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안 죽는다니까-45화 (45/69)

엘릭서를 앞두고 고민하고 있었을 때, 한 가지 든 생각이 있었다.

“근데 라인하르트.”

“말하거라.”

“내가 이걸 안 먹으면 어떻게 되지?”

검성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나는 신경 쓰지 않겠다. 그렇지만 용사가 강제로 먹이지 않을까.”

사실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두 눈에 핏발 가득한 시선을 부릅뜬 용사는, 어떤 방식으로든 내 입에다가 엘릭서를 쑤셔 넣겠다는 모습이었다.

...사실 이렇게 될 줄 알고 검성은 선택지를 주는 척하는 거 아닌가.

의미 없는 저항을 하다가 용사에게 엘릭서가 입으로 쑤셔 넣어지는 추태를 보이느냐, 그냥 마시느냐라는 선택지는 참으로 고르기가 다른 의미로 어려웠다.

어쩌겠나.

결국 마셔야지.

뭔가 피눈물이 날 정도로 아까웠지만, 안 그러면 용사가 강제로 먹일 테니까.

용사가 아니어도 프랑, 라엘리도 있었다.

그녀들이 과연 날 살릴 수 있는 엘릭서를 두고 가만히 있겠는가.

뚝-

엘릭서의 뚜껑을 열자 청아한 향이 풍겨 나왔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거 한 방울에 대저택 하나는 갈려 나갈 법한 영약.

이런 귀물을 태연히 주는 검성도 참 대단하다 할지.

마실지 말지 고민을 수십 번 거듭했다.

...내 목에 걸려있는 별의 근본하고는 경우가 달랐다.

엘릭서는 일회성이니, 먹기보다는 아끼고 싶은데 말이지.

그렇지만.

마셔야지.

-꿀꺽, 꿀꺽.

불사라고 말하면서 엘릭서를 아껴볼까 고민도 했지만, 어차피 의미가 없을 거다.

그걸 믿는 인간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용사와 검성이 믿어줄 리 만무했다.

뭔 개소리냐며 구박하겠지.

아니, 검성은 좀 다르려나, 사고방식이 워낙 특이한 편이니까.

그래도 한결 나아졌다.

엘릭서를 마시자마자 전신의 기력이 회복되었고, 몸을 쉽게 움직일 수 있기에.

침대에서 일어서려 했으나, 용사가 그런 날 제지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닙니다. 약효가 전부 돌기 전에는 쉬시지요.”

“...알겠다.”

뭔가 용사를 보면 볼수록 불안했다.

설마…. 너도?

프랑이나 베시아처럼 그런 과도한 감정을 용사마저도 나한테 품고 있다면.

감당하기 좀 어려웠다.

게다가 나는 용사의 무력을 최대한 낮추려는 목표까지 지니고 있기에, 용사와의 충돌은 필연적으로 생길 예정이다.

그런 상황에서 용사가 이상한 감정을 품고 있으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변수가 생길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다른 소녀들처럼 극심한 건 아니니, 아직은 괜찮겠지.

...아직은 말이다.

잠시 걱정을 넘겨 두고는 모든 사람을 모으기로 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논하기 위해, 프랑하고 라엘리를 불러와 줘라, 그리고 용사, 베시아를 꺼낼 수 있겠는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가능합니다.”

“그럼 부탁하지.”

용사가 누워있으라고 했지만, 몸이 좀 나아진 상태에서 굳이 누워있을 필요성은 못 느꼈다.

용사도 두 번씩이나 날 막지는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가서 잠시 바람을 쐬려고 했으나.

퉁-

결계가 날 가로막았다.

아 맞다. 나 갇혀 있었지?

프랑이 감금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용사, 혹시 날 꺼내줄 수 있는가?”

“잠시 거기에서 머물고 계시지요.”

용사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건지, 결계에서 못 벗어나는 날 놔두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용사 너마저도.

고개를 돌려 검성을 바라본다.

“라인하르트, 혹시….”

“엘릭서를 먹었다고 죽어가는 사람이 바로 회복되는 건 아니지.”

검성은 좀 더 논리적으로 날 압박했다.

“네게 먹인 엘릭서가 헛되지 않게 가만히 있어라, 어차피 그 정도 요구는 내가 할 수 있지 않은가?”

“...맞긴 하지.”

뭔가 미묘하게 더 열 받는 기분이다.

도무지 반박할 수 없어서.

게다가 엘릭서를 가져온 건 검성.

그 비싼 걸 먹여놓고 달리 대가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를 하는데 말을 안 들을 수가 없었다.

결론은 침대에서 얌전히 찌그러져 있어야 했다.

...나 안 죽는다니까.

아무도 안 믿네 진짜.

무언가 서글프기까지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주교마저도 날 불사자라 안 보는 마당에,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안 죽는다고.”

그냥 중얼거려봤다.

방 안에 가둬진 상태에서 이러니, 무척이나 기분이 미묘했다.

모두가 모여들 때까지.

잠시, 기다릴 수밖에.

**

“베시아를 꺼내달라 하셨습니까?”

추기경은 당황스럽다는 듯,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용사는 더없이 단호했다.

“그렇습니다. 베시아를 감옥에서 꺼내주시지요.”

“그, 용사님께 설명해 드려야 하겠지만, 그 사제는 악마와 결탁했다는 혐의를 짊어진 죄인입니다. 함부로 꺼낼 수….”

“제가 원하는 것이라면 손을 써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꾹 참았다.

교회에서 하고 싶은 추궁과 말들이 많았지만, 아직은 그들이 베시아를 가둬놓고 있기에.

주교가 저주받아 쓰러져 있기에.

겉으로는 협조하는 척하는 교회를 치기에는 난해하다.

흑탑주를 처치할 때까지는 가만히 놔두기로 했다.

요아스 추기경은 자신이 한 말도 있으니, 어찌 대응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아니, 그 무엇보다도 큰일이었던 건, 용사가 교회에 대해서 불신을 가졌다는 사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방금 까지만 하더라도 베시아를 절대로 내놓지 않으려 했으나, 더 큰 것을 얻고자 작은 것을 양보했다.

베시아 사제를 풀어주기로 한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확실합니까?”

“예, 저희가 언제 용사님의 부탁을 거절하겠습니까? 단지 베시아 사제에 대한 혐의가 모두 풀린 건 아니니, 정해진 기일 이내로 저희에게 돌려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용사가 수긍하자 추기경은 안도의 한숨을 푹 쉬며, 이리 당부했다.

“그렇지만 용사님 교회만큼은 꼭 믿으셔야 합니다. 저희가 용사님을 배신할 일이 있겠습니까? 단지 현실의 벽 때문에 교회는 용사님을 대신하여 손을 더럽혔을 뿐입니다.”

“...당부는 잘 듣겠습니다.”

용사는 더는 할 대화가 없다며 몸을 돌려 그의 방에서 벗어났다.

추기경은 혼자 남아서 한숨을 푹 쉬었다.

“일이 꼬였구나.”

추기경은 꼬여버린 원인을 천천히 파악했다.

흑마탑과 왕가, 그리고 입학시험.

안 그래도 입학시험으로 인하여 부담이 큰데, 거기서 왕가가 흑마법사 조직을 키우는 짓까지 해버렸으니, 왕가를 변호하던 교회가 의심을 받는 건 당연했다.

“어찌하여 흑마탑이 무너졌는가.”

추기경은 이상하다고 여겼다.

어차피 실기 시험의 참사는 일어날 일이었으니, 그것만 감당할 예정이었는데, 흑마탑으로 인하여 정해진 역량을 넘기고 말았다.

그렇다면 일이 꼬여버린 시작점은 흑마탑이 무너진 사건에서 비롯되었으니.

추기경은 전속 사제를 불렀다.

“예, 추기경님.”

“왕가에 몇 가지 이야기를 전달하고, 베시아 사제를 석방해주거라.”

“알겠습니다.”

흑마탑이 무너진 일은 흑탑주가 원하여 덮어두기로 했었다.

어차피 흑마탑을 무너뜨린 당사자가 죽어서, 굳이 캐낼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여기에 관련된 베시아 사제도, 주교와 엮어서 처리하기로 했기에 실로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디선가 계속해서 변수가 생겼다.

흑마탑부터 시작하여, 입학 시험,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의 일을 망치는 놈이 있었군.”

그 벌레를 잡아야 했다.

그래야만, 그분의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질 테니.

원래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흑마탑에 대한 일을 파헤치기로 했다.

추기경의 한쪽 눈이 잠시 거뭇하게 바뀌었다.

그렇지만 그건 아주 잠깐 일어난 것에 불과했다는 건지, 추기경의 몸에는 성력으로 가득 찼다.

성력이란 마기와 상반된 힘.

또한 성력이란 신실해야만 보유하는 게 가능한 힘.

그렇기에 성력을 지녔다는 건, 일종의 신원 보증이다.

그런 모순이 가능케 하는 권능을 지녔기에.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는 완벽한 첩자가 이 자리에 있었다.

**

“아르갈, 이제 괜찮은 거예요?!”

“엘릭서를 먹었다면서? 그럼 안 죽는 거지?”

가장 먼저 달려온 건 프랑이었다.

그 뒤를 잇는 건 라엘리.

그녀들의 걱정을 한 몸으로 받고 있었다.

생각해 본다면 내 상태는 쓰러져 있는 내내 계속해서 악화했을 테니, 프랑과 라엘리가 심각할 만했다.

정말로 검성의 엘릭서가 없었다면, 한 번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제가, 네? 바깥을 돌아다니면서 저주를 해결할 수 있는 주술사까지 찾으려고 돌아다녔잖아요!”

“나도! 네 저주를 나한테라도 옮기려고 흑마법사를 찾아다녔다니까?!”

두 명 다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저주를 해주할 가능성이 있는 주술사나, 아예 라엘리는 자기한테 저주를 옮기려고 흑마법사까지 찾아다닐 지경이었다.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래도 이젠 몸이 괜찮아졌으니, 나 좀 풀어주는 게 어떨까 프랑.”

엘릭서를 먹은 덕분에 너희가 그렇게까지 걱정할 상태는 아니니까, 그런 제안을 했다.

다른 인물들이 날 크게 풀어주고 싶어 하지 않아서, 날 가둬둔 마법사인 프랑을 설득 해 보려 했지만.

프랑은 정말로 정색했다.

“그거 진심이에요. 아르갈?”

“...그.”

“이번에 진짜 죽을 뻔하고 자유롭게 움직이시겠다고요?”

아니, 그래야지.

흑탑주를 잡건 뭘 할 수 있지 않을까…?

부릅!

프랑은 날 당장이라도 잡아먹기라도 하겠다는 얼굴로 살벌한 시선을 보냈다.

풀어달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아카데미의 휴교가 끝날 때까지 갇혀 있을 거 같다는 위협을 느꼈다.

내 본능에 맞춰서 조용히 몸을 사렸다.

어째선지 마왕보다도 프랑한테 꼼짝 못 하는 것 같은데.

가만히 있으니, 프랑은 그래도 좀 풀렸는지 한숨을 푹 쉰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아르갈.”

“그래, 결국 살았으면 된 거지.”

라엘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생존에 안도했다.

저벅, 저벅.

뒤이어 나타난 건 검성이었으니, 그는 별말 없이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는 모두가 모여들 때까지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뒤이어 문을 열고 들어온 소녀가 있었다.

한동안 갇혀 있어서 그런지 온몸에 더러운 흙이 묻어있었으며, 원래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던지라, 다소 쇠약한 모습의 베시아.

...그 당시가 떠올랐다.

흑마법사에게 고통받으며 죽을 날만 기다렸던 그때의 소녀가.

“아르갈.”

베시아는 날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또 함부로 목숨을 내던지며 남을 구하였기에, 내뱉고 싶어 하는 원망과.

그러면서 자기 부모나 다름없는 주교를 도와주었기에, 느끼고 있는 감사가.

마음속에 공존하며 그녀를 괴롭혔다.

“이, 멍청아.”

그래서 나온 결론은 일단 날 욕하는 건가.

벌벌 떨려오며 나에게 다가오는 걸음이 안쓰러우면서도.

결코 놓을 수 없는 의지가 느껴지니.

그렇지만 안 좋은 몸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던 여파였을까.

휘청-

한쪽 다리가 힘이 풀려 넘어질 뻔하다.

그녀를 붙잡았던 건.

뒤이어 온 용사였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정말로 모두가 모였다.

실기 시험 이후로.

잠시 휴식이 있을 줄 알았지만.

그 직후 덮쳐온 상황이 우리를 모으게 했다.

그렇기에 나는 말했다.

우리는 수험생들을 도왔던 구조자이자.

인류의 구원을.

혹은 그렇게 하게 될 운명을 지닌 이들이 모였다.

고로, 나를 제외한다면 이들은 용사파티의 일원들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

용사파티의 목표는 오직 하나.

“흑탑주를 퇴치하는 것.”

마왕을 잡는 것.

물론 한 번도 합류하지 않은 맴버가 있긴 했다.

바로 성녀.

어차피 베시아가 성녀급의 실력을 지녔으니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용사파티의 대마법사 역할도, 지금 프랑이 대신하고 있었고.

그래서 모두가 모였다고 생각했건만.

하나 까먹은 이가 제 발로 이곳에 들어왔다.

“...다 여기에 모여있네?”

여전히 아픈 건지 입에 마스크를 쓴 창성이 기침을 연신 해 대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교회에서 어느 정도 치료받았는지, 상태가 조금 나아진 걸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수도에 도착한 이후로 따로 안 챙긴 거로 기억하는데, 용케 교회에 머물고 있었구나.

아마 프랑이나 라엘리가 챙겨줬게….

“어, 아셀? 교회에서 머물고 있었네요?”

“언제 여기에 왔었어? 마차에 놔뒀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구나.

창성은 들어오자마자 세상 모든 억울함을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나, 날 거기다가 버려두고, 지금까지 잊고 있던 거야?”

정말 그랬던 거 같은데?

뭔가 이상해진 분위기 속에서 검성은 풋 하고 웃었다.

그는 마치 이 상황이 짜인 것처럼 느껴졌는지, 그렇게 물었다.

“뭐냐 아르갈, 이것도 예절교육인가?”

“...아니다.”

누가 예절교육을 이렇게 불쌍하게 해.

창성의 두 눈에 물기가 좀 지나칠 정도로 가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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