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그래온 것처럼,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내놓으려 했었다.
그녀의 분노를 잠재우고, 합류하여 티아그리스를 죽이기 위해서.
그렇지만, 뺨이 얼얼했다.
날 짓누르는 저주의 영향인가.
주교의 확신에 찬 한마디가 계속해서 머리를 어지럽혔다.
...내가 불사자가 아니라는 초월자의 한마디가 날 이렇게나 흔들다니.
프랑의 추궁 앞에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불사자 인 줄 알았더니, 설령 죽는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프랑은 더는 참을 수 없다며,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흑탑주는 저희가 알아서 잡을게요.”
“...”
“아르갈,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요. 잠시 교회에서 머물고 계세요. 용사도 여기에 머물고 있으니까 용사와 같이 흑탑주 하나 못 잡을까요?”
아마 여기에 베시아와 검성까지 합류할 수 있으니, 잡을 수는 있을 거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라도 죽어서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흑탑주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나 혼자서 1대1로 이길 수 있는 확신이 들지 않는 강자를, 아무런 피해 없이 이길 리가 있겠는가.
고뇌 속에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넘기는 거다.
최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결론을 내놓는 것이다.
내가 불사자라는 확신을 되찾거나.
아니면 불사자라는 증거를 확실하게 찾아내거나.
혹은, 나는 불사자가 아님을 인정하거나.
후자의 가능성이 정말 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예 불사자라는 증거가 없던 건 아니었으니.
부활한 뒤에, 빨라진 생명력 회복이나.
거듭된 단검 사용에도 아직도 살아있는 나 자신이라거나.
물론 여기에도 불사가 아니라는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 있었다.
별의 근본이 몸을 회복시키고, 수명도 회복시켜 주었다면, 이 또한 불사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어버리니.
...몸에 아무런 기운이 없었다.
머리가 너무나도 아팠다.
안 좋은 몸에다가 저주까지 겹치고, 프랑의 감정까지 더해지니 모든 것이 흔들리는 기분이다.
“아르갈, 괜찮죠?”
“...괜찮다.”
“그, 미, 미안해요. 아까는 너무 격해져서.”
그녀는 뺨을 때린 것에 대해서 사과했지만, 크게 상관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몸이 너무나 안 좋아서 그런 것일 뿐이지.
아니, 실제로도 다를 게 없겠지.
...내 몸은 죽기 직전이었다.
안 그래도 안 좋은 몸에, 저주까지 겹쳐 버렸으니.
심각한 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원래라면 주교의 저주를 받고 한 번 죽을 생각이었건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한 번 죽는 것도 무언가 찜찜하다.
우선, 용사와 검성, 모두를 모으고 결정하는 거다.
“일단, 환자를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성력을 좀 불어넣던 사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교회야 의심스럽긴 하지만, 겉으로는 대놓고 적대하지 않으니, 잠시 머물러도 큰 문제는 없을 거다.
사제의 주장에 따라, 가장 근력이 좋은 라엘리가 날 업어서 옮겼다.
침대에 눕자, 내 몸은 금방 수면에 들기 시작했다.
흐릿해지는 정신 속에서 프랑이 말했다.
“...일단 흑탑주를 용사와 함께 잡으면 되는 거죠?”
“아마 용사 말고도 라인하르트도 여기에 올 거다.”
“예? 본가로 갔다던 사람이 왜 수도로 다시 돌아오나요?”
그건 나도 잘 모르지만, 주교가 그리된다고 했으니 실제로도 그렇게 될 거다.
초월자가 가진 특유의 통찰력이,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추측할 수 있을 테니.
“...그러니 기다리고 있어라.”
“오랫동안은 못 기다려요.”
프랑은 용사도 필요 없이 단신으로 흑탑주를 잡으러 가고 싶어 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저주가 내 몸을 좀 먹고 있기에, 그녀는 조급해한다.
잠시나마, 불안증세를 보이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프랑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려두었다.
그녀의 물기 가득한 두 눈이 너무나도 뚜렷이 보였다.
“나는 안 죽으니.”
주교의 말에 잠시 흔들렸어도.
아직 완벽한 확신은 못하더라도.
나는 아직도 그렇게 믿는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정말, 못 믿겠어요.”
프랑은 이를 으득 하고 씹으며 다시 자신이 한 말을 곱씹었다.
“절대로, 못 믿어요.”
그 뼛속 깊은 불신이.
어디서 흘러나왔는지 나조차도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너무나 불안정했다.
“아르갈은 너무 나쁜 사람이에요.”
“그래, 나 나쁘다.”
회귀 전에 인류의 주적이었으니.
나쁜 사람이 맞기는 했다.
수 없이 들어본 증오의 말이었다.
“사람을 구해놓고, 또 자기만 죽으려 하는 거, 정말 나쁜 짓이에요.”
...그런 의미에서였나.
천천히 몸을 숙여가는 프랑은 결국에는 나와 완전히 밀착했으니.
머리카락의 좋은 향이 내 콧속으로 흘러갔다.
그녀는 나의 심장 소리를 들어서, 확실하게 살아있다는 증거를 확보하고 싶었는지 내 가슴에 얼굴을 가져다 놓았다.
한 번 날 꽉 껴안은 프랑은 불안 증상이 좀 풀려났는지, 한결 나아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저는 아르갈을 절대 안 믿을 거예요.”
비장한 각오가 섞인 한마디에는 무언가 물리적인 장치를 마련하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녀의 마법이 발동되었고, 푸른 마법진이 방을 뒤덮었다.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 거지…?
불행히도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녀의 결계가 방 내부를 뒤덮었으니.
여기에 상응하는 강력한 마법, 흑마법이 아니라면, 프랑의 허락 아래에서만 방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감금당한 거다.
“저기, 프랑 조금 생각을 달리 해보는 게….”
“아르갈이 안 바뀌면, 제 생각이 바뀔 일은 없을 거예요.”
프랑은 너무나 단호했다.
단 한 발자국이라도, 여기서 벗어나는 걸 허용할 생각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프랑은 묵묵한 걸음으로, 결계에서 벗어났다.
내 얼굴을 보기도 싫다는 모습이다.
겉보기에는 삐진 것처럼 보이는데.
요즘 애들은 좀 살벌하게 삐져버리는구나.
나는 꼼짝도 못 하고 이 방에 갇혀버린 상황 속에서 중얼거렸다.
“...어쩌지.”
엎지른 곳에다가 불을 지르는 격으로, 라엘리도 프랑의 행동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르갈, 한동안 거기에서 쉬고 있어! 우리가 꼭 흑탑주를 잡고 올 테니까.”
“그보다 날 꺼내주는 게 어떤가 라엘리.”
“얻어맞고 싶다는 거지?”
라엘리는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벗어날 낌새가 보인다면, 곧장 방에다 박아넣겠다는 의지가 분명히 느껴졌다.
진짜 내가 뭘 잘 못 했다고 이런 대우를 받는가.
내 목숨 걸어서 남들 구하겠다는 건데, 자꾸 과도한 걱정이 따라붙었다.
한숨을 푹 쉬며 침대에 누웠다.
내 업보로구나.
남을 구한다 해서 마냥 좋은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되돌아간다면.
그녀들을 다시 똑같은 방법으로 구했겠지.
침대는 푹신했다.
...아주 잠시만, 무거운 것을 내려놓고 편안함 속에서 잠들었다.
**
“잠들었네?”
라엘리는 프랑처럼 그 자리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단지 방문 바깥에서 아르갈을 지켜보았을 뿐이지.
제 몸이 박살 나고, 누구라도 견디지 못할 고통 속에서도.
그렇게 강고한 의지를 지녔건만.
저리 조용히 잠들어 있을 때는 너무나 여리고 순진해 보이는가.
그러니 그녀의 혼담 상대이자.
앞으로 약혼할 관계였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그렇게 만들 것이다.
“뭔가 경쟁자가 계속 생기고 있는 기분이긴 해.”
라엘리는 그렇다 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만의 유별난 점이 있으니.
다른 이들은 아르갈에게 목숨이 구해졌다면, 그녀만큼은 아르갈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가졌다.
그러니, 그녀에게만 불사라는 말을 괜히 했겠는가?
아르갈은 라엘리를 특별히 여겼기에, 남들과 공유하지 않는 사실을 밝혔다.
“근데 불사라는 말은 안 믿어 아르갈.”
누가 봐도 자길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지 말라는 거짓말로 보였다.
도대체 누가 그걸 믿어?
세상에 불사자가 있겠어 설마.
그렇지만 불사자란 사실을 본인이 진지하게 믿고 있다면, 그것도 큰 문제였다.
그래서 라엘리도, 감금에 대해서 찬성했다.
어떠한 희생을 저지를지 모를 아르갈을 붙잡는 게 가능하니까.
“결코 죽게 놔두지 않을 거야 아르갈.”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른 소녀들이 터져 오르는 감정을 보이며 아르갈에게 집착한다면.
라엘리는 무의식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진득함을 보였다.
“네 저주를, 내가 가져가는 한이 있어도.”
네가 넘겨받은 악마의 저주를, 내가 가져간다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르갈?
너무나도 궁금했기에.
그녀는 조용히 제 감정을 삼켰다.
“반드시 지켜줄게.”
그를 위한 희생이.
생각보다도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
잠시 사경을 헤매고,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용사가 있었다.
...환각을 본 줄 알았다.
“...용사?”
“괜찮습니까?”
대체 얼마나 기절하고 있었던 거지.
회귀 전 그 강한 고통을 겪어왔다 하여도, 이 정도로 아픈 적이 별로 많지는 않았다.
몸에는 땀이 흥건했고, 심장은 당장이라도 멈출 것처럼 고동이 미약했다.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던 거지?”
“삼 일은 지났습니다.”
“...이런.”
생각 이상으로 오랫동안 기절했었다.
잠시 교회를 떠났던 용사가 돌아올 때까지, 잠시라도 깨어나지 못한 것 아닌가.
이런다면 정말로 한 번 죽고 나서 흑탑주를 잡으러 갈 거 같은데 말이지.
용사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그동안 알아냈던 사실들을 하나씩 늘여놓았다.
“믿기 어려운 사실들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가?”
“왕가의 타락부터 시작해서, 교회의 어둠까지.”
용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책임감은, 내가 이렇게 쓰러져 있던 것에서도 무겁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저의 방만함이 당신을 고통받게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 용사.”
“아닙니다. 제가 진작 알았다면 베시아를 감옥에서 꺼내고, 주교를 저주에서 구해주었을 텐데, 용사인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을 당신이 대신 해주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용사로서 짊어진 막대한 책임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그러한 죄책감이.
용사의 얼굴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 이전과 같이, 내 생각은 지금도 동일했다.
“...말했었지, 혼자 짊어질 필요 없다고.”
“그렇, 군요.”
“아무리 용사라도 한계란 있는 법이다. 굳이 너 자신을 뛰어넘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덜컹.
그리 말하고 있던 참에, 방 내부로 들어오는 사람이 또 있었으니.
그 또한 익숙한 얼굴이었다.
푸른색 머리의 저 잘난 인간이 여기에 정말로 왔다.
검성이, 왕국의 수도에, 그리고 교회에 찾아왔다.
“그러는 너는 무엇인가 아르갈.”
“...무슨 소리지.”
“용사도 짊어지기 힘든 것을 왜 네가 감당하고 있냐고 물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바깥에서 용사와의 대화를 다 들었던 건지 무거운 주제에 대해서 태연히 묻고 있었다.
...나도 대답하긴 곤란한데.
이런 일들을 용사가 짊어지다간, 각성하거나 강해져서 마왕도 강해지기 때문, 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으니까.
“이상한 놈.”
“...”
“하지만 그걸 원한다면 어울려줄 수 있지.”
휘익-
검성은 나에게로 무언가 던졌다.
그건 물약처럼 보이는 물건이었고, 또한 그 무엇보다도 희귀해 보였다.
“이건?”
“엘릭서다. 줄어든 수명과 지금의 상태를 거의 회복시켜 줄 수 있는 기적의 물약. 죽기 직전이라면 그 무엇도 되살릴 수 있는 생명의 영약.”
“...이걸 나에게 주겠다고?”
“힘들게 구했다. 네 줄어든 수명을 되돌리기 위해서, 지금은 다른 이유로 써야 하지만.”
나는 영약을 바라보며 침을 삼키면서도.
미치도록 아까웠다.
불사자가 마실 필요가 있는 건가?
그냥 한 번 죽고 마는 게 더 나을 텐데.
그리 생각하면서 내려놓으려 했건만, 검성이 엘릭서를 내려놓으려는 내 손을 꽉 붙잡았다.
꽈악!
“너의 목숨은 촌각을 다루고 있으니.”
“...”
“여기서 먹지 않으면 곧 죽는다. 아르갈. 이상한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
검성은 그걸로 자신이 하고 싶다는 말은 끝났다는지, 붙잡았던 내 손을 풀었다.
그 뒤의 판단은 네 자유라는 듯,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엘릭서를 가만히 바라봤다.
황홀하게 무지갯빛을 내는 그 영약은.
삼키는 그 즉시 쓰러진 몸을 일으킬 수 있다는 보장을 하고 있었다.
악마의 저주는 영약으로 지우지 못하더라도.
나의 죽음이 한 걸음 멀어지는 건 확실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