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기사단장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용사님의 각오는 알겠습니다.”
“그럼 약속하시는 겁니까?”
“좀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기사단장은 몇 가지 타협안을 내놓았다.
“도시가 위험한 마당에 여기가 머물고 있어야 하는 제 마음도 편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기사단 일부를 보내지요. 저희는 여기에 남아서 수도를 지키겠습니다. 이러면 왕태자의 명령을 어긴 게 아니며, 동시에 용사님의 부탁도 들어주는 겁니다. 물론 인장도 돌려드리겠습니다.”
보기에는 적절한 타협안이다.
기사단장은 용사와 결투하는 걸 회피할 겸, 왕태자의 명령도 들은 게 되는 거다.
용사는 이런 제안에 혹하는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걸로는 부족하다.
“전부를 주셔야 합니다.”
“제 최대한의 재량을 발휘해서, 정예만 뽑아서 드리겠습니다. 흑탑주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탑주급, 그녀와 싸울 수 있는 전력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안 됩니다. 이건 탑주와 개개인으로 싸우는 일이 아닌, 전쟁입니다.”
기사단장은 난처해하면서도,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강한 압박감이 용사를 눌러 내렸다.
아무리 그녀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어도, 그는 왕국 최강의 기사 중 하나다.
괜히 기사단장이란 직위에 오른 게 아니다.
은빛의 검선이 선명히 용사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 검선에는 푸른 빛이 물들기 시작했다.
엑스퍼트의 상징.
그리고 엑스퍼트의 한계까지 올랐다는 기사단장의 위엄을 그는 선명히 보여주었다.
“세 번 안에 제 검을 무너뜨린다면, 기사단의 반을 내어드리지요.”
“...분명 말했듯, 전부가 필요합니다.”
“검을 부순다면,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기사단장이 이런 모습을 보인 건, 확신이 있어서다.
용사는 흠집조차 못 낼 거리는 확신이.
성검도 못 받고, 아직 실력을 다 쌓지도 못한 용사의 강함은 엑스퍼트의 아래였다.
그런데 엑스퍼트의 정점인 기사단장의 자신감은 얼마나 강하겠는가?
이런 관대한 조건으로, 내기를 하겠다는 오만함을 본 용사는 치욕스러우면서도 자신의 나약함에 한탄했다.
그렇지만 이런 조건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길 거란 확신이 없는 결투보다는 이런 방식이 최소한의 요행이라도 바랄 수 있었으니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녀가 수용하자, 단장은 검에 더 강한 빛을 뿜어내며 상단 방어 자세를 취했다.
언제가 되었든, 세 번의 공격을 하라는 모습.
용사도 검을 들어 올렸다.
저 검을 내리게 만들면 된다.
신의 축복을 받은 육체는 엑스퍼트를 이길 수 없더라도, 거기에 따르는 육체 능력을 지닐 거다.
그러니 힘과 힘의 싸움으로.
검을 아래에 처박히게 만들면 된다.
부우웅-!
세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모든 힘을 다했다.
검에 하얀 신성력이 깃든다.
모든 성력을 쏟아부어서 가장 강한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다.
“...과연 용사님이시군요.”
결코 우습게 보면 안 되겠다는 단장의 반응을 보았지만, 기사단장은 그렇다고 해서 당황한 눈치는 아니었다.
용사의 검은 일직선으로 움직였다.
가장 강하고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지녔다.
이런 깔끔한 궤도를 타고 내려가, 기사단장의 검과 맞닿는 순간, 커다란 굉음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앙-!!!
주변을 뒤덮은 흙먼지가 가라앉자, 하얀빛의 검선이 서로 맞닿아 있었다.
서로의 신성력과 오러가 맞부딪쳐 소멸하고 검만이 남아있었다.
용사는 이를 악물었다.
“확실히 용사님답군요. 방심했으면 검이 내려갈 뻔했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여유로워 보이는군요.”
기사단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한평생 검만 휘두른 사람의 오러를 지워버리는 용사님이 더 대단한 겁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길 수 없지요.”
“조급할 필요 없습니다. 용사님, 결국 초월에 이룰지인데, 무엇 하러 현재의 강함에 집착합니까?”
“지금 당장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이를 악물어서 그런가.
그녀의 입에는 뼈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약하다.
너무 약했다.
분명 각성의 기회는 있기야 했다.
저번 시험의 고난에서, 극한의 상황까지 몰렸던 그녀는 어딘가 깨우침을 느낄 뻔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완벽히 안전이 보장된 환경에서 진행되는 내기.
거기서 누군가 죽는 사람은 없었다.
도시에서 사람이 죽더라도 눈앞에서 죽는 게 아니니 특별히 와닿는 것도 아니다.
후회를 해봐야 의미 없다.
용사는 검을 들어 올렸다.
이마 아래로 흐르는 땀을 훔치며, 이번에도 최선을 다한다.
저 견고한 철벽같은 검을 한 치라도 내려버리기 위해서.
“오시죠.”
첫 번째의 공격을 여유롭게 막고도 여력이 넘치도록 남아 보이는 기사단장의 모습을 깨부수기 위해.
두 번째 일격을 가했다.
이번에는 자세가 달랐다.
처음은 정석에 가깝다면, 이번에는 최대한 추진력을 더하기 위해서 검을 최대한 뒤로 당겼다.
기사단장은 용사의 자세를 보고 천천히 분석했다.
“망치라도 내려찍듯이 검을 휘두른다고 하여도….”
콰아아아아아앙-!!
아까와 다름없는 폭음이 터졌다.
이번에도 성력과 오러가 부딪쳤으니, 커다란 여파가 생겨났다.
그렇지만 기사단장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멀쩡히 서서 검을 막았으니.
“소용없습니다.”
“후읍, 후윽….”
“많이 지친 거 같으니, 조금 쉬었다가 하시겠습니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에게는 모욕처럼 들려왔다.
아직은 덜 큰 애송이를 가르치기 위해, 만류하기 위해서, 배려하는 척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모욕적이었기에.
여기서 무너지더라도, 용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길 원했다.
“더 하겠습니다.”
“...원하는 데로.”
기사단장은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이전과 같았다.
똑같이 검을 들어 올리고, 똑같이 검을 막아낸다.
그 단순한 과정을 꿰뚫을 방법이 없을까.
용사는 요행을 찾아보려고도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보아도 요행이라는 건 없었다.
오직 이 내기에는 단순한 정석밖에 없으니.
너무 단순한 규칙이고, 너무 단순한 힘과 힘의 싸움이다.
용사는 깨달았다.
오히려 기사단장의 이 방식은 기사단장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만약에 그녀와 기사단장이 결투에 들어간다면, 용사에게는 주요한 유리함을 하나 지닐 수 있었다.
기사단장은 함부로 용사를 다치게 할 수 없었다.
아무리 결투라는 명목이 있더라도, 용사가 목숨 걸고 달려든다면 내찌르는 검도 거둬야 한다.
아무리 결투라 하여도 감히 인류의 구원자인 용사를 함부로 다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기사단장은 다른 방식을 제안한 것이다.
단순한 힘 싸움.
그렇지만 누구도 다칠 일 없는 방법.
“으으윽!”
그걸 인제 와서야 알았기에 용사는 더더욱 이를 악물었다.
더 강한 힘이.
더 빛나는 성력이 검에 깃들길 바라기에.
검에 힘을 부어다 넣었다.
가장 처음 전력을 다한 것 보다. 더 강력한 성력이 검에 밀집되기 시작했다.
“호오….”
기사단장은 그제야 용사의 검에 감탄한다.
-우우웅!
하지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 발생했으니.
일반적인 성기사가 검에 성력을 불어넣는 걸 뛰어넘어서, 그 빛이 결정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는 초월적인 힘을 부여받은 성기사의 상징이자.
역대 성검을 쥔 용사의 상징이었으니.
마치 결정처럼, 하얀색을 이루었으나 빛을 반사하는 보석 같은 성력이 검을 감싸고 있었다.
“...말이 안 되는군요.”
“...”
용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녀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다.
기사단장이 감탄했을 때, 바로 휘두르려 했건만, 성력이 어디선가 흘러와서 검에다가 더 강한 힘을 부어다 넣었다.
하지만 용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검을 휘둘렀고, 기사단장은 두 번의 공격까지는 가만히 서 있던 자세까지 바꾸며 막아내려 했다.
그렇지만 막아낼 수 없었다.
아까는 인간의 싸움이었으면, 지금은 초월적인 힘이 담겼다.
콰가가가각-!
아까보다는 소리가 작았다.
오히려 압도적이라서, 맞부딪친 게 아니라 한쪽이 일방적으로 무너졌다.
기사단장은 주저앉았고, 그의 옆에는 검이 완벽히 반으로 조각났다.
“...졌습니다.”
기사단장은 결과에 수긍했다.
오히려, 기사단장은 용사의 모습에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바꾸었다.
분명 그가 보았던 건, 초월의 상징이었다.
왕태자의 명령보다 더 강력한 상징이 눈앞에 있었다.
기사단장은 흔들릴 필요성을 못 느꼈다.
바로 곤두서서 우렁차게 외쳤다.
“모든 기사단은 출동할 준비하여라!”
“알겠습니다!”
기사들의 사기까지 오르며, 다들 출동할 준비를 하는 마당에.
가장 이해가 안 된 건 용사였으니.
그녀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방금 성력이 움직였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먼 거리였으나, 용사의 시력으로는 충분히 보고도 남았다.
거기에는 못 알아볼 정도로 젊어진 청장년의 모습이 있었다.
용사는 몇 번을 살피고 나서나 누군지 알았다.
도무지 설명이 안 되었기에, 용사는 입을 멍하니 벌리고야 말았다.
“...주교님?”
악마의 저주를 받고 쓰러졌던 주교가, 용사가 있는 곳까지 찾아왔다.
초월적인 힘을 움직이면서 말이다.
**
“...넌 왜 자꾸 날 껴안는 거냐.”
“이러면 좀 안정되지 않아?”
잠시 분석을 끝마치고 그 분석을 밑바탕으로 파훼할 수식을 쓰고 있건만 옆에 자꾸 거머리가 달라붙었다.
이젠 밀치기도 귀찮아서 놔두었다.
가만히 놔두면 딱 달라붙어서 조용히 있었다.
그러면 신경 쓸 필요 없으니 오히려 편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내 어깨에 고개를 걸친 창성이 수식을 보더니,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떤 원리로 저 하늘의 흑마법을 파훼하는 거야?”
“기본적으로 흑마법은 제물을 바치는 대상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악마부터 시작해서 신화적이고 악질적인 외부의 존재들이 있지, 그런 이들이 인간의 피를 먹고 마기로 환원해 주기에, 그걸 차단하는 게 흑마법 파훼의 주된 목적이 될 거야.”
“...으응, 그렇구나.”
관심이 있긴 있던 건가.
...생각 해 보면 창성은 흑마법에 대해서 하나씩 물어보긴 했다.
크게 호기심을 보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일부로 물어보는 건가?
“그럼, 아르갈은 왜 흑마법을 배운 거야?”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기에.”
창성의 질문은 자꾸 회귀 전과 연관됐다.
내가 과거에 흑마법을 배운 이유는 흑마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 상황을 극복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사자에게 가장 걸맞은 힘이기도 했고.
“...나도, 창을 배워야만 해서, 배웠는데.”
창성은 거기에 동감한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회귀 전에는 창성이 제 과거사에 대해서 언급하긴 했던가?
하나 같이 꼭꼭 숨기긴 했었지.
솔직히 창성이나 검성이나, 이들의 과거사를 잘 모르고 있다.
용사파티에 붙잡혀서 같이 머문 적도 있건만, 아무것도 모르긴 했다.
“왜 배워야만 했는데?”
“으응, 설명하면 좀 길어.”
“충분히 들으면서 할 수 있다. 어차피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일도 아니고.”
그리 말하자, 창성은 잠시 고민하다가 제 속마음을 꺼내 들었다.
“남의 마음을 바꾸려면, 내 마음부터 알려줘야 하는 게 맞겠지?”
“...굳이 그러고 싶다면야.”
“알겠어.”
창성은 이젠 완전히 나에게 체중을 실었다.
“내 이름은 아셀 몬트로즈.”
내가 알고 있는 그녀의 이름이다.
회귀 전에는 그녀의 본명을 오랫동안 몰랐다.
검성이야 별의 칭호 자체가 잘남의 상징이니 즐겨 썼다면, 창성은 자신의 이름을 가리려 했다.
거기에 무언가 이유가 있던 모양.
“...하지만 나는 몬트로즈가 아니야.”
“사생아라는 뜻인가?”
“아니, 아예 연관이 없어.”
그녀의 담담히 말했다.
아무런 관심 없어 보이는 태도 속에서.
흔들리는 감정이 보였다.
“나는 몬트로즈에서 키워진 부품일 뿐이지.”
“...그런가?”
몬트로즈는 백작가.
꽤 좋은 영지를 거점 삼은 권세 가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단 한 번도 메이드에게 보조를 받거나, 특별히 좋은 곳에서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딱히 입는 옷이 좋은 것도 아니고.
검성과 비교하면 확연히 차이가 보였다.
나와 라엘리야 같은 귀족이라 하여도, 몬트로즈는 일게 시골구석의 가문하고는 격이 달랐다.
몬트로즈의 영애가 이렇게 방치되는 건, 엄연히 따지면 말이 안 됐다.
여태껏 부자연스러움을 못 느낀 건, 그저 그녀의 성격 때문이라 생각했건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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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성은 천천히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자신의 암울했던 시기부터 하나씩.
“몬트로즈는 부랑아들을 모아서 어느 한 목적으로 키워냈어.”
그렇다는 건 그녀는 귀족으로 태어난 것도 아닌, 그저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부랑아란 소리였다.
“그들은 완벽한 양자를 하나 들이길 원했어, 용사파티에 합류할, 강력한 재능을 지닌 양자 하나를.”
“...말은 양자지만 양녀라도 상관없겠네.”
“응, 거기서 살아남은 내가 양녀가 된 거고.”
거기서 살아남는 것.
벌써 불길함이 가득한 말이었다.
얼마나 가혹한 환경에 놓여있는지, 상상이 가기 때문에.
그러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 정도로 용사파티에 들어갈 가치가 있는 건가?”
용사파티에 들어간 맴버들이 잘 나가기보단 고생하다가, 결국 마왕을 못 잡고 세상이 멸망하는 미래를 보았다.
차라리 용사파티에 들어갈 실력으로 가문을 지원하는 게 더 나아 보였다.
그러기에 굳이 용사파티에 들어가겠다는 목적으로 실력 있는 고아를 양자로 들이는 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혜택이 엄청나, 용사파티에 들어간 순간 각종 이권이 주어지고, 마왕을 잡으면 가문 전체가 공신 가문이 되니까, 역사상 그래왔고.”
“그렇기야 하겠군.”
마왕을 잡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과정인가.
왕국에서는 막대한 보상을 내걸어서 용사파티에 들어올 강자들을 모아야 했다.
그리고 몬트로즈는 이를 노리고 양녀를 들였던 거다.
고생은 창성이 하되, 이득은 가문이 취하는 거다.
이론상 좋은 전략이다.
용사파티에 들어가서 용사가 마왕을 죽이는 걸 돕기만 하더라도, 가문 전체가 더 높게 도약할 수 있으니까.
그 과정이 얼마나 잔혹하건.
사람 하나가 삶의 이유를 잃어버리더라도.
공신 가문이 될 수 있다는 혜택 앞에서 미쳐 버린 거다.
마치 왕가가 불로불사에 미쳐서 어떤 악행도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몬트로즈 역시 왕가와 비슷한 최후를 맞이했을 거다.
내가 수도를 불태워버려서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한 사람을 망치고 여럿을 죽이면서 이루어진 용사파티 합류 계획은 물거품이다.
왕가를 대체할 정치 집단이 없는 한 왕국은 사실상 멸망한 것이었으니, 나라 전체가 무정부 상태가 되었고,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런 회귀 전을 떠올리고 있을 때, 아셀은 말을 이었다.
“몬트로즈는 날 납치했고, 눈을 뜬 순간에는 아무 무기를 집어서 싸우라는 소리를 들었어, 그때 잡은 게 창이었고, 지금도 창을 쓰게 된 거야.”
“그런 거였나?”
자신의 재능을 찾아서 창을 무기로 쓴 게 아니라, 얼떨결에 잡았던 무기가 지금까지 썼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우연치고는 그녀의 재능이 창에 너무나 걸맞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때에는 나랑 비슷한 아이들이 많았어,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으면 거기로 잡혀갔으니까.”
“...들어보니, 지금은 다 죽은 거 같네.”
“응, 다 죽었어.”
그녀의 한마디가 너무나도 무심했기에.
별거 아닌 일을 듣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도 들었다.
하지만 어느 한 가문이 벌인 잔혹한 과거이며,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죄였다.
...왕가만 무너뜨려야 할 게 아니었다.
듣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말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일을 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결국 몬트로즈의 양녀가 되었는지.
길고 긴 삶에 관한 이야기였다.
무려 하루가 꼬박 걸릴 정도로.
중간중간 식사를 잠시 하며.
잠시 숨을 돌리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되었으며, 왜 그런 성격과 습관을 지녔는지도 하나씩 알게 됐다.
납치당했던 부랑아들은 결국 창성만이 남았다.
죽을 위험이 큰 수련을 겪었고, 거기서도 살아남은 아이들끼리 서로 싸우게 했다.
그렇게 창성은 몬트로즈의 양녀가 되었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녀는 만들어진 용사파티의 부품이자, 인생 자체의 목적이 용사파티에 들어갈 운명이다.
그녀가 입을 닫으니, 분위기가 고요했다.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고, 그녀도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그렇지만 나는 이런 삶을 살아온 소녀에게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공감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게 살아왔으니, 거기에 공감했다.
흑마법사의 노예가 되었으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삶을 살았다.
끔찍한 과거에 대해서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다.
그로 비롯해 지은 죄가 너무나도 컸다.
썩어 문드러진 감정이, 광기에 망가진 마음이 남에 대해서 공감했으니.
그 감정에 대해서 이성이 뭐라 판단을 내리기 전에 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천천히 그녀를 감싸 안는다.
아셀이 했던 것처럼.
나는 끌어안으며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고생했다.”
“...응.”
창성은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서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생겨났다.
그것도 잠시, 창성은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내가 위로받아야 하는 게 아닐지도 몰라.”
“...왜지?”
“내가 보기에는, 네가 살아온 삶이 더 힘들었을 거 같아서.”
내가 과거에 대해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그녀가 어림짐작으로 나에 대해서 한 예측이 너무나 잘 들어맞았다.
“더 큰 고통을 느꼈고, 그래서 그 마음이 망가져 버린 것 같아서.”
“...”
“그래서 나는 동질감을 느꼈고, 나는 널 위로해주고 싶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신적으로 기이하게 흔들려왔다.
결국 창성이 나에게 접근을 한 이유는 동질감 때문이고.
그 동질감을 통하여 창성 역시 날 공감했다.
그래서 위로받았다.
...그 과거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군.”
내가 그녀를 놓으려 했지만, 창성은 더더욱 날 끌어당겼다.
놓지 말라는 듯, 이제 더 회피하지 말라는 듯 달려드는 모습이다.
“그러니까 말해 줄 수 있어?”
나의 상처를 말해달라 하고 있었다.
창성은 말이다.
...그런데도 말하고 싶은 과거가 아니다.
마왕을 죽일 때까지 나만이 간직하고 싶은 과거.
끔찍한 일에 대해서 나는 입을 굳게 닫았다.
“할 수 없다.”
“...그래?”
창성은 여기서 더 요구하진 않았다.
조용히 떨어져서 날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
하지만 그녀의 위로가 지나칠 정도로 위안이 되었다.
약간이나마 편안함을 느끼며, 걸음을 옮긴다.
분석이 거의 끝나간다.
마기는 진작 죄수를 통해서 모았다.
수명을 가져오는 일이지만, 사형수이니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게다가 분석을 통해서 흑마법의 치명적인 오류까지 발견했다.
그 오류 덕분에 파훼까지 걸리는 시간을 압도적으로 단축했다.
이러면 흑탑주는 결국 패배하는 미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직 하늘의 마기가 많이 모였던 건 아니었으니, 간접적으로 도시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이걸로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만약 도시가 삽시간에 붕괴할 징조가 보였다면, 진작 흑탑주 앞에 나서서 미끼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서, 완벽한 승리만이 남았다.
피로 그린 커다란 마법진 위에 선다.
마법진에는 나의 피와 아셀의 피가 섞여 있었다.
그런 짙은 색이 더 붉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창성은 파훼를 시작하려는 날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제, 삶에 대한 미련이 좀 생기는 거 같아?”
그녀는 내 마음이 바뀌었는지 물었다.
어느 정도 그럴지도 모른다.
불사자라서 죽지 않는 게 아닌.
진정 모든 걸 끝마치고.
나는 삶의 이유를 찾고 계속 살아갈 것인가.
창성은 외쳤다.
진심으로 그렇게 바란 창성의 한 마디가, 절절히 가슴 속으로 와닿았다.
“그러니까, 죽지 마! 아르갈.”
약간이나마 고개를 끄덕인다.
한 번의 발걸음을 떼자, 커다란 힘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피로 물든 마법진이 강한 빛을 낸다.
**
피난민을 공격하는 포격을 막아냈던 건, 베시아의 성력이었다.
그녀도 어느덧 성벽 위로 올라와 프랑과 함께 같이 서 있었다.
“도움이 됐어요. 베시아.”
“포격이 너무 시끄러워서, 치료를 다 끝내고 달려왔어.”
프랑은 궁금했다.
분명 라인하르트는 중상자가 많아서 베시아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말했건만, 이렇게 빠르게 치료하고 왔다고?
프랑은 베시아의 실력이 남다르다는 걸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성력의 결계는 데스나이트 마저도 완벽히 막아냈다.
물론 그녀의 힘이 프랑을 확연히 뛰어넘기보다는 상성 상 유리하다는 게 맞겠지.
드디어 피난민들이 모두 빠져나갔고, 사람들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특히나 좀 더 이 일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던 관계자들일수록 더더욱.
저 하늘의 흑마법은 누구 하나라도 죽는 순간, 더 커다란 군단과 맞서 싸워야 한다.
이미 언데드들에게 죽어서 올라간 마기만 하여도 큰 규모다.
언데드들은 자신들의 목표가 저 커다란 성벽 뒤에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잠시 달려드는 걸 멈췄다.
마찬가지로 데스나이트도 굳이 성력의 보호막을 뚫으려 들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기이한 소강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 사태의 주범이자, 도시의 습격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가장 먼저 사제와 성기사들이 발작했다.
그들의 천적이 눈앞에 있으니 그럴 만하다.
“저 죽어 마땅한 흑마법사들!”
“얼마나 커다란 죄악을 짊어지려고 이런 짓을 벌였느냐!”
검은 로브를 쓴 흑마법사들이 하나의 군단을 이루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제의 비난에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놈들인데, 뭣 하러 대답해주냐는 태도.
그들은 성벽 가까이 접근했다.
이들을 죽이기 위해 마법을 날리건, 화살을 날리건 그 무엇이든 의미가 없다는 태도.
그중에 한 명이 로브를 걷어냈다.
그건 하나의 여인이었다.
전신에 금각이 새겨져 있었고, 마탑에서 통용되는 상징이 박혀 있기에, 사람들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 일의 주범이라는 것 역시.
“...저 탑의 문양이라면 흑탑주?”
“탑주라는 자가 저리도 젊다고? 아니 애초에 수도 근처에 흑탑주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베시아는 발작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이 일의 주범이자, 흑탑주에게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당사자라서 더더욱 그랬다.
“저, 저년 잡고 나도 죽을 거야!”
“잠깐만 참아요! 괜히 여기까지 접근 한 건 아닐 거란 말이에요!”
프랑은 혹여나 모를 함정이 있을까 봐 베시아를 최대한 말렸다.
그리고 흑탑주, 티아그리스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너희들에게 할 제안이 있어.”
이미 그녀는 확신에 가득 찬 듯, 권태로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딱 절반, 절반을 주면 모두 살려줄게.”
여기에 도시를 대표할 만한 관료가 대답했다.
시장은 도시 내부에서 할 일이 많아서, 성벽에는 부시장을 세워 뒀다.
노화한 모습의 부시장은 거기에 대해서 의문을 제시했다.
“그 절반이라는 게 무엇이오.”
“이해 못 했어? 너희 절반.”
“그러니까 그 절반이….”
흑탑주는 답답하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녀로서 도시민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말을 이해 못 한다는 걸 납득 못했고, 부시장으로서는 설마 절반이 그 절반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너희 모든 목숨의 절반, 나는 그걸로 충분해.”
10만의 인구가 사는 도시민의 절반이면, 5만이다.
그것만으로 초월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그녀는 온전한 초월을 원하기보다는, 비슷한 힘을 얻고서 수도로 가서 불사자를 찾으면 됐기에, 모두 죽일 필요가 없었다.
흑탑주가 보기에는 합리적인 제안이다.
절반이나 살려주겠다는 소리인데 말이다.
원래라면 모두 씨몰살 당했을 텐데.
당연히 부시장은 기겁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얼마나 좋은 조건인데, 말이 안 된다니, 원래 다 죽이려다가 반은 살려주는 거야.”
더는 협상의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부시장은 몸을 돌리며 모두에게 외쳤다.
저항 외에는 오직 죽음뿐이다.
그럴 바에는 최후를 다하여 싸우는 일만 남았다.
“개소리하지 말라 흑마법사! 우리는 총력을 다하여 도시를 수호할 것이다. 모든 기사들이여, 마법사들이여, 사제들이여! 저 간악한 흑마법사를 막아내라! 수도에 지원이 올 때까지 사력을 다하여 버티어라!”
“예!”
“저 흑마법사들을 불태워 죽여라!”
그렇게 부시장이 외치던 순간, 베시아는 프랑이 붙잡고 있던 손길을 뿌리치고 바로 강력한 성력을 흑탑주에게 쏟아 부었다.
아무리 함정이 있건,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어서 어그로가 끌려도, 그녀는 여기서도 가만히 있을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이거나 맞고 뒈져라, 개년아!”
커다란 외침에 고개를 돌린 흑탑주는 되려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란, 너무나도 매혹적이었기에, 오히려 소름이 돌았다.
“어머, 네가 거기에 있었구나?”
그녀는 베시아를 너무나도 반가워했다.
굳이 다른 사람을 통하여 죽일 필요 없이.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있어서, 기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