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불길한 날이야.”
아르델은 하늘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이번에는 순찰이 아닌 성문의 경비를 맡고 있었다.
그런다 해서 견습 기사가 하는 일이 많은 건 아니다.
대부분의 잡일은 경비병이 다 하고 있으니까.
하늘은 어두웠다.
맑은 태양이 지상을 비추어야 할 텐데, 먹구름이 잔뜩 껴서 주변을 어둡게 만들었다.
여기에 대한 반증일까.
분위기가 상당히 안 좋았다.
견습을 관리하는 선임 기사가 닦달하는 건 물론이고, 경비대에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이 나왔으니까.
실종자들이 상당수 나타났다.
처참한 흔적의 시체들도 발견됐다.
사제들이 보기에는 마기까지 묻어나왔다고 한다.
이런 불길한 징조가 계속되니, 당연히 안토니를 수호해야 하는 기사들은 비상이었다.
수도에 보고를 올려야 할지 고민했지만, 이렇게 된 지 얼마 안 지났으니 당장은 기다리기로 했다.
나중에 아무런 일 없이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르델이 예상하기에는 무언가 일이 터질 것 같았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칠 사건이.
그렇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단순 예감 가지고 이 도시에서 벗어나는 짓을 하려는 마음은 없었으니까.
“마차 들어옵니다.”
그러던 참에 다가오고 있는 마차가 있었다.
커다란 도시이니만큼, 이런 심상치 않은 상황 속에서도 도시로 들어오고자 하는 행렬이 많았다.
대부분은 무역상이라거나, 이동을 위해 마차를 빌려 탄 서민의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
“뭔가 많이 고급진데?”
그런데 누가 보더라도 뻔히 귀족의 마차로 보였다.
경비병들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고, 아르델도 누구인지 보기 위해서 근처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와중에 달려온 마차의 문양이 뚜렷해졌을 때, 경비병들의 긴장은 폭탄처럼 되어 다가왔다.
“...루셀마니?”
공작가의 이름을 누군가 떠올린다.
그러한 상징이 저 마차에 박혀 있었으니, 모두가 뒤집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행히 가주가 행차한 건 아니었다.
공작께서 친히 오시기라도 했다면, 진작 선임 기사부터 시작해서 도시의 시장이 정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상황 자체가 달랐을 거다.
그렇다면 건 최소 루셀마니 소속의 핏줄이라는 건데.
그것도 보통 이야기는 아니다.
도대체 공작의 자제가 여기에 왜 오는 건가?
드르륵- 텅!
마차는 멈추어 섰고, 경비대는 바짝 긴장한 채로 늘어섰다.
경비대장이 직접 나서서 마차를 살피며 공손한 자세로 말한다.
“혹시 어느 고귀한 분께서 자리하신 지 여쭈어보겠습니다.”
그 고귀한 분은 고개를 내밀지도 않았다.
메이드가 얼굴을 보이며 말했지.
“라인하르트 공자님이십니다.”
“아, 알겠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바로 마차 통과를 시키려던 순간.
마차의 내부에서 걸어 나오는 이가 있었다.
그건 핑크빛의 머리카락을 한 영애였다.
그녀가 누군지는 아르델도 알고 있었고,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아르갈의 혼담 상대가 누군지 모를 리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라엘리 역시 아르델을 한 번 본 적 있었기에 그를 보며 반가워했다.
“아르델 오빠, 오랜만이네요!”
“바, 반갑다.”
사실 근무하던 와중에, 그것도 특수한 상황에서 아는 얼굴과 마주하는 건, 곤란하다.
그나마 나은 점이 있다면 라엘리는 루셀마니의 마차에서 내린 탓에 그에게 뭐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지.
“저, 견습이 루셀마니와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가?”
“별 볼 일 없는 남작가 출신인 줄 알았더니, 무언가 뒷배는 있는 모양이야.”
아르델은 갑자기 생겨난 오해를 어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던 때에, 더 큰 거물이 마차에서 내렸다.
폭포수 같은 푸른 머리.
루셀마니의 상징과도 같은 녹안.
“그대가 아르갈의 형제인가?”
“그렇습니다.”
“잠시, 마차에 합류할 수 있는가?”
라인하르트의 제안에 도대체 무슨 사태인가 싶어서 아르델이 당황하던 와중.
자신을 떠받들어야 하는 게 무척이나 당연한 태도를 하고 있던 라인하르트에게 프랑이 책을 휘둘렀다.
툭-
그런다고 하여도 신체감각이 뛰어난 그에겐 책 따위야 완벽히 막히고 말았지만.
“라인하르트! 아르갈의 형한테 무슨 버릇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신분은 고려해야 한다. 프랑.”
“아, 혹시 저 오빠가….”
급발진을 했던 프랑은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델의 복장을 보고 황금 기사단의 견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고작 해봐야 견습을 상대로 루셀마니의 공자가 존칭을 쓴다면, 곤란한 건 아르델이었다.
라인하르트는 한숨을 푹 쉬며, 경비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가 여기서 가장 높은 직책에 자리했나?”
“예, 옙, 그렇습니다!”
“잠시 저자를 빌려 가겠다. 상관없지?”
“그렇습니다! 공자님!”
어차피 아르델에게 결정권이 넘어갈 일은 없었다.
라인하르트는 그를 곧장 데려갈 생각이었으니까.
아르델은 반강제적으로 마차에 탑승하게 됐고, 마차는 도시 내부로 들어갔다.
아르델은 여전히 정신이 복잡한 상황에서도, 중요한 키워드를 떠올렸다.
바로 그의 동생.
아르갈을 떠올리며 말했다.
“...혹시 공자님, 아르갈과 무슨 관계이십니까?”
라인하르트는 잠시 고민하더니 답했다.
“친구.”
그 한마디 뿐이었지만, 아르델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무슨 짓을 하면 공작의 자제와 친구로 사귀는가.
그걸 본 프랑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에이, 무슨 친구는 친구예요. 라인하르트에게는 전우가 아닐까요? 그리고 라인하르트한테 말 편히 해도 상관없어요.”
“너는 누구니.”
“저는 프랑! 차후 대마법사가 될 인재이지요!”
그녀의 당당한 소개에 아르델은 더욱 어지러웠다.
진짜 도대체 뭘 하고 다닌 거냐 아르갈….
속으로 제 동생에게 이를 갈고 있던 아르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르갈이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구나.”
여기에 라엘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과연 좋은 친구? 일까요. 오빠.”
“...그게 아니라면?”
라엘리는 대답하지 않고 생각했다.
라인하르트를 제외하면, 아무래도 전부 연적이 아닐까.
그녀가 생각해 보더라도, 실로 경쟁자가 많았다.
저기 뒤편에 조용히 잠들어있는 베시아만 하더라도 마찬가지.
그렇지만 여기서 승리하는 건 라엘리 자신이라 생각했다.
**
요아스는 바람처럼 도주해버린 저들을 보며 고민했다.
용사는 아직 수도에 머물고 있다.
용사가 교회를 불신하는 상황에서 저들까지 합류해서 교회가 부당하다고 실토하면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나 교회는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용사와 함께해야 했다.
“...모든 것이 꼬일 수도 있겠군.”
일을 망치고 있을 거라고 추정되는 저 소년을.
놓치고 말았으니.
아직 조사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교회에다 구류해 두고 차후 판단할 생각이었지만, 아예 탈출을 강행할 줄은 몰랐다.
“예하, 어찌하시겠습니까?”
“...왕성으로 향하는 길을 차단하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요아스는 분명 저들이 용사에게로 가리라 추정했다.
이 일을 수습할 수 있는 건 오직 용사뿐이니까.
저들은 겉으로는 교회와 적대했고, 요아스 추기경은 명분을 지녔다.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고, 그러한 점을 두려워한다면 저들은 무조건 용사에게 가야 한다.
요아스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굴러봐야 내 손 안에 있지.
교회에서 벗어나 왕성으로 향하는 성기사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일이 꼬였어도, 방향은 제대로 나아갈 것이다.”
어떤 변수가 있어도.
그가 지닌 신성력은 온전했다.
그가 추기경에 자리한 이상, 수도의 교회는 그의 손에 쥐고 있었다.
여기에 견제할 수 있는 건 성녀 후보와 교황뿐.
그러나 그들 모두가 타국에 머물고 있었다.
설령 초월에 가까운 자들이기에, 추기경의 몸속의 마기를 눈치채더라도, 핑계 댈 수 있는 건 많았다.
마기와 성력은 양립될 수 없으니, 흑마법사와 다투다가 그리됐다거나, 마족을 정화하는 데 영향을 받았다는 식으로 변명이 충분히 가능했다.
그는 짙은 미소를 짓는다.
어찌 되건 추기경 자신이 승리할 결말만이 남았다.
마치 신성력으로 덧칠이라도 한 마냥.
하늘은 너무나 밝았다.
그의 미래를 축복하는 듯싶다.
...그리고 모든 이가 떠나간 방 안에서.
죽음을 오가던 존재가 정작 멀쩡히 깨어났다.
악마의 저주를 반으로 나눈 건 어디까지나 추기경의 방심을 유도하는 연막.
이미 저주는 그에게 무의미에 가까워졌다.
주교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모든 계산이 끝났소이다.”
주교는 주교로서.
혹은 초월자로서.
쉼 없이 계산을 반복하여 최상의 결과를 도출해 냈다.
이미 계획은 이루어졌고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대로 결론만을 남기고 있다.
오직 그가 아르갈에게 한 조언만이 유일한 변수.
아르갈의 과도한 죽음을 막기 위해.
끝내 파멸에 이르는 결말을 막기 위해.
거짓에 가까운 말을 담았다.
저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해서 죽음을 각오하지 못하게.
“그런 방식의 죽음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외다.”
그는 아르갈을 믿었다.
그러다가 타락에 이르러.
모든 것을 무너뜨릴 테니.
불사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그는 고개를 돌린다.
초월적인 영역에 이르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저 건너편에서 신성력을 품고 있는 추기경.
그러며 첩자인 자가 있었다.
흑탑주가 당장의 재앙이라면, 저것은 최후에 전신을 붕괴시킬 불치병이었다.
교회는 모든 이들의 희망이 되어야만 한다.
모두가 마왕의 손에서 놀아나더라도.
모두가 타락의 물결에 몸을 담았더라도.
교회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어야 했다.
그런 교회를 망가뜨리게 둘 수 없다.
“...내 반드시. 교회를 정화할 것입니다.”
주교는 신에게 맹세한다.
아니면 신이 그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초월에 이른 정신을 뒤이어.
육체 또한 초월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그대 덕분입니다.”
베시아가 그날 죽어서 돌아왔다면.
라베가 주교는 무너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절망 속에서 꺼내어주었기에.
그는 아직 신을 믿었고.
희망을 믿었다.
그 믿음이 저주를 이겨냈고.
견고한 정신이 초월에 이르렀으며.
뒤이어 몸체의 완전함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얼굴에 남아있던 주름이 없어지고, 하얗게 세던 머리카락이 색을 되찾는다.
이를 유일하게 가로막던 악마의 저주마저도 나누어 가졌다.
은인에게 받았던 만큼.
다시 되갚아 줄 것이다.
절망뿐인 세상에.
구원의 씨앗이 기꺼이 되리라.
**
“후읍!”
쿵-!
숨을 거칠 게 쉬며 수도의 성벽 바깥으로 떨어졌다.
모든 저력을 사용했다.
몸은 다시 망가졌고, 악마의 저주는 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엘릭서가 남아있어서, 정말 쓰러질 것 같으면 먹어도 된다.
아니면 한 번 죽어서 되살아나는 것도 선택지이긴 했다.
창성이 곁에 있어서 굳이 죽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나 싶긴 한데.
...그녀라면 딱히 상관없지 않을까.
워낙 특이한 성격인지라 내가 불사라 하여도 믿을 것 같았다.
창성은 내가 쓰러지자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날 바라본다.
“원래 이렇게 약골이었어…? 아니 원래 약골이 맞네.”
“맞으니까 이제 네가 업어라.”
“우읏, 나도 움직일 여력이 없단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일점 찌르기를 쓰고 체력이 남을 정도는 아니구나.
이번에 일점 찌르기를 썼을 때, 살기도 없고 속도도 워낙 빨라서 한 단계 뛰어넘을 줄 알았더니, 거기까지는 아니다.
그럼 잠시 쉬었다가 갈까.
나와 다르게 창성은 쉬면 회복은 할 테니까.
그리 생각하며 누워있던 참이었다.
창성은 하찮아 보일 정도로 바닥에서 뭉그적거렸다.
...그러나 저 멀리에서.
내 몸의 전율이 일어날 정도의 마기가 용솟음했다.
“...쉴 시간이 없구나.”
시작되었다.
흑탑주이 일으키는 재앙이.
제 생을 불태워서 초월에 이르고자 하는 마지막 발돋움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