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새로운 남궁의 직계(2)
의선의 정순한 내공이 침과 그 끝에 달린 실에 이어지고, 이리저리 늘어진 금빛 기운의 타래들이 진화의 끊어진 혈을 잇기 시작했다.
하얀 빈맥에 붉은 피가 흐르고 찢어진 근육이 점점 붉게 차오르는 광경은, 마치 메마른 대지에 붉은 생명수가 닿은 듯했다.
사람의 몸을 자르고, 잇고, 소생시키는 의선의 의술은 소문처럼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듯한 신비로운 광경이라, 무공의 끝을 보았다는 제왕검 남궁강조차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였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팽연화와 남궁경은 서로의 손을 잡고 오로지 진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야, 견뎌야 한단다.’
의선의 의술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결국 살아 내는 것은 이 작은 생명의 의지와 힘에 달린 일이었다.
혹자는 의선에게 죽은 자도 소생시키지 않느냐며 그를 칭송하지만, 의선은 죽고자 하는 자는 누가 와도 살려 낼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의선은 의술을 갈고닦아 더 많은 환자를 살려 낼수록, 의술이란 결국 천운을 바라는 기도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뛰어난 의술도 결국 하늘이 정한 명운을 거스를 순 없었다.’
하늘이 정한 커다란 명운 앞에서는, 자신의 금구천약지침(金甌千藥之針)과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여인의 간절한 기도가 다를 것이 없으리라.
둘 다, 그저 환자를 돕는 것이다.
‘생(生)에서 사(死)를 향하는 무수히 많은 갈래들 중에서, 의술이나 기도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단다. 선택은 오로지 인간의 의지로 이루어진단다. 부디 너의 의지가 아직 생의 갈래 위에 있기를.’
의선의 금빛 침술이 천천히 진화의 몸을 닫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과정은 의선의 금구천약지침이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는 천의무봉(天衣無縫)뿐이라.
정확한 침술의 명칭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의선이 벌어진 살을 닫은 곳에는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 경지를 일컬어 이제는 모두가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모두가 기다리고 고대하던 때였다.
탁.
마지막 한 땀까지 정성스럽게 움직이던 의선이 실을 끊었다.
진화의 귀밑부터 전신에 거미줄같이 어지러운 붉은 선이 늘어졌지만, 더 이상 붉은 피는 새어 나오지 않았다.
* * *
의선이 남궁세가에 들어 나흘이 되는 날, 의선과 그의 제자는 다시 남궁세가의 대문에 섰다.
아직 진화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치료는 잘 끝났고 남은 일은 의선의 처방전에 따라 약을 쓰면서 회복을 돕는 것뿐이었다.
“감사합니다.”
“허허허, 아닙니다. 의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늙은 의원에게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정의맹의 의뢰를 받아 귀천성의 흔적을 뒤지기 위해 왔던 길.
하지만 의원으로서 환자를 고치는 것만큼 보람된 일이 또 있을까.
아이를 치료하며, 의선은 그가 침을 쥐면서 가졌던 신념과 의지를 다시 되짚어 보는 기회가 되었다. 오히려 남궁세가와 아이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서로를 마주 보는 남궁세가 사람들과 의선의 얼굴이 전보다 더 편안해 보였다.
“정의맹에는 있는 사실 그대로 보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의맹이 바란 결론은 아닐지 모르나, 의선은 아이 또한 독수에 죽어 가던 제물일 뿐이라 결론지었다.
의선은 있는 사실대로 보고할 것이라 하였고, 아이를 받아들이기로 한 남궁세가의 입장에서는 이것으로 정의맹은 물론 세간의 억측이나 의심을 거둘 수 있길 바랐다.
의선의 시선이 남궁경에게 닿았다.
“신체가 회복됨에 따라 감각도 깨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온전히 회복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무가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원으로서의 노파심에 한 말이었다.
그러나 남궁경의 대답은 떠나야 하는 의원의 마음을 참으로 편안하게 하였다.
“그저 천천히 아이가 자라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면 족합니다.”
남궁경의 대답에 의선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소문을 믿지 않았건만, 남궁세가는 정의맹의 표리부동한 자들과 진정으로 달랐다. 남궁세가야말로 앞으로도 우리 의선문이 믿고 함께할 수 있는 곳이지 않겠는가!’
남궁세가는 진실한 마음 하나로 어여쁜 아이와 함께 든든한 정의맹의 조력자를 얻었다.
“그럼 이만, 편히 지내다 갑니다.”
“의선의 은혜는 이 남궁세가에서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의선 님.”
“이것으로 이어진 인연입니다. 다시 뵐 날이 있을 것이니, 그때는 온 가족의 건강한 모습을 보았으면 합니다.”
“예, 꼭 그리될 것입니다.”
힘 있는 남궁경의 대답에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린 의선이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제자와 함께 조촐하게 길을 떠났다.
“후우……. 그래, 결국 그리하기로 했구나.”
“아이에게서 아버님이 느끼셨던 것은, 분명 우리 부부를 위한 운명(運命)이었을 겁니다.”
“그래.”
남궁성의 말에 남궁경이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자식을 가지고 아버지가 되면, 사내는 더 강해지는 법이었다.
그의 동생은 어느덧 한 생명의 무게를 품고 한층 성장한 듯 보였다.
* * *
진화는 새하얀 공간에서 온몸이 부유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어디지? 심상에 든 것인가?’
‘하하하! 녀석, 나를 닮았구나. 역시 내 아들이다!’
‘아가, 가엾은 것.’
‘안 된다! 꺄악-!’
‘왕자님-!’
온화한 기운 속에서 마음껏 부유하며, 진화는 귀천성의 감옥에서 습관처럼 떠올렸던 포근한 품에 안긴 느낌을 만끽했다.
그것은 이전에도 겨우 꿈속에서나 냄새나 온기로만 아스라이 느낄 수 있던 것이었다.
‘이 느낌이 기억이었던가? 대체 언제의 기억이지? 혹시 이것이…… 나의 첫 기억인가?’
모두가 시작이 있었다.
진화가 첫 기억을 움켜쥐는 순간.
쿵. 파지지지직……!
크게 심장이 뛰는 동시에 세차게 흐른 피가 강물처럼 물길을 찾고, 잘게 튄 뇌전의 힘들이 가장 강하고 빠른 혈맥을 이끌고 나머지를 완전하게 이었다.
‘젠장, 이런 버러지 같은 새끼의 밥 당번까지 해야 해?’
‘이봐, 그러지 말라고. 귀하신 몸뚱이잖아.’
‘아니지. 귀하신 분들의 몸뚱이가 될 몸뚱이라고 해야지. 크하하하하!’
‘빌어먹을 제물 주제에!’
악의에 가득 찬 말과 돌아오는 폭력.
파지지지직……!
강한 뇌전의 힘이 가슴 전체에 퍼지면서 잠들어 있던 맥과 신경을 깨웠다.
살아 있는 뱀처럼 맥과 신경이 본류를 찾아 꿈틀거렸다.
‘이거 이래도 살까?’
‘혼현마제께서 하라고 하셨잖아. 살 수 있겠지. 죽으면 뭐, 알 게 뭐야. 다른 제물이라도 잡아 오겠지.’
‘킬킬킬! 이 녀석 펄떡거리는 게 붕어 같지 않아?’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을 쳤다.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진화는, 단 한 번도 저항하길 포기하지 않았다.
쿵! 쿵!
파지지지지직……!
뇌전의 힘이 모든 끊어진 혈맥이어 균열을 없애고, 세차게 뿜어진 피가 온몸으로 퍼졌다.
마침내 진화의 전신이 뜨겁고 붉게 달아올랐다.
‘아가, 견디거라. 너는 할 수 있어.’
‘예쁜 코, 예쁜 눈. 어서 어여쁜 눈동자를 보았으면 하는구나.’
남궁세가에서 팽연화와 만났을 때였다.
‘병신 새끼. 저딴 놈을 왜 양자로 맞으신 거지?’
‘대남궁세가의 수치!’
‘기분 나쁜 놈이야. 귀천성 악마의 저주를 받은 놈이라고!’
‘어쩌면 한통속이었을지도 모르지!’
‘이 집안에 받은 은혜를 생각해라! 네 목숨 따위 뭐가 아깝단 말이야!’
차라리 그냥 제왕검에게 은혜를 입은 식객이었다면 나았을까.
하지만 싫었다.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가.
‘내가 병신이면 니들은 등신이었고, 내가 남궁의 수치라면 니들은 남궁의 치부겠지. 저주? 은혜? 나는 그저 몰랐던 거다. 비범(非凡)한 것을 질투한 평범(平凡)한 버러지들의 변명 따윈 짓밟으면 그만이라는 것을!’
파직! 파지지지직……!
뇌기가 목에서 꿈틀거리던 신경들을 향해 움직였다.
마침내 수천, 수만의 뇌전들이 연결되며 진화의 머리 전체에 푸른빛이 번쩍였다.
‘네 운명이 누군가의 제물로만 남는다면 그만치 슬픈 것이 어디 있겠느냐.’
‘화야, 꽃 같은 내 아들.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니? 꼭 네가 가야만 하는 길은 아니란다.’
진화는 가야 했다.
사실은 누구보다 자신이 남궁경과 팽연화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길 원했기 때문이다.
‘내가 틀렸어. 그 버러지들의 말에 휘둘려서 결국 아버지와 어머닐 슬프게 만들다니! 멍청이도 그런 멍청이가 없었어!’
그들의 인정 따위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들, 포기할 순 없겠니?’
‘당신들이 없는 남궁 따윈 백번도 더 포기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네가 내 아들인 것으로 족하단다.’
‘저도 그것이면 되었습니다. 다른 건 다 허상이었어요.’
‘귀천성이 널 노리고 있다. 놈들은 포기하지 않을 거다. 어서, 어서 도망가거라!’
‘살아 남거라, 아들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살아남았습니다!’
온몸을 벼락 속에 태우면서 지옥에서 돌아왔다.
기억이든, 영혼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자신은 돌아왔다.
살아난 것이다.
파지지지지직……!
진화의 온몸에 푸른 뇌전이 돌았다.
푸른 뇌전의 힘은 의선의 의술에 힘입어 진화의 머리와 손끝, 발끝까지 모든 것을 깨웠다.
그리고 의선이 실자국도 없이 꿰매 놓은 외부의 상처까지, 옅은 붉은 선만 남기고 완벽하게 이어 붙였다.
파지직……!
진화가 눈을 떴다.
진화의 눈동자에 새파란 번개가 치고 있었다.
“이번엔 먼저 짓밟는다!”
진화가 뇌왕이라 불린 것은 천뢰제왕신공을 익혔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남궁세가의 소속으로서 밖에 보이기 위한 것뿐이었다.
진화를 뇌왕으로 만들고, 최후의 결전에서 흑면을 죽이고 광마제의 대법을 망친 건, 모두 진화가 몸 안에 품고 있던 뇌전의 힘이라.
파직! 파지직!
진화는 다시 손안에 들어온 천뢰기를 움직이며 눈빛을 번뜩였다.
* * *
진화가 완전히 의식을 찾고, 남궁세가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다.
특히 팽연화와 남궁경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가, 우리 아들이 되어 주겠니?”
“…….”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라.
진화는 어떤 말도 못 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울음도 터뜨리지 못하고 우수수 눈물을 떨구는 아이의 모습에, 팽연화와 남궁경은 기꺼이 진화를 품에 안았다.
“동서, 축하해.”
“숙모님, 동생이 너무 예뻐요!”
눈을 반짝이며 덥석 제 손을 쥐는 소녀는, 남궁에서 진화의 유일한 이해자였던 남궁진혜였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남궁진혜는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누님!’
진화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숙부님이 그러시는데, 너는 종잇장처럼 약하대. 그러니까 찢어지지 않게 누나가 잘 지켜 줄게!”
다부지게 말하는 남궁진혜를 보며, 진화는 애틋한 마음과는 별개로 남궁진혜를 피했던 이유를 떠올렸다.
청명화(晴明花).
남궁진혜의 청명은 활짝 갠 하늘처럼 맑은 마음을 의미했지만, 그녀가 맑은 것은 마음만이 아니었다.
남궁강에서 남궁경으로 이어지는 ‘그것’이 하필 남궁진혜에게 이어진 것이다.
“비켜 봐라, 짱돌아.”
남궁진혜를 옆으로 밀며 나타난 소년은 그녀의 오빠이자 남궁세가의 대공자인 남궁진휘였다.
“드디어 나도 예쁜 동생이 생겼네!”
“오빤 동생 있잖아!”
“응, 그냥 동생 말고 예쁜 동생 말하는 거야, 우리 돼지.”
“돼지 아니라고!”
웃으면서 살살 남궁진혜를 놀리는 모양새가 아버지인 남궁가주를 똑 닮은 소년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죽었을 즈음, 남궁세가의 소가주는 그가 아니라 교활한 겁쟁이인 남궁교명이었다.
‘……!’
활짝 웃으며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남궁진휘의 모습에, 진화의 눈이 흔들렸다.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정확히 언제, 왜 죽었더라? 이 사람만 죽지 않는다면……!’
남궁진휘의 손을 잡은 진화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가족이 된 걸 환영한다.”
남궁진휘의 말을 듣는 진화의 눈에서 다시 우두두 눈물이 떨어졌다.
“아가, 그만 울자. 힘들어.”
“아들.”
“흑, 으아아아아앙-!”
팽연화와 남궁경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진화는 결국 억눌렀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 울음이 수치심 이외에 다른 어떤 사달을 일으킬 거란 사실을 이땐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 *
“그렇게 세게 잡으면 어떡해? 동생이 울었잖아!”
“난 살살 잡았는데. 동생 몸이 생각보다 더 약한가 보네.”
“음, 확실히! 손만 조금 잡았는데 그렇게 우는 걸 보면, 종이 인형보다 더 약한가 봐. 내가 단단히 지켜 줘야겠어!”
남궁진휘, 남궁진혜 남매는 지난날 산송장처럼 누워 있던 진화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그 모습이 뇌리에 깊게 각인되어 버린 듯했다.
그들은 몸이 많이 약한 동생을 아껴 주고 지켜 주기로 오랜만에 의기투합했다.
“아이가 저렇게 약해서 어쩌죠?”
“경이 내외가 잘할 것이오.”
“그래도 진휘, 진혜한테도 단단히 일러야겠어요. 겨우 건강해졌는데 다치면, 서방님과 동서 마음이 많이 아플 거예요.”
“총관에게 일러서 가솔들에게도 조심하라 일러두겠소.”
“내일 세가회의에서 발표한다죠? 장로들이 받아들일지 걱정이군요.”
“쉽게 받아들이지 않겠지.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오. 경이의 결심도 단단하고, 아버님도 나서신다 하니.”
“아버님께서요? ……호호! 어쨌든 다행이군요.”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좁히던 하후민이 제왕검 남궁강이 나선다는 소식에 애써 미소를 지었다.
벌써 모두가 마음으로 새 식구를 받아들였으니, 남은 절차들도 순조롭길 희망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