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마제 (8)화 (8/425)

남궁마제

보배 진(珍) 꽃 화(花) : 복병들(2)

소가주인 남궁진휘가 죽었을 때.

남궁경을 제외하면 남은 직계 남자는 남궁진화뿐이었다.

자랑스러운 제왕의 피를 잇지도 않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귀천성 출신의.

남궁세가는 큰 혼란에 빠졌다.

많은 가신들이 출신을 이유로 남궁진화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소가주가 된 사람은 방계 중에서 가장 가까운 혈족인 남궁교명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끝까지 남궁진화의 손을 들어 준 사람들이 있었으니.

가주 남궁성을 비롯한 직계 혈족들이었다.

그들은 남궁의 명맥은 창천을 잇는 것에 있다며, 진화가 누구보다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진화 스스로가 자격이 없다며 소가주 위를 거부했고, 그들은 다퉈 보지도 못했다.

당시 남궁진화는 스스로 남궁세가 직계의 일원이라는 자각이 없었다.

말 그대로 혈족(血族)이 아니기에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그들의 관심과 배려를 부담스러워하며 그들을 피해 다녔다.

직계가 아니라 단지 은혜를 받는 식솔이었다면 더 편했을 거란 생각 따위를 하면서 말이다.

남궁성과 남궁진혜는 소가주가 된 남궁교명과 그 세력이 경쟁자인 남궁진화를 사지로 몰아 댈 때에도 기꺼이 남궁진화의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귀천성의 손에 죽어 가며 지킨 사람들 중에는 분명 임무에 나가 있던 진화도 있었다.

진화가 자격지심으로 스스로를 한계에 가두고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유일한 아들이자 오빠를 잃은 그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에게 다가왔던 걸까.

그들이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물어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종종, 아니 자주, 내장을 녹이는 무형지독에 당하고도 사지가 끊어질 때까지 귀멸대를 물고 늘어졌던 남궁성과, 천화정 입구에서 목이 없는 채로 검을 잡고 있던 남궁진혜의 주검이 떠올랐다.

* * *

탕-!

“진화야!”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천화정의 가장(家長) 남궁경이 존재를 알려 왔다.

남궁경은 팽연화의 손을 잡고 나설 준비를 하던 진화를 달랑 들어 안았다.

“아버지.”

“으하하하, 우리 아들, 잘 잤니? 아침밥은 많이 먹었고?”

애초에 답을 들으려던 물음은 아니듯, 남궁경은 진화가 입도 떼지 못하도록 얼굴을 대고 볼을 비벼 댔다.

이 몰랑 하고 보드라운 살결이 바로 내 아들의 것이라!

진화의 볼이 붉어지는 것을 본 팽연화가 말릴 때까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찰싹!

“우리 아들 볼이 다 헐겠어요!”

“응? 어이쿠! 우리 아들, 아팠느냐?”

“…….”

그제야 진화의 볼이 붉어진 것을 본 남궁경이 미안한 듯 물었다.

그에 진화는 그저 고개를 저어 보였고, 남궁경은 다시 진화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이후로 태상가주 남궁강의 처소인 창운전에 도착할 때까지 진화의 볼 색은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아들 볼이 아직도 빨가네.”

팽연화는 그것이 남궁경의 탓인 양 그를 슬쩍 째려보았고, 남궁경은 진화를 품에서 내려놓지 않은 채 팽연화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진화가 붉은 것은 단지 볼만이 아니라, 그의 귀도 터질 듯이 붉어져 있었다.

‘대체 아버지는 뭐가 문제지? 이런 분이 아니셨는데…….’

멀쩡한 어른의 정신으로 아버지 남궁경의 애정 표현을 감내하는 것은 팽연화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그러나 진화는 귀가 터질 듯이 쑥스러워하면서도 남궁경의 애정 표현을 거부하지 않았다.

부모님께 좋은 아들이 되기로 맹세한 이후로, 진화에게 거부권이란 없었다.

남궁세가의 직계들은 각자가 바쁜 일이 있는…… 것도 그렇지만, 태상가주인 남궁강이 아침잠이 많다는 이유로 모든 가족이 점심 식사 시간에 남궁강의 처소인 창운전에 모였다.

가모 하후민과 팽연화가 점심 만찬을 챙기고 가주 남궁성과 남궁경이 만찬장에 담소를 나누는 동안, 진화는 오랜만에 응접실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가지고 있는 때였다.

탕-!

이미 활짝 열린 대문을 구태여 박차고 들어오는 것은 집안 내력일까.

“진화야-!”

남궁진혜가 씩씩하게 문을 차고 들어와서 곧장 진화를 덥석 안아 들었다.

조금 전의 누군가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헤헤헤, 누나 안 보고 싶었어?”

“아…… 응.”

“그래! 누나도 진화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일어나자마자 바로 달려왔어!”

자신의 대답은 분명 그런 뜻이 아니었을 텐데.

하지만 남궁진혜에게도 중요한 건 진화의 대답이 아니었던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진화의 하얀 볼을 비비며 호들갑을 떨었다.

남궁진혜는 한 살 차이 오빠와 태어나 지금까지 티격태격하는 터라, 늘 말 잘 듣는 ‘동생, 동생’ 노래를 불러 댔었다.

그런데 새로 생긴 동생 진화는 순하고 제 말에 고분고분할 뿐 아니라 눈이 번쩍 뜨이게 예쁘기까지 했으니.

“으으으, 내 동생, 내 동생, 예쁜 내, 내, 내 동생!”

진화를 안아 휘두르던 남궁진혜는 이상한 음을 붙여 노래까지 부르며 애정 표현 삼매경에 빠졌다.

곧바로 뒤에서 미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앞으로 한 열 번은 더 흔들어 주었으리라.

‘하아, 첫 번째 난관이 왔으니, 이제 두 번째가 올 차례인가.’

진화는 남궁진혜의 품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구태여 저항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남궁진혜를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다행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는 것도 있었다.

“오, 우리 뚱땡이, 오늘도 진화를 괴롭히면서 예뻐하고 있구나.”

“그냥 예뻐하는 거야!”

“음, 그런 것치곤 우리 진화 숨넘어가겠는걸.”

풍모가 헌헌한 청의 무복의 소년, 남궁진휘가 들어서면서부터 남궁진혜를 타박하며 그녀의 팔에서 진화를 풀어 주었다.

남궁진혜 또한 조금 창백해진 진화의 얼굴을 보며 모르는 척 팔을 풀었지만, 대신 남궁진휘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누구보고 뚱땡이라는 거야, 이 돼지가!”

둘 다 전혀 뚱뚱하지 않았는데 서로를 돼지라고 불렀다.

진화로선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구태여 묻진 않았다.

“우리 진화, 숨이 막혔으면 누나한테 풀어 달라고 했어야지.”

“뭐라는 거야!”

“진화 얼굴을 봐라. 하얗게 질렸잖아. 내가 안 구해 줬으면, 넌 오늘도 덕진 할매한테 등짝 맞았어!”

남궁진휘의 말처럼 진화의 얼굴에는 아직 창백한 기가 남아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한쪽에서는 천화정의 총관인 덕진 할매가 남궁진혜를 째려보고 있었다.

창운전에도 총관은 따로 있었지만, 덕진 할매는 귀엽고 연약한 도련님의 알찬 식사를 위해 점심만찬에 꼬박꼬박 함께했다.

“치이, 우리 진화 아야 했어? 누나가 너무 반가워서 그랬어.”

남궁진혜가 조금 미안한 얼굴로 되어 진화의 볼을 쓰다듬으려는데, 그것마저도 남궁진휘가 얄밉게도 쏙- 진화를 제 품으로 숨겨 버렸다.

약이 오른 남궁진혜가 남궁진휘를 노려보며 말했다.

“대체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남궁진휘를 따돌리기 위해 아침에 세수도 않고 달려온 길이었다.

그런데 멀끔한 얼굴에 단정한 차림까지, 할 것 다 하고 온 듯한 남궁진휘가 이렇게 빨리 온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바보냐? 나는 제대로 아침에 일어난다고.”

“아, 뭐래!”

비결은 단순했지만, 잠이 많은 남궁진혜에겐 결코 좁힐 수 없는 결정적 차이였다.

아침잠이 많은 것 또한 제왕검에 이어 남궁경, 남궁진혜까지 이어진 치명적인 ‘그것’ 중에 하나였다.

두 남매의 눈싸움 속에서 진화가 멀뚱멀뚱하게 있던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며 자애로운 목소리가 그들 모두를 불렀다.

“진화야, 아들, 밥 먹어야지? 진혜, 진휘도 어서 들어오렴.”

팽연화가 응접실에서 식사를 기다리던 이들을 만찬장으로 불렀다.

탕-!

활짝 열린 만찬장 문을 제왕검 남궁강이 박차고 들어오면서, 남궁세가 직계들의 점심 만찬이 시작되었다.

‘대체 어디까지 닮으려는 거지?’

진화의 눈이 새삼 남궁강과 남궁경을 거쳐 남궁진혜에게까지 향했다.

* * *

식사 내내 남궁진휘와 남궁진혜가 진화를 가운데 두고, 그의 밥그릇에 고기를 올리고 또 고기를 올렸다.

진화는 가만히 앉아서 주는 대로 오물오물 먹고 있었고, 남궁경과 팽연화는 그저 그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가족회의를 통해 그간 힘들었을 진화에게 최대한 애정 표현을 많이 해 주기로 약속했다지만, 남매와 남궁경, 팽연화 부부는 그 정도가 심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행복한 가족들의 표정을 보며 가모 하후민이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자꾸 고기만 주면 안 돼, 얘들아. 진화가 골고루 먹을 수 있게 해야지.”

“하지만 고기가 더 맛있는걸요.”

“진화처럼 약한 아이에게는 살코기를 먹여 살을 단단하게 채우는 것이 좋다고 들었습니다.”

하후민의 지적에 남궁진혜와 남궁진휘가 참으로 그들답게 대답했다.

하지만 진화의 그릇에는 다 먹지도 못할 고기가 쓰러질 듯 쌓여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고기반찬을 죄다 빼앗긴 할아버지가 콧김을 뿜고 있었다.

“그래도 채소까지 골고루 먹어야 소화도 잘되고 건강에 좋은 거야. 대체, 이렇게 고기를 쌓아 두면 밥은 어떻게 먹겠니?”

하후민은 쌀알을 찾기 힘든 진화의 밥그릇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그릇을 새로 가져와야겠다 싶을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덕진 할매가 새 밥을 떠서 건네주었다.

서늘한 덕진 할매의 눈초리가 남매를 훑었다.

‘후후, 천화정은 식솔들까지 참.’

하후민이 민망한 듯 웃었다.

하지만 극성맞은 천화정이 우울한 천화정보다 백배, 천배 나았다.

“으쌰-! 우리 진화, 자리가 더러우니까 오늘은 아빠 품에서 밥 먹을까?”

남궁경의 말투는 질문이었지만, 진화는 벌써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동시에 진화의 귀 끝이 붉어지려는데, 한쪽에서 불쑥 다른 손이 끼어들었다.

“네 아버지는 덩치가 커서 자리가 좁으니까, 이 큰아빠에게 오련?”

자상하게 웃으면서 팔을 내민 남궁성의 눈빛이 사뭇 심술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진화가 쭈뼛쭈뼛 남궁성에게 팔을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아들!”

진화가 남궁성의 품에 안긴 채 아버지의 절망에 찬 부름을 애써 외면하고 있을 때, 남궁성은 승리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역시, 우리 진화가 수줍음이 많아서 그렇지 큰아빠를 제일 좋아하지?”

아이 하나로 달라진 식탁의 분위기.

남궁가주의 장난에 식구들 모두 즐거워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딱.

식탁에서 본인의 존재감이 이토록 없을 수 있다는 데에 잔뜩 심술이 난 남궁강이었다.

“우리 막내, 그놈도 네 아비와 별반 다른 건 없으니, 이 할아비에게 오련?”

남궁강은 자신감 있게 팔을 뻗었지만, 진화는 슬며시 밥그릇에 코를 파묻으며 그 팔을 못 본 척했다.

결국 승리자가 가려진 것이다.

“하하하하! 우리 진화, 밥 먹자.”

남궁성이 기분 좋은 듯 대소를 터뜨리자, 남궁강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흥, 우리 막내가 할아비 말을 잘 못 들었나 보구나. 할아비가 밥 먹으면서 무공 이야기나 해 줄까 했는데.”

남궁강의 말에 진화의 귀가 쫑긋해졌다.

“그래! 하긴 우리 막내도 이제는 수련을 시작해야 되겠지? 이참에 할아버지가 내공심법을 전수해 줄 터이니, 밥 먹으면서 그 이야기나 들어 보련?”

“아버님, 치사하……!”

남궁성이 반발하려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

우-웅.

식탁 위에 있던 그의 젓가락이 공중에 떠올라, 정확하게 그의 미간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허공섭물(虛空攝物)! 게다가 방향까지! 벌써 이기어검(以氣馭劍)의 경지에 오르신 것인가!’

모든 식구들이 식탁 위의 무공 낭비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반면, 공중에 뜬 젓가락에 혼이 팔린 진화는 저도 모르게 남궁강을 향해 팔을 뻗고 있었다.

“옳지!”

진화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벌써 남궁강의 품에 있었다.

“허허허, 그래, 이왕 이렇게 말이 나온 거, 내일 아침 일찍 천화정으로 가마. 내일은 천화정에서 아침을 같이하자꾸나.”

“예, 아버님.”

남궁강의 말에 팽연화가 공손하게 답했다.

하지만 정작 진화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내공심법을 알려 준다고? 할아버님이 직접? ……왜지?’

이전 삶에선 내공심법으로 고생을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의 심법을 배웠지만 전신 혈맥이 부족한 진화는 그것을 잘 익힐 수 없었고, 하는 수 없이 아버지 남궁경이 말과 검형으로만 전해 준 천뢰제왕신공을 홀로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화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판단이 되지 않았다.

‘할아버님도 창궁대연심법을 알려 주시려나? 아니야, 허공섭물을 펼칠 정도의 고수라면 내 몸의 혈과 맥이 어찌 되었는지 알아차릴 수도 있어. 그럼 이번에는 천뢰제왕신공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건가?’

기대감으로 진화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챈 것일까.

남궁강이 진화와 눈이 마주치고 씨익- 웃어 보였다.

“우리 막내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니, 뭔가 잊었나 보구나! 이 할아비가 맞춰 볼까?”

“…….”

“흠, 거기 고기! 우리 막내의 고기를 가져오렴.”

남궁강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본래 진화의 밥그릇을 정확하게 가리키며 말했다.

‘……어쨌든 심법은 배울 수 있겠지?’

조금 전과 살짝 다른 의미로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