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안 죽는다니까-54화 (54/69)

“...그건?”

“흑마법으로 얼굴을 가린 거다. 혹시 몰라서.”

“오….”

창성은 감탄하더니, 왜 가면을 쓰냐는 의문 보다는 다른 것에 집중했다.

“그거 멋있어 보여, 나도 만들어줘.”

“...헛소리 말고 가자.”

“너도 정체를 숨겨야 한다면 나도 숨겨야지….”

“난 달리 이유가 있어서이지, 네가 굳이 숨길 필요가…. 있으려나?”

창성의 집요함에 결국 나는 수긍했다.

그녀 또한 흑마법사한테 정체를 들키면 좋은 건 아니었으니까.

흑마법으로 이루어진 가면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자, 창성은 신비로운 보랏빛 머리카락만이 눈에 보였다.

“이거, 신기해, 얼굴을 완전히 가렸는데 앞이 보여.”

“앞이 안 보이면 그건 그냥 눈 가림막이지 가면이겠어?”

우리는 계속 달려 나갔다.

그리고 어느 한 시점에 되자,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다.

주변 지형지물을 살핀 나는 도시에 매우 근접하고 있는 산 하나를 발견하고 말했다.

“저 산으로 돌아가야겠다.”

“...오르는 게 힘들지 않아?”

“힘들 수는 있지, 그렇지만 확실해.”

저 산이 언데드가 숨어있기 편한 곳이긴 해도, 흑마법사가 머물기 적합한 곳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

누군가에게 추격당하고 위험한 상황에 부닥친 흑마법사라면 저 산이 딱 알맞은 장소이긴 했다.

그러나 반대로 이번에 흑마법사가 도시를 침공하려 한다.

그렇다면 언덕 위에 앉아서 전황을 살피면서 언데드를 쏟아부을 것이다.

도시를 침공하는 상황에서 저 산은 적합하지 않았다.

고로 안전하게 도시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경로라는 거다.

있어 봐야 언데드가 있겠지, 흑마법사가 있을 건 아니니까.

게다가 그렇게 높지도 않으니 들어가는 데 힘들지도 않을 거다.

“가자.”

“응.”

창성은 나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하늘이 어두워, 빛 한 줌 제대로 안 보이는 산속으로 우리는 나아갔다.

**

“너무 어둡군.”

산속으로 들어간 아르델은 중얼거렸다.

너무 어두웠다.

안 그래도 태양을 가려버린 검은 응어리 때문에 주위가 어두웠는데, 약간의 빛조차 빼곡히 서 있는 나무들이 삼켜버리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막이 주변을 뒤덮었다.

그의 뒤를 따라오던 청년은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등에 짊어진 짐을 꺼내 들었다.

“혹시나 하고 준비해 왔습니다.”

“...잘 준비해주었어.”

아르델은 고마움을 표현하며 청년이 건네준 횃불을 들어 올렸다.

불을 붙이자 어두운 것과 상반되게 주변을 밝게 드러내 준다.

산의 경사가 그렇게 가파른 건 아니다.

엄연히 따진다면 산이 아니라 나무가 많은 언덕 정도.

청년은 주변을 살피면서 아르델에게 전한다.

“그 꼬맹이가 그렇게 멀리 나가진 않았을 겁니다. 체력적으로도 그렇고.”

“그럼 이 초입 부근을 살피면 되겠는가?”

“서로 떨어지시겠습니까, 아니면 같이 찾으시겠습니까?”

“같이 움직이자, 분위기가 좋아 보이진 않아.”

아르델은 조급하게 서로 흩어져서 살피는 선택은 안 했다.

소리 높여 이름을 부르며, 산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루나! 어디 있는가? 지금 위험한 상황이다. 루나!”

“꼬맹이! 나와봐라, 기사님이 널 찾으러 왔다!”

그렇게 소리 높여 외치자 풀숲에서 부스럭거리면서 고개를 내미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르델이 화색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그가 알고 있는 형상의 사람이 자리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괴물이 있었다.

죽지 못해 움직이는 언데드가.

-그르르르.

“허억!”

청년이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을 때, 아르델은 곧장 앞서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서걱!

고작 언데드 하나.

그 정도야 이미 기사급이라 봐도 무방한 아르델이 처리하기는 수월했다.

목표가 명예로운 황금 기사단이기에 아직 견습인 거지, 그의 실력이 특별히 떨어졌던 건 아니다.

단칼에 언데드의 목을 날린 아르델은 거친 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언데드가 여기까지 왔다면.”

위험한 상황이다.

아르델은 침착하게 고민했다.

좀 더 나아갈지, 여기서 접을지.

그렇지만 아직 진정한 위기에 맞닿지도 않은 체, 뒤로 물러서겠는가.

그런 겁쟁이는 아니었다.

아르델은 묵묵히 도무지 알 수 없는 위험에 다가섰다.

횃불이 보이지 않는 숲속을 드러내 주었고, 아르델은 풀 속에서 흔적을 발견했다.

작은 아이의 발자국.

누가 보더라도 뻔한 흔적이다.

다소 이상한 점이 있다면, 그 아이도 숲속의 불길함을 알 텐데 발걸음의 방향은 좀 더 깊숙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상하군.”

더 깊게 들어가야만 할 이유가 있는가?

그런 고민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아이의 발걸음을 뒤따르는 커다란 발자국.

루나는 뭣도 모르고 위험한 숲속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이미 언데드에게 포위된 상황이다.

아르델과 비슷한 걸 본 청년도 의견을 제시했다.

“아마 루나는 숨은 것 같습니다.”

“숨었다?”

“도망가는 것 치고는 발자국이 얌전합니다. 아마 언데드에게 들키진 않은 거 같군요. 언데드 눈앞에서 도망치기보다는 언데드가 다 지나가고 안전해질 때까지 숨어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찌 보면 희망적인 해석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숨어서 기다리는 건 어린아이가 하기는 쉽지 않은 판단이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찾아보자.”

사람 하나 살리는 데 어떤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아르델은 흔적을 파고들면서 점차 많아지는 언데드를 베어 넘겼다.

죽이고 또 죽이다 보니, 흔적의 끝에 다다른다.

온몸이 더러운 흙투성이의 아이.

익숙한 색의 눈동자와 머리카락.

루나는 무성한 풀 속에서 조용히 벌벌 떨면서 숨어있었다.

“루나…!”

“기, 기사 오빠….”

루나는 자신을 찾아온 아르델을 보며 한없이 기뻐하면서도,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루나의 얼굴을 보고 아르델은 의아해했다.

위험 속에서 아르델을 보고 안정을 되찾은 얼굴이 아니다.

아이는 여전히 두려움에 가득 찼다.

“돌아가자 루나, 지금 성 외부는 위험하다.”

“오, 오빠, 저 앞을 봐.”

그 아이가 그토록 겁에 질려있던 이유를 아르델은 횃불을 돌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수없이 많은 언데드들의 군단이.

조용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르델은 황급히 횃불을 바닥으로 내던져서 불길을 끄려고 했다.

만일 저 언데드들에게 시선이 끌리는 순간 모두가 개죽음당할 게 분명하다.

청년의 어깨를 짓누르며 어떻게든 아르델은 몸을 숨겨 지금의 위험을 넘기려 했다.

그렇지만 이미 늦었다.

횃불의 빛이 저들을 비춰놓은 순간.

언데드들은 적의 위치를 깨닫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끼에엑!

-그웨엑!

-그르륵!

열 마리.

스무 마리.

백 마리.

언데드 군단이 오직 세 명을 향하여 달려들었다.

아르델은 루나를 청년에게 건네주며 외쳤다.

“뛰어! 어떻게든 도망치게, 나는 시선을 끌어 볼 테니까!”

“미, 믿겠습니다. 기사님!”

“오, 오빠 혼자서 거기에 남으면…!”

루나는 아르델의 희생을 원치 않아 했지만, 청년에게 끌려 나갔다.

청년은 위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빠르게 달린다.

산을 타본 경험이 있던 건지 저 청년의 움직임은 아이를 하나 업고도 상당히 빨랐다.

아르델은 잠시 언데드의 시선을 끌었고, 언데드를 베어나가며 뒤이어 도망쳤다.

그렇지만 몰려드는 언데드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아르델은 입에서 느껴지는 지친 숨을 거듭 쉬면서도 후회했다.

“너무, 만용을 부렸어.”

사실 예상이 불가능했다.

그냥 성 바깥에 머무는 아이를 성 내로 데려올 생각만 했던 건데, 불운이 겹치고 겹쳤다.

루나는 하필 이때 산속으로 들어갔고, 산속에는 수백의 언데드가 있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됐다.

아르델은 검을 들어 올리며, 비장한 각오를 한다.

언데드들과 맞서 싸워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방안을 마련하고자 움직인다.

-키에엑.

-캬아아악!

-까아아악!

저벅-

수십의 언데드가 사방에서 덮쳐오려는 찰나.

아르델이 죽음을 각오하고 검을 휘두르려던 때에.

도무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겨났다.

이러한 재회는 상상하지도 못했기에.

아르델은 검을 들고선 멍하니 서 있었다.

가뿐한 발걸음으로 아르델의 곁에 선 존재.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아르델에게 익숙했다.

“가만히.”

저 한마디에 모든 언데드들이 멈추어 선다.

위압감이 느껴졌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기에, 아르델은 더더욱 이상함을 느꼈다.

기사단장이나, 아카데미의 교수진이나, 대륙에 손꼽히는 강자에게 느껴질 법한 압박감이 주변을 뒤덮는다.

소년은 불길한 색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 위에 손을 올려 검은 막을 벗겨낸다.

“...못 보던 사이에 많이 바뀐 것 같네, 동생아.”

“바뀐 건 별로 없어 형.”

아르갈이 무심한 두 눈으로 중얼거렸다.

수백의 언데드를 멈춰 세운 소년이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아르델은 수없이 많은 의문을 꾹 참는다.

“물어볼 게 정말로 많지만.”

아르델은 고개를 돌린다.

저 수많은 언데드들이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때에, 굳이 여기서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었다.

“일단은 성으로 가자.”

“그래.”

아르갈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이어 따라오는 사람을 기다렸다.

체구만 보더라도 아르갈과 비슷한 연령대의 소녀였다.

그 소녀는 수려한 몸짓으로 가뿐히 발을 내디디며 아르갈의 곁에 섰다.

아르델은 그걸 보며 약간의 헛웃음을 지었다.

“하나 느끼는 건데.”

“...?”

“네 친구의 성비가 압도적으로 여성이 많구나.”

아르델은 숫자를 세 보았건만, 남자 하나에 여자 넷이다.

순수한 아이라서 여자 하나 잘 사귀고 다닐 줄 알았더니.

이렇게 엮인 게 많을 줄은 아르델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설마 여기서 하나 더 있지는 않겠지.

아르델의 시선에 아르갈은 의아해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문제는 없지, 당장은.”

여자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게 좋다는 충고를 간신히 참으며, 숲속을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상황이 시급하니 당연한 걸음이다.

**

이건 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장난일까.

형은 원래부터 황금 기사단에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니 회귀 전에도 수도를 지키고 있는 황금 기사단이었으며, 지금은 아직 기사가 되지 못한 견습이다.

그리고 머릿속 한쪽에서 황금 기사단의 견습은 안토니를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내가 흑마탑을 무너뜨리면서 생긴 흑탑주의 폭주와 견습 기사로서 안토니를 지키는 형의 운명이 절묘하게 겹치고 말았다.

일단 무슨 이유로 이 산속에서 언데드와 싸우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데드들을 전부 멈춰 세웠다.

언데드들을 조종하는 흑마법사가 근처에 있는 게 아닌 한, 내가 잠시 조종을 할 수 있었다.

이런 방법이 평소에도 잘 먹히는 건 아니나, 지금은 효과적이었다.

“저 사람이 네 형이야?”

창성은 내 옆에 다가가서 그리 말했다.

명백한 사실이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창성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너랑 다르게, 좀 멋진 스타일인데?”

“...그러더냐?”

“걱정하지 마, 네 형한테 관심 가질 일은 없으니까.”

...도대체 왜 그걸 걱정하는 건가 창성.

창성의 헛소리를 뒤로 넘기며, 산을 빠져나가기 위해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자, 저 너머에서 달려드는 인영이 하나 보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몇몇 언데드를 베어 죽였는지 그녀가 들고 있던 검에 진액이 묻어 있었다.

그건 라엘리였고, 당연하게도 날 알아보고는 그리 외쳤다.

“너, 너! 어떻게 여기에 온 거야?!”

...형에게도 그렇고, 무언가 해명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속이 편치는 않았다.

어찌 되건, 내가 그녀들을 속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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