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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21)화 (21/425)

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합칠 화(和) : 사제지간(3)

스승은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무인에게 무공이 생명과 같듯, 스승과 제자는 무공을 나누듯 인생을 나눈다.

한 무인에게 스승의 명성은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고, 스승에게도 제자의 인생은 명예 혹은 멍에가 된다.

부모의 은원을 짊어지듯 스승의 은원은 제자에게 물려지고, 제자의 은원 또한 스승에게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될 고리였다.

결국 무인에게 스승은 또 한 명의 부모인 동시에 마치 인생을 계승한 분신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이상적이고 감상적인 이야기를 떠나더라도, 당금 현실에서 스승과 무사부의 존재는 출세와 생존에 직결된 문제였다.

모든 것이 전쟁 때문이었다.

귀천성과의 치열하고 잔인한 전쟁 속에 타고난 출신과 가진 배경이 잠시 위험을 피하게 할 순 있겠지만, 중요한 순간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본인의 실력밖에는 없었다.

무인에게 실력이란 타고난 자질과 우수한 가르침이라.

그중에서 후천적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건 스승과 무공 선택뿐이니, 두 가지의 선택에 인생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 *

오늘도 열심히 수련을 할 생각으로 기분 좋게 일어난 진화는, 아침 식탁에서 생각지도 않은 인물을 발견하고 말을 잃었다.

“…….”

이 사람을 청림이 아닌 천화정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멀뚱멀뚱 보고 있는 진화의 시선에서 그의 생각이 곧장 읽히는 듯했다.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남궁경과 웃고 있는 팽연화를 번갈아 보는데, 당연한 듯 아침 차를 마시던 의천검주 남궁호명이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네 아비가 내 집을 날려 먹었다. 집을 다시 지을 나무를 하는 것부터 전부 네가 도와야 할 것이다.”

“…….”

남궁호명의 말에 놀란 진화가 남궁경과 남궁호명을 번갈아 보았다.

남궁경은 차마 진화와 눈을 마주하지 못했고, 남궁호명은 자식의 눈치나 살피고 있는 남궁경이 웃긴지 고소를 지었다.

“제자가 되는 겁니까?”

“거창할 것 없다. 그냥 집짓기나 할 거다.”

“……아버지.”

진화가 울상이 되어 남궁경을 보았다.

“지, 진화야! 아니, 이 영감탱이가 성격이 꼬여서 그래! 그래도 제자가 아니라는 소리는 안 했잖니? 제자로 받아 준다는 소리나 다름없단다!”

진화가 울상이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진짜 필요 없는데…….’

하지만 진화는 왜 쓸데없는 짓을 했냐는 원망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밥알을 새듯 깨작깨작 먹어서 남궁경의 걱정을 샀을 뿐이었다.

다음 날.

세가 안팎으로 남궁경의 양자가 의천검주의 제자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 * *

한 가지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진화의 걱정과 달리, 남궁호명은 정말로 진화에게 뭔가 가르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제왕검이 혼자서 내공심법을 수련하는 걸 허락했다고?”

“예.”

“하나만 묻겠다. 어제 청림에서 음기와 양기를 나눠서 다루더구나. 맞느냐?”

“예.”

남궁호명의 물음에 진화가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진화의 간단한 대답을 들으며 남궁호명은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미친! 끄덕끄덕 잘도 대답하는군. 심법을 배운 지 겨우 보름이나 되었을까 하는 놈이, 혼자서 천뢰제왕심법을 운용하는 건 물론이고 그걸 제왕검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그것도 놀랄 노 자구먼, 벌써 음기와 양기를 나눠서 다루고? 재수 좋은 소는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는다더니만, 재수 좋은 제왕검은 뒷걸음치다가 이런 걸 낚는 건가?’

인간 또한 자연의 산물이라 본디부터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진 생명체였다.

천뢰제왕신공을 익히기가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날 때부터 만들어진 균형을 깨야 하는데, 그것을 깨기도 힘들뿐더러 다루기는 더더욱 힘들기 때문이다.

‘역천지체 때문인가 한다고? 천만에! 그 또한 자연의 산물이다. 평범한 사람과 반대로 위치할 뿐 기능부터 역할과 정도까지 하등 다를 것이 없단 말이다!’

진화를 보는 남궁호명의 눈빛이 흔들렸다.

진화 또한 남궁호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뇌왕의 자리까지 오르면서 많은 무인을 보았고, 많은 적과 싸웠다.

지학을 넘겨 혼자서 겨우 익힌 무공으로 그들을 모두 이기며, 경악에 찬 천재(天才) 소리는 무수히 들었었다.

그러니 지금 제가 어린아이의 몸으로 하는 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성취를 속이지 않는 것은, 괜히 성취를 속인다고 수련의 속도를 늦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화에게 중요한 건 빠르게, 그리고 이전보다 더 강해지는 것이었다.

남궁호명의 눈에 고민이 많아 보였다.

실제로 그는 진화를 제자로 받기는 했지만, 이런 천재는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알지 못했다. 정확히는 딱히 지금 당장 가르쳐야 할 것을 찾지 못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음양의 기운을 나눠서 운용할 줄 안다는 것부터, 내공심법을 완벽하게 익히고 확립한 것이다. 더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다.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것은 검술뿐인가…….’

남궁호명은 한 번도 누굴 가르쳐 본 적 없는 주제에 너무 거창한 제자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화는 그가 생각보다 좋은 스승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부터 매일 오전과 오후에 이곳 청림에 와서 장작을 패라. 네 아비가 내 집을 무너뜨렸으니, 새집을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

“예.”

섣불리 나서지 않는 것은 남궁호명이 초보 스승이어서가 아니라 겸손한 성품이기 때문이고.

욕심내어 검술을 가르치기 전 장작 패기로 기초 체력과 근력을 만들라 한 것은, 그가 기본의 중요성을 아는 좋은 무인이기 때문이라.

“자, 냉큼 숲으로 가거라!”

“같이 안 가십니까?”

“못 들었더냐? 새집을 지어야 할 것이 아니냐. 너는 장작을 가져오고, 나는 이곳에서 집을 만들고 있겠다!”

남궁호명의 단호한 선언에, 진화는 싱글벙글해서 청림으로 들어갔다.

‘좋은 스승이야, 생각보다 훨씬!’

* * *

이장로 남궁경옥의 처소.

남궁경옥이 둘째 아들인 남궁교명에게 뭔가 알릴 것이 있어 부른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 목소리 큰 불청객이 뛰어 들어왔다.

“형님, 소식은 들었습니까? 그 천한 양자 놈이 의천검주의 제자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남궁필은 여전히 이장로 남궁경옥의 수족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남궁필로서는 남궁가주에게 세가 내에서 어떤 일도 할 수 없도록 금제를 당했으니 생계가 궁했고, 남궁경옥으로서는 남궁필이 서평원에 쌓아 놓은 인맥에서 얻어 오는 정보가 아직 쓸 만했으니.

둘은 여전히 가까이 지낼 이유가 충분했던 것이다.

“의천검주요?”

“흐음, 나도 그 소식은 들었다.”

남궁교명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던 듯 크게 놀란 기색이었고, 남궁경옥은 알고 있던 소문이라 침음을 삼켰다.

“젠장! 그럼 이것도 들었습니까? 그 남궁경 새끼가 이번에 또 검 들고 쳐들어가서 어거지로 제 양자 놈을 밀어 넣었다는 거!”

“남궁경이?”

이번에는 남궁경옥도 크게 놀란 듯 되물었다.

그에 남궁필이 더 씩씩거리며 소식을 전했다.

세가회의에서 남궁경의 기세에 완전히 눌려서 꼼짝도 못 했던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사실 남궁가주에게 말을 걸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것이 더 비참했지만, 가주를 원망할 담력은 없었기에 모든 원망이 남궁경을 향했다.

남궁필은 이제 남궁경의 이름만 나와도 이를 갈며, 누가 시키지 않아도 꼬투리를 찾기 위해 파고들었다.

“서평원 목수장에게 들었습니다. 청림에 다시 집을 지으러 가는데, 이유가 남궁경이 의천검주의 집을 날려 먹어서라더군요.”

“허어, 의천검주의 집을 날려? 그래서 의천검주가 순순히 그 양자를 제자로 받았고?”

“이전부터 둘이 친하지 않았습니까. 천화정에 살면서 대충 제자로 받았답니다.”

“의천검주가 제자로 받았다고요? 뭘 전수한다고 합니까?”

남궁필의 말에 남궁교명이 끼어들며 물었다.

그날 이후, 얼굴도 모르는 양자 놈과 경쟁하게 된 남궁교명이었다.

하지만 내심 천한 출신의 양자 따위가 제 상대가 될 리 없다며 자신만만해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그 천한 양자 놈이 의천검주의 제자로 들어갔다니!

아닌 밤중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 참, 다행히 딱히 가르칠 생각도 없는지 매일 장작 패기만 시키고 있다는군요.”

“허! 그럼 그렇지!”

남궁필의 말에 남궁경옥이 코웃음을 쳤다.

남궁교명의 얼굴에도 다시 여유가 돌아왔다.

“그 천한 양자 놈이 뭐가 그리 예쁘다고 물고 빠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될 일을 억지로 성사시킨다고 다 잘되는 건 아니지.”

“흥! 의천검주가 그 양자 놈에게 뭘 가르치겠습니까? 가르칠 수도 없죠. 천한 놈에게 무슨 자질이 있을 거라고! 이름만 제자, 얼마든지 해 보라지요!”

남궁교명이 장작 패기라는 말에 안심했는지 진화를 비웃었다.

다만, 남궁교명과 달리 남궁경옥은 그 이름만 제자인 것조차 거슬렸다.

남궁진화에게 의천검주가 성의 있는 스승이 되지 않더라도, 의천검주는 명성 자체만으로도 진화에게 큰 배경이 되어 줄 것이다.

“양자 놈의 성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스승이 의천검주라는 것 자체로, 사람들은 그놈을 달리 보게 될 거다. 게다가 의천검주도 제왕검과 남궁경의 눈치가 있으니, 조만간 기초적인 검술이라도 가르치겠지.”

“흥! 가르침을 받는 자가 제대로 된 자일 때의 말이겠지요. 어린아이의 손에 명검을 쥐여 준 꼴입니다! 그놈이 누구의 제가가 되건, 제 상대가 될 리가 없습니다!”

남궁교명의 자신감에 남궁경옥 또한 아들이 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두 부자는 근본도 없는 양자에게 그런 행운이 간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그 양자 놈이 뭐라고!’

제왕검이 직접 심법을 봐 주었고, 아버지인 남궁경은 차기 남궁제일검이라 불리는 자였다.

그런데 이제는 은거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의천검주가 스승이라니!

남궁세가의 모든 무인들이 꿈꾸는 이들을 주변에 칭칭 감고 있는 남궁진화의 환경에 질투가 났다.

그 남궁진화가 귀천성에서 데려온 출신도 모르는 천하디천한 아이라서 더 화가 났다.

남궁교명은 가까운 혈통에 뛰어난 자질, 명석한 두뇌까지 가진 자신을 봐 주지 않는 본가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치 제 것이 되었어야 할 것들을 모조리 빼앗긴 듯한 박탈감과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 남궁교명의 마음을 남궁경옥 또한 십분 이해했다.

“대체 그놈의 불쌍해 빠진 얼굴 어디에 그런 복이 있는 건지! 우리 교명이에게 그중 하나만 있었어도 차차기 남궁 제일 고수는 따 놓은 당상일 것을! 에잉!”

남궁경옥이 과장된 말투로 뒤틀린 아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에 남궁필도 눈치를 보며 맞장구를 쳤다.

“그, 그러니까요. 우리 교명이한테 그중 한 명이 스승으로 있었다면 무림에 이름을 날리는 고수가 될 것이 자명한 것을요! 어쩌면 남궁진휘도 능가할지 모르지요!”

“어허! 말! 자네는 그 말 좀 조심하게!”

“아, 아! 예!”

남궁필이 또 생각 없이 내뱉은 남궁진휘라는 이름에 남궁경옥이 크게 정색했다.

가주의 권력에 도전하고 직계의 위치를 넘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궁진휘는 아니다.

세가의 대공자인 남궁진휘는 완벽한 혈통에 타고난 자질과 성품, 세가 내의 인망까지 결코 넘볼 수 없는 아성이었다.

남궁진휘를 건드렸다간 당장 제왕검에게 목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어쨌든 의천검주라니, 남궁경이 욕심을 부렸군. 하지만…… 우리도 만만치는 않을 거다.”

“예?”

“아버지?”

“허허, 오늘 교명이 너를 부른 이유도, 사실 이분을 소개해 주기 위해서다.”

남궁교명과 남궁필의 의아한 반응 속에, 남궁경옥이 문을 향해 일어서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어르신.”

“허허, 내가 늦진 않았는가?”

“헉!”

“저, 저분은……!”

거대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크고 단단해 보이는 노검사가 남궁경옥의 인사에 화답하며 들어왔다.

남궁필은 중년인이 앞을 지날 때까지 제 눈을 믿지 못할 정도였고, 남궁교명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의천관 관주, 남궁도다.”

어찌 모르겠는가!

아주 오래전부터 남궁의 오 대 무단 소속 무인들 대부분이 그의 손에서 단련되고 배치되었다. 그래서 남궁세가 모든 무인들의 스승이라고도 불리는 자.

은수천검(隱手千劍) 남궁도.

전 무림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남궁세가 내에서만큼은 제왕검, 의천검주와 대등한 명성을 지니는 유일한 무인이었다.

“우수한 자질의 아이가 스승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하여 왔느니라.”

“……가, 감사합니다!”

남궁도의 말에 남궁교명이 격정을 이기지 못한 표정으로 대뜸 절을 올렸다.

그 모습을 남궁경옥과 남궁도가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며칠 후, 세가 안팎으로 남궁교명이 의천관주 남궁도의 직전제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퍼져 나갔다.

이 일로 남궁진화와 남궁교명이 다시금 사람들의 입에 비교되었지만, 그때 잠시뿐.

몇 번의 계절이 지나자, 그들의 소식은 잠잠한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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