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악몽(惡夢)
산이 높다 한들, 하늘 위에 있지 못하고
강이 넓다 한들, 바다를 이기지 못한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야 하며
모든 생명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다.
“진리다.”
사람은 본디 태어날 때부터 하늘에서 주어진 구실이 있어서
남녀의 역할이 유별하고
귀천의 구분이 명확하니.
주어진 사명을 달게 받아 하늘을 우러르며 살아야 할지어다.
“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개소리군.”
사내는 하늘로 침을 뱉었다.
다시 아래로 떨어졌어야 할 그것은 그대로 구름을 뚫고 사라졌다.
“하늘에 주어진 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늘을 우러른다고? 그렇다면 제대로 했어야지!”
사내가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하늘은 본래 검다! 보여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 주어진 구실이 있었다면! 모든 인간의 관계를 떠나 태초의 모습 그대로, 타고난 기량대로, 평등하고 공평하게 하늘이 내려 준 섭리대로 살아야 했다!”
사내는 태어난 인간의 모든 것을 공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리는 것이야말로 공평한 시작이라고.
“세상의 질서를 본래 그러했어야 하는 모습으로 돌릴 것이다!”
사내는 스스로를 역천제라 불렀다.
귀천성주(歸天城主).
역천마제(逆天魔帝) 파륜(破倫).
역천마제와 귀천성은 노도같이 사나운 파도가 되어 세상을 덮쳤다.
귀천성에는 역천마제를 따르는 여덟 명의 마두들이 있었고, 그들 하나하나가 능히 천하제일을 논할 만큼 강성하였다.
그들은 거대한 태풍처럼 무림을 휩쓸었고, 순식간에 중원의 절반을 정복했다.
그들은 정말로 세상을 바꿀 뻔하였다.
그러나 파괴하려는 자가 있다면 지키려는 자도 생기는 것이 세상의 이치.
기존의 질서를 지키려는 정도 무림은 귀천성의 역천에 대항하여 일어섰다.
“갈-! 파괴의 운을 타고난 이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강압하고, 착취하고, 소유하는 것이 어찌 하늘이 내린 본래의 섭리란 말인가! 인간은 바르게 서는 것이 운명이며, 검을 든 자는 약자를 지키는 것이 사명이며, 위에 선 자는 자비를 베푸는 것이 천명인 것을! 그것이 세상이 선하게 돌아가는 섭리인 것이라! 의기를 지닌 자들은 선한 사명을 다할 것이다!”
정도 무림은 서둘러 정의맹(正義盟)을 결성하고 귀천성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소림의 선승(選僧) 각오대사를 맹주로 하여, 매화성검(梅花聖劍) 구산용, 옥허신검(玉虛神劍) 청연, 제왕검(帝王劍) 남궁강까지 검을 든 걸출한 세 고수가 군사인 천수현인(天壽賢人) 제갈길현의 지략과 전술에 따라 움직였다.
사파 무림은 기존의 질서를 무시했던 것처럼, 귀천성의 역천 또한 거부했다.
“니미, 결국 있는 놈들 치우고 네놈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개소리로구나!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겠다면, 남은 것은 전쟁뿐이다-!”
사패천 낭아왕(狼牙王) 한구혈이 검을 빼 들었다.
지리멸렬 분열되어 있던 사파는 녹림과 수로채, 하오문이 사패천 아래로 모여들면서 단단하게 뭉쳤다.
무력으로는 큰 적수가 되지 못했지만, 낭인 시절 독검이라 불리던 한구혈과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패천의 모략과 술수는 아무리 귀천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었다.
무림에 전쟁이 일어나고 조정(朝政)마저 간신과 반신으로 혼탁했으니.
무림과 조정, 관(官)과 민(民) 할 것 없이, 온 세상이 혼돈에 빠졌다.
결국 모든 부수려는 자들과 모든 지키려는 자들의 거대한 전쟁으로 번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전쟁의 끝에서.
“대체,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왜애-!”
한 남자가 울부짖었다.
* * *
뇌왕 남궁진화는 제왕검 남궁강의 손자이자 창천일검(蒼天一劍) 남궁경의 아들로, 남궁세가의 단 셋뿐인 직계 삼 대 중 일인이었다.
동시에 남궁진화는 전 무림이 다 아는 ‘입양아’였다.
바야흐로, 정사 연합이 관부를 끌어들여 반격을 가하던 시점이었다.
남궁진화는 광마제의 마지막 제물이 될 뻔했다가, 정사 고수들의 손에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남궁강의 구함을 받아, 남궁경의 아들이 되었다.
그리고 제왕검 남궁강의 차남인 남궁경의 아들로 거두어져, 남궁진화라는 이름을 얻었다.
남궁진화는 남궁세가에 은혜를 갚기 위해 노력했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고, 그는 가장 위험한 전장마다 나서서 남궁을 위해 피를 흘렸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의무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번도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다.
남궁진화는 스스로 남궁세가의 사냥개이자 노예를 자처한 것이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남궁세가는 몇 명의 생존자를 남기고 멸문당하고, 자신은 이렇게 귀천성의 제물로 끌려온…….
제왕검 남궁강의 아래에서 성세를 이루던 남궁세가.
하지만 소가주 남궁진휘가 죽고, 후계자 다툼이 일었다.
새로 소가주가 된 방계 출신 남궁교명 일파는 세가의 권력을 잡기 위해 가주와 직계들을 압박했다.
가문은 둘로 쪼개졌고, 자신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끌려다녔다.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광마제가 나타났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부활한 광마제는 집요하게 역천비록과 남궁진화를 노렸다.
그 과정에서 모두 죽었다.
진화에게 소중했던 이들이 모두…….
‘어머니! 아버지!’
마지막에 정의맹으로 피난을 가며, 광마제가 노릴 것이 뻔한 남궁진화는 결사대와 함께 따로 움직였다.
소가주 남궁교명과 그 일파는 조금 둘러간 뒤 정의맹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완벽한 함정(陷穽)이었다.
‘우리가 움직이는 경로와 중간 집합 장소는 소가주 측과 제갈군사밖에 모른다. 둘 중 하나가 배신한 것이 분명하다! 으드득! 찢어 죽일 놈들! 지옥에서라도, 지옥에서라도 죽여 버릴 테다!’
자신의 존재가 광마제에게 무척 중요한 제물이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차라리 스스로 혀를 깨물고 죽는 길을 택했으리라.
아니, 결사대의 보호를 받아 움직이기 전에 스스로 죽었어야 했다.
결국, 이렇게 다시 제물이 되어 제단에 누워 있을 바에는 말이다.
‘운명인가? 이게 운명이란 말인가! 빌어먹을, 그 제물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단 말이냐!’
강인했던 사내가 다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때, 마치 남궁진화의 눈물을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흐흐흐, 천하의 뇌왕이 아이처럼 울고 있는 것이냐?”
“……!”
꿈에선들 잊었으랴, 이 목소리를.
마흔이 넘은 남궁진화를 아이라 칭하는 데 조금도 어색함이 없는 말투와 심장을 할퀴는 듯 쇠금성이 섞인 목소리……. 노인은 과거에도 남궁진화를 이 제단에 묶었던 주인공이었다.
“광마제 구훤!”
“이제는 내 이름도 알고. 많이 컸구나.”
“제왕검께 죽은 줄 알았는데…….”
“흐흐흐, 내 말하지 않았더냐. 너와 나는 운명(運命)이라고.”
“개소리 집어치워!”
광마제 구훤의 말에 남궁진화는 씹어뱉듯 소리쳤다.
하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남궁진화는 핏발이 터진 눈으로 광마제를 노려보았지만, 광마제 구훤은 그런 남궁진화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차분한 표정과 달리 광마제의 눈 속엔 오랜 기다림으로 인한 갈증과 탐욕스러운 열망 그리고 곧 닥칠 남궁진화의 죽음에 대한 흥분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시작하라.”
광마제의 명과 함께 주변에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인기척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정말로 이 엿 같은 게 내 운명이라고? 이렇게 더럽게 끝난다고?’
남궁진화는 이제야 귀천성의 술사들을 눈에 들어왔다.
단전이 박살 난 무인의 무력감과 절망감이 한 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하늘을 열어라-!”
광마제의 포효가 동굴 안을 울리고, 횃불이 타오르며 컴컴한 어둠을 밝혔다.
스르렁- 스르렁-.
거대한 맷돌이 굴러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이 울려 퍼졌다.
* * *
술사들이 계속해서 주문을 외자, 구덩이에서 꿀럭꿀럭 진득한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 이렇게 끝이라고? 살겠다고 평생 동안 그 발버둥을 쳤는데, 기껏 제물이 끝이라고?’
남궁진화는 숨이 턱 막힐 듯한 독기가 느껴지자 이제 정말로 끝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누구 마음대로! 누구 마음대로 이렇게 끝이라는 거냐! 으드득!’
남궁진화는 점점 강해지는 독기를 견디려 이를 악물었다.
마침, 약속한 듯 귀천성의 술사들이 주문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단검을 높이 들고 자신들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살 가망도 없고, 혼자 살 생각도 없다! 하지만 내가 골백번을 뒈진대도, 네놈의 제물이 되는 건 사양한다!’
이것이 남궁진화였다.
남궁의 인형 같은 삶을 견디게 해 준 건, 다른 것도 아닌 그의 독심이었다.
외부의 독기가 그를 파고들수록, 남궁진화의 정신은 선명해졌다.
‘어디 끝까지 해보자!’
진화가 마지막 각오를 세우고 단전의 내공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귀천성 술사들이 일제히 진법의 완성을 외치며 단검으로 스스로의 목을 찔렀다.
“납귀골육(納歸骨肉) 연지천로(聯之天路) 유아혼신(有我魂神)!”
푹-!
푹! 푹! 털썩!
술사들의 목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피가 바닥에 그려 놓은 진법을 따라 붉게 흘렀다.
“크흐흐흐! 으하하하하하! 드디어 완성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
붉은 빛이 진득한 독물이 가득 차오른 구덩이로 모여들었다.
그 광경을 보며 광마제가 벅찬 희열을 참지 못하고 광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진화는 위태로운 단전의 내공을 일으켜 작은 불씨를 터뜨렸다.
파지지지직-!
진화의 의지에 따라, 불씨가 전신 혈맥에 불을 붙였다.
천뢰제왕신공(天雷帝王神功)을 익히기 이전부터 진화의 몸에는 번개가 존재했다.
하늘의 음과 양이 부딪치며 만들어 내는 벼락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역천지체 중에서도 혼돈지체(混沌之體)를 지닌 자가 바로 남궁진화였다.
그의 온몸에 번개가 내리쳤다.
“으드득……!”
마침내 단전까지 터져 나갔다.
하지만 아득한 고통 때문인지 진화의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는 듯했다.
“납귀골육 연지천로 유아혼신!”
푸-욱!
흥분에 찬 광마제가 제단의 앞에서 제 심장을 찌르고, 심장에서 솟아나 두 손으로 흐른 피가 남궁진화가 누워 있는 제단을 따라 그의 몸으로 흘렀다.
그리고 피와 함께 광마제의 검은 기운이 함께 흘러들어 갔다.
“마침내 광룡이 부활하리라!”
진법에서 흐르던 붉은 기운이 광마제의 검은 기운과 만나며 폭발하듯 엄청난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아-!
동굴을 뒤흔드는 거대한 기운이 마치 타락하여 미쳐 버린 용처럼 날뛰었다.
넘실거리던 검은 용은 마침내 그들 위에 마련된 제물을 발견하고 남궁진화를 향해 입을 벌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광마제의 눈빛이 희열의 극치를 달렸다.
바로 그때, 남궁진화가 피를 토하며 들썩였다.
“쿨럭!”
“헉! 뭐, 뭐냐!”
“커헉! 컥! 하……. 하하.”
광마의 표정에 진화가 힘겹게 웃음을 흘렸다.
광마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남궁진화의 영혼은 갈기갈기 흩어지고 육신만 남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 남궁진화가 저를 비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두 눈에 푸른 번개를 담고서 말이다.
“이제, 끝……이다!”
콰—광-!
파지지지직-!
남궁진화의 말과 함께 그의 두 눈과 온몸에서 번개가 쏘아져 나왔다.
“아, 안 돼! 안 돼-!”
광마제가 자신의 기운을 끊어 내기 위해 제단에서 손을 떼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심장에서 흐르는 피와 진법의 기운은 이미 완전히 융합되었고, 검은 용은 그의 통제를 벗어났다.
분노한 검은 용이 사냥감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안 돼-!”
광마제의 비명과 함께 검은 용이 남궁진화가 있는 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남궁진화가 온몸을 터뜨리며 움직인 천뢰기(天雷氣)였다.
혼돈의 기운과 만난 검은 용은 벼락 속에서 몸부림쳤다.
그리고 마침내 진화의 의지대로, 벼락은 검은 용을 파괴했다.
콰광광-! 쾅-! 쾅쾅-!
“안— 돼-!”
눈앞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광마제가 절망스러운 비명을 토했다.
꺼져 가는 정신 속에서도 진화는 광마제의 비명을 들었다.
하늘이 무너진 듯 절망하는 그의 비명을 보면, 뭐가 됐든 그는 실패한 것이리라.
그거면 되었다.
‘……지옥에서 보자!’
쾅! 쾅! 쾅-!
남궁진화의 몸을 갈기갈기 찢으며 푸른 번개가 온 사방을 밝혔다.
그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것이 죽음이라니.
남궁진화는 그렇게 웃으며 죽었다.
* * *
분명 죽었는데…….
‘지옥인가……?’
콰-앙!
“광마야-! 아직 살아 있냐?”
어릴 적, 자신이 구해지던 날 들었던 목소리가 들렸다.
‘지옥이라기엔 그리운 목소리구나.’
진화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어렸다.
딱 그때처럼 하늘이 울고, 땅이 진동하는 시간이 흘렀다.
‘……하늘의 시험인가?’
상제의 앞에서 심판을 받기 전, 인생을 거슬러 본다고 했던가.
진화는 이렇게라도 가족들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 여기, 사람이 있소!”
“뭐요?”
“허어! 이런 짓을……!”
“이제…… 혹시…….”
“우리가 데려가는 건…… 하지만…….”
진화는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 누군가 저를 품에 안아 드는 것을 느꼈다.
진화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아이야, 나와 가자.”
‘할아버님…….’
진화는 구원과도 같았던 제왕검 남궁강의 품을 느끼며, 지옥에서라도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확실하게 죽이셨어야죠!’
진화는 이번에도 전하지 못한 채,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