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안 죽는다니까-68화 (68/69)

몇 번이고 그녀를 죽였다가 다시 되살렸다가를 반복했다.

흑탑주가 무너지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름 강자라고 할 수 있는 그녀조차 버틸 수 없는 고문이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만일 이 일이 실패하면 더 큰 지옥이 남아있기 때문이겠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으니, 그녀에겐 뒤가 없다.

“...그, 만.”

“나름의 저력은 있구나.”

그녀를 죽이는 건 멈추진 않았다.

더 못 죽인 이유는 흑탑주는 결국 버티고 버티다가 약간이나마 심상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최소한 자신을 방어할 정도는 된 거다.

원래 내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몸은 완벽히 제압당했고, 그녀의 흑마법이 온전히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으니까.

단지, 이런 상황이 가능했던 건, 내 기이할 정도로 강력한 정신력이 그녀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주저앉아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그녀는 날 멍하니 바라보며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너, 넌 도대체 뭐야.”

“한 번 더 말하겠다. 맞춰봐.”

과연 너는 이 심상 속에서 어디까지 볼 수 있을까?

진정 나의 과거를 살폈다면,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거다.

못 보더라도 상관없다.

너는 이길 수 없으니까.

“아, 하하하하, 하하하핳!”

흑탑주는 미친년처럼 웃어젖혔다.

정말로 실성하듯이 웃은 그녀는 덜덜 떨려오는 두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현실에서 마기에 완전히 잠식된 것과는 다르게, 심상 속에서는 온전한 모습이었다.

단지 그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직도, 방법이 있어.”

“또 다른 최후의 수단이라도 꺼내올 생각인가?”

“아니, 난 아직 유리해.”

흑탑주는 자세한 상황을 꺼내 들었다.

“이미 현실에서는 내가 압도적으로 유리해, 넌 악마들에게 제압당했고, 상황을 주도할 수 있어. 널 데리고 도시를 빠져나가서 몸을 숨기면 어떨까? 아니면 악마들을 통해서 도시를 무너뜨리고 초월한다면?”

내가 걱정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느끼고 있는 게 있었다.

“자신이 없나 보군.”

“...”

“날 도시에 빼돌린다? 아니면 도시를 파괴해서 초월적인 힘을 얻는다? 그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결국 내 몸을 빼앗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네 염원이 이루어지지 않겠나?”

갑자기 초월자가 된다 해서 그녀의 정신력이 뛰어오르는 게 아니다.

특히나 흑마법사처럼 기형적인 방식으로 초월에 이른다면, 자신의 심상 세계조차 구현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초월자밖에 못 된다.

그런 상태가 된다 해서 내 정신을 압도하고 몸을 빼앗을 수 있을까.

흑탑주는 확신이 없기에, 아직도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내 몸을 빼앗지 못하면 그녀는 어차피 죽는다.

이미 마기는 끌어당길 만큼 썼고, 그녀의 육신이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녀에겐 불사란 이미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게 됐다.

“...어, 으억….”

그녀가 점차 무너지고 있음을 느낀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 있게 도박 수를 던졌던 그녀의 판돈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가장 큰 판돈.

영혼을 팔아서 얻은 전력.

세 명의 악마가 그녀에게 있다.

“할 수 있어.”

“...아직도 미련이 남았나 보군.”

“네 모든 것을 빼앗아, 불사자가 될 수 있다고!”

그녀는 나에게로 몸을 내던졌다.

내 정신을 완벽히 지배한 것도 아닌데, 융화를 시도하려는 것이다.

그건 가장 파괴적인 행위였고, 자칫 잘 못 하다간 그녀의 정신이 망가질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 버려서, 나에게 역으로 흡수 당하거나.

나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사람의 정신이란 가장 불규칙하고 설명할 수 없는 영역.

프랑의 정신을 지배해서 많은 이득을 얻고도, 그녀의 정신을 앞으로 지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한 번 더 도박 수를 던진 거다.

현실에 악마가 있더라도, 결국 악마들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차라리 지금이 가장 좋은 타이밍.

악마가 날 온전히 제압하고 있을 때, 내 정신을 집어삼켜야지만, 그녀가 승리할 수 있었다.

그녀와 내가 부딪치는 순간, 내 무의식의 밑바닥 심연으로 떨어진다.

가장 처음부터, 기억이 시작되는 거다.

그것도 회귀 전의 기억이 말이다.

그러는 와중에, 이상한 걸 보았다.

“...형?”

왜, 아르델이 이 심상 속에서 보이는 건가.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가 평소에 내 머릿속으로 들어있던 것도 아닌데.

그건 나의 형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얼굴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큰일이었다.

흑탑주에게 회귀 전을 보여주는 건 문제 없다.

어차피 막을 수도 없고, 그녀는 곧 죽을 테니까.

하지만 형은 이야기가 다르다.

가족에게, 회귀 전에 있었던 일들을 보여주는 건, 거리낌을 넘어선 거부감을 느껴서 그렇다.

용서받을 수 없는 과거라서.

그걸 본 가족의 반응을 보기가 두려워서.

굳게 닫아놓았지만,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

어떻게 아르갈을 빠져나오게 할지 한창 고민하던 때였다.

아르델은 유심히 구도를 살피다가 아르갈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일단 아르갈을 이렇게 옮겨 보는 게 어떨….”

그리고 그는 그 상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라엘리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 오빠? 왜 갑자기 그래요?!”

한창 마법을 준비에 집중하던 프랑이 아차 싶어 했다.

미리 경고해야 했는 데, 미쳐 신경 쓰지 못했다.

“손 데면 안 돼요!”

“그,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어떻게 될지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아마 흑탑주하고 아르갈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끼어들게 될 거예요.”

“그럼 큰일 아닌가?”

“일단 그렇죠.”

프랑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안 그래도 아르갈을 지켜야 하는데, 지켜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났다.

일이 이렇게 됐지만,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법.

프랑은 계속 마법을 준비했고, 라엘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르갈과 흑탑주 사이에 서 있었다.

프랑은 그러던 와중에도 잡념이 들었다.

그녀도 바보는 아니다.

아르갈이 흑마법을 쓰는 모습을 보며, 결국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알 수밖에.

“...도대체 어떻게 극의를 알고 있는지 몰라도.”

극의란 마법사의 정점이지, 흑마법사의 정점은 아니었다.

서로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흑마법사가 극의를 안다는 건 모순이다.

프랑이 마법뿐만이 아니라 흑마법에 대한 지식을 꽤 알고 있음에도, 아르갈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그가 흑마법사라 하여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아르갈은 도시를 구하려 하고, 사람을 구하려 했고, 그녀를 구해주었으니까.

그거면 충분하다.

그녀의 목숨을 걸기에는 말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흑탑주는 무엇을 노리고 있기에, 아르갈과 접촉한 상태에서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가 되었는가?

그래서 더욱 불길했다.

그녀가 보기에는 이 흑마법은 어디선가 익숙하다.

상급 마족을 앞에 두고 그녀의 정신을 지배하였던 흑마법과 무척이나 유사하다.

그렇다면 아르갈의 정신이 지배된다면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되는 건가.

“모르겠어요.”

프랑은 뒷 일을 생각하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지금 할 일은 흑탑주를 죽이는 것.

그래야만 악마의 구속에서 아르갈이 벗어날 수 있었다.

**

아셀은 건물의 파편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니, 먼 거리를 단숨에 이동해서 생긴 후유증을 꾹 참고서 일어선 것이다.

“거짓말, 거짓말을 했어.”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며, 빠르게 뛰쳐나갔다.

전신에 깃든 무력감을 억누르며, 자신이 생에 처음으로 남에게 주었던 믿음을 배신한 배신자에게로 빨리 달려 나갔다.

시기를 놓쳐서 죽게 놔둔다면, 그 배신자에게 복수할 기회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물을 꾹 참으며, 달려가다가 어느 투명한 벽이 생겨났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너무, 익숙해.”

그러면서도 익숙한 절망이다.

실기 시험에서도 그 누구도 뚫지 못하는 장벽.

오직 용사만이 뚫을 수 있는 벽이다.

이성적인 판단을 한다면 용사를 기다리는 게 맞다.

하지만, 그녀는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가슴을 벅차게 하는 감정이, 창을 들어 올리게 했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일점 찌르기를 준비했다.

뚫는 수 없는 벽에다가 창을 찔러내는 것.

많이 해 봤다.

어렸을 적에 고문이나 다름없는 수련을 거듭하면서, 튼튼한 벽에다가 창을 내지르는 짓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건 수련을 위한 것이지, 지금처럼 뚫을 수 없는 걸 뚫어내려는 것하고는 달랐다.

헛수고인 걸 알면서도, 창성은 자세를 잡는다.

“뚫을 수 없으면, 뚫으면 되는 거야.”

할 수 있다.

한 번이 아니면 두 번, 두 번이 안 되면 열 번을 찔러서 그 벽을 통과해서, 그에게 다가가리다.

그러고 죽음을 막아낼 거다.

그의 죽음을.

그녀가 동질감을 느꼈던 유일한 동반자를 살려내겠다.

콰아앙-!!

강한 물리적인 반발력이 느껴진다.

한 번의 찌르기에 그녀의 손바닥이 찢어졌다.

다시 한번 더 찌른다.

이미 한계에 다다랐지만, 그녀는 지치는 걸 몰랐다.

근육은 끊어질 것 같고, 전신의 뼈가 삐그덕거린다.

그러나 완벽한 자세가 잡히고, 창이 앞으로 나아갔다.

콰아아아아앙-!!

초월자가 만들어 둔 벽을 뚫는 건 불가능 할 거다.

하지만 그녀는 불가능이란 무의미 하다는 걸 알았다.

이미 불가능에 허리를 굽혔다면, 이 자리에 있지도 못하겠지.

극한까지 끌어당겨진 감정이 또 다른 극한에 도달할 거다.

창에 잠시나마 푸른 빛이 감돈다.

그녀의 몸이 한계에 다다를수록, 한계를 뛰어넘으려 들었다.

그건 오직 재능만이 아닌.

순순히 그런 상황을 돌파하고자.

한계를 돌파하고자.

저 벽을 돌파하고자 이루어진 도약이었다.

잠시 한 번뿐인 도약을 기회 삼아서 창을 움직인다.

다시 일점을 찌른다.

콰아아아아앙-!

무려 세 번.

얼마 전 만 하더라도 하루에 한 번이 한계라 생각했던, 일점 찌르기를 세 번씩이나 사용했다.

그러자 작은 기적이 이루어졌다.

흑마법으로 이루어진 결계에는 아주 작은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은 뚫려버린 채로 더는 복구되지 않았다.

그녀는 완전히 지쳤음에도 쓰러지지 않았다.

굳게 서서 다시 자세를 잡는다.

전신이 비명을 지르는 걸 넘어서, 힘이 완벽히 빠지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창을 찌르려 움직였다.

“한 번이 아냐.”

안 된다면 두 번.

세 번.

열 번.

백 번을 찔러서.

너에게 갈 거야 아르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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