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셀이 그렇게 말을 꺼낸 순간, 세 명의 적의가 아셀에게로 향했다.
“제, 제가 제대로 들은 거죠?”
“아셀, 그 말 진심이야?”
아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도 그렇게 말을 꺼내긴 했지만, 저런 험악한 분위기를 잘 이해 못하고 있었다.
아셀은 자신이 지닌 감정을 그대로 말했다.
아르갈을 향한 추궁을 막을 겸 해서.
그런데 반응이 이상하다.
라엘리나 프랑은 경악하고, 베시아는 입만 벌리고 말도 못 하는 상황 아닌가.
아직 남의 감정에 대해서 이해를 잘 못 하는 아셀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 채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대로 말 한 거 맞는데…?”
그러자 가장 먼저 폭발한 건 베시아였다.
“또 한 명 더 생긴 거야? 안전하게 있으라고 아셀하고 같이 놔둔 건데 그사이에 꼬셨어?!”
“꼬시다니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저게 꼬신 게 아니면 뭔데?”
베시아의 불도저 같은 모습에 아르갈은 당황했지만, 아셀과 마찬가지로 아르갈 또한 타인의 감정을 잘 몰랐다.
광기에 저며진 삶을 살았기에, 연애 감정 따위를 알겠는가.
아셀이 했던 말이 사실상 공개 고백이나 다름없다는 걸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그걸 보던 아르델은 한숨을 쉬었다.
“동생아, 넌 이미 글러 먹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이건 좀 억울….”
억울하다고 말하기도 전에 라엘리의 팔이 아르갈의 목을 휘감았다.
그녀는 무척이나 살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르갈?”
“...왜지?”
“한 명도 이해하고, 두 명까지도 이해했어.”
라엘리는 다소 억울해 했다.
가장 처음으로 아르갈에게 마음을 주었건만, 어찌 된 게 아르갈은 한둘씩 연애 대상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라엘리는 이해했다.
어쨌든 자기가 마지막에 이기면 되니까.
게다가 남을 구하다가 생긴 감정은 어쩔 수 없잖는가.
아르갈이 베시아나 프랑을 구하지 않아서 그 둘이 죽는 건, 오히려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셀 만큼은 아니다.
아셀이 아르갈한테 구해진 것도 아니고, 그냥 순수하게 단둘이서 잠시 머물고 있었다.
그것도 하루밖에 안 지났다.
그 사이에 꼬드겨버려?
“그런데 세 명은 아니잖아?”
“...무척이나 큰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너희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
“못 알아들은 척하면 다 되는 줄 알아!”
으드득-
라엘리는 아르갈에게 초크를 걸어버렸다.
프랑은 그 곁에서 응원한다.
“잘하고 있어요. 라엘리! 그대로 기절시켜버려요!”
아셀은 당황스러워하면서 라엘리를 말렸다.
아르갈을 돕기 위해서 나선 건데 오히려 상황이 더 안 좋아져 버렸다.
“그, 그만해.”
“아셀, 별로 관심 없는 척하면서 꼬리치다니, 나중에 각오해!”
“히이익!”
라엘리의 엄포에 겁먹고 머리를 감싸며 몸을 숙인 아셀을 놔두고, 아르갈에게 매운 손맛을 보여주기 위해 베시아와 프랑이 모여들었다.
“네 명, 이건 좀 어렵겠네요.”
“난 한 명 더 생길 거라 예상은 했어, 물론 예상인 거지 또 생기면 가만히 놔두겠다는 말은 아니지.”
“이런 나쁜 버릇이 다시 도지지 않게 확실히 처리하는 게 맞겠죠?”
그걸 보던 아르델은 고개를 휙휙 저으면서 다가갔다.
저러다가 사람 하나 송장 치우겠다.
남동생을 위해서 도와줘야겠지.
“몸에 무리 안 가게만 해줘요.”
“아니, 확실히 해야지, 죽을 거 같으면 내가 살려줄게.”
사제의 자애로운 두 손에서 나오는 성력이 왜 저렇게 살벌한 건가…?
아르델은 남의 연애사에 대해서 끼어들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동생의 일이니 두려운 마음을 꾹 참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크흠, 애들아 당장 중요한 건 이게 아니잖아? 그렇지?”
“중요한 거요?”
“아르갈의 버릇을 고치는 것 말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게 있던가요?”
“그, 버릇은 나중에 고치기로 하고, 정말 죽겠다. 애들아.”
라엘리는 아르갈의 목에 걸었던 초크를 풀어주었다.
아르갈이 워낙 별 반응이 없어서 그랬지,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몸부림을 쉼 없이 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목이 졸라진 상태였다.
아르갈은 몇 번 기침을 한 다음에 화난 그녀들을 막아서기 위해 말하였다.
“미안하다.”
“미안한 건 아네요.”
“그건 다행이긴 해.”
“그런 뜻으로 미안하다는 게 아니다.”
아르갈은 여태껏 대화를 들으면서 그녀들이 어떤 감정을 지녔는지 정말 약간이나마 이해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는 정말 오해라 말하고 싶었다.
아셀이 단 한 번이라도 사랑이라는 말을 꺼내었던가.
단지 마음을 움직이고 싶어 했지.
그녀는 아르갈의 죽음을 막고자 했다.
그것이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건가.
다시 그녀들의 시선이 살벌해지고 있을 즘에, 아르갈은 급하게 몇 마디 더 꺼내 들었다.
“너희를 속여서 미안하다. 계약은 원래부터 맺는 게 불가능했지만,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베시아, 네가 생각해 보아도 그때 당시는 너무 과열되지 않았던가.”
“그건 맞아. 지금 와서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까지 막을 필요는 없었어, 게다가 교회가 안전한 것도 아니고.”
베시아는 순순히 인정했다.
프랑도 마찬가지.
“마법사로서 계약에 당한 건 당한 사람이 바보예요. 그렇게까지 마음을 담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 눈에 안 보이면 더 불안하고요.”
“나는 처음부터 아르갈을 놔두고 갈 생각이 없었어.”
아르갈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어찌 되건 용서를 받긴 했구나.
그렇지만 분위기가 딱히 달라진 건 아니다.
“그럼, 좀 풀어줄 수….”
“하지만 아르갈,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지?”
아르갈은 어리둥절했다.
분명 그녀들은 용서했다.
거짓말을 하고 안토니까지 찾아온 행동을.
그렇지만 여전히 눈빛이 살벌했다.
“그래서 어떻게 아셀을 꼬셨을지, 알아볼까?”
“자, 잠깐 그건 분명 오해라고….”
“그런 변명이 통할 줄 알아요?”
그렇게 그대로 납치되어서 끌려가는 아르갈을 본 아르델은 헛웃음을 지었다.
“...동생아, 못 본 사이에 업보를 많이도 쌓았구나.”
무려 네 명이라.
하지만 곧 아르델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주워듣기만 하더라도, 무언가 이상한 점이 많았다.
죽을 위험이 있다고?
그런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다?
대체 뭘 하고 다닌 건가 동생아.
그는 소중한 가족으로서 아르갈을 걱정했다.
**
거의 세 명의 소녀들에게 끌려가던 와중에 구원자는 의외의 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파도와 같은 푸른 머리의 소년.
...검성의 얼굴이 이렇게 반가워질 줄은 몰랐는데.
검성의 곁에는 나도 알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회귀 전보다는 좀 더 젊은 모습이었다.
안토니의 시장.
나의 습격에도 굴하지 않고 결사 항전을 하던 자.
그 암울한 시대에서 가장 올곧았기에, 그의 얼굴을 잊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나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초월의 밑거름이 됐었다.
“모든 기사단과 병력을 움직였소, 수도에도 도움을 요청했소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오?”
“장담하지 못합니다. 더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 있습니까?”
“더 알아볼 수는 있지만, 이 이상으로 유의한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오.”
검성은 시장과 대화를 나누더니 시선이 우리에게로 향했다.
날 발견한 검성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했다.
“올 거라고 예상했다.”
“예상한 김에, 나 좀 도와줄 수 있겠나?”
검성은 날 꽁꽁 감싸고 있던 세 여인을 바라보고선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저들이 널 죽이려 들고 있는 건가.”
“...나도 잘 모르겠다.”
“모른다고요? 그게 제일 나쁜 변명이에요!”
검성은 그러건 말건 나의 부탁을 적절히 수행해 주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상황을 이용한 것이다.
“프랑, 너의 결계로 흑마법 포격을 막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걸로 수천이 넘는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었지, 이번 사태의 구조상 사람이 최대한 덜 죽어야 한다. 너의 도움이 무척이나 필요하다.”
“그, 그런가요?”
“잠시 성 내로 들어가는 시민을 보호해 주거라. 그것만 하더라도 앞으로의 일에 막대한 영향을 줄 것이다.”
프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막지 않으면 참사가 벌어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날 붙잡기보다는 수많은 시민을 살리기 위한 선택을 했다.
검성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다른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근본적으로, 그녀들의 마음은 선하다는 걸 이용하기 위함이다.
“베시아, 이미 언데드들의 습격은 시작됐고, 성 외부에서 다치고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 죽기 직전의 중상을 입었기에 반드시 네 도움이 필요하다.”
“...거기가 어디인데?”
“관료, 네가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검성은 능숙하게 그를 보좌하는 관료를 움직여서, 베시아를 나에게서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아무리 불순한 태도를 지녔어도, 그녀는 근본적으로 사제.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근본을 부정할 수 없다.
베시아는 죽어가는 이를 치료하기 위해 황급히 떠났다.
그리고 검성은 라엘리를 보다가 고민했다.
“넌 그냥 따라와라.”
“왜? 난 따로 할 일 없어?”
“아르갈을 지키는 게 네가 할 일이다. 아니면 목숨 걸고 언데드와 흑마법사와 싸우고 싶은가?”
검성은 영리했다.
마법사인 프랑과 사제인 베시아와는 다르게, 그녀의 특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전장에 나가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했다.
그녀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을 검성은 굳이 만들지 않았다.
검성의 의도를 어렴풋이 눈치챈 라엘리는 수긍하면서도 날 풀어주었다.
방금의 분위기는 말끔히 사라졌다.
더 큰 문제, 더 큰 위험을 인지시켜주니, 연인 관계에 대해 더 신경 쓰지 않았다.
“...다음으로 미루자, 아르갈.”
아니, 정확히는 모면한 것에 불과했지만.
라엘리의 살벌한 귓속말에 몸을 흠칫 떨었다.
그렇더라도 확실한 도움이다. 검성.
“고맙다.”
“고마울 필요는 없다. 어차피 네 힘이 필요해서 도와준 것이니.”
검성은 하늘을 바라본다.
저기에 응어리진 흑마법이 태양 빛을 가로막아 도시 전체를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노화한 사제가 흑마법에 대한 분석을 해 주었다. 말이 필요 없는 끔찍한 흑마법이더군.”
“그건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검성은 걸음을 옮겼다.
도시 내의 음울한 분위기가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성 외부에서 들어와 무거운 짐을 싸 들고 잠시 머물 안식처가 없어서 돌아다니는 피난민.
웃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아이들의 얼굴.
그러한 모든 것이 도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으아앙! 엄마! 아빠!”
“나, 나 잠깐만 저 아이 좀 돌봐줄게.”
라엘리는 그 와중에 혼자 돌아다니는 아이의 부모를 찾아주며, 우리와 잠시 떨어졌다.
검성은 잠시 멈춰서서 말을 이었다.
“믿을 건 단 하나, 수도에 있는 용사가 제때 황금기사단의 전력을 데려와서 흑마법사들을 쓸어 담는 것.”
검성은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가능성만 믿고 있기에는 정세가 너무나도 불안정했다.
“그렇지만 왕가가 황금기사단을 막는다면?”
“...나도 그 점을 걱정하고 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왕가는 흑탑주를 참살하기 위해 집행부가 움직였을 거다. 그러나 집행부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황금기사단 외 왕가의 또 다른 무력.
그들의 힘이라면 충분히 폭주하는 흑탑주를 참살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검성은 이를 근거로, 왕가는 흑탑주를 방관하거나 돕고 있으리라 추측했다.
“왕가를 못 믿는다. 황금기사단도 제때 도와주러 올 것이라는 장담도 못 한다.”
최악의 상황이다.
도시는 언데드 군단을 쏟아내는 흑마법사들을 참살할 무력이 없는데, 지원군마저도 없다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게 예정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네 힘이 필요하다는 거다.”
검성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눈치채고 있었다.
“너의 흑마법 실력이.”
내가 마법사가 아닌,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언제부터 알고 있던 거지?”
“본가에서 조사를 좀 해봤다. 애초에 마검이 아닌 이상 그 정도 수준의 흑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는 유물 같은 건 없더군. 단순한 흑마법이면 모를까, 너는 거의 자유자재로 다루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렇긴 하지.”
여태껏 검성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착각한 이유가 있다면, 마법과 흑마법은 공존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검성은 조사를 통하여 유물의 한계를 알았기에, 내가 흑마법사라는 걸 확신했다.
여기에 나의 흑마법 실력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사실까지.
“하나만 묻지.”
검성은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에겐 비장한 각오가 보였다.
그래야만 하고, 그러지 못하면 이 도시는 지도에서 지워질 거란 사실을 알았기에.
보여주는 태도다.
“저 흑마법을 파훼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