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다짐하고 있었을 때, 저 건너편에서 어떤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미련하네.”
그녀의 곁에 섰던 건.
폭발에 휩쓸리기라도 한 모습의 베시아였다.
“너도, 아르갈도.”
“...왜 그런 꼴이야?”
“아, 나도 미련한 건가?”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앞으로 걸음을 옮겨나갔다.
저 흑마법의 결계는 오직 용사만 뚫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성녀 급의 사제도 여기에 있었다.
“난 안 죽을 자신이 있거든.”
아까 폭발에 휩쓸려,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팔 한쪽이 거의 잿더미가 될 정도로 불에 탔으며, 그 덕분인지 그녀의 사제복은 한쪽 팔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복구하는 건 몇 분이 걸리지도 않았다.
압도적인 성력이, 죽음 직전에 이르더라도 되살려주었다.
그건 창성에게도 마찬가지.
거의 괴사할 지경으로 혹사한 근육을 커다란 성력으로 복구시켜줬다.
그러는 동시에 강력한 성력으로 흑마법 결계를 녹여냈다.
“같이 가자고.”
“...응, 고마워.”
베시아는 아셀이 좀 얄밉더라도.
결국 그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은 같았기에 동행을 했다.
두 명은 잠시 구멍이 뚫린 결계 너머로 뛰어들었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끝없이 이어져 오는 과거의 연속은.
나의 정신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럴 만하다.
그전에는 광기에 집어삼켜져,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했던 일들이, 지금 와서 보니까 얼마나 끔찍한 죄악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과거가 펼쳐지자마자 형의 모습은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가 나의 죄악을 들여다보지 않길 원했기에 다행이다.
물론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흑탑주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이곳은 나만의 공간.
각자의 공간에서 나의 과거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혼이 쪼개지기 전, 할 수 있는 최선의 고통을 느끼게 해주마 흑탑주.”
이런 상황까지 이르게 만든 흑탑주에게 모든 원망을 쏟았다.
그녀가 영혼까지 팔아치우는 짓을 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편하게 죽기라도 할 텐데 끝장을 보았기에 생겨난 변수다.
최악의 경우, 나의 형이 모든 과거를 살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때를 대비해야겠지.
그러며 시선을 돌린다.
다른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과거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나도 긴 역사였다.
가우디움의 노예가 되고, 그의 밑에서 수없이 죽음을 반복하다가 그를 죽였으며.
또한 대악마와 계약하고, 흑마탑을 무너뜨렸으며,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가족들을 죽였으며, 왕가를 붕괴시키려 하기 위해 집행부마저 말살했을 때.
가장 잊으려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녀와의 첫 만남.
내가 집행부를 말살하고, 결국 소드마스터까지 와서 날 죽이려 했을 시기.
마왕은 현세에 강림했다.
내 목을 베어내려는 소드마스터를 막아 세웠던 초월적인 존재의 마왕은 나를 구해주었다.
‘많이 다쳤구나, 상처 입은 야생동물처럼.’
‘나를 따르거라, 그러면 거래를 통해서 원하는 걸 이루어주마.’
그녀는 공명정대했다.
그러며 친절했다.
항상 남에게 미소를 지어주었으며, 또한 신뢰를 주기 위해 배려해주었다.
그녀가 쓴 가면이, 모두를 속였다.
천칭 아래에서 거래된 공명정대한 교환에 따라, 모두가 그녀에게 충성하고 믿고 따랐다.
누군가는 마왕에게 영원한 부와 권력을 보장받고 명령을 따랐으며.
또 누군가는 인류의 멸절을 약속받고, 마왕에게 충성했다.
나 또한 그녀와 거래했다.
마왕이 용사를 죽이고 진정 승리에 이르렀을 때.
나의 광기를 종식해주고, 평범한 삶을 살게 해 달라는 소원을 내걸었다.
그녀는 웃으며 나의 거래를 받아주었다.
분명히 천칭으로 거래를 맹세했기에, 나는 그녀를 위해 봉사하였고, 그녀의 임무가 완수된다면 나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했다.
마왕은 그런 거래와 약속을 모두 어기고.
기억 속에 보이는 세상처럼.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다.
다시 보아도.
그리고 다시 상기시키더라도.
내 생각은 영원히 똑같을지니.
“...모든 것을 다해서 널 죽이겠다.”
정작 광기를 종식해주었던 건, 날 회귀 시켜준 용사였다.
그런 아이러니함이, 더더욱 그녀에게 복수심을 불타게 했다.
진정 기억의 끝에 다다르고.
기이한 형체가 눈에 보였다.
광기와 절망뿐인 기억 속에, 그나마 마왕을 통해 희망을 얻었던 사람은 처절한 배신을 당하고 오직 복수만을 원하는 삶을 바라본 흑탑주의 모습이다.
그녀는 제 몸을 유지하지도 못한 체, 나에게 의문을 쏟았다.
“말, 도 안 돼.”
그녀의 손가락이, 다리가, 전신이 녹아내렸다.
정신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고작 과거를 둘러보았을 뿐인 나와는 다르게, 날 흡수하려고 시도했던 그녀는 아마도 온전히 과거를 경험했을 거다.
그 경험이, 그녀에게는 마치 끔찍한 지옥을 겪어온 것과 같았다.
“이걸, 어떻게 버틴, 거야.”
“버틴 것이 아니라, 광기가 날 무너지지 않게 만들었다.”
항상 미쳐 있었고, 그 미쳐버린 정신은 무너지고 싶어도 무너지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광기에 빠져있지 않았던 흑탑주는 무너졌다.
온전히 경험하고, 온전히 내 정신 위에 서서 이겨내는 게 아니라.
그저,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게도 끔찍했나?”
나는 조금은 궁금해서 물어봤다.
어차피 이 경험을 버텨낸다고 하여도, 내 정신이 무너지지 않는 한 그녀는 나의 몸을 빼앗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전에 지나쳐야 할 기본적인 과정부터 박살이 난 거다.
형체조차 유지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는 내 질문에 광인처럼 웃었다.
그 웃음이 시체의 목구멍에서 빠져나오는 숨소리처럼 들려서 다소 기괴했다.
“끔찍했냐고?”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은 흑탑주는 되물어봤다.
“나도 물어볼게, 그 지옥을 어떻게 견딘 거지?”
“견딘 게 아니라, 광기가 날 무너지지 않게 만들었다.”
“그렇구나, 광기가 오히려 너의 축복이 되었구나.”
평생을 괴롭혔던 광기란 저주를 그녀는 오히려 축복이라 여겼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저주가 축복이라고?”
“평범한 사람의 정신이, 광기 없이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을까? 고작 유약한 공자에 불과했던 네가? 나조차도 견디지 못해서 무너지는 이 과거를?”
“그건 맞긴 하다. 그러나 광기가 없었다면 더 나은 미래가….”
“아니, 진작에 포기했겠지, 가우디움의 노예로 끔찍한 고통을 겪어온 시점부터 정신적으로 백치가 됐을 거야. 넌 무조건 무너졌어, 그러나 광기가 그걸 끝없이 일으켜 세워준 것이지.”
그녀가 이어서 한 말은 도리어 화를 돋게 했다.
“불쌍한 것, 이런 과거를 품고 남에게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죄지은 자,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나 보다, 너의 삶이 더 안타깝구나.”
“...그 입 닥쳐라.”
“누구보다도 강인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연약한 아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현실을 자각하고 있는지, 그녀는 날 비웃으면서도 얼굴은 한없이 어두웠다.
한숨을 쉬었다.
이런 말로 날 흔들어야 할 정도로 흑탑주는 구석에 몰려 있었다.
내가 그 말에 넘어가겠나.
“어차피 평생 고통받아야 할 미래가 예정된 자의 발버둥이다.”
“흐흐흐, 빌어, 처먹을, 이건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어. 젠장, 불사자면서 회귀자라니 누가 그걸 고려해? 이미 망했지.”
“그래서 포기할 생각은?”
물론 여기서 살려줄 생각은 없었다.
흑탑주도 그걸 모르겠는가.
마왕과 원수 관계를 지닌 회귀자의 과거를 보았는데, 자길 가만히 살려줄 거란 걸 의미하지는 않을 거다.
그저 얌전히 죽겠냐는 물음이다.
“내가 가만히, 죽을 거 같아?”
“참 끈질기군.”
“내가 최후를 맞이한다면, 너도 처참히 최후를 맞이해야지…?”
불길한 말이었다.
이 심상 세계 속에서 뜬금없이 아르델의 모습이 보였던 것도 그렇고, 무언가 좋지 않은 변수가 생겨난 모양.
“너희는 날 너무 우습게 봤어, 내가 설마 무방비한 상태가 될 텐데 악마들에게 아무런 대비도 안 시켜놓았을 줄 알았어?”
“...외부에 몇 명이나 있는 거지?”
“악마의 말로는 네 동료가 다 온 거 같은데?”
흑마법 결계가 생겨난 건 안다.
이 결계가 절대적인 방어막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만약 베시아가 힘으로 결계를 뚫고 들어왔다면, 이건 위험한 상황이었다.
흑탑주가 최후를 걸어서 나의 동료들을 죽이려 든다면, 막을 수 없었다.
악마들만큼은 지금의 나로선 이길 수 없으니까.
그녀는 무너지던 몸체를 약간이나마 복구하고는 일어섰다.
“이제 끝을 봐야겠지…? 퍼엉.”
심상 세계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녀의 의지로 강제로 유지되던 세계가 해제되자, 바로 현실이 당도한다.
그리고 눈을 뜨는 순간, 어두운 결계로 뒤덮인 주변이 보였다.
내 근처에 긴장하고 서 있는 라엘리의 모습도.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기절한 형의 모습도.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마력을 그려 모은 프랑의 모습까지.
프랑은 흑탑주와 내가 서로 떨어지자마자 그대로 커다란 마법을 터트렸다.
“천벌이나 받아요!!”
그리 외치는 동시에 두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커다란 빛이 주변을 뒤덮었다.
라엘리는 바로 나를 끌어안고는 몸을 날렸고, 프랑은 자기 마법을 견디기 위해서 결계를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흑탑주 역시나 빠르게 대응했다.
이미 악마를 통해서 상황을 알고 있던 그녀는 악마의 권능을 통해서 보호받았다.
콰아아아아아앙---!!
세상을 뒤흔드는 폭음이다.
나조차도 아무런 저항 없이 폭발을 얻어맞고 뒤로 날아갔다.
이미 프랑은 한계를 다한 건지 죽지는 않았지만 거의 중상에 가까운 피해를 보고 그대로 저 멀리 날아갔다.
...죽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그러면서도 라엘리는 날 꽉 끌어안고는 폭발을 견디며 외쳤다.
“오빠, 정신 좀 차려봐요!”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건가?
흑탑주가 내 몸에 접촉하며 몸을 빼앗으려 한 시도를 하던 와중에, 형은 위험하게도 내 몸을 건드렸다.
그러다 보니 심상 세계 속으로 같이 휩쓸린 것 같다.
여기에 회귀 전 기억까지 보았을 테니 그 후유증으로 깨어나지 못한 거지.
흑탑주랑은 다르게 아직 형은 평범한 사람의 정신일 테니까.
“으욱, 우웨에에엑!”
악마에게 보호받은 흑탑주는 크게 토악질하며 몸을 빼앗으려 했던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그 심상 속에서 무너졌던 몸이 거짓이 아닌 건지, 그녀가 무너졌던 부위는 현실에서도 망가졌다.
두 다리는 움직이지 못했으며 손가락조차 까닥일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악마들이 그녀를 무너지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악마들은 이 상황을 흥미롭게 방관했다.
권태만을 느껴온 괴물들이기에, 하나의 흥밋거리가 그들의 재미이자 여흥이다.
그런 악마들에게 흑탑주는 명령했다.
그녀는 결심했다.
오직 패배하는 미래를 앞두더라도, 마지막 발악을 하고 죽겠다는 그런 생각을 품었다.
“바사고, 저년을 죽여.”
폭발의 여파로 날아간 프랑, 그리고 기억을 들여다본 후유증으로 기절한 아르델.
유일하게 깨어난 건 라엘리뿐이다.
...결국 때가 왔구나.
악마의 권능이 그녀에게 도달하기 전에 나는 라엘리에게 말했다.
“라엘리 아까 말했듯 나는 불사자다.”
“뭐야 갑자기? 그리고 난 그런 말 안 믿는다…. 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번에는 믿어라.
믿지 않고 고통받을 바에는 믿는 게 더 나았다.
“나는 한 번 죽을 생각이다. 그러니 믿는 게 낫다 라엘리, 내가 죽는다 생각하고 슬퍼할 필요가 없다.”
“무슨, 헛소리야 살면 되는 거지 네가 왜 죽어!”
정밀하게 흑마법을 조작한다.
권능을 피하는 방법은 오직 초월자라거나, 그걸 우회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그녀에게 닿는 권능이 나에게로 향한다.
“살아남거라 라엘리.”
“차, 차라리 내가 대신 죽겠어!”
라엘리도 대충 상황은 파악했는지, 그녀는 악마들을 등지고 내 몸을 꽉 껴안았다.
무슨 공격이 오더라도 그녀가 대신 맞겠다는 의지다.
그런 희생정신이 어디에서 온 건지 몰라도, 좋은 버릇은 아니다 라엘리.
너는 불사가 아니잖은가.
그리고 권능을 나에게로 우회한 이상, 라엘리 네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막을 수 없다.
오직, 내가 권능을 맞는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
푸우우욱-!
악마의 권능이 나의 심장을 관통했다.
흩뿌려지는 피가 그녀의 얼굴에 튀었다.
나는 죽는 와중에도, 그녀가 충격받지 않기 위해서 몇 번이고 되풀어 말했다.
“나는 불사자다 라엘리, 죽지 않으니 그러니 부디….”
...그녀가 죽지 않길 바랐다.
내가 죽는 동안,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도.
그녀가 살길 바란다.
“제발 살아남거라.”
“아….”
라엘리의 얼굴이 망가졌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뻔하다.
이번에도 믿지 않는구나.
...안 죽는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믿지 않으면 답이 없다.
그렇다면 되살아나는 걸 보여줘야만 해야겠지.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