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합칠 화(和) : 화합 따윈 개나 주라 그래(2)
인간은 감정을 기억하는 존재다.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것만 보고 듣고 행한다면, 그 사람은 행복 속에 살 것이고, 슬픈 마음으로 싫은 것만 보고 듣고 행한다면, 그 사람은 불행 속에서 살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무너지고, 보고, 들은 모든 것은 사라졌다면?
증오를 가슴에 품고 새까만 독기와 악만 남아 있다면?
“남궁 시주, 지금은 저들의 작은 무리 하나하나에 집착할 때가 아니오. 부디 시야를 넓히시오! 작은 복수에 집착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이 무엇이 있겠소. 대의와 정의가 무엇인지, 진실로 남궁세가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하오!”
“대사, 남궁세가에서 제가 추구한 것은 그들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제게 대의와 정의,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허어! 그렇다면 죽은 시주들은 어떻소? 그들의 대의와 정의는 어떠하오?”
“그들의 대의와 정의도 죽었습니다. 그들 또한 저와 같은 것을 바랐으니까요.”
“복수와 복수, 그 살육의 바다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열화지옥밖에 없음을 왜 모르는 것이오! 정녕 삶을 지옥으로 만들 셈이오?”
진화는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하! 하하하하! 대사는 우스운 말을 하는군요.”
“시주!”
“대사, 나는…… 이미 지옥에 있습니다.”
다시 어린아이의 몸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가족들을 다시 만났다고, 진화를 까맣게 물들였던 증오가 사라졌을까.
시간을 거슬러 왔다고 그들이 진화의 소중한 사람들을 해쳤던 사실이 사라지는 것일까.
진화가 겪었던 아픔이 거짓이 되는 것일까.
과거로 돌아왔다는 건, 진화의 소중한 존재들이 돌아왔다는 의미인 동시에 진화의 원수들 또한 돌아왔다는 의미도 되었다.
* * *
제왕검 남궁강이 진화의 내공심법을 봐 주고 첫 운기조식을 한 지, 일주일이 지난 날이었다.
진화는 그동안 남궁강의 지도 아래 운기조식을 해 왔다.
천뢰제왕신공은 보통의 내공심법과 궤를 달리하여, 남궁강조차도 며칠 두고 보면서 진화를 살펴 주기로 한 것이다.
고작 일주일 만에 잠삼현은 물론 합비 전체에까지 진화의 일이 알려진 이유였다.
진화의 입적 문제로 세가회의에 참석한 이후로 두문불출하던 제왕검이 이번엔 또 진화의 내공심법 문제로 모습을 드러내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왕검이 진화를 총애한다는 말이 나올 만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눈에는 남궁진휘나 남궁진혜에게도 주지 않던 특혜를 양자가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진화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어휴, 저녁마다 감시를 받으면서 운기조식을 하려니 죽을 맛이네.’
애초에 이미 알고 있는 천뢰제왕신공이었다.
지난 삶에서 경지의 벽을 넘어서면서 내공 운기라면 의식하지 않아도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해냈었다.
그러나 달라진 점도 분명 있었다.
‘역시, 자세는 상관없었다는 건가. 하긴 혈과 맥도 무시했는데 자세라고 다를까.’
지난 삶에서 진화는 아버지에게 들은 그대로를 실천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간격, 가부좌를 하고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자세, 매일 정확한 시간에 대주천을 하는 것까지. 나이 마흔에 들어 경지의 벽을 넘기 전까지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매일, 매시간 실천했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 성실함과 끈기가 쌓이고 쌓여서 비교적 이른 나이에 벽을 넘었다고 믿었었다.
하지만 그 믿음과 지난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지금 진화는, 쪼그려 앉아서 개미를 보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내공심법을 자연스럽게 행하고 있었다.
‘나쁜 건 아닌데 좀 허무하네. 지난 삶에서 얼마나 등신이었나 싶고. 역시 첫 운기에서 할아버님이 나를 편안하게 눕히신 것을 보면, 할아버님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거겠지. 지난 삶에서 벽을 넘어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을 벌써 알고 계신 거라면, 지금 할아버님은 어디쯤 있는 걸까? 그런 할아버님조차 혼자서는 엄두도 못 냈다는 역천마제는 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이제는 개미로 보신을 노릴 필요가 없었다.
매일 편식을 한다는 오해를 사면서 당근을 빼돌리는 수고에서도 해방이었다.
지금도 들숨과 날숨을 의식하지 않는 호흡에, 폐와 심장, 머리를 거쳐 손끝과 발끝까지 천뢰기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강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광마제와 역천마제는 할아버님과 같은 고수들 몇이 붙어도 죽이지 못한 자들이었다. 지금은 기뻐해서도 안주해서도 안 돼!’
진화는 전신에 꿈틀꿈틀 차오르는 자신감을 억누르며, 억지로라도 향상심을 상기했다.
지금도 진화는 남궁세가 직계의 장원인 창천원(蒼天院)을 처음 벗어나 있었다.
평범한 아이였다면 들뜰 만도 했지만, 진화는 얌전하게 화단 앞에서 남궁진휘와 남궁진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실, 진화의 마음만은 충분히 설레고 있었다.
‘천뢰제왕신공의 비급서! 지난 생에는 아버지에게 이론을 듣고, 검형의 시범을 보고 검술을 익혔는데, 이번에 내가 직접 비급서를 보게 된다면 또 무엇이 달라질까?’
오늘 진화가 창천원을 나오게 된 것은 천뢰제왕신공이 적힌 비급서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제왕검 남궁강은 이제 어렵지 않게 혼자서 천뢰제왕심법을 운기하는 진화를 보며 본격적으로 천뢰제왕신공을 익혀도 되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태상가주의 권한으로 진화에게 비급서를 허락했다.
과거에 비하면 거의 이십 년을 앞당긴 것이다.
남궁세가의 모든 무서와 비서, 역사서를 비롯해서 하다못해 족보까지, 남궁의 모든 역사는 창서각이라는 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창서각은 지학을 넘은 사람들 중 태상가주나 가주, 창서각주의 허락을 받은 사람들만 출입이 가능했다.
지학이 넘지 않은 진화는 남궁진휘, 진혜 남매와 동행했고, 남매가 천뢰제왕신공을 가지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진화의 등 뒤로 앳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지새끼.”
순수하면서 악의 찬 비난.
그것은 진화의 기억 속에 익숙하게 들었던 말이었다.
진화가 돌아보자, 그곳엔 감색 무복을 입은 소년이 진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년과 마주한 진화가 잠시 얼어붙었다.
“너, 누구야?”
“너, 네가 그 거지새끼 맞지?”
소년의 목소리는 진화의 기억 속 목소리와 겹쳐졌다.
“……와아, 하하!”
저와 마주하고 나서 더 깔보는 듯한 표정의 열 살 남짓한 소년.
처음 그를 부른 말도 어쩜 그리 같은지.
진화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생각보다 반갑네.’
과거로 돌아오면서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고, 막연히 원수들도 멀쩡히 살아 있겠지 생각했다.
그중에 소년은 진화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소중한 사람들과 내 손에 죽은, 혹은 나를 죽인 원수들만 돌아온 게 아니네. 내가 내 손으로 죽이고 싶었던 놈들도 모두 돌아온 거였어.’
부정적인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다.
진화가 지금의 행복감에 잠시 잊고 있었던, 그가 가진 시커먼 증오와 악의가 폴폴 새어 나왔다.
‘반갑네, 남궁자소. 어린 너도, 여전히 너구나.’
고개를 드는 진화의 눈에 새파란 청광이 번뜩였다.
* * *
소년은 오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천명관에 들렀다.
남궁세가의 본가 앞쪽엔, 소천로를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청평원이 있었다.
청평원은 남궁세가의 방계와 가신, 무단 단원과 그 가족이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그중에서 서쪽은 남궁세가 방계들이 살았고, 소년의 아버지는 서(西)청평원의 치안대장, 통칭 서평원장 남궁필이었다.
동평원장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건 동(東)청평원이 가신들과 무단 단원들 그리고 그 가족의 거주지였기 때문이다.
감히 남궁세가 오 대 무단 단원들의 마을에서 치안을 흐릴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평원장 남궁필이 정식 치안대 정복을 차려입고 아들을 불렀다.
“자소야, 오늘은 정례보고로 본가에 들어갈 거다.”
“저도 갈래요!”
서청평원에서도 소년, 남궁자소가 사는 골목에선 그의 아버지만이 본가에, 그것도 시종인이 아니라 가신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부자에겐 그 사실이 큰 자부심이었다.
남궁자소는 그의 아버지가 본가에 가는 때에 꼭 따라나서곤 했다.
그러면 골목의 모든 아이들이 그를 부러워하는 눈길로 쳐다보았는데, 사실 그 눈길이야말로 남궁자소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가는 길에 백부님과 만나 함께 갈 것이다.”
“장로 백부님과요?”
세가의 이장로인 남궁경옥은 서평원장 남궁필의 사촌 형으로, 남궁자소에게는 당숙, 당백부뻘이었지만, 어쨌든 남궁세가의 해상상단을 이끄는 사람이 가까운 친척이라는 사실은 남궁자소의 두 번째 자랑거리였다.
“형님!”
“오, 서평원장, 자소, 왔느냐?”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부님, 안녕하세요!”
“오냐.”
우렁찬 인사에 남궁경옥이 인자하게 웃으면서 남궁자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벌써 정례보고를 하는 날이던가.”
“예. 그런데 오늘도 세가회의를 하러 가시는 겁니까?”
“아아, 요즘은 이래저래 세가에 일이 많지 않나.”
본가로 들어가는 길, 이장로 남궁경옥과 서평원장 남궁필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하얀 피부와 둥글둥글한 외모에 퉁퉁한 체격의 남궁경옥과 까만 피부에 광대가 두드러진 얼굴, 마른 체구의 남궁필의 외형은 사촌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좁고 날카로운 눈매와 그 눈에서 나오는 눈빛만큼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제왕검께서 그 출신도 모르는 양자에게 심법을 전수하셨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정말입니까?”
“후우, 정말이다.”
“아니, 제왕검께서 그 양자를 총애하신다는 소문이 정말이란 말입니까?”
“일주일 내내 끼고 계시면서 양자 놈의 무공을 봐 주고 계신다는군. 안 그래도 그 때문에 말들이 많아. 제왕검의 심기를 상하게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그 양자 놈을 끼고 도시도록 둘 수도 없으니. 이러다가 제왕검이 그놈을 제자로 삼겠다는 말이 나올까 봐 걱정이야!”
“허! 하여튼 무적단주께서는 왜 그런 화근 덩어리를 양자로 삼아서 이런 분란을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말이!”
“어쨌든 저자의 거지새끼와 다를 게 없던 놈이 과분한 혜택을 누리는군요.”
이장로 남궁경옥은 앞으로 나서진 않았지만 진화의 입적 때부터 크게 반대해 온 사람으로, 남궁경의 양자 자리에 일장로 남궁순이 그의 조카를 내밀었을 때에 남궁경옥은 제 둘째 아들을 내밀었던 사람이다.
갑자기 나타나 남궁세가의 직계가 된 진화에 대해 소문이 돌기 직전까지, 저잣거리는 직계 자리를 얻으려고 자기 자식까지 내놓은 이장로 남궁경옥에 대한 수군거림으로 가득했었다.
어쨌든 현 시점에서 진화에 대해 가장 불만스러운 사람이 있다면 남궁경옥일 것이다.
서평원장 남궁필은 제 사촌형이 좋은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 제 일처럼 함께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어른들의 말을, 아들인 남궁자소가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이윽고 의천문을 들어서자 바로 정면에 천명관 현판이 보였다.
“다녀오마.”
“얌전히 기다리고 있거라.”
“예!”
이장로 남궁경옥과 아버지 남경필이 천명관으로 향하고, 남궁자소는 늘 그렇듯 천명관 주변을 배회하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남궁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천명관은 본가 정문이라 할 수 있는 의천문의 바로 앞에 있었다.
침입자든, 방문자든, 그 누구도 정면에서 회피하지 않겠다는, 남궁세가의 자신감이 드러난 위치였다.
천명관의 뒤로 대연무장이 있었지만 남궁의 각 무단은 각자의 장원을 가지고 있었기에 특별한 행사가 없는 한 비워져 있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던 남궁자소가 최종적으로 향한 곳은 대연무장 바로 앞에 있는 작은 호수인 천명호였다.
빙 둘러서 산책을 할 수도 있고 멋진 전각도 있었기에 남궁자소는 자주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특히 천명호의 반대쪽에는 직계들의 처소인 창천원이 있었는데, 전각으로 가면 창천원의 입구나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을 구경할 수도 있었다.
남궁세가 본가 장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 모두가 본가 총관부 소속이거나 장로, 가신, 오 대 무단 소속이었다.
밖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 안을 동경하고 희망하고 있었다.
특히 청평원의 아이들 대부분은 본가 오 대 무단의 무인이 되길 꿈꾸고 있었고, 남궁자소 또한 그러했다.
“칫, 교명 형님이 양자가 되었다면 나도 저길 맨날 놀러 갈 수 있었을 텐데. 거지새끼가 감히 저기가 어디라고……. 응?”
오늘도 전각에 올라서 창천원 입구를 구경하러 가던 남궁자소의 눈에, 처음 보는 어린아이의 등짝이 보였다.
궁상맞게 쪼그리고 앉아서 꽃이나 보고 있는 아이는 남궁자소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순간, 옹심이 솟았다.
“야, 너 누구야! 여긴 아무나 못 오는 데라고!”
남궁자소의 기억으로 본가에 자신보다 어린아이는 없었다.
가주님의 자식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네다섯 살 더 많다고 들었다.
남궁자소의 얼굴이 심술 맞게 변했다.
“야! 너 누구냐니까!”
아이는 남궁자소의 부름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에 약이 오른 남궁자소가 더 큰 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이 씨, 야, 이 거지새끼야!”
그제야 아이가 뒤로 돌아보았다.
아이는 남궁자소가 깜짝 놀랄 정도로 예뻤다.
그리고 멀리서 보던 것보다 더 작았다.
놀란 건 잠시, 남궁자소가 다시 자신감에 찼다.
“너, 누구야?”
“나? 남궁진화.”
“남궁진화? 처음 들어 보는데? 너 남궁 맞아?”
남궁자소가 추궁하듯 물었다.
서평원에 널리고 널린 남궁씨의 아이들 중 남궁자소가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남궁 맞아.”
“니네 아빠가 누군데!”
“우리 아빤 남궁경.”
아이의 말에 남궁자소는 남궁경이 누구인지 떠올렸다.
‘제왕무적단주님!’
이제 남궁자소는 아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아이는, 이번 주 내내 아버지가 불평하고 오는 길에도 백부님과 아버지를 불쾌하게 만들었던 그 ‘양자’였던 것이다.
남궁자소는 이런 조그만 게, 장로 백부님의 아들인 남궁교명을 밀어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너 같은 것보다 교명 형님이 백배는 나은데!”
남궁자소의 기준으로, 그건 매우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저를 보면서 웃었다.
“하, 하하!”
예쁘게 생긴 아이가 활짝 웃으니 더 귀여워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