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합칠 화(和) : 화합 따윈 개나 주라 그래(5)
십수 년의 치열한 전쟁은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특히 무림은 이전까지와 생존 전략을 완전히 달리했다.
무림 명문 문파의 직전제자와 속가제자 사이의 구별을 없애고, 속가제자에게도 문파의 요직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무림 세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혈연 중심에서 실력 위주로, 외부 인재 영입에도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전쟁의 시대에 걸맞은 역량을 가진 직계가 있는 경우에는 그들을 중심으로 세가가 똘똘 뭉쳤고, 반대의 경우에는 실력 있는 방계가 세가의 가주가 되거나 실권을 장악했다.
후계 경쟁에서 대놓고 피바람이 부는 곳도 심심찮게 있었다.
다만, 천하오대세가(天下五大勢家)라 불리는 곳에서만큼은 직계를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며 직계와 방계의 구별이 더 엄격해졌다.
나랏님도 엎고 황제도 바꾸는 마당에, 힘과 무를 숭상하는 무가에서 어찌 방계의 도전이 거세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그들이 가주 위와 함께 직계의 권위를 더 오롯이 지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이유였다.
그들이 더 강했고, 더 교활했으며, 더 잔인했기 때문이다.
남궁세가 또한 직계의 힘이 누구보다 강성한 곳이었다.
유일한 후계였던 남궁진휘의 죽음 이후 제왕검과 남궁가주가 실의와 충격에 빠진 동시에, 미래라는 명분을 잃기 전까지는.
* * *
“가, 가주님!”
“그 아이가 대체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 아니겠소? 평소에 그런 말을 보고 들은 출처를 유추하는 것도 어렵진 않을 듯하군. 아니 그런가?”
남궁가주 남궁성의 송곳 같은 분노가 이장로 남궁경옥과 서평원장을 압박하는 동시에 천명관 내부의 분위기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장로 남궁경옥 또한 자신에게 꽂힌 가신들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은 것을 알아차렸다.
‘젠장! 제 놈들도 같이 동조해 놓고 이제 와서 날 그런 눈으로 봐?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잘못하다가는 애새끼가 한 실수의 불똥이 나한테까지 튀겠어!’
이장로 남궁경옥은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걸 인정했지만, 이대로 마냥 실수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꼼짝없이 직계를 모욕했다는 죄를 뒤집어쓰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 그러나 쟁점은 다친 아이입니다! 아이는 큰 상처를 얻었습니다! 떨어지지도 않은 벼락을 맞았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네, 네?”
“이장로, 좀 전에도 말했지만, 벼락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아이가 상처를 얻은 이유를 말하라. 아니, 정확히는 직계의 아이들이 그 아이를 상하게 했다는 증거를 대라!”
탕-!
탁자를 부술 듯이 내리친 남궁가주가 마침내 분노를 온전히 드러내었다.
“그대야말로 착각하지 마라! 이 일의 쟁점은 그대들의 발언이다! 증거를 대지 못한다면, 남궁필과 그 자식이 한 발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남궁가주 남궁성의 철두철미함은 상대에게 여지를 주지 않는 냉철함에서 나왔다.
그리고 남궁가주의 압박에 이성을 잃은 서평원장 남궁필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저, 저 아이! 제 자식과 함께 있던 사람은 저 아이가 유일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 아이는 처, 천뢰제왕신공을 익혔다고 알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실수였다.
남궁필의 말에 남궁경옥은 아예 눈을 감고 말았고, 진화는 남궁경의 품에 얼굴을 묻고 고소를 숨겼다.
“갈-! 저 아이가 아니라 무적단주의 영식이자 남궁진화일세! 어쨌든 자네의 말은, 우리 진화가 겨우 일주일 전에 배운 천뢰제왕신공으로 자네 아들에게 벼락을 내렸다는 건가?”
남궁가주의 물음은 남궁필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실제로 곳곳에서 다른 가신들이 그들을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 저걸 말이라고!”
“일주일 만에 벼락을 때리는 인재라면 남궁교명과는 비교도 안 되겠군.”
“그런 인재라면 제왕검께서 제자로 삼는대도 입을 다물겠네!”
여기저기서 그들을 비꼬는 소리가 들리고, 남궁가주도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다.
“내 자식들의 증언도 못 믿을 테고.”
“가, 가주님!”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놈들’ 중 하나였지? 창서각주의 아들이라 했나?”
남궁가주의 말에 남궁경옥이 크게 놀라 두 눈을 부릅뜨고 창서각주를 찾았다.
구장로 양서군자(良書君子) 남궁희가 차디찬 눈으로 저를 향해 미소를 짓는 순간, 이장로 남궁경옥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아뿔싸! 끝났군!’
구장로 남궁희는 남궁의 비고라 할 수 있는 창서각을 책임지는 창서각주로서, 무공은 뛰어나지 않지만 세가 내외 인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 남궁희와 적대 관계를 형성한 것만으로도 장로들 중 절반과 멀어졌다 할 수 있었으니.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면피하더라도 세가회의에서 영향력을 키우려던 남궁경옥의 희망은 몇 배로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다.
“남궁구라고 합니다.”
“네가 본 것은 무엇이냐?”
“제가 대공자님과 영애와 함께 비명을 듣고 뛰어나갔을 때, 진화 공자님이 남궁자소를 잡고 있었습니다. ‘쓰러지지 마라.’ 말하시며 진화 공자님이 작은 몸으로 남궁자소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더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남궁가주가 남궁구를 자리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이장로 남궁경옥과 서평원장 남궁필을 보았다.
“자, 이제, 두 사람 언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볼까.”
남궁경옥과 남궁필은 남궁가주의 시선에 마치 뱀 앞에 옭아매진 쥐처럼 새파랗게 질려 손끝을 벌벌 떨고 있었다.
남궁경의 살기가 본격적으로 그들에게 향했고, 진화는 남궁경의 품에서 얼굴을 가리며 조용히 입꼬리를 말았다.
‘되지도 않는 화합 따윈 개나 주라지.’
독이 될 건, 일찌감치 캐내는 것이 좋았다.
* * *
남궁세가는 귀천성의 공세에도 세력권을 지켜 낸 몇 안 되는 세가였다.
오히려 제왕검 남궁강이라는 걸출한 영웅을 배출하고, 현 가주인 남궁성과 그 동생 남궁경이 제왕검의 명성을 지키며 전쟁 중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더한 성세기를 맞이했다.
지금의 남궁세가 직계는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수가 적었지만, 그 권위만큼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았다.
사실 제왕검 남궁강이 내팽개치다시피 가주 위를 넘기고 전쟁에 참여하러 간 후, 강하고 노회한 남궁의 장로들 중에는 초보 가주의 운영에 대해 불안해하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현 가주 남궁성은 빈틈없이 세가의 일을 처리하며 가주의 권한이 흩어지는 것을 막았고, 심지어 제왕검이 귀찮아서 가신들에게 넘겼던 수많은 사업권과 관리권 들을 일부 조정함으로써 그들을 달래는 동시에 위협했다.
젊은 나이에 전쟁에 나서며 실력을 증명한 제왕무적단주 남궁경 또한 형을 도와 폭력적인 실력 행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제 형제의 권위에 맞설 자들은 적어도 세가회의 내엔 없었다.
세가회의 후.
“빌어먹을! 감히 뒤로 그딴 소리를 지껄여? 얼마나 조심성 없이 입을 나불거렸으면 그 어린 자식 놈이 진화에게 그딴 소리를 했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남궁필 놈은 물론이고 남궁경옥 놈의 모가지를 꺾어 버렸어야 했는데, 대체 왜 말리셨습니까!”
남궁경은 여전히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렸다.
남궁진휘와 진혜도 분기를 참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가주 남궁성은 남매가 남궁경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진화의 귀만은 가리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고 말았다.
“녀석아, 아무리 너라도 그 자리에서 칼부림을 했으면 장로들이 난리를 쳤을 게다. 오히려 고작 말실수 하나로 서평원장 자리와 함께 남궁필을 모든 가문의 일에 함께하지 못하게 했으니, 앞으로 남궁경옥이 물밑에서 여론을 조성하기도 힘들 것이다.”
가주 남궁성이 남궁경을 달래듯 말하며 남매와 진화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에 남궁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야 그렇다 친다지만, 형님께서 어인 일입니까?”
“무엇이 말이냐?”
“형님 말마따나 겨우 말 한마디입니다. 그런데 서평원장을 날려 버리고, 이장로에게 직접적으로 경고까지 하시니……. 형님답지 않게 일을 키우셔서 하는 말입니다.”
사실 남궁경이야 그 자리에서 칼부림을 해도 의아해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지만 어쨌든 남궁경의 대외적인 모습은 단순무골(單純武骨) 그 자체가 아니던가.
하지만 가주인 남궁성은 달랐다.
말 한마디, 발걸음 하나조차 계획적이고 치밀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평판으로 제왕검과는 다른 의미로 경계를 사고 있는 사내였다.
만약에 그가 진짜로 이장로와 서평원장을 어찌하고 싶었다면, 그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빼도 박도 못하는 함정에 빠뜨려서 단번에 치워 버렸을 것이었다.
그런데 친히 경고를 날리다니, 남궁경이 보기에도 전혀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하, 이번 일로 장로들과 방계들 사이에서 여론을 형성하던 이가 누구였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졌지 않느냐. 본가의 사업이 확장되면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너무 많았거든. 그 모두를 정리할 수는 없으니, 이장로에게 경고를 함으로써 그 주변이 자연스레 정리되도록 한 것이다.”
가주 남궁성의 말에 남궁경은 물론이고 남궁진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진혜는 전혀 관심 없는 표정으로 진화의 볼을 쓰다듬고 있었고, 진화는 남궁진혜를 상대하며 그쪽으로 귀를 열어 두고 있었다.
‘남궁필은, 남궁경옥이 자금을 횡령하고 은닉하는 것을 여론을 움직여서 가렸던 이였다. 그런 자가 더 이상 가문의 행사에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앞으로 남궁경옥의 행동반경이 좁아지겠군.’
작정하고 상황을 키웠던 진화로서는 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진화는 마음 한편으로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아직 소가주인 진휘 형님이 건재한데, 벌써 물밑에서 여론을 움직이고 있었다고? 왜? 그 사람이 소가주도 아닌 직계의 자리를 노릴 리가 없을 텐데?’
진화의 느낌은 점점 합리적인 의심(疑心)으로 변해 갔다.
한편,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남궁가주는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아버님께서 돌아오시고 본가의 세가 급격하게 확장되면서, 잠잠했던 이들이 다시 욕심을 드러내고 있구나. 본가에서 모든 것을 다 관리를 하기도 벅차고 해서 두고 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한 번 더 조정을 거쳐야 할 것 같군.”
가주 남궁성의 말이 끝나는 순간 남궁경의 눈빛에는 살기가 감돌았다.
제왕무적단은 가주의 검(劍).
남궁경은 남궁성의 명이 떨어지면 언제라도, 상대가 누구라도, 검을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남궁진휘와 남궁진혜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이 가주님과 아버지가 세가를 이끌던 본래의 모습인가. 세가회의부터 지금의 모습까지, 일부러 우리에게 보여 주셨군.’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진화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진화의 추측이 맞았는지, 남궁가주가 남궁진휘, 진혜, 진화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세가를 지키는 것에는 여러 방법이 있단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내부의 가시가 서로를 찌르지 못하도록 미리 잘라 내야 할 때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뿌리를 지키는 것이다. 뿌리를 흔드는 건, 더 번지기 전에 과감하게 제거하는 것이 좋단다.”
남궁진휘와 남궁진혜 남매는 이러한 상황에 익숙한 듯 남궁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에효, 역시 전 그냥 검이나 들래요.”
대답은 달랐지만, 남매는 벌써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확실하게 보고 있는 듯했다.
가주이자 아버지이기도 한 남궁성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또 다른 아버지 남궁경은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진화를 보았다.
아직 어리고 몸도 약한 아이에게 남매와 같은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남궁경의 걱정조차, 진화에겐 감사할 뿐이었다.
‘과거의 나는 정말로 형편없었구나! 이분들은 이토록 치열하게 지켜 온 뿌리에 날 받아 준 것이었는데, 병신같이 그걸 감사한 줄 모르고 외면만 했으니……!’
이번에야말로 진화는 담담하고 순수하게, 제 속마음을 드러내었다.
“저는 그냥 아버지, 어머니 아들만 하면 돼요.”
굴러온 돌 주제에 가주 위를 노리며 남궁진휘의 경쟁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바보같이 남궁경의 아들로서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는 일 또한 결코 없을 것이다.
진화의 바람은 더없이 진지하고 간절했다.
그런 진화의 진심에 남궁경이 크게 기뻐했다.
“그래! 우리 아들은 그냥 아버지, 어머니 아들만 하면 된다! 그거면 돼!”
의사 표현이나 감정 표현이 드문 진화라 어른들 사이에서는 걱정이 많았다.
그런 진화였기에, 아이의 말에 담긴 진심이 더 남궁경을 감격스럽게 했다.
제 자리를 지키는 것.
직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기에, 남궁경은 진화를 번쩍 안고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남궁가주 또한 흐뭇한 얼굴로 진화를 보았다.
“그래, 진화야.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란다.”
남궁가주의 말에 진화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되겠구나.”
“예.”
가주의 허락에 아이들이 처소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남궁진휘와 진혜에게 한 손씩 잡혀서 나가려던 진화가 우뚝 멈췄다.
“근데, 제 책은요?”
“응?”
“천뢰제왕신공 비급서.”
“아!”
“아까 급하게 나오면서 깜빡했다!”
“…….”
진화의 얼굴이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거지’라고 불렸을 때보다 더 슬퍼 보이는 진화의 표정에, 남매는 물론이고 남궁성과 남궁경마저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