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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2)화 (2/425)

남궁마제

귀천비지의 생존자(1)

운명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할까.

운명이 정말로 하늘이 정해 놓은 순리라면,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이유와 결과가 명확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인과관계가 분명한 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이치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존재했다.

진화의 존재가 바로 그러했다.

과거로 돌아온 걸까.

아니면 어린 몸에 미래의 기억이 담긴 것이라 해야 할까.

‘빌어먹을, 역천대법을 망가뜨린 부작용이든 뭐든 알 게 뭐야! 지금 내가 이 꼴인데!’

가마가 흔들리는 진동에도 멀미를 하는 몸이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심각한 건, 겨우 멀미에 의식이 흐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신다! 온다!”

“우아아아아아-!”

“태상가주님 만세! 만세!”

“남궁결사대 만세! 만세!”

울음 섞인 함성이 잠삼현 전체를 울렸다.

진화는 어렴풋이 들리는 그 소리에, 제가 남궁세가로 돌아왔음을 알았다.

* * *

당금 무림에서도 최고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

남궁세가(南宮勢家).

양주의 맹주이자 정파 무림의 오대세가 중 하나로, 명성이야 이전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남궁세가는 귀천성에게서 그들의 양주를 지켜 냈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명문들이 귀천성의 공격에 쓰러져 가는 와중에도, 남궁세가는 귀천성을 상대로 가장 많은 승리를 가져오며 그 명성과 영향력이 전에 비할 수 없이 커졌다.

게다가 이제 막, 제왕검 남궁강이 귀환하고 있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귀천성 팔현 중 하나인 광마제를 죽이고서.

잠삼현이 떠나가라 외치는 환호성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광마제와의 전투 직전, 장남이자 소가주였던 남궁성에게 서찰로써 가주 위를 넘기며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던 그의 일화는 양주를 넘어 전 무림에 회자되고 있었다.

그런 남궁의 제왕(帝王)이 돌아온 것이다.

남궁세가의 모든 무인들이 의천문(義天門) 앞에 모였다.

마치 길 위에 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듯 위압적이다 못해 장관이었다.

쿵! 쿵! 쿵!

“남궁의 제자들이, 태상가주님을 뵙습니다!”

마침내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그들의 주군이자 영웅을 맞이했다.

사흘 밤낮으로 환영 연회가 이어졌다.

누가 뭐래도 남궁은 이번 대격돌의 승리자였고, 전쟁과 함께 가문의 성세는 전례 없는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었기에 술과 음식은 잠삼현 사람들을 모두 먹이고 남을 정도로 풍족했다.

밖이 그렇게 시끄러운 가운데, 남궁세가의 가신들은 천명관에서 심각한 얼굴로 모여 있었다.

“태상가주께서는 어떠신 겁니까?”

“대체 얼마나 상하셨기에 연회에조차 두문불출하신단 말입니까? 가주께서는 뵈었소?”

“가주와 무적단주께서 창운전(昌運殿)에 들어 계신다고 합니다. 곧 의선께서 방문하신다니, 그동안 세가 내에 공연한 소리들이 돌지 않도록 입단속 합시다.”

“이를 말이오.”

누군가는 굳은 얼굴로 말을 삼켰고, 누군가는 잔뜩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순수하게 남궁강의 건강을 걱정한 이들도 있을 것이고, 그의 명성에 올라탄 남궁세가의 위세에 이상이 있을까 걱정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궁세가 가신들의 남궁강에 대한 믿음과 존경만큼은 바위처럼 단단해서 흔들리지 않았다.

* * *

남궁세가의 가신들이 제왕검 남궁강에 대한 흔들림 없는 존경과 충성심을 북돋고 있는 시간.

가주와 제왕무적단주인 제왕검의 아들들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효심을 붙잡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가문의 사활을 걸고 임한 전투에서 가져온 것이 정말로, 진짜, 정말로 고작 저거란 말입니까?”

“어허, 저거라니! 가주께서는 말을 삼가시게.”

장남, 남궁가주 남궁성의 항의에도 이제는 태상가주로 물러난 제왕검 남궁강은 당당하기만 했다.

그 모습에 기가 찬 남궁성이 이마를 감싸며 입을 다물었다.

대신 차남 제왕무적단주 남궁경이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형을 대신해서 말대꾸를 했다.

“젠장, 형님 말이 뭐 틀렸습니까? ‘저거’ 아니면, 뭐라 말합니까?”

“스읍! 네놈이 그래도! 한 대로는 매가 부족했더냐!”

제왕검 남궁강이 이번에는 탁자 위의 찻주전자를 던질 듯 움켜쥐자, 남궁경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남궁경은 이미 한차례, 끓어오르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남궁강에게 덤볐다가 주먹 한 방에 자신도 몰랐던 숨겨진 효심과 함께 내장까지 토할 뻔했기 때문이다.

제왕검 남궁강은 갑자기 가주 자리를 넘긴 것이 미안했는지 그래도 장남 남궁성에게는 가주 대접을 해 주었지만, 차남인 남궁경에게는 무력 사용에 거리낌이 없었다.

“하아. 결국, 정말로, 제가 전쟁 통에 달랑 서찰 하나로 가주가 되고야 만 그 참사를 당하고도 얻은 것이, 겨우 ‘저거’라는 거군요.”

“유감스럽지만 사실이오, 가주.”

“하하…….”

남궁성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다, 참사(慘事).

무림에 영웅담처럼 퍼진 ‘서찰가주즉위사건’은 그렇게 비장하고 희생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냥 제왕검 남궁강이 전쟁터로 뛰쳐나가며, 서찰 한 장으로 남궁성에게 남궁세가의 가주 자리를 떠넘긴 것뿐이었다.

졸지에 ‘남궁세가 역사상 가장 졸속으로 가주 위에 오른 자’가 된 남궁성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지금 남궁강의 태도는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것이었다.

꼬박꼬박 반존대에 가주라는 말까지 붙여 주는 것도, 실은 가주 대접이 아니라 빈정이 상해서 비꼬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궁성이 남궁강의 말에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는 것은.

졸속이든 뭐든 이제는 정말로 그가 남궁세가의 가주였기 때문이다.

“이번 대격돌로 남궁은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 희생으로 얻은 것도 적지 않소.”

물론 제왕검의 활약으로 남궁세가는 양주의 거의 대부분의 상권과 특산품을 장악, 유통과 교역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잡아먹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것은 가주가 된 자신의 희생과 노력의 몫이 크다고 확신하는 남궁성이었다.

현 남궁가주, 창천명웅(蒼天明雄) 남궁성.

그는 무력에 있어서는 제왕검의 발밑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그 외에 가문을 이끄는 데에 필요한 모든 자질에 있어서 완벽하다 칭송받고 있었다.

특히, 계산에 있어서 진솔한 남자였다.

“앞으로 희생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과 성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아비가 최선을 다해 살아 돌아왔잖소? 나머지는 가주께서 열심히 노력해 보시오.”

남궁가주 남궁성의 말에 남궁강이 천연덕스럽게 그를 더 격려했다.

가주로 지내 온 세월이 적지 않은 남궁강이었다.

고작 아버지의 위명 하나로는 계산이 모자라다는 아들의 투정을 받아 줄 리 만무했으니.

결국 자신의 건재함을 이용해서 더 애써 보라고 돌려준 것이다.

남궁가주 남궁성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한편, 간신히 정신을 차리자마자 들려오는 남궁 삼부자의 대화에, 진화는 제 상황도 잊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저거라니, 가주님과 아버지도 너무하시는군.’

기가 막혔다.

정말로, 다시 돌아온 거라니!

익숙한 목소리들에 심장이 뛰었다.

마지막 광마제와의 전투에서 저를 대신해서 죽은 아버지 남궁경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했기에, 그가 바로 옆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이제 곧 어머니 팽연화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까지 두근거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짐짝 신세로 남궁세가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빌어먹을 운명, 망해 버려라! 하늘에 있는 연놈들아!’를 속으로 수십 번은 더 외쳤지만, 막상 그리운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자 생각이 달라졌다.

‘그 많은 죽음을 반복하느니 차라리 지옥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하늘이 내게 미안해서 다시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모르겠네.’

남궁진화가 속으로 외쳤던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수많은 욕설들을 상기했다면 하늘의 자비도 되돌아갈 법했지만, 본래 인간은 자기 유리한 대로 생각하는 생물이 아니던가.

어차피 또 살게 되었고, 자살로 끝내는 것 외에 되돌릴 방법 따윈 알지 못했다.

‘그래, 저분들이 살아 계신다! 그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더 있겠어?’

자신이 ‘은혜’라는 말에 얽매여 뻘짓을 하던 사이, 진짜 은혜를 베풀어 준 이들은 모두 죽었다.

음흉하고 교활하게 남의 목숨을 방패삼은 이들, 비열하고 이기적으로 몸을 사린 이들이 더 오래 살아남았다.

진화의 소중한 사람들도 모두 죽었다.

진화는 그들이 죽고 나서야 제가 ‘무엇을’ 지켜야 했는지 처절하게 깨달았다.

‘이건 기회야! 저분들이 없는 남궁이 무슨 소용이더냐! 세상의 정의 따위 똥이나 먹으라 그래! 이번에는 반드시 지킨다!’

진화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당장 으스러질 듯한 육체의 고통에 아랑곳 않고 주변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 * *

그때, 형제애로 똘똘 뭉친 남궁경이 다시 형을 위해 나섰다.

“아, 진짜! 형님, 그냥 솔직하게 말합시다!”

제왕검 남궁강이 눈을 부라렸지만, 남궁경은 입을 닫을 생각이 없었다.

창천일검 남궁경은 제왕검의 검재를 이어받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동시에, 검재를 제외한 모든 재능은 형에게 양보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었다.

즉, 맷집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무골인 동시에, 방금 전에 내장을 토할 정도로 맞았다는 사실은 금방 잊어먹은 단순함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젠장, 까놓고 이번 대격돌에서 제일 많은 승전을 울린 게 남궁입니다! 개나 소나, 전부 다 어디 뜯어먹을 자리 없나 찾고 있는데, 남들 눈치 안 보고 얻을 수 있을 때 더 얻으면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일곱 권씩이나 되는 역천비록을 두고 저 짐 덩어리를 데려왔냐고요! 광마제랑 싸우다가 정말 미치신……!”

“닥치지 못할까, 이 망나니 놈!”

퍼—억!

제법 단단한 목갑이 인정사정없이 남궁경의 인중을 강타했다.

남궁강은 가주도 뭣도 아닌 다 큰 자식의 반항을 용납해 줄 생각이 없었다.

“크-읍!”

제왕검을 이을 차기 남궁 제일 고수라는 남자의 코에서 두 줄기 붉은 시내가 흘렀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보던 남궁성이 고개를 저었다.

편을 들어 주기에는, 방금 상황은 제가 봐도 매를 벌었다 싶었다.

“하아……. 저것, 아니 그 ‘아이’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겁니까?”

더는 화를 내어서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체념한 남궁가주 남궁성이 진지하게 물었다.

‘광마제의 제자! 아니 첩자! 아니, 역천비록까진 아니더라도 귀천성의 작은 진전 하나라도 이었어라, 제발!’

하지만 남궁강은 그의 실낱같은 기대마저 고개를 저어 보였다.

“흐음…….”

결국 남궁가주 남궁성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그때, 제왕검 남궁강이 생각지도 못한 답을 내어놓았다.

“알 수 없다.”

“네?”

남궁가주 남궁성과 차남 남궁경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친혈육으로 추정되는 최측근들에 의하면, 피도 눈물도 염치만큼 없다는 평가를 듣던 제왕검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보기 드물게도 매우 안타까운 눈으로 창운전 제일 깊은 방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정확히는 창운전 제일 깊은 방, 남궁강이 광마제를 죽이고 역천비록을 얻을 기회를 차 버리고 데려온 ‘아이’를 향해서였다.

“유일한 생존자다.”

“…….”

“동남동녀 각각 이천 명의 시체를 묻고 술사들의 피로 그려진 진법 한가운데, 태어난 지 석 달이 안 된 갓난아이 일백의 살아 있는 정기를 녹인 만년독수 속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생존자였다.”

“그런……!”

“제길, 쳐 죽일 놈들!”

제왕검 남궁강의 입에서 전해진 잔인한 상황에 남궁성과 남궁경은 욕지거리 외에 다른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걸 듣고 있던 진화도 속으로 욕지거리를 뿜어냈다.

‘이런, 젠장! 뭐라고? 그 빌어먹을 역천비록이 일곱 권이나 있었다니!’

나중에 밝혀진 역천비록의 진짜 가치를 알고 있었기에, 진화는 심경이 복잡해졌다.

귀천성은 역천마제의 몸이 회복되자마자 역천비록을 찾아 천하를 뒤졌다.

당시 공공연하게 역천비록을 가졌다고 알려졌던 문파는 화산파와 제갈세가였다.

이후 화산파는 어린 제자 하나를 남기고 멸문을 당했지만, 제갈세가는 정의맹의 주도권을 쥐었다.

‘과거 역천비록의 행방은 극비 중에 극비라서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갖는 이들도 있었지만, 지금 들어 보면 역천비록이 실제로 정파 쪽에 있었다는 거잖아! 그것도 일곱 권이나!’

당시 제갈세가가 겁화를 피한 것은 세가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정의맹 본부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팽배했다.

실제로 귀천성은 역천비록을 찾기 위해 정의맹 본부마저 여러 번 침입을 시도했었다.

그리고 그걸 막아 낸 것이, 각 문파에서 나온 고수들이었다.

역천비록의 행방이 어쨌든, 귀천성의 침입에 정의맹 본부를 뚫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귀천성이 역천비록을 뒤지던 시기와 제갈세가의 중요성이 커진 시기가 맞물린 것도 이해가 가지. 정의맹 수뇌부를 움직여서 역천비록의 행방을 극비로 해 놓고, 놈들이 진짜 그걸 가지고 있었던 거야!’

남궁세가에서도 많은 무인들을 파견했고, 꽤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었다.

‘음흉한 제갈 대가리 새끼들, 골고루도 이용해 먹었군!’

진화가 제갈세가를 향해 이를 갈았다.

마지막 남궁결사대의 행로를 알고 있는 유이한 세력으로, 모든 것이 확실하진 않았지만, 알 게 뭔가.

여기서 진화에게 중요한 건, 귀천성 침입 당시 남궁세가에서 파견한 무인에 진화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심정적 유죄나 다름이 없었다.

* * *

남궁경이 다른 직계 가족들을 부르기 위해 나가고, 남궁강과 남궁성 둘만 남았다.

남궁세가의 가주로서 남궁성은 남은 문제를 의논하고자 했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살아난 아이입니다. 동남과 동녀, 갓난아이까지, 어떤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 유일한 생존자라는 것은…….”

“그렇지. 천수현인은 귀천성에서 이미 아이에게 어떤 대법을 펼치고 있었고, 마침 그 대법을 마무리할 단계에서 우리에게 들킨 것은 아닌가 추측하더구나.”

“흐음…….”

“그 악랄하고 잔인한 수법을 본 것이, 두 번째라 하였다.”

“두 번째요?”

“혼현마제가 죽었을 때. 진법의 완성도에 차이는 있었지만 그 형태와 제물 등에 유사점이 많다고 하더구나. 정확히는 광마제가 만들어 놓은 그것이 보다 완성형일 수 있다는 거지.”

“하면, 아이를 두고 관찰하실 작정이십니까?”

남궁가주는 아버지 제왕검이 아이를 통해 광마제나 귀천성이 남긴 것을 살펴볼 의도로 아이를 데려왔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상황이나 상태는 매우 안타까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훨씬 납득이 쉬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제왕검 남궁강의 말은 조금 예상 외였다.

“대외적으로는 그 핑계가 좋겠구나. 그러나 가여운 생명이다. 그 수많은 주검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생명이다.”

“아버님…….”

“우리 남궁은 많은 가족을 잃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는 가족을 잃은 이들이 우리들만이 아니었고, 차마 셀 수도 없는 이들이 죽었다. 그보다 더 무거운 슬픔과 탄식, 비명이 있었다.”

태산같이 컸던 제왕검의 목소리가 이렇게 힘없이 들릴 수도 있던가.

담담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제왕검의 시선을 따라간 남궁성은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크고 무겁다. 거기에 하나가 더해진다고 크게 달라질 비탄은 아니나, 이제는 정말 단 하나도 보태고 싶지는 않구나.”

제왕검 남궁강의 고백과 같은 말에 남궁가주 남궁성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은 여전히 남궁의 왕이십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아이의 상태를 관찰하든, 아이를 이용하든, 키우든. 모두 아이를 살고 나서 결정할 일일 것이라.

* * *

제왕검 남궁강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은 절절한 후회와 책임감뿐이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자신이 귀천성에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듯, 제왕검 또한 이제까지 싸워 오며 많은 이들을 잃었을 것이다.

‘이번엔 별걸 다 알게 되는구나.’

그들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진화는 과거 집안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저에게 안타까운 얼굴로 시선을 보내던 제왕검 남궁강과 가주 남궁성의 얼굴을 떠올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대책 없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군.’

진화는 설사 그들이 자신을 감시하려는 목적이었어도 상관없었기에, 진실이 더 감동적이었다.

‘……에잇! 그래도 역천비록은 하나쯤 챙겼어야지! 고작 제물 따위를 챙기느라 역천비록을 잊으면 어쩌냐고! 내 목줄인 줄도 모르고 제갈세가 놈들 좋은 일만 시켰군.’

진화가 순수하게 감격스러워하지 못한 이유였다.

‘역천비록에 역천지체에 대한 내용뿐 아니라 역천대법에 관해서도 적혀 있을 거다. 왜 그렇게 날 원했는지 알아낸다면,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알 수 있겠지! 이번엔 어떤 방식을 사용하든 역천비록부터 얻어야겠어!’

몸은 아팠지만 죽진 않는다.

귀천성에서 이보다 더 모진 일을 당했을 때에도 살아남았고, 실제로 이전 생에서도 살아남았었다.

게다가 진화는 곧 의선이 와서 자신의 몸을 고쳐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빨리 강해져야 해. 제갈, 이 빌어먹을 대갈 새끼들! 이번에 네놈들의 역천비록을 노리는 건 귀천성만은 아닐 거다!’

만약 제갈세가의 배신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모조리 죽여 버릴 참이었다.

그런 마당에 서책 하나 도둑질하는 게 대수겠는가.

행복하고 안락한 현생을 위해, 진화는 소박하게 남아 있던 양심마저도 과거의 기억 속에 묻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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