이러한 짓을 하는 이유는 신선한 제물과 노예를 얻기 위함이다.
그러한 것이 필요한 흑마법사들은 수도 근처에는 오직 한 곳뿐이잖는가.
암브로시아.
그들은 다시 태동하기 위해, 마을을 불태우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하나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떠올랐으니.
악마의 저주는 흑마법사들이 잘 다루는 분야.
나만 하더라도 쉼 없이 악마와 계약하고 이를 활용하지 않던가.
그래서 추측했다.
주교가 쓰러지고, 베시아가 교회에서 누명을 쓴 부분이, 흑마탑의 음모인 건가?
아니,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겠지.
주교만 저주받아 쓰러지는 일이었다면, 흑탑주 혼자서도 가능하지만, 베시아까지 잡아가는 건 다른 일이었다.
더욱 더 큰 뒷배가 끼어있을 거다.
“...복잡하군.”
“신경 쓰지 않는 게 더 낫지 않아? 주교님이 더 시급하잖아.”
그러고 싶어도, 이번 일은 흑마법사가 관련되어있는 건 확실했으니.
주교를 구하는 겸, 암브로시아의 재건 또한 막아야 했다.
너무 티 나지 않게 은근히.
잘 못 하면 왕가의 시선을 지나칠 정도로 끌 테니까.
...솔직히 말하면 이미 끌 만큼 끌어버린 것 같긴 한데.
“도적들은 듣거라.”
무릎 꿇은 도적들에게 말했다.
내가 당장 여유가 없다면, 움직일 수 있는 인력을 활용하는 게 맞다.
“너희들의 죄를 사면받을 기회를 주겠다.”
“정말입니까?”
“살려주시는 겁니까?”
도적들이 기운이 생기길 시작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살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한 일에 따른 합당한 보상을 해주겠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라도 시켜주십시오!”
“저희도 이렇게 도적질하다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회유가 꽤 성공적임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무법적으로 살다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게 도적.
정말 끔찍한 기근, 풀 한 포기도 먹기 어려운 상황이 아니면 도적이 되려고들 하지 않을 거다.
그런 이들에게 기회를 준다고 하니. 얼마나 희망이 생기겠는가.
그러던 와중에 프랑이 물어봤다.
“도적들한테 뭘 시키시려는 지는 모르겠지만, 저희가 과연 도적을 사면해줄 수 있나요?”
“그럴 수는 없지, 나야 고작 남작가 차남이고, 라엘리도 자작가 영애에 불과할 뿐이니.”
“...이거 완전 구라잖아요.”
“어차피 도적이 상대인데, 구라 좀 치면 어때?”
나는 떳떳하다.
도적들한테 뭘 약속하고 보상하는가? 안 죽여주면 감사해야지.
이게 맞나 싶어 하는 프랑을 놔두고 도적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최대한 살아남은 마을이나 소규모 집단을 찾아서, 수도 근처에서 최대한 벗어나도록 유도하는 게 너희의 역할이다.”
“그러기만 하면 됩니까?”
“여기 주변을 습격하는 흑마법사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도적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제안을 언뜻 보면 합당해 보였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저들에게 제약을 걸어둬야 했다.
도적 떼를 아무 제한도 없이 믿어버리면, 나만 호구 된다.
별의 근본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고, 푸른 빛이 내 주변을 잠식한다.
도적들은 마법의 행차에 겁을 먹었다.
내 손짓에 따라 푸른 빛으로 되어있는 계약서가 저들 모두에게 배부된다.
“서명하여라, 내 지시를 지키지 않고 도망친다면, 죽음을 선사해주는 힘이니.”
“...도망치면 어떻게 됩니까?”
“그대로 머리가 터져 죽을 것이다.”
도적들은 두려움에 떨며, 동시에 사면과 보상에 기운을 내며 모두가 계약서에 서명을 끝마쳤다.
단 한 번의 서명이었지만, 분위기는 내가 저들을 고용했으며, 동시에 목숨 줄을 쥔 주인이고, 저들은 그 주인 앞에 고개 숙인 맹견이 되었다.
“그럼 가거라. 일을 마무리하고 너희를 공치사해도 늦지 않으니.”
“알겠습니다!”
“일을 완료한다면 루셀마니에 찾아와라.”
“허억! 공작가의 이름…!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게 산적들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프랑은 짜게 식은 두 눈으로 내가 쳐 놓은 개구라들을 하나하나 읊었다.
“우선 마나의 계약은 마법사끼리만 가능한 일이라서 아무런 효능도 없고요.”
“그런 거였어?!”
그런 사실이야 몰랐던 라엘리는 그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이 위엄찬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위엄 넘치긴 했지.
저 많은 도적 떼가 개과천선하고 내 앞에서 고개를 숙였으니까.
“라엘리도 정신 차려요! 나중에 마법사가 와서 계약하자고 하면 절대 믿지 말고요!”
“으, 응, 그렇구나.”
“게다가 루셀마니의 이름은 왜 대는 건가요?! 여기에 라인하르트도 없는데 사칭을 해버리다뇨?!”
“루셀마니의 마차는 맞잖아.”
루셀마니에 소속된 귀족의 행차가 아니기에, 문양이나 휘장을 걸어두진 않았지만, 어쨌건 루셀마니의 마차는 맞았다.
프랑은 나의 장대한 구라에 기겁했으나, 어차피 뒤탈이 없다.
마나의 계약도 거짓, 루셀마니도 거짓이지만 거기 공자랑 아는 사이.
구라를 친 상대는 도적 떼.
완벽한 구라는 진실과 구별할 수 없으니.
고로 완벽 범죄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아르갈에게는 도덕 교육이 필요 한 것 같아요.”
“어차피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그래, 주교님이 우릴 기다리고 있잖아?”
"끄으으응."
게다가 너무 지체되다 보니까, 마차 안에 박혀 있던 창성도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저기, 무슨 일이야….”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환자는 얌전히 있어야죠!”
“나, 나도 말은 하고…!”
드르륵- 쾅!
프랑은 창성이 열어둔 창문을 닫아버렸다.
철저한 격리를 위해서, 그녀가 타고 있는 마차는 숨구멍도 없었으니.
종종 답답하다며 창문을 열어버리면, 프랑이 곧장 닫아버리고 말았다.
그거 그냥 화풀이 아닌가 프랑…?
마차는 어찌 되건 순조롭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틀 정도 되는 거리이기에, 곧 야영할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가 복잡한 준비를 할 필요는 없었다.
따라붙은 메이드들이 전부 프로와 같은 실력으로, 야영 준비를 순식간에 끝마쳐버렸으니.
활활 타오르는 땔감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대화를 나누었다.
창성은 마차 안에 계속 처박힐 수 없다는 강한 의지 아래에, 프랑의 방해에도 여기에 합류하여 죽을 마시고 있었다.
물론 내 식사도 죽이다.
...나 역시 환자는 환자다 보니. 최대한 소화하기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하긴 했다.
“아르갈, 근데 어떻게 악마의 저주를 푸는 거죠?”
프랑은 궁금증이 생겨서 그런지 나에게 물어봤다.
애초에 악마란 베일에 휩싸인 존재.
잘 못 거래하면 목숨이 날아가는데, 흑마법사라 해도 접근할 일이 많지 않고, 마법사라면 아예 책으로만 아는 게 악마다.
암만 금서까지 찾아서 읽은 것 같은 프랑이라 해도 악마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잘 알진 못한다.
좀 잘 아는 인간이 있다면, 교수뿐인데 교수라 하여도 악마의 거래에 있어서는 날 이겨내지 못한다.
여기에 라엘리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것보단, 악마가 뭔지 궁금한데? 마왕군에 소속된 괴물들이야?”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 악마는 사실상 개별적인 존재라 봐야 한다.”
마족과 악마가 소속된 차원도 다르다.
그렇다 해서 나도 자세한 건 잘 모른다.
악마의 정점이라는 대악마와 계약했을 뿐, 특별한 교감을 나누는 것도 아니고, 악마랑 교감을 나누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대악마는 권능을 조정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 만약 대가를 치를 수 있다면, 마왕의 권능마저도 잠시 저지할 수 있는 게 대악마였다.
그러니까, 그 둘이 동맹 관계라 볼 수는 없었다.
마왕과 전혀 상관이 없던 게 악마였으니.
그들은 세상이 멸망하건 말건, 인간이 주는 대가를 받아먹고 강력한 힘을 주는 방관자였다.
흑마법사의 관점으로 본다면, 난해한 의식과 제물을 받아주는 수많은 초월적인 존재 중의 하나다.
“제 질문이 먼저거든요. 라엘리.”
“그것도 대답해 주지.”
본론으로 돌아가서, 악마의 저주란 무엇인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제거할 수 없다.
이건 일반적인 거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주를 걸려고 한 흑마법사가 악마에게 제물을 바치고, 그 제물을 받은 악마는 대상자를 저주하여 결국 죽게 하거나, 죽는 것과 다름없는 고통을 주는 것이 저주의 목표다.
보통이라면 악마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통하여 저주가 걸리기에, 흔적도 잘 안 남고, 막을 수도 없기에, 누군가 암살하기에는 무척이나 강력한 힘이었다.
물론 주요 암살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왕실에서야 이러한 저주의 힘을 알기에, 항시 축복이나 점검받거나, 왕성 같은 안전한 성역에 머물고 있어서 악마의 저주를 받을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이상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교회에 머무는 주교가 왜 악마의 저주에 걸렸는가?
프랑도 마찬가지였던 모양.
“그러니까요? 어떻게 주교님은 저주에 걸리신 걸까요? 저주에 걸리기 힘드시잖아요.”
“...차차 알아봐야겠지.”
성역에 가까운 교회에서 벗어나고, 주교 자신의 성력을 모두 소진할 일이 있을 때.
악마의 저주에 걸릴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릴 테니.
아예 불가능한 조건은 아니다.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해가 금방 떨어졌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니, 잠을 잘 시간이 된 거다.
라엘리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졸다가, 중요한 사실을 꺼내 들었다.
“불침번이 필요하지 않아?”
“그렇긴 하네요.”
수도로 가는 데 불침번은 고려하지 않았다.
애초에 치안이 좋아야만 하는 공간인데, 도적 떼랑 만나는 일이 생기고, 흑마법사가 민가를 습격하고 있다니.
알고 있었다면 진작 용병을 고용했을 거다.
“불침번은 저희가 설 수 있습니다.”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그 즉시 깨우겠습니다.”
여기에 메이드들이 불침번을 서겠다고 나섰다.
좋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으나, 프랑은 차라리 자기가 방법을 내놓겠다며 마법을 시전했다.
“제가 감지 마법을 설치해 둘 테니까, 그냥 편하게 자요. 이게 더 나을 거 같네요.”
“그것도 나쁘진 않지.”
감지 마법은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상대까지 막아낼 수 있으니, 일반적인 불침번보다 효과가 더 크기야 할 테다.
단지 마법사 본인의 실력이 부족해서 못 쓰는 게 대부분이지만, 실력이 한 단계 나아간 프랑은 감지 마법을 손쉽게 시전했다.
그리하여 하룻밤을 보냈으니.
내가 눈을 감는 그때까지도.
불길한 마기가 내 콧속을 훑었다.
...오늘 밤 무언가 찾아올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하며 두 눈을 감는다.
**
[살아있는 것을, 죽이리라.]
흑마법사.
죽어서 리치가 된 흑마법사는 온전하지 못한 걸음걸이를 옮기며 나아가고 있었다.
괴물에게 느껴진 건 살아있는 자의 냄새.
[저, 곳에 살아있는 것들이 있구나.]
흑마법사, 가우디움은 미소를 지었으니.
죽어서도 안식 따윈 없었다.
그리하여 죗값을 치르고, 또 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저곳에 두 개의 마차와 잠시 불을 피웠던 흔적이 보였으니.
가우디움은 흑마법을 활용하여, 마차에 있는 모두를 죽이고자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