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탑주는 화려한 피날레를 볼 줄 알았건만, 그 뒤에 포격이 잠잠해지는 걸 보고 그녀는 분노했다.
“뭐야? 왜 갑자기 멈춘거야!”
“그…. 마기를 다 썼습니다.”
“목숨까지 걸어서 쓰면 되잖아?”
“탑주께서야 상관없으시겠지만, 저희는 목숨 걸면 여기가 무덤이 되는지라….”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흑마법사가 오랫동안 쌓아온 마기를 다 쓴다고 하더라도, 언데드를 만들거나 지금까지 이어져 온 포격으로 이미 끌어당긴 만큼 끌어당겼다.
그런데도 흑마법사가 무한한 원동력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렇게 생겨난 죽음에서 마기를 끌어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근데 이렇게 생겨난 마기들을 저 하늘이 다 집어삼키고 있다.
이러면 수레바퀴를 돌리듯이 흑마법 포격을 쏟아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저희에게 마기만 좀 나눠준다면….”
“음.”
흑탑주는 고민했다.
더 강한 공격을 쏟으려면 하늘에 모인 마기를 활용해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그건 꽤 고통스러운 작업이라는 것.
하늘의 마기를 몸에 품고, 다시 뿌려야 하는데 그게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흑마법사들에게 직접적으로 저 하늘과 접촉할 권한을 주는 것도 안 된다.
잘 못 하다간 소유권이 넘어갈 수도 있어서다.
원래라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마기를 몸에 쏟아서 다시 활용하는 작업을 거쳤을 거다.
그래야지 빠르게 도시를 점령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여유가 있었다.
외부의 지원을 지연시켜서, 저 도시를 별문제 없이 요리시킬 여유가.
차라리 하루를 거쳐서 천천히 마기를 나눠준다면, 그녀는 크게 고통받을 필요도 없었고, 마기를 쉽게 보충할 수 있었다.
이미 그녀는 압도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기에.
좀 더 편안한 선택을 했다.
결국 사람은 고통을 싫어하는 동물이다.
마지막에 크나큰 고통을 견뎌야 하는 게 예정되더라도, 당장은 아프고 싶지 않을 거다.
도시에 떨어지는 포격이 멈췄기에 다시 잠잠해졌으나, 저들은 이미 절망감에 빠져있었다.
다시 언데드들이 도시 내부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하루만 더 기다리면 이길 텐데.”
무엇 하러 그녀 자신이 극한까지 몰려야 할 이유가 있던가?
그녀는 편안히 의자에 앉아서 도시를 지켜봤다.
어차피 도시는 알아서 무너진다.
기사나 병사들은 24시간 동안 쏟아지는 언데드를 못 견디고 쓰러질 거다.
그때 마기를 전부 회복하면 문제 없이 도시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여기다가 외부에 지원을 오는 것까지 고려해서, 연락망까지 심어두었다.
만약 황금 기사단이 출동할 때, 곧장 그녀에게 소식이 전해질 거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여력을 다하리라.
그 때까지 티아그리스는 평범한 삶을 조금이라도 더 즐길 것이다.
절망으로 가득 찬 도시를 안주 삼아서.
**
포격은 한 번으로 끝나서 천만다행이었다.
파괴된 건물이 드문드문 보였고, 아예 포격을 맞고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만약 이게 끝없이 이어졌다면, 얼마나 죽고 다쳤는지 감이 안 잡혔다.
지금만 하더라도 큰 피해인데 말이다.
포격의 무서움이다.
성벽의 의미를 사실상 지워버릴 수 있었으니까.
“나는 일단 도시를 돌아다닐게.”
베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움직였고, 사람들도 지금 마주한 참사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프랑은 모든 여력을 다했던지라 풀린 다리를 일으키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버틸 수 있을까요?”
다행히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긴 했다.
아직은 언데드만 쏟아지고 있었고, 데스나이트도 결국 라인하르트가 제압했으니까.
결계로 좁아진 성문은 기사와 병사만 고생한다면 충분히 막아냈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청을 바라본다.
아르갈은 저곳에서 흑마법을 파훼하고 분석하고 있을 거다.
그의 빈자리가 생각보다 컸다.
항상 위험한 곳에서 먼저 나서서 담담히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 싸워준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이제야 알았다.
여기에 있다면, 그가 무엇이라도 해 줄 거라는 기대를 품었을 거다.
그렇지만 지금은 없었다.
더 큰 일하기 위해 시청에 머물고 있었지만, 지금 이 공간에 없다는 것이 프랑의 마음 한쪽이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르갈, 언제 오나요….”
마치 영웅처럼 등장해서, 저 흑탑주를 한 손가락으로 죽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기만 한다면, 달리 소원이 없을 지경.
그런 생각에 빠져있던 프랑의 눈에 보였던 건, 주춤거리며 무기를 들고 나서는 시민들의 모습이다.
“저희도 도와줄 수 있습니까?”
“병사와 기사님들만으로는 힘들 것 같습니다.”
“...위험하지만 작은 도움이라도 고맙구려.”
용기를 가진 이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앞서 나갔다.
기꺼이 지금 쏟아지고 있는 언데드와 맞서서 싸우겠다는 각오를 지닌 이들이었다.
도시는 아직 희망을 찾고 있었다.
절망 앞에서 무너지기에는 아직 이르다.
습격은 시작이었으나, 조금이라도 버티면 방법이 있다는 희망이 존재했다.
그리고 도시 내부의 주요 인물이 성문까지 다가왔다.
안토니의 시장이다.
그는 도시를 이미 한 바퀴 돌아다녔는지, 전신이 더러운 먼지 투성이었지만, 강직하게 걸음을 옮기면서, 연설하며 흔들리는 도시민들을 붙잡았다.
만약 시민들이 희망을 놓아버린다면, 그 뒤에는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몰라서 그렇다.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고, 남을 죽고 다치게 할 수도 있었으니까.
도시가 알아서 자멸하는 일은 막아야 했다.
시장은 라인하르트를 불렀다.
마침 프랑도 곁에 있었기에, 그녀는 다가가서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그대가 소개한 인물, 믿을 수 있소이까?”
“믿을 수 있습니다. 혹여나 시장님이 의심을 할 수 있지만, 그는 틀림없이 이 도시를 구하고자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도 믿고 싶소이다. 하지만 몇 가지 보고가 올라왔건만, 그는 흑마법을 다루고 있다고 하더구려, 잠시 방 내부로 들어갔던 죄수들이 한 말이오.”
“단순 오해입니다. 흑마법을 파훼하기 위해 흑마법에 가까워진 것이지, 그는 틀림없는 마법사니까요.”
시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어차피 희망을 걸 곳은 많지 않으니, 내부로 들어온 첩자라 생각할 여유가 없구려.”
“믿어주시지요. 깊게 신뢰할 만한 인물입니다.”
“그렇소이까? 그럼 이 소식을 조금이나 기쁘게 알려드릴 수 있겠구려, 포격은 생각보다도 피해가 크진 않소이다. 정확히는 수습할 수 있는 규모라 보면 되겠소.”
시장이 듣기로는 도시 내부에 떨어진 포격이 심각한 피해를 주었던 건 아니다.
반 정도는 맨땅이나, 빈 건물을 타격했으니까.
사람이 죽기야 했지만, 그렇게 많이 죽었던 건 아니다.
처음 포격이 떨어졌을 때는 도시가 붕괴할 가능성까지 고려했기에, 여기에 비하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전장은 어떻소이까? 보고로 듣긴 했어도, 외부인이라 할 수 있는 그대의 정확한 판단을 듣고 싶소.”
“아직은 괜찮습니다. 시장님을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이 아닌, 지금 당장만 본다면 큰 문제가 없습니다. 흑마법사가 움직이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만, 뒤로 물러나고 있는 걸 본다면, 오늘 내로 끝장을 내진 않겠군요.”
그의 말에 시장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도시를 공성하고 있는 흑마법사들은 모르는 희망이 도시에 존재하는 때에, 단 하루라도 시간을 더 벌었다는 건 무척이나 다행인 일이다.
시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움직이며 사람들을 다독일 때, 검성은 프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은 무너질 필요는 없다. 사람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 지금까지 이어진 포격만 보더라도 이미 흑마법사는 여력을 다했어, 우리가 걱정하는 건 저 하늘 위에 있는 마기를 활용했을 때다.”
“그, 그래요?”
“파훼만 성공한다면, 마기를 다 쓴 깡통일 뿐인 흑탑주와 흑마법사들만 남는 거다. 그러니 잠시 쉬고 다시 공격이 들어왔을 때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리 독려를 해 주니 프랑은 자연스럽게 안정을 되찾았다.
이렇게 보면 할 만해 보인다.
워낙 흑마법사와 흑탑주가 강렬한 힘을 쏟아부었기에, 그 임팩트가 강했던 것뿐이지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결코 난사할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삽시간에 무너질 상황이라면, 그 녀석이 진작 나섰을 거다. 하늘에 모이는 마기를 뻔히 읽고 있는데, 균형이 무너질 죽음이 생겨났다면 진작 눈치를 채고 움직이겠지, 아직은 안전하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네요.”
“좀 낙관적이긴 하지만, 그리 생각하는 게 맞다.”
“그, 그럼 믿고만 있으면 될까요?”
프랑은 라인하르트를 보며 조금은 이상하게 여겼다.
그 정도로 아르갈을 믿는 건가?
아르갈은 평소에는 병약하며, 툭 건들면 쓰러질 것 같은 약자이며, 보호해줘야 할 대상.
반대로 무슨 위기가 오면 든든히 믿을 수 있던 게 아르갈이라는 건 프랑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아르갈에게 주고 있는 신뢰는 다른 것이었다.
좀 더 확신과 절대성을 지닌.
반드시 원하는 결과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뢰.
“그가 원하는 게 안 되었던 적이 있던가?”
“그건 그렇죠.”
프랑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정말 각종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걸 관철하는 게 아르갈이다.
그걸 보며 라인하르트는 신뢰했다.
“그럼 안 될 때까지 믿으면 되는 거다.”
아무리 위기가 오더라도, 아무리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 생겨나더라도.
아르갈의 방법이 통하지 않을 때까지 믿으면.
손해 보는 일은 없었다.
프랑은 여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찾아올 재앙에 힘을 비축했고, 언데드들은 여전히 쏟아졌지만, 커다란 벽이 되어 서 있는 기사와 병사들을 뚫지 못했다.
베시아는 꼬박 도시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녹초가 된 채로 돌아왔고, 잠시 시간이 될 때마다 모여서 식사 시간을 가졌다.
입맛이 없지만 꾸역꾸역 입에다 집어넣으며, 힘을 비축한다.
활약을 많이 하다 보니까, 나름 풍요로운 식사가 올라왔지만, 그걸 맛있게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하늘이 좀 더 어두워졌다.
언데드에게 운 나쁘게 죽거나, 도시 내부에서 숨을 겨우 넘기고 있다가 죽은 사람들의 마기가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어두운 밤이 될 때는 달빛이 완벽히 가려져 한 줌의 빛조차도 안 보였다.
달빛이 아닌 횃불과 조명 아래에서도 아직도 언데드와 싸우는 기사와 병사들의 모습에 모두가 잠을 설쳤다.
프랑은 수면 마법까지 쓰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연산이 중요한 마법사가 잠을 안 자는 건 그만큼 머리에 큰 무리가 오는 짓이다.
억지로라도 자야 했다.
그리고 다시 하늘에 빛이 올라왔을 때.
쏟아지던 언데드가 다시 돌아갔다.
어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졌던 언데드와의 사투가 이제야 끝이 났고, 모든 여력을 쏟아부은 기사들은 지쳐버린 상태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던 때에, 다시 흑마법사들이 성벽 앞으로 모여들었으니.
그녀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쓰러진 기사들을 보곤 비웃었다.
“어머, 벌써 힘이 풀린 거야? 아직도 언데드들은 산처럼 쌓여있는데, 지금 쓰러지면 안 될 텐데?”
“꺼지거라 악녀야! 지옥에 가서 불타 죽어라!”
“전신이 잘게 잘게 찢어져 죽어 마땅한 괴물!”
티아그리스는 미소만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어줄게, 이 얼마나 배포가 큰지. 딱 절반만 주면 살려준다니까?”
그녀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받더라도, 받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기사와 병사는 지쳤고, 쏟아지는 언데드만 하더라도 감내하기 어려웠으며, 하루의 시간 동안 천천히 마기를 수급하는 방식으로 그녀와 흑마법사들은 모두 회복했다.
어차피 저들은 끝이다.
흑탑주는 대답도 듣지 않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흑마법사들은 다시 도시를 포격하기 위해 마법진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변이 발생했다.
하늘에 쏘아지는 커다란 힘의 움직임을 발견한다.
그녀의 얼굴이 구겨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