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보배 진(珍), 응할 화(和) : 위험 지향형 인간(3)
진화의 첫 창천원 밖 외출이 불미스러운 일로 끝이 난 사건은 남궁진혜의 입을 통해서 금방 팽연화와 다른 식솔들 귀에도 들어갔다.
“아들, 정말 괜찮니?”
팽연화는 제가 더 아픈 표정을 하고 진화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과거에도 그녀는 진화가 상처받고 온 날 본인이 더 아픈 얼굴을 하며 진화에게 괜찮냐고 물었었다.
그러면 진화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팽연화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는 걸까.
사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과거엔 속수무책으로 악의에 상처 입고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키려고 버둥거렸지만, 이제는 그들의 악의 자체를 무시할 만큼 여유가 생겼다.
아니, 사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마음먹고 나니 진화에겐 참을 이유가 사라졌고, 참을 이유가 사라진 진화는 거칠 것이 없었다.
“벼락을 맞았대요.”
진화가 덤덤하게 말했다.
‘실은 오른팔의 맥을 태워 버렸어요.’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앞으로 오른팔로 검을 쥐긴 힘들 것은 물론, 무인으로서 반쪽짜리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과거의 나처럼 창천대연신공을 제대로 익히기 어려울 거니까.’
진화의 모습에 팽연화가 안심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 나쁜 자식! 진화에게 그딴 말을 하니 하늘에서 벼락을 내린 게 틀림없어요, 숙모님!”
남궁진혜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렸다.
두 아이가 모두 ‘씩씩’한데, 가모 하후민은 남궁진혜를 보며 다른 의미로 한숨을 쉬었다.
“그놈 주둥아리를 때려 줬어야 하는데!”
“딸, 제발 말 좀.”
“하지만 어머니, 그놈이 아픈 바람에 착한 진화가 그놈을 돌봐 주고 있었다고요! 그렇게 심한 말을 했는데! 그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됐다.
남궁구에게도 확인해 보았지만, 그렇게 친절하게 보일 법한 광경은 아니었다.
대체 어떤 시선으로 봤기에 저렇게 확신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진화는 너무 착해서 탈이에요! 앞으로 그런 나쁜 놈들이 또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번에는 벼락이라도 떨어졌지만 다음에도 벼락이 떨어질 리가 없잖아요. 그때는 착한 데다 종이 인형같이 약한 진화가 진짜로 다칠지도 몰라요!”
남궁진혜의 말에 진화가 아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남궁진휘와 진혜 남매는 어린 시절 처음 보았을 때 진화의 모습이 크게 각인된 듯, 늘 진화를 보호하려 애썼다.
혈과 맥이 없어 천뢰제왕신공을 익힐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는, 그런 경향이 더 심해졌다고 생각은 했는데…….
설마 종이 인형이라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하지만 더 당혹스러운 것은, 남궁진혜의 말에 하후민과 팽연화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방금 전에 ‘그런 나쁜 놈’ 남궁자소의 미래를 없애고 온 진화로선 차마 어머니와 눈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하후민과 팽연화는 그런 진화를 더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다.
“진혜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닌 거 같아요. 먼저 시비를 거는 아이가 또 없으라는 법은 없는데, 진화의 성격이 너무 순한 건 확실히 걱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놈 새끼, 벼락을 쳐 맞기 전에는 진화가 만만해 보이니까 시비 털고 있었을 거 아니야! 아악! 분해! 몰래 코뼈라도 뭉개 놓는 건데!”
남궁진휘까지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고 나서자, 남궁진혜가 더 기세가 올라 발을 동동 굴렀다.
“진혜야!”
하후민은 점점 제왕검과 남궁경의 말투를 닮아 가는 딸을 보며 화들짝 놀라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그녀 또한 남궁진혜의 말이 아주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동서, 아이들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닌 것 같아.”
하후민이 진화의 얼굴을 보았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팽연화도 진화와 눈을 마주쳤다.
뽀얀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요즘엔 볼살도 통통하게 올라서 팽연화를 뿌듯하게 했다.
하지만 진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긴 속눈썹이 만들어 내는 처연한 분위기와 송아지처럼 촉촉한 눈망울이라. 보다 보면 저절로 머리를 쓰다듬고 있을 정도였다.
“아이의 성품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도 아니고, 사실 누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지.”
하후민의 시선이 잠시 남궁진혜에게 머물렀다.
“대신에 진화도 슬슬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하는 게 어떨까?”
“수련요?”
“사실 보통은 심법이 좀 익숙해지고 나서 시작하겠지만, 진화는 벌써 심법을 홀로 펼칠 수 있고……. 사실 진화의 나이를 생각하면 제대로 무공을 시작할 나이긴 하지.”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었지만, 진화가 구출되었을 당시 의선은 그의 나이가 다섯 살에서 일곱 살 정도 되었을 것이라 했다.
그래서 남궁경과 팽연화는 그의 나이를 여섯 살로 삼기로 했고, 그렇게 치면 올해로 일곱 살을 넘어가니 슬슬 수련을 시작할 나이기는 했다.
보통 대세가에서는 대여섯 살부터 몸을 만들고 수련을 시작하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 늦은 감도 있었다.
“맞아요, 어서 검술을 배워서 그놈들은 상대도 안 될 정도로 강해져야 해요! 진화는 할아버님도 칭찬했을 정도로 재능이 있으니까, 그놈들 정도는 금방 따라잡을 거예요!”
남궁진휘와 남궁진혜도 다섯 살에 벌써 남궁경에게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고, 여섯 살에는 목검을 쥐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 가혹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귀천성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에 아이들의 생존을 위해서도 가혹해질 수밖에 없었다.
“진화가 무공을 배우려면, 할아버지께 배워야 하나요? 천뢰제왕신공을 가르치는 다른 무사부가 있나요?”
“아, 그건…… 아무래도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상의해 봐야 할 듯하구나.”
남궁진휘의 지적에 하후민과 팽연화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들이 알기에도 천뢰제왕신공을 제대로 익힌 무인들은 본가 내에서도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진화의 무사부에 고민하고 있을 때에, 진화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했다.
‘스승이라고?’
* * *
남궁세가에서 무공을 배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첫째로 무학관을 다니는 방법이 있었다.
동청평원과 서청평원에는 남궁세가에서 운영하는 무학관이 있었고, 잠삼현 전체로는 열 개가 넘는 무학관이 있었다.
이 경우에는 사부보다는 출신 학관의 명성이 중요했는데, 경쟁을 통해 성장하고 여러 무인들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잠삼현은 물론 안휘성 전체에서 가장 이름난 무학관은 단연코 남궁세가에서 운영하는 청평무학관이었다.
두 번째로는 개인적으로 무사부를 두거나 직전제자로서 사부를 모시는 방법이 있었다.
사실 후자의 경우처럼 이름난 무인을 사부로 모시고 직전제자가 되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였고, 대부분은 이름난 무사부의 밑에 소수의 제자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 경우에는 보다 집중적인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데 장점이 있었다.
사실 유복하거나 권세가 있는 집안의 경우에는 학관을 다니면서 무사부를 따로 두거나 개인 무사부를 여럿 두기도 했고, 이름난 무인을 사부로 모시려는 경쟁이 치열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방계 출신이나 다른 무가 출신에게 해당하는 말이었고, 남궁세가의 직계인 남궁진휘와 남궁진혜는 또 달랐다.
그들은 학문과 교양, 제왕학을 가르치는 여러 사부를 두었고, 남궁제일검이라 꼽히는 남궁경을 무사부로 모시고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아 왔다.
진화의 경우 건강을 회복한다는 이유로 모든 교육을 미뤄 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진화도 직계로서 교육을 시작해야 할 때였다.
건강을 회복하기도 했지만, 세가 안팎으로 진화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기 시작한 이상 남궁세가의 직계로서 합당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우리랑 같이 배우면 안 되나?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숙부님이 제일이시잖아.”
“바보야, 학문이나 다른 교양이면 몰라도, 무공은 안 되지! 숙부님은 천뢰제왕신공을 모르시잖아!”
“아……!”
남궁진휘의 말에 남궁진혜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무리 남궁진혜라도 천뢰제왕신공의 심법으로는 창궁대연검법이나 제왕무적검법을 익힐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검법은 제왕무적검법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남궁진혜가 한껏 슬픈 눈으로 진화를 보았다.
‘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 훤히 보이네. 지금 당장 제왕무적검을 펼치래도 검형만큼은 내가 더 완벽하게 펼칠 수 있을 거라고!’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드는 진화였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럼 역시 천뢰제왕신공을 익힌 사람을 빨리 찾는 수밖에 없구나.”
“단맥 되지 않도록 특별히 관리 중이니까, 아버지께 물어보면 누가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아, 단맥…….”
천뢰제왕신공의 처량한 처지에, 다시 한번 진화를 보는 남매의 눈이 슬퍼졌다.
‘젠장, 천뢰제왕검법도 이미 이론과 검형이라면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이걸 말을 할 수도 없고……. 괜히 스승을 구해 봤자 귀찮은 감시자만 늘 뿐인데, 이걸 어떻게 거절하지?’
하후민과 팽연화, 남궁 남매가 진화의 스승에 대한 문제를 고민할 때, 진화도 조금 다른 방향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남궁성과 남궁경이 모두 돌아오고 저녁 시간에 다 같이 모여 상의하기로 하고, 각자 바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헤어졌다.
겨우 혼자 있게 된 진화가 자유 시간을 보내는가 싶은 때였다.
“도련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손님?”
하녀의 말에 진화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진화의 인간관계는 이 창천원 안이 전부였던 터라, 손님이라고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호호호, 도련님 친구라고 하셨어요.”
“치인구?”
더 수상쩍어졌다.
하지만 어쩐지 기뻐 보이는 하녀의 표정에 따라나선 진화는, 그 ‘손님’의 정체를 알고 화색을 띠었다.
“안녕?”
“비급서!”
“내 이름은 비급서가 아니라 남궁구인데 말이야.”
상큼하게 웃으며 인사한 손님은 남궁구였다.
하지만 남궁구의 말과 상관없이 진화의 눈에는 그가 들고 있는 천뢰제왕신공 비급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진화가 남궁구를 보고 기뻐하자, 하녀는 둘이 함께 있는 진화의 처소에 간식까지 챙겨 주곤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남궁구가 비급서를 내려놓기 무섭게 낚아챈 진화가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내 아버지가 창서각주시니까. 대공자와 영애께서 잊고 가신 듯하다고 챙겨 가라시더라고.”
“그렇구나! 고맙다! 정말로!”
진화는 남매가 잊어버렸던 제 비급을 가져다준 남궁구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리고 얼른 비급서를 펼쳤다.
대충 훑어본 비급서는 제왕검의 설명과 과거에 남궁경이 알려 준 검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비급서의 끝을 확인하고, 진화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
그 과정을 두 번 정도 하고 나서 진화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없어! 천뢰제왕검법에 대한 설명은 있지만, 천뢰기나 섬전십삼검뢰에 대한 설명은 없다!’
과거 분명히 익혔던 검술이 없자 진화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과거 아버지께서 천뢰제왕검법의 검형과 함께 알려 주신 무공이다! 그런데 없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전에 알려 주신 무공이 비급서에 없습니다!’ 하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당황한 진화가 본격적으로 구결을 뒤져 보려 하는데, 바로 옆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진화를 상념에서 깨웠다.
“저기, 혹시 모를까 봐 이야기하는 건데, 나 아직 여기에 있어.”
“아…… 혹시 내가 아까 잘 가라고 인사를 안 했나?”
진화는 진심으로 물은 말이었다.
남궁구를 완전히 깜빡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궁구도 만만치 않았다.
“하하하, 역시 재미있구나.”
남궁구는 진화의 말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아무리 내가 창서각주의 아들이라지만, 내 앞에서 그렇게 무방비하게 비급서를 보는 건 좀 곤란해. 비급서는 허락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거라고.”
“……어차피 네가 들고 온 거잖아.”
“안 보기로 철석같이 약속하고 가져왔어.”
이건 무슨 참신한 개소리란 말인가.
“그걸 믿어?”
“목격자가 없으니까.”
남궁구의 당당한 태도에 진화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아! 기억났다. 의천재룡(義天才龍) 남궁구! 가운데 재(才)자가 사실은 재앙을 의미한다는 소문이 돌았던……!’
그 말을 증명이나 하듯, 과거 남궁구는 소가주 남궁진휘가 죽었을 때 함께 죽었다.
“너네 아버진 지금 뭐 하시냐?”
“음? 무슨 의미야?”
진화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남궁구가 이내 씨익-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이 녀석 혹시……?’
진화의 눈초리가 점점 의심스러워질수록 남궁구의 웃음은 짙어졌다.
“흐흐흐.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따져도 소용없다고! 비급 관리가 허술하다며 몇 번이나 항의가 들어왔지만, 이십 년째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고 계시는 중이시지! 하하하하!”
“……그거 정말 괜찮은 거냐?”
“늘 아슬아슬하지. 그래서 인생이 더 재미있잖아?”
“…….”
어쩐지 그가 왜 죽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날, 천화정 식구들은 진화에게 ‘첫 친구’가 생긴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