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오세요.”
사제의 도움에 따라, 우리는 손쉽게 교회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내부에 아는 지인이 있다면, 성기사라 해도 그렇게까지 막아서지는 않는 모양.
그렇게 교회 내부로 들어가자, 우릴 불러들인 사제는 무언가 눈치를 챘는지, 조용하게 속닥거렸다.
“주교님을 뵈러 오신 거죠? 따라오세요.”
설명이 필요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를 뒤따르자, 조금 분위기가 다른 방이 나왔으니.
전심전력을 다하여 주교의 목숨을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보이기는 했다.
그를 뒤덮은 수많은 축복과 성력이 그 증거.
그러나 악마의 저주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
주교의 모습은 과거 보았던 때보다도 더 늙었고 죽음에 다가가고 있었다.
손등에는 아주 또렷하게 악마의 저주가 담긴 흔적이 보인다.
“저희만 이곳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랫동안 여유를 드릴 순 없습니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강고한 내 의지에 사제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바깥으로 나갔다.
드디어 뭐라도 할 수 있는 환경을 줬으니.
나는 단검을 꺼내 들었다.
“자, 잠깐만요.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요 아르갈?”
“설마 네가 죽고서 주교를 살리는 그런 짓을 하는 건 아니지?”
두 소녀가 득달처럼 달려들었으나.
당연히 그럴 생각은 없었다.
“악마의 저주를 건드리려면 최소한의 마기는 필요해서 그렇다. 그 정도라면, 단검에 담긴 마기만 활용해도 충분하다.”
“그, 그런 거죠? 갑자기 막 찔러버리거나 그러면 가만히 안 둘 거예요.”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특별한 짓을 안 하더라도 단검 속에서 마기가 흘러나왔다.
마기를 통하여 악마의 저주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긴 시간은 필요 없었다.
저주란 복잡함보다도, 하나의 개념에 가까웠으니.
읽고 해석만 할 수 있으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해주할 수 없는 저주였다.
저주에 담긴 현상은 무조건 누구 한 명은 죽어야 풀려난다는 의지를 가졌다.
어쩔 수 없었다.
해주를 위해서 나에게 저주를 옮겨야만 했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주교의 손등 위로 손을 올렸다.
여기에 강한 정신을 담는다.
주교의 저주를 나에게로 옮기기 위해.
마기를 집중적으로 조작했다.
손등에 새겨진 악마의 표식이 점차 흔들렸다.
그러나, 예상외의 일이 발생했으니.
커다란 성력이 주변을 뒤덮었다.
번쩍!
“갑자기 강한 빛이…!”
강렬한 빛 아래에 의식을 잃고 말았으니.
나를 강하게 끄집어 내려가는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라베가 주교가 날 마주하여 앉아있었다.
“반갑습니다. 은인이여.”
방금까지 침대에 누워있었던, 그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더 없이 정정한 중년의 남자가 신비로운 세상 속에서 존재했다.
어디선가 보았다.
초월적인 존재가, 다른 이와 단둘이서 대화하기를 원했을 때, 많이 초대하는 곳이니.
그래서 입으로 꺼낸다.
“여기가 당신의 심상 세계입니까?”
“바로 아시는군요.”
다소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주교의 심상 세계라니.
그것은 초월자만이 지닌 특수한 힘 중의 하나였으니.
그렇다면 주교는 초월자가 되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닐 거다.
정말 초월자가 되었다면, 주교가 악마의 저주 따위에 쓰러져 있겠는가.
주교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이 세상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닙니다. 단지 쓰러진 이후로 저 자신을 관조하다 보니, 이러한 세상이 펼쳐졌을 뿐이지요.”
“...그런 게 됩니까?”
“돼서, 이렇게 당신과 마주하는 것이지요.”
정말 그걸 가능케 했다면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주교는 죽을 위기 속에서도 자신의 역량을 말도 안 되게 발휘했으니까.
그렇기에 궁금했다.
주교는 어떤 방식으로 이러한 세상을 구현했는지.
과거 내가 초월에 이르렀어도, 광기로 무너진 정신은 이런 심상 세계를 만들지 못했다.
주교가 진정한 초월자가 되진 못했어도, 심상 세계를 구현했다면, 그의 정신만큼은 초월자였다.
여기서 그와 묻고 답하는 것은 초월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정신만은 초월에 이르렀을 테니, 쓰러져 있는 동안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이 다양했을 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허허, 제가 너무 다급히 움직였지요.”
주교는 여태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풀어냈다.
죄를 지은 왕실에 책임을 묻기 위해, 각계각층의 유력자에게 편지를 보내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제가 쳐내야 할 그림자는 너무나 거대했습니다.”
왕실뿐만이 아니었다.
교회 내부에서도 썩어들어갔으니.
주교는 평소대로 교회가 명령하는 데로 움직였으나 되돌아온 것은 악마의 저주다.
나는 여기서 궁금한 점이 생겼다.
교회라는 성지에 머물고 있던 존재가, 악마의 저주에 걸렸으니.
또한 저주에 저항력을 지닌 성직자가 걸리기에는 만족해야 할 조건이 너무나 많았다.
“그것이 궁금합니다. 어찌하여 주교가 악마의 저주에 걸렸습니까?”
“교회의 명을 받고, 힘없고 다친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잠시 바깥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렇다면 가능했을 거다.
교회에서 벗어났을 거고 성직자가 치료를 위하여 성력을 다 소모했다면, 저주에 걸리기 최적의 상태가 됐을 테니까.
그렇다면 다른 이야기를 꺼내야 했으니.
주교가 저주에 걸린 이유도 알았고, 그 저주가 누가 의도한 음모인지도 알고 있지만, 결국 저주로 인하여 죽어가는 건 주교였다.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베시아가 누명을 썼다는 것도 아십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의 억울한 호소가 여기까지도 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법이 있습니까?”
주교는 약간은 후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디선가 익숙함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저것은 죽음을 각오한 얼굴이다.
“잠시나마, 저주를 이겨내고 움직일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러하다면 분명 죽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베시아의 누명을 벗겨낼 수 있겠지요.”
“...그 방법뿐입니까?”
“제가 남기고자 하는 것이 있으니, 그 계획이 실천된다면, 분명히 이 왕국에 드리워진 어둠을 약간이나마 걷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교.
널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으니.
심지어 심상 세계를 구현한, 초월한 정신체를 이른 존재를 이대로 죽도록 놔둘 순 없었다.
손을 내밀었다.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교의 저주를 저에게 옮기시지요.”
연신 차분했던 주교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내가 입에 올린 희생에,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으니.
“왜 죽고자 합니까 은인, 그대가 나 대신 죽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걱정은 필요 없습니다. 저는 죽지 않는 존재이니.”
심상 세계에 들어왔을 때부터 각오했다.
주교에게 불사의 비밀을 꺼내겠다는 생각을 말이다.
애초에, 주교와 같은 성격이라면 나의 희생을 허락하지 않을 거 같아서, 차라리 이렇게 불사를 밝히고 그의 목숨을 살리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주교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에게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불사자라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주교.”
“조금은 이상하군요. 제가 보기에는 당신은.”
정신적으로 초월에 이른 존재가 그리 단언했다.
“...단 하나의 목숨을 지닌 평범한 사람이니.”
“...예?”
“어찌하여 불사자입니까? 왜 그것을 믿고 있습니까.”
회귀 전에는 쉼 없이 죽음을 반복한 불사자였으니.
지금도 죽어도 죽지 않으리라는 감각이 남아있어서,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주교의 말에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가능성을 따져봤다.
사실은 내가 죽어서 죽음에 이르렀다면.
실제로 죽었으나, 베시아의 기적에 의하여 정말 살아난 것이라면.
...여태껏 걸어온 길이 몇 번을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길이었기에.
잠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정말 나는, 불사자가 아니었던 건가.
“...그러나.”
흔들리는 정신을 붙잡았다.
여태 그렇게 믿어왔건만, 그게 아닐 수 없을 거다.
실제로 내가 불사의 의식을 치르지 않았더라도, 회귀하여 가지고 있던 모든 힘이 증발했어도.
불사만큼은 나에게 남아있으니.
나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불사의 경험을 아직 못 느꼈더라도.
나는 불사자가 맞다.
결코 안 죽는 불사자가.
“나는 안 죽습니다.”
“...확고한 믿음을 지녔군요.”
주교는 나의 확신에 고개를 끄덕였으니.
그는 다른 방식을 제안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안전한 방식을 쓰지요. 저주 일부를 나누겠습니다.”
“그러면 주교, 당신을 살릴 수 없습니다.”
저주를 나눠봐야 목숨의 연장만을 할 뿐이지, 죽음에 다가가는 주교를 되살릴 수 있는 건 아니다.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요.”
주교가 손을 휘젓자, 저 멀리에서 연결되어있는 인연이 있었다.
확실히 정신만이라도 초월에 이르렀다면, 얻는 전지적인 힘이 대단했다.
자신에게 저주를 건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 누운 자리에서 알 수 있었다.
심상 세계 속에서, 어렴풋이 그녀의 모습이 보였으니.
“저에게 저주를 건 흑마탑의 탑주. 알고 계십니까?”
“...티아그리스.”
“그녀를 퇴치해주십시오.”
주교가 한 번 더 손을 휘저으니, 운명처럼 다가오는 존재들이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베시아와 용사, 그리고 검성이 보였다.
프랑과 라엘리야 당연히 이 일에 참여할 테니, 사실상 실기 시험의 위험에서 이겨냈던 주역 모두가 흑탑주를 처치하기 위해 모이는 셈이다.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이 이를 가능케 할 겁니다.”
“반드시 그러하지요.”
내가 손을 내밀자, 주교는 딱히 그걸 원하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결국 나의 강한 의지에 답하여, 약간이나마 저주를 옮겼다.
나의 손등에는 악마의 표식이 옅게나마 새겨졌으니.
그러는 동시에, 끔찍한 고통 아래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흐릿하던 심상 세계에서 벗어나, 눈을 뜨는 순간 라엘리와 프랑의 비명이 들려왔다.
프랑은 쓰러진 날 붙잡으며 급히 말했다.
“사제, 사제님을 불러와요!”
“알, 알겠어!”
그렇게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저주 약간 좀 옮겼다고 혼절할 지경이면, 저주를 온전히 받는 순간 그 즉시 죽었을 거 같은데.
내 몸이 참 허약하긴 하다.
**
“아, 아르갈 어서 깨어나 봐요!”
프랑은 자책했다.
왜 이걸 예상하지 못한 거지.
분명 아르갈이라면, 남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는 그는 주교조차 살리겠다고 저주를 자기 몸에 옮기는 짓을 할 것이 분명했을 텐데.
이를 간과했다.
결국 그녀 앞에 있던 건 저주를 옮겨 받고 쓰러진 아르갈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사제가 달려들었다.
그녀도 상황의 시급함을 알았는지, 사제는 아르갈을 급히 치유하며 상태를 파악했으나, 더 안 좋은 결과만이 사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니, 그때보다 몸이 더 만신창인가요?! 어떻게 여기까지 걸어서 온 거죠?”
“...만신창이라면.”
“전신이 망가져 있는 건 물론이고, 저주 때문에 급속도로 몸의 생명력이 말라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잘 못 하면 곧 죽는다는 소리예요.”
“네, 네에?”
안 좋은 이야기가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왔으니, 프랑은 어찌해야 할 줄도 모르고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아르갈이 죽는다고?
그때 겨우 살아남았던 아르갈이 또다시?
그 당시의 기억이 악몽처럼 살아났다.
프랑은 이빨을 딱딱 떨며, 상급 마족에게 심장이 찔려 쓰러지는 아르갈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 안 돼요. 죽으면 안 돼요.”
너무나도 끔찍한 트라우마가 되살아나기 직전에, 다행히 쓰러진 아르갈의 몸이 움직였다.
“...안 죽으니 걱정하지 마라.”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죽음에 이르렀던 아르갈이 깨어나니, 프랑은 떨려오던 가슴을 가라앉히는 동시에 활화산처럼 분노했다.
약간의 마나도 못 견디는 환자가, 악마의 저주를 옮겨 받았으니까 그럴 만했다.
“안 죽기는 무슨!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주교에게 악마의 저주를 건 당사자가 누군지 안다. 흑탑주를 처치하면 주교도 깨어나고 베시아의 누명도 벗겨낼 수 있어,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으니, 잠시 주교의 저주를 옮겨 받은 거다.”
“네, 네? 그럼 흑탑주만 처치하면 이 일은 해결되는 건가요?”
“그래, 거기에 나도 같이 갈 생각….”
프랑은 아르갈의 몸을 꽉 붙잡았다.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신체 강화만 해도 쓰러지는 인간이, 주교에게까지 저주를 건 흑탑주를 처치하려 동행한다?
“안 돼요. 절대로 안 돼요.”
“...내가 없으면 쉽사리 잡을 수 없는 인간이다. 차라리 무의미한 희생이 생길 바에는….”
짝-!
프랑의 손이 강하게 아르갈의 뺨을 때렸으니.
이를 꽉 악문 프랑이, 가슴속에서 긁어 오르는 복잡한 감정을 목소리에 담는다.
“...거기서 아르갈이 죽으면, 그건 유의미한 희생인가요?”
“...”
“대답, 해봐요. 아르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