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안 죽는다니까-55화 (55/69)

“자, 잠깐만 라엘리!”

창성은 의외로 달려드는 라엘리 앞에 당당히 서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용기는 삽시간에 진압당했다.

“너는 빠져 아셀!”

“히익!”

독감에 걸리고 괴롭힘을 당한 덕분인지 창성은 라엘리의 외침에 그대로 쭈그리가 되어버렸고, 라엘리는 나와 마주하며 분노 반, 반가움 반이 담긴 시선을 담았다.

그걸 본 나는 알 수 있었다.

의외로 라엘리는 그렇게까지 분노하지 않았다.

여기서 날 마주할 수 있다는 반가움이 더 커 보인다.

아무래도 라엘리는 그렇게까지 나에 대한 집착이 강하지 않아서 그런 건가?

베시아나 프랑은 내가 목숨까지 걸어서 구해주었으나, 라엘리는 그 정도는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았다.

게다가 직접적으로 죽거나 죽을 뻔한 모습까지 본, 두 명하고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을 이용해서, 일단 라엘리부터 설득하는 게 필요하겠지.

게다가 타당한 이유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이유? 무슨 이유가 있는데?”

“추기경이 우리를 억류하려 들었다.”

“추기경?”

평소에 얼굴 마주할 일도 없는 높으신 분에 대한 이름이 나오니 라엘리는 뜬금없어했다.

“계약상으로는 교회에 머물러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추기경이 우리를 가두려 했으니까.”

“교회가?! 말도 안 돼.”

“그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애당초, 베시아를 가두려고 했을 시점부터 이상하지 않던가? 혹여나 베시아를 의심할 수 있더라도, 조사하는 과정을 거쳐야지 처음부터 죄인 취급을 하고 있었다. 교회의 수뇌부는 타락했고 그들을 신뢰할 수 없다.”

이러한 논리에 라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는 더 없이 수상했으니까.

“그리고 수도 전체가 교회의 영역이기도 하니, 차라리 너희와 합류하겠다고 판단했다.”

“...그건 이해하겠어, 그럼 계약은 어떻게 한 건데?”

사실 계약은 처음부터 무효였지만, 다른 변명거리가 있었다.

프랑도 바보는 아니다. 아무리 교회라 해도 무슨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위험한 상황에서는 계약을 무시하고 움직일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만들어두었다.

“계약에 예외 조항이 있다.”

“아, 그렇겠네, 예외 조항이 없으면 안 되지.”

라엘리는 납득했다.

계약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수긍할 법한 해명이긴 하다.

무슨 남을 작정하고 구속하려고 한 계약도 아니고, 보호하려고 한 계약인데, 계약 때문에 더 위험해지면 이상한 거지.

그렇지만 여전히 모순점은 있었다.

아무리 예외 조항이 있어도, 어디까지나 나의 안전을 위한 것.

더 위험할 수 있는 안토니에 직접 찾아왔다는 건 모순적이었다.

또한 아직 수도에 머물고 있을 용사에게 가지 않았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

...이 부분도 적절히 해명해야겠지.

잠시 쭈그리가 된 창성도 애써 용기를 내며 나섰다.

“마, 맞아, 추기경이 우릴 가두려 했다니까?”

“그래?”

그렇지만 라엘리도 이상함을 여전히 느꼈는지 의심스러워했다.

“근데 굳이 여길 찾아왔어? 좀 더 안전한 곳으로 가지.”

“...해결할 자신이 있어서다. 멀리에서 터져오는 마기의 폭풍우를 보고, 이번 일은 내가 오는 게 맞다 판단했다.”

“으응….”

라엘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 일은 자신이 결정 내릴 게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일단 몸을 돌렸다.

“모두하고 이야기를 나누자, 이건 내가 어떻게 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알겠다.”

“그리고 아르델 오빠, 오빠가 말했던 아이는 산 아래로 잘 내려갔어요.”

“그것참 다행이야.”

...내 형은 누군가 구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던가?

확실히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심성 하나는 똑바르다.

한결 나아진 분위기 속에서 형은 나에게 조용히 말해주었다.

“아까 도와준 건 정말로 고맙다.”

“별것 아니야.”

“그리고 한 가지 충고를 좀 할게.”

“충고?”

충고를 해 주겠다는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한 번 듣고자 했다.

아르델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

“...그게 무슨 소리.”

“꼭 진지하게 생각해보아라.”

형은 이해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고 좀 더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내가 아카데미를 다녔을 당시에 학교 전체에서 유명하던 인기남이 있었다. 제 외모와 번들거리는 말솜씨를 이용해서 여러 명과 사귀고 다녔었지, 그 녀석이 어떻게 됐는지 아는가?”

“어떻게 됐는데.”

“칼에 맞고 죽어버렸다.”

...그거 너무 극단적인 것 아닌가.

황당해하는 내 표정을 진지하게 관찰한 아르델은 뒷일에 대해서 말하였다.

“원래 사귀고 있던 여검사를 놔두고 또 다른 여자와 놀고 다닌 거지, 그걸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반복하고 다녔으니 그 여검사는 화를 못 참고 찔러 죽였다고 한다.”

“...나와 맞는 예시는 아닌 것 같은데.”

“그건 안다. 그 녀석이야 자기가 자초한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불길해서 그렇다.”

...굳이 불길할 게 있는가? 내가 프랑, 라엘리, 베시아, 창성과 함께 다니는 것은 특별히 그녀들과 연인이라는 관계에서 함께하는 게 아닌, 돕거나 구해주었다는 은인의 개념이었다.

“자기는 아닐 거라는 자신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녀들이 너에게 보이는 감정이 친구에게 보일 법한 모습은 아니니까.”

“그건 알아.”

확실히 그녀들의 감정이 과격하긴 했다.

날 가두거나 가로막으려 들었으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길 구해준 은인의 목숨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 아닌가?

그러한 걸 고려한다면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다.

형은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며 한숨을 푹 쉬었다.

...설령 정말로 그런 파국이 생기더라도, 나는 어차피 불사자라 죽지는 않는다.

걱정이 굳이 필요하겠는가.

산속을 내려가자 곧 성이 보였다.

수 없이 많은 시민이 성으로 들어가기 위한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이미 언데드들이 움직였고 그런 목격담이 넓게 퍼져버린 이상, 모두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도망치고 있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미 늦어 보였다.

저 멀리에서 커다란 마기의 응축이 느껴진다.

흑마법사들은 저기에 몰려든 사람들을 한 번에 몰살시키고자 흑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뻔한 방법이다.

저 수많은 사람이 전부 성으로 들어가기에는 입구가 너무 좁았고, 저 좁은 입구로 들어가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많이 몰린다.

이런 타이밍에 흑마법을 떨구기 딱 좋겠지.

나라도 그렇게 하겠다.

막기에는 이미 늦었다.

막고자 한다면 내가 이미 저 자리에서, 단검을 써서, 대응할 수 있는 마법까지 준비해야 한다.

초월자가 아닌 한, 이런 상황에서 하늘 위로 떨어지는 흑마법과 맞설 수 없다.

콰아아아아앙-!!

한치의 예상도 틀리지 않고, 흑마법은 성문 앞에 있는 수 없이 많은 군중에게로 떨어졌다.

커다란 참사를 예상했다.

바닥에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들과 그 주변에 흑마법의 여파로 죽음을 맞이한 시체들이 나뒹굴 거라고 생각했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하늘로 올라가 흑탑주의 초월을 위한 거름이 될 것이라 보았건만.

그 흑마법과 맞서는 결계가 하나 있었다.

“...프랑?”

저 높은 성벽 위에 프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마법 실력은 상급 마족과의 싸움에서 이미 진일보했다.

검성과 함께 가장 뛰어난 힘을 가지게 된 실력자라 봐도 무방하다.

특히나 가장 발달한 게 있다면 결계를 치는 능력이다.

그녀가 날 방에 가두기 위해 만들어둔 결계의 수준을 생각해본다면, 정말로 이 분야에서는 그녀가 독보적인 위치에 이룰 것이라 본다.

프랑은 참사를 막아냈다.

수천이 죽을 수도 있는 죽음을 막았다.

흑마법이 투명한 결계에 막히며 장렬한 폭발음을 내었다.

시민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우리는 좀 더 빠르게 저 성벽으로 뛰어갔다.

“오, 오빠!”

다수의 군중에게 접근하자, 아르델을 알아보고 소리 높여 외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어린 소녀는 종종걸음으로 형에게 다가갔다.

아르델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다행이구나.”

“고마워요. 오빠! 오빠 덕분에 살았어요!”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형이 왜 신경 써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머리나 눈동자의 색이 모두 달랐지만, 어딘가에서 아리엘과 무척이나 닮았다.

나조차도 저 소녀를 보고 여동생을 떠올렸으니까.

라엘리는 미소 지으며 루나를 바라보았다.

“와 귀엽다. 너 이름이 뭐니?”

“루나에요!”

“예쁜 이름이네, 일단 여긴 위험하니까 우리랑 같이 갈까?”

라엘리는 그렇다고 해서 동의를 구하진 않았다.

바로 루나를 업히고선 성벽을 향하여 달려 나갔다.

“아르갈! 도와줄 수 있지?!”

“...대책이 없는 건 여전하네.”

그렇지만 가장 편한 길이다.

저 수 많은 군중을 뚫고서 성 내부로 들어가기엔 우리들의 시간이 많았던 건 아니니까.

나는 마기를 움직여 모두의 발아래에 힘을 부여했다.

단순히 성벽에 발이 잘 달라붙게 해 주는 흑마법이다.

이거 하나로 성벽을 오르는 건 미친 짓이긴 하지.

그렇지만, 이거 하나로 성벽을 오를 수 있는 신체 능력을 갖춘 이들 뿐이다.

가장 먼저 창성이 가뿐한 몸놀림으로 벽을 타고 올라갔으며, 라엘리 또한 빠르게 벽을 타고 올라갔다.

등 뒤에 루나를 업고 있는 것 치고는 재빠른 움직임이다.

가장 뒤처졌던 건 나의 형.

그는 차근차근 성벽을 타면서도 묘한 자괴감을 느꼈다.

“...십몇 년을 수련했는데, 한참 어린애들보다 더 느리네.”

“쟤네들이 괴물인 거야.”

아직 수험생들은 하급 마족도 1대1로 못 잡는 마당에, 저 소녀들은 작정하면 중급 마족까지도 비벼볼 수 있었다.

한 번 각성까지 한 검성과 프랑은 말이 필요 없었다.

솔직히 내 형이 하급 마족을 잡을 수 있을까 장담하지 못하는데, 저 소녀들과 비교가 되겠는가.

이런 걸 본다면 아카데미가 의미 있을까.

아무래도 좀 더 다른 과정이 필요하겠지.

장차 용사파티로 활약할 애들이니, 내가 따로 신경 써줄 환경을 만드는 게 좋아 보였다.

엘리트만 모아둔 제1반도 아닌.

장차 용사파티가 꾸려질 전용 반을 이루는 거다.

저들 모두를 마왕만을 죽이기 위한 무기로 만드는 것이다.

아마 이번 안토니에서 활약을 토대로 요구한다면.

아카데미 측에서도 따로 예산을 편성해서 도와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성벽 위에 도달했다.

모두가 안전히 도착했다.

그리고 성벽 위의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두 사람이 보였다.

프랑만이 있던 게 아니다.

베시아까지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검성과 용사를 제외한 모두가 여기에 모여들었다.

그녀들은 라엘리의 태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라엘리는 여기로 찾아온 날 은근히 반기기도 했고, 처음부터 막으려 하지 않았다.

베시아와 프랑은 달랐다.

내가 죽는 걸 진심으로 걱정 했기에, 교회에서 나오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걸 어겼으니 당연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 두 명의 마음 깊숙이 끓어오른 분노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르갈.”

프랑이 첫 마디를 땐다.

“왜 거짓말을 한 거죠?”

“그건….”

“우릴 속인 건가요?”

여기에 라엘리가 끼어들었다.

나의 변명을 이미 들었던지라, 그녀는 어느 정도 변호를 해 주고 싶었던 거다.

“자, 잠깐만, 사실 교회의 추기경이 아르갈하고 아셀을 공격했대! 그래서 아르갈은 여기까지 온 거고.”

“...그런 사정이 있다면 이해는 하지만.”

프랑은 눈치챘다.

더 큰 거짓을 말이다.

마법사로서, 계약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걸 모를 수 있겠는가?

계약을 맺은 당시야 내가 눈속임을 곁들였기에, 속아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계약이 이상하다는 걸 프랑은 알고 있었다.

“계약은 왜 아예 성립이 안 되었던 거죠?”

“으음.”

“거짓말도 정도가 있는 거지, 아예 이런 식으로 속이는 건…!”

분위기가 안 좋아 지고 있을 때.

적절한 해명을 입에 담으려 했다.

그녀들이 화를 내는 주요한 이유는 결국, 내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위험하지 않다는 걸 증명한다면, 화를 풀 수 있지 않을까.

흑탑주의 흑마법을 풀어내는데 보호 받았으면 보호 받겠지, 위험할 일은 없었다.

그런 생각 아래에, 입을 열려던 찰나.

갈등의 중심에 선 소녀가 있었다.

...그건 내가 보더라도 예상 외다.

창성은 양팔을 펼친다.

마치 날 보호하듯이 선 그녀는 말했다.

“...거짓말을 했지만, 아르갈을 믿어줘.”

“...아셀?”

창성은 날 믿고 싶어 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날 믿게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니 움직였다.

“아르갈은 안 죽을 거야.”

창성은 기이한 자신감을 가졌다.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그러한 고집스러운 모습이.

이상한 설득력을 만들어냈다.

“내가 아르갈의 마음을 그렇게 만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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