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합칠 화(和) : 화합 따윈 개나 주라 그래(4)
진화는 재빨리 상황을 판단했다.
남궁경옥은 남궁의 해상상단을 운영하며 얻은 자금으로 되레 가주님을 압박한 자였다.
그는 제 아들을 소가주로 올리고 가문의 권력을 잡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던 인간이었다.
남궁진혜를 한미한 가문에 팔아 버리려 했고,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제 소유물처럼 쓰다 버렸다.
남궁필은 그런 남궁경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일 뿐이었다.
이후 아비들의 관계가 그대로 이어져, 남궁자소 또한 남궁교명의 앞잡이 노릇을 했었다.
‘당장 치워 버리면 좋겠지만 그럴 순 없으니, 가주님과 아버지가 저들을 경계하게 만드는 것도 괜찮은데…….’
자신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이게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른들은 대개 아이를 순수하고 어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가끔은 어린 것을 무기처럼 쓰기도 하고.’
하지만 진화는 실려 간 남궁자소보다 어렸다.
거기에 곱고 예쁜 외모는 어른들의 마음을 사기에도 좋았다.
‘무기는 네놈들만 쓸 수 있는 게 아니야.’
게다가 진화에겐 어리다는 것 외에 무기가 하나 더 있었다.
“우리 아들, 아까 못생긴 아저씨한테 험한 말 듣고 많이 놀랐지? 괜찮으냐? 그 개쌍다구 같은 새끼, 아가리를 확 찢어 놓는 건데!”
남궁경이 진화를 품에 안고 시종일관 새끼를 지키는 맹수처럼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처음 보는 가신들은 벌써 질려 버린 얼굴들이었다.
* * *
잠시 뒤.
모두가 천명관에서 기다리는 동안, 남궁자소와 함께 의약당으로 갔던 서평원장 남궁필과 이장로 남궁경옥이 들어왔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흥분을 가라앉고, 아까 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 얼굴이 굳어 있었다.
저런 자들이었다.
지금도 안면교색(顔面驕色)하여 강자 앞에서 한없이 겸손한 얼굴을 꾸미고 있었지만, 아까 그 흥분한 얼굴과 막무가내 언행이야말로 저들의 밑바닥이었다.
상대방을 깔아뭉개며 우월감과 탐욕을 채우지 못해 안달 난 족속들.
그 탐욕이 저들의 현실과 능력을 아득히 넘어서는 순간, 남궁을 망쳤다.
“왔군요. 아이는 좀 어떻습니까?”
그들의 등장에 남궁가주 남궁성이 부드러운 표정과 말투로 물었다.
하지만 남궁필의 얼굴은 더욱 빳빳하게 굳었고, 이장로 남궁경옥도 다르지 않았다.
남궁가주의 물음이 향한 곳이, 아이의 아버지인 서평원장이 아니라 이장로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궁가주가 서평원장 따위는 직접 상대하지 않겠다는 간접적인 무시를 보여 준 것으로, 나아가서 서평원장이 막무가내로 의심한 아이들과 그들 사이의 격(隔)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장로 남궁경옥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나섰다.
“아이는 괜찮습니다. 다만 크게 놀란 듯하여 아이의 몸을 살펴보는데…… 아이의 오른쪽 어깨부터 팔 그리고 가슴과 옆구리의 일부에 까맣게 핏줄이 드러났더군요. 모든 혈맥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를 입은 듯 보였습니다.”
“오, 그거 큰일이군요. 그래서 의약당에서는 뭐라 하던가요?”
남궁경옥은 남궁자소의 상처가 매우 이례적이라는 것에 화제를 집중시키려 했지만, 남궁가주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남궁가주는 남궁경옥의 의견 따윈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무심하게 의약당의 진찰 결과를 물었다.
매정하게 들리겠지만 지금 문제가 된 것은 아이의 상태가 아니라 조금 전 서평원장의 발언이었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이 천명관에서는 방계 아이의 상태보다 대남궁세가 직계의 권위가 더 중요했다.
남궁가주는 아이의 상태에 대해 빨리 마무리를 짓길 원했고, 그걸 아는 남궁경옥은 매우 곤란스럽다는 얼굴로 말을 꺼냈다.
어차피 여기서 말을 돌리거나 거짓말을 해도 의약당주가 금방 사실 확인을 해 줄 것이기에, 결국은 남궁가주의 의도대로 사실만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의원의 말로는 간혹…… 벼락을…… 맞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합니다.”
“허어!”
“벼락이라고?”
“그럼 그 아이가 벼락을 맞았다는 건가?”
남궁경옥의 말에 장로들과 가신들이 금방 술렁거렸다.
사람이 벼락에 맞는 일은 극히 드문 일로, 썩 좋은 징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 하지만 아까 벼락이 치는 것은 아무도 못 봤습니다! 벼락 따윈 치지도 않았는데, 제 아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술렁이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읽은 서평원장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남궁가주가 더는 들을 것 없다는 듯 그의 말을 끊었다.
“벼락이 아니라면 무엇 같은가?”
“……네?”
“의원은 벼락이라고 하는데, 자네는 벼락이 아니라고 하니 묻는 것이네. 벼락이 아니면 무엇 같은가?”
사실 남궁진화에 대한 서평원장의 발언을 남궁경이 문제 삼지 않았더라도, 남궁가주 자체로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양자를 삼는 과정에서부터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고, 이번에는 심법 전수 문제로 장로들의 반발이 거세던 차였다.
남궁가주는 이참에 여전히 진화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을 누르고, 진화의 위치를 공고히 할 생각이었다.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물었지 않나.”
“그, 그것은…….”
남궁필이 아무리 우기고 싶어도, 벼락을 대신할 무언가를 찾진 못했다.
“아까 보니 내 아들과 경이의 아들을 의심하던데, 여전히 아이들이 자네 자식에게 무슨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남궁가주가 그들을 부른 이유였다.
“…….”
남궁가주의 물음에 남궁필은 벌레를 씹은 듯이 얼굴을 구기면서도 대답을 찾지 못했다.
“이장로.”
“네, 네.”
“좀 전에 있었던 자네 사촌 아우의 발언에 대한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의 주장에 근거가 있나?”
불똥은 결국 이장로 남궁경옥에게까지 튀었다.
사실 남궁가주가 처음부터 노린 사람은 한낱 치안대장 따위가 아니라 세가회의에서 은근히 진화에 대해 업신여기는 분위기를 조성하던 이장로 남궁경옥이었다.
남궁경옥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지만, 그 또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정도는 예상했던 듯 앞으로 나섰다.
“자식이 다쳤으니 서평원장이 냉정을 유지하지 못한 듯합니다. 다만…….”
“다만?”
“여기 있는 우리들조차 벼락이 치는 것은 알지 못했는데, 갑자기 나온 벼락이라는 말도 믿기 힘든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해서 멀찍이서 근무하고 있던 창서각 하인을 불러서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남궁자소의 몸에 남은 흔적은 남궁경옥 또한 보았다.
분명 벼락을 맞은 흔적이었지만, 만약 벼락이 떨어졌다면 천명관에 있던 남궁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모두 몰랐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남궁가주는 이장로가 문제의 중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목격자라면 아이들이 있는데 굳이 멀찍이 있던 하인을 데려온 것은, 이장로도 직계 아이들이 의심된다는 서평원장의 말에 동의한다고 생각해도 되겠소?”
“그, 그것이 아니라……. 후우, 아이들의 기억은 감정에 따라 왜곡되기 쉬우니, 객관적인 사실 전달을 위해 어른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장로 남궁경옥이 식은땀을 닦아 가며 열심히 변명했지만, 결국 직계 아이들의 말을 믿지 못한다는 의미는 같았기에 남궁가주의 덫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젠장, 조용히 여론을 모아야 하는 시기에 하필 이런 분란을……!’
이장로 남궁경옥이 이런 빌미를 만들어 버린 서평원장을 흘겨보았다.
잠시 뒤, 남궁경옥이 부른 하인이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들어왔다.
“예, 예. 작은 아이, 진화 공자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큰 아이가 갑자기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계속 비명이 들렸습니다.”
“벼락은? 벼락은 보았는가?”
이장로 남궁경옥은 기회를 잡은 듯 하인을 다그쳤다.
“아, 아니오! 벼락 같은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겁을 먹은 하인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에 이번에는 남궁가주가 나섰다.
“진화와 큰 아이가 어쩌다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우리 진화는 경계심이 많아 누구에게 먼저 다가가는 성품은 아니라서 묻는 말일세.”
“아! 진화 공자님은 화단의 꽃을 보고 있으셨고, 중간에 큰 아이가 다가와 진화 공자님을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저 그것이, 큰 아이가 진화 공자님을 향해 뭐라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는데…….”
“어허! 확실치 않은 것은 말하지 말라 하지 않았나!”
하인이 곤란한 듯 말을 얼버무리자, 예감이 안 좋았던 남궁경옥이 나서며 하인의 대답을 잘랐다.
그때, 뜻하지 않은 목소리가 남궁경옥의 방해를 자르며 끼어들었다.
“거지새끼!”
“무슨……?”
아버지 남궁경의 품에 있던 진화가 외친 말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말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진화를 보았고, 진화는 눈을 말똥말똥 뜨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모두를 보았다.
* * *
강호에 나가면 아이와 노인, 여인을 조심하라는 말이 있다.
노인이라면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과 같이 강호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는 뜻이고, 아이와 여인이라면 잠깐의 방심도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린아이도 얼마든지 악의(惡意)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아이의 악의는 무시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과거, 남궁교명과 남궁자소가 진화를 때리다가 사고로 이어졌을 때에도, 그들은 아이들끼리 ‘장난’을 치다가 ‘사고’로 이어진 것뿐이라 했었다.
그들의 폭행은 장난도 사고도 아니었지만, 너무 쉽게 용서받았었다.
‘너희들이 그랬듯이 나도 그러려고.’
진화의 폭력은 들키지 않은 사고일 뿐, 문제는 어른인 남궁필이 아니던가.
진화가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게 고개를 숙였다.
“거지새끼!”
모두의 시선이 제게 닿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의 모습으로 순수(純粹)를 가장(假裝)하는 것쯤은,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남궁가주가 이 일을 문제 삼겠다면, 진화는 기꺼이 상황을 더 키우기로 했다.
“지, 진화야, 뭐라고? 뭐라고 했다고?”
귀를 의심스럽게 하는 말에, 남궁경이 말까지 더듬으며 되물었다.
그에 진화는 차분하고 또렷하게, 그래서 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말을 이었다.
“거지새끼라고 불렀습니다. 그 형이 저한테 거지새끼는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나가라고 했어요. 진휘 형님과 진혜 누님이 꼼짝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해서 안 된다고 했는데, 그 형이 저한테 어차피 주제도 모르는 거지새끼는 버려질 거라고 했어요.”
“뭐라!”
진화의 말에 가신들이 경악했다.
이장로 남궁경옥과 서평원장 남궁필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질렸다.
하지만 이 중에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은 남궁경으로, 그는 치미는 분노로 얼굴근육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거지새끼? 내 새끼가 거지새끼면, 내가 거지라는 말이야?”
남궁경이 이장로와 서평원장을 향해 살기를 흘렸다.
불쾌한 얼굴을 한 것은 다른 남궁 직계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남궁진휘, 진혜 남매는 어이가 없는 듯 코웃음을 치며 서평원장을 노려보았고, 유일하게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던 남궁가주의 얼굴도 결코 좋지 못했다.
‘저, 저 꼬맹이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게야!’
당황한 이장로 남궁경옥이 손사래까지 치며 변명하려 했다.
“앞, 앞서 말했듯이 아이들은 감정이 앞서서, 아이가 잘못 들은 것이…….”
곤란함 속에 허우적대는 남궁경옥을 보며 고소를 머금은 진화는, 조금의 틈도 주지 않을 생각으로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음. 무적단주님이 왜 거지새끼를 양자로 삼았냐고 물었는데, 나는 몰라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나는 그냥 우리 아버지 아들이고, 벌써 우리 아버지 아들이 되었다고 했어요.”
정확히는 이미 입적이 끝났다고 했지만, 진화는 교묘하게 단어를 바꾸었다.
단어의 선택이 천진할수록 아이의 말은 순수성이라는 힘을 얻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 원래 교명 형님이라는 사람의 자리인데 내가 차지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교명 형님이 오면 나는 곧바로 버릴 거라고 했어요.”
진화의 말에 이장로 남궁경옥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새하얗게 질렸다.
방금 나온 말은 그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말이었고, 말의 내용도 단순한 무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개소리!”
남궁경이 크게 흥분하며 펄쩍 뛰었다.
“아버지, 나 말고 교명 형님이라는 사람이 오나요?”
천진한 진화의 물음에 오히려 남궁경이 울상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에도 안타까움이 떠올렸다.
“아니다! 내 아들은 진화인데 그게 무슨 말이냐? 교명인지 교망인지 그런 놈은 모른단다! 다 지어낸 거짓말이다! 우리 진화는 안 들어도 되는 말이야!”
남궁경이 얼른 진화를 품에 안으며 진화를 어르고 달랬다.
갑자기 제 차남인 ‘교명’의 이름이 나와 당황하던 남궁경옥은 남궁경의 말에 노기를 품었다.
‘아무리……! 감히 내 아들이 그딴 천출보다 못하다는 거냐!’
남궁경옥의 얼굴에 불쾌감이 솟았다.
하지만 교활한 상인은 재빨리 표정을 감추었다.
남궁가주의 차디찬 노성이 남궁경옥을 향했기 때문이다.
“진화는 본래 알지도 못하는 실명이 거론되는 것을 보면, 진화가 아주 감정적으로 들은 것은 아닌 모양이오. 그렇지 않소, 이장로?”
남궁가주 남궁성은 다혈질로 유명한 제왕검이나 남궁경과 달리, 계산에 능하고 행동은 신중하며 무엇보다 온화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달리 말하면, 세가의 안팎으로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게끔 내부를 잘 조율하고 관리했다는 의미였으니.
남궁세가 내부에서는 남궁가주 남궁성은 온화한 가면을 쓴 철두철미한 냉혈한으로 통했다.
냉혈한의 칼날 같은 눈빛이 남궁경옥과 남궁필의 머리 위에 내리꽂혔다.
‘작두 끝에 머리 하나는 올려놔야지.’
진화의 시선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남궁필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