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바뀔 화(譁) : 성장하다(1)
전쟁 중에도 꽃은 핀다 했던가.
지금의 무림에는 ‘전쟁 중에도 삶은 지속된다.’는 의미가 더 적절할 것이다.
귀천성과의 오랜 전쟁이 지속되는 속에서, 무림인들은 여전히 개인의 꿈과 욕망을 버리지 못했다.
어쩌면 전쟁 중이라 더 그런지도 몰랐다.
평화의 시대에는 태생과 배경, 부와 권력의 한계로 감히 노려보지 못한 위치에, 지금은 적을 죽여서 얻은 공과 명예만으로도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귀천성과의 전쟁 중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대변되는 기존 명문 출신이 아닌 많은 인사들이 대거 정의맹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전쟁으로 인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가 모든 것의 우위에 서게 된 것이다.
귀천성과의 전쟁에서 많은 은거기인들이 세상에 나서고 그들이 요직에 들어서자, 정의맹은 앞으로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 나가기 위해 무림 전역에서 본격적으로 인재 발굴에 나섰다.
그 상징이 바로 정의무학관(正義武學館)이었다.
정의무학관은 개인이나 문파의 단위를 벗어난 대규모 전쟁을 치르는 데에 필요한 전술과 협력 방법, 문파들을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행정과 귀천성을 상대하는 경험 등을 가르쳤다.
모두 실전에 곧바로 투입하기 위해서였다.
결론적으로, 정의무학관은 무공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전쟁에서 써먹을 인재를 찾는 선별기관(選別機關)인 것이다.
정의무학관을 나온 무인들은 세 가지 길을 선택할 수 있다.
먼저, 대부분의 이들은 각 문파나 세가로 돌아가 정의맹의 전략에 따라 소속 무인들을 이끈다.
다음, 정의맹에 남고자 하는 이들은 사 대 무단의 대원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 그들 중에서도 특히 우수한 인재들은 정의맹 소속 여러 기관에 지휘부로, 요직에 발탁되었다.
전쟁과 관련한 수많은 이권이 걸린 가운데, 지휘부에 들어간다는 것은 부와 권력을 얻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래서 많은 문파와 세가 들이 정의무학관에 인재를 보내고 싶어 하고, 많은 인재들이 출세를 위해 정의무학관에 가고 싶어 했다.
남궁세가에서도 양주 지역 선발대회를 열어 정의무학관으로 인재들을 보냈다.
* * *
그리고 올해.
진화가 의천검주의 제자가 된 지, 햇수로 삼 년째 되는 해였다.
진화는 올해에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올해 치러진 남궁세가 자체 선발 대회에서 남궁진휘, 남궁진혜 남매가 정의무학관으로 가게 된 것이다.
“어어어엉-! 진화야, 누나 없이도 울지 말고 잘 지내야 해애?”
“제발 너나 울지 않으면 안 되겠니? 이 오라비는 벌써부터 네가 부끄럽구나.”
“닥쳐! 흐어어엉! 이 어리고 여린 걸 두고 가는데, 내가 어떻게 발길이 떨어지겠어!”
남궁진혜는 진화를 끌어안고 눈물, 콧물을 쏟았다.
창천원 문 앞에서 그들을 배웅하던 식구들은 진화의 위기를 살며시 외면했다.
은근슬쩍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보면, 사실은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제법 여인의 태가 나는 외양으로 눈물과 콧물을 진화의 어깨에 문지르고 있는 남궁진혜의 모습도 가관이었지만, 차마 남궁진혜를 밀치지 못하고 귀만 붉히고 있는 진화의 모습에 어른들은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얌전함을 넘어 점잖은 애늙은이 같은 모습만 보이던 진화였기에, 가끔씩 이렇게 당황하거나 아이다운 얼굴을 할 때가 반가운 것이다.
게다가 어쩌면 이 셋이서 이러고 있는 광경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
어른들은 이 모습을 조금 더 눈에 담아 두고 싶었다.
“네가 여기서 그냥 세가에 눌러앉아도 오빠는 고맙겠구나, 진상아.”
“닥쳐-! 악착같이 따라가서 다음번엔 내가 이길 거야—! 허어엉!”
이번 선발대회에서 남궁진혜는 남궁진휘에게 패배했는데, 모두가 납득한 결과를 혼자서 납득하지 못하며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남궁진휘는 선발대회 우승을 기점으로 정식으로 소가주 위에 올랐다.
모두가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했기에 아무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화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전 생과 똑같이, 형님이 정의무학관에 가기 전에 정식 소가주가 되셨다.’
진화는 이전 생과 같은 결과가 달갑지 않았다.
특히 남궁진휘와 관련된 것은.
정의무학관으로 떠난 소가주 남궁진휘가 의문의 죽음을 맞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소가주 남궁진휘의 죽음까지는 아직 오 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후우, 떨어져라, 떨어져! 진화가 불쌍하지도 않냐! 이 어깨를 좀 봐라!”
눈물, 콧물로 축축하게 젖은 진화의 어깨를 보다 못한 남궁진휘가 억지로 남궁진혜를 떼어 놓았다.
그제야 제가 만들어 놓은 결과물을 본 남궁진혜가 모르는 척 진화의 어깨를 털어 주었지만, 그게 털린다고 털리는 종류는 아니었다.
“진화야, 내 예쁜 동생, 밥 잘 먹고 건강하게 있다가 오 년 뒤에 와야 한다?”
“형님도요. 형님, 제가 갈 때까지 건강하게 계세요.”
진화의 당찬 대답에 남궁진휘도 마지막으로 진화를 꼭 껴안았다.
‘형님, 남궁의 운명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도!’
진화는 남궁진휘를 마주 안으며, 반드시 그의 죽음을 막아 낼 것이라 다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삼 년이 지나면 전 반드시 돌아올 거예요!”
정의무학관은 육 년 과정이었지만, 삼 년의 기본 교육 기간이 지나면 실전을 경험하기 위해 순환 근무를 돌면서 일 년에 석 달 정도 휴식이 주어졌다.
남궁진혜가 기약하는 건 바로 그 기간이었다.
“저 시끄러운 녀석들이 사라지니 벌써 빈자리가 크네.”
“삼 년…… 참 길겠죠?”
남궁가주와 가모가 차분하게 남매를 보낸 대신, 남궁경과 팽연화 부부가 눈물을 보이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진화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세가의 일로 바쁜 가주 내외를 대신해서 자식처럼 남매를 키운 정이 큰 것이다.
“우리 진화까지 오 년 후에 가 버리면, 진짜 어쩌죠?”
“그건 좀 먼 일이니까 미리 울지 말자고.”
팽연화의 울적함을 달래며 남궁경이 진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휘 형님이 정의무학관으로 가는 것은 바꿀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벌써 이전 생과 달라진 것은 있다! 진혜 누님과 함께 떠났으니까!’
과거 남궁진혜는 적적해할 어른들을 생각하서 다음 입관 시험을 노렸었다.
그런 관점에서, 그녀가 이번 해에 떠날 수 있었던 데에는 진화의 역할이 가장 컸다.
이전과 달리 진화가 집안에서 점잖은 막내 역할을 다 하면서, 집안 어른들이 적적할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화는 남궁가주와 하후민과 따로 시간을 보내는 데에 어색해하지 않을 정도로 식구들 사이에서 잘 어울리게 되었고, 남궁진휘와 남궁진혜가 없는 빈자리를 어렵지 않게 메워 나갔다.
* * *
삼 년이 넘는 동안, 남궁호명의 집은 다 지어졌다.
심지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규모와 화려함이었다.
하지만 천화정 밥맛에 길들여진 남궁호명은 천화정을 완전히 떠나지 않았고, 진화의 장작 패기도 끝나지 않았다.
이미 세가 내에 ‘의천검주가 제자에게 장작만 패게 하고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누군가는 남궁경이 억지로 붙여 놓은 거라서 그런 것이다, 또 누군가는 제자의 자질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런 것이다, 마음껏 떠들어 댔다.
한편으로는 ‘언제 또 남궁경이 검을 들고 쳐들어갈지’ 내기를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어른들 사이에 어떤 교감이 오간 것인지, 남궁호명의 교육 방식에 대해선 그 누구의 간섭도 없었다.
물론 남들이 뭐라 떠들건, 삼 년 내내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장작 패기만 했던 진화의 만족도도 매우 높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궁호명이 검게 옻칠이 된 목검을 가져왔다.
“천뢰제왕신공을 평범한 목검으로 펼친다면 며칠 가지도 못하고 불이 붙을 것이다. 이렇게 불에 강한 참목이나 삼목이 좋다. 여기에 옻칠까지 더해지면 제법 오래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공까지 운용하려면 진검으로 바꿀 수밖에 없다. 다른 검법 수련보다 일찍 진검을 쥘 터이니, 이전에 목검으로 검술에 익숙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예상치도 않았던 선물이었다.
“잉? 뭐냐, 그 눈은? 설마 진짜로 내가 이대로 쭉 장작 패기만 시킬 거라고 생각한 거냐?”
“……아닙니다.”
사실 삼 년이나 계속 장작 패기를 시키자, 조금 그렇게 생각하긴 했다.
어쨌든 남궁호명의 선물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라 기쁘기도 했고, 과거 혼자서 수련할 때에는 알지 못하던 수련법이라 이제야 ‘내가 스승이 생기긴 했구나.’ 하는 실감이 나는 느낌이었다.
‘진검도 괜찮다는 말은 안 하는 게 좋겠지?’
삼 년의 시간 동안 남궁호명이 마냥 진화를 방치한 것은 아니듯, 진화 또한 마냥 그를 무시하고 지낸 것은 아니었다.
남궁호명은 간간이 진화의 성취를 물어봐 주었고, 때론 자신의 심득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진화도 장작 패기가 검을 휘두를 근육과 체력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은 했지만, 남궁호명은 매번 다른 방법을 주문하며 자신도 전쟁터에 나서고 나서야 얻었던 경험까지 진화의 기초에 쌓아 주었다.
과거 남궁위와 명목상으로만 지냈던 사제지간과 달리 실제로 심득과 경험을 주고받는 관계의 경험은, 진화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날도 바로 그러한 날 중 하나였다.
“오늘부터 천뢰제왕신검을 보여 주마.”
남궁호명이 의천검을 들고 나갔다.
남궁경이 부순 옛 집터는 훌륭한 공터이자 연무장이 되었다.
처음 완벽하게 공터가 된 이곳을 봤을 때는 민망했지만, 순식간에 뇌전의 힘으로 잡풀을 태우고 땅을 다듬어 놓자 제법 연무장다워졌다고 생각했다.
“사실 천뢰제왕검법은 인간의 몸으로 뇌전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위해 만들어 놓은 뇌전의 길이다.”
천뢰제왕신공의 힘을 제대로 보여 주려는 양, 의천검을 들고 나선 남궁호명이 기세를 끌어 올리자 그의 머리칼과 수염, 눈썹 한 올 한 올까지 바람도 없이 서기 시작했다.
너무도 쉽게 거대한 기운을 끌어 올리는 남궁호명의 경지는 아마도 과거 뇌왕에 올랐던 자신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라.
그러나 무엇보다 진화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가 천뢰제왕신공을 운용하는 방식이었다.
“……!”
몸에 흐르는 뇌전의 움직임을 천뢰제왕신공이 도와주는 진화와는 완전히 달랐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역천지체 중에서도 뇌전의 힘을 품은 혼돈지체인 진화와 달리 남궁호명은 음과 양의 조화를 순리대로 타고난 인간이 아니던가.
진화가 천뢰제왕신공의 극과 극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면, 남궁호명은 천뢰제왕신공의 음양의 부조화를 조화롭게 쓰고 있었다.
“검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뇌전의 흐름을 상하게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 가도록 만들어 준다고 생각해야 한다! 보거라! 이것이 나의 천뢰(天雷)다!”
파지지지직-!
남궁호명은 진화처럼 음기와 양기를 나누지 않았다.
잠깐 기운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몰라도 강한 뇌전을 일으키는 거대한 힘을 그런 부조화 속에 움직인다는 건, 자칫 몸 안의 순리를 무너뜨려 주화입마를 일으킬 수 있었다.
대신 남궁호명은 조화를 이루려는 세상의 이치를 이용했다.
자연에서 거대한 양기와 음기를 끌어들인 후 그 균형을 이루기 위해 천뢰제왕신공의 음기와 양기가 움직이면, 그것을 함께 발출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 속에서 들어온 양기와 음기가 본래의 자리로 흩어지려 할 때, 남은 남궁호명의 음기와 양기가 세상의 조화와 부딪히며 뇌전을 일으키는 것이다.
오로지 천뢰제왕신공을 익힌 인간만이 가능한 방식이었다.
‘모든 생명의 기운이 다 같지 않고, 함부로 섞이지 않는다. 그러니 조화를 깨뜨려서 몸 안으로 끌어당기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천뢰제왕심법은 조화를 깨뜨리는 힘이 아니라 부조화를 조화롭게 만들어 내공을 쌓는 것이다. 그리고 천뢰제왕신공은 시전자의 몸에 무리를 주지 않고 부조화의 힘을 사용하게 만드는…… 아! 과연 이게 바로 평범한 인간이, 혼돈지체가 아니고서도 천뢰제왕신공의 극의(極意)를 완성한 자가 존재한 비결이었어!’
진화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치는 순간이 찾아왔다.
“필거심뢰-!”
콰과광—쾅-!
“폭렬뇌전-!”
파바바바밧! 팟!
“천뢰우전-!”
지지지직! 펑! 펑! 펑!
“천뢰제왕신공으로 나온 무공은 여러 가지다. 천뢰기, 천뢰삼장, 폭뢰신권, 구벽신권, 천뢰지, 천뢰제왕검법 그리고 섬전십삼검뢰까지……. 모두 그냥 뇌전의 길, 천뢰제왕신공에 모든 것이 있다!”
거창한 이름들이 붙었지만 그것은 천뢰제왕신공의 모든 것을 익히지 못했기에 일부를 떼어 낸 것뿐이라, 남궁호명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쿠-웅!
폭풍이 뇌우를 뿌리듯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것이 거대한 천뢰가 떨어지며 고요와 평화를 가져왔다.
진화가 저도 모르는 사이, 제자리에 우뚝 서서 천뢰제왕신공을 운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응? 서, 설마! 이, 미친놈!”
말을 잇다가 진화의 상태를 발견한 남궁호명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파지지직-!
진화의 온몸이 순식간에 푸른 번개로 뒤덮이는 모습을 보며.
“허……!”
남궁호명은 저도 모르게 하늘을 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놈을 내리신 겁니까? 그것도 하필이면 저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