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참 진(眞) 꽃 화(花) : 여론(輿論)이란(3)
승승장구(乘勝長驅).
뇌전을 뿜기 시작한 진화는 거칠 것이 없었다.
서른두 명의 최종 선발자를 결정짓는 마지막 예선부터, 오늘 준결승에 진출할 신인사걸을 뽑는 비무까지, 네 번의 대결을 모두 압도적인 실력으로 승리했다.
처음 화려한 뇌전을 검에서 뿜어냈던 것과 달리, 오늘 벌어진 비무에선 뇌전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관중은 끝까지 진화에게 큰 환호를 보냈다.
그건 첫 뇌전의 여파 때문이 아니었다.
“괴, 굉장해!”
같은 선발자들 사이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진화가 본선 경기에서 보여 준 실력은 격(格)이 달랐다.
진화는 매 경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승리를 차지한 것이다.
삼십이 강에서는 순식간에 상대의 간격을 오가며 상대의 장외를 유도했고, 십육 강에선 환상적인 접검술을 발휘하며 상대의 검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방금 진화는 검을 뽑지도 않은 채, 상대의 품을 파고들어 천뢰장(天牢掌)을 날렸다.
퍼-엉!
바람이 지나가듯 매끄럽게 빠지는 보법에 햇빛에 반짝이는 천풍무의의 합작은, 마치 진화가 사라졌다 나타난 듯한 효과를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진화의 손에 파지직- 맺혔던 수기는 화룡점정이었다.
“읏……! 졌습니다.”
“와아아아아-!”
“최종 진출자 남궁진화!”
창궁무학관 소속으로 의외의 실력을 보이며 올라온 호명기가 세 합 만에 패배를 인정하고, 심판의 선언이 있기도 전에 사람들의 환호가 경기장에 퍼졌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호명기에게 다가간 진화가 상태를 묻자, 호명기가 가슴을 문지르던 것을 멈추고 포권 하며 진화에게 예의를 갖췄다.
“소공자의 아량에 감사합니다. 사정을 둬 주신 덕에 다친 곳은 없습니다.”
이전과 다르게, 진화에 대한 호칭도 바뀌었다.
이로써 남궁교명과 의천무학관 출신 몇몇 선발자들을 제외하곤, 모두가 진화에 대한 호칭을 바꾸었다.
의심과 호승심으로 가득 찼던 눈들이 경외로 바뀌고, 거의 모든 선발자들이 진화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다.
“축하드립니다, 소공자님!”
“장법까지 펼치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천뢰제왕신공에 장법까지 훌륭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장법을 별도로 수련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검을 잃었을 때를 대비해서 앞으로는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비무장을 내려오자 모두가 다가와 진화에게 한마디씩 건네기 바빴다.
진화는 그런 이들에게 일일이 웃으며 응대했다.
“유 소협께선 검을 잃을 일이 없으실 텐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래도 혹시 수련하실 거라면, 정의무학관에 가는 길에 함께 수련해도 좋겠습니다.”
“오오, 정말 그래 주시겠습니까?”
“저, 저희도 정의무학관에 갑니다!”
진화의 말에 화색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사람도 있었는데, 확실한 것은 그들 모두 진화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남궁교명과 함께 있던 의천무학관 출신들도 아닌 척 진화를 힐끗거리며 관심을 보였다.
진화는 눈이 마주친 남궁교명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서, 그들에게도 활짝 웃어 주었다.
‘제 발등을 제가 찍은 격이지. 내 태도가 달라진 것도 있지만, 남궁교명의 오만한 발언으로 외부에서 온 참가자들의 마음이 돌아섰다. 같은 실력이라도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할지는 뻔하지.’
이제까지 남궁교명의 드러난 실력은 한겨울 골짜기의 삭풍처럼 힘차고 매서운 검세가 돋보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진화는 남궁교명과 비슷한 경지면서도, 뇌전을 뿜는 화려하고 강한 검술에 보법, 하다못해 체술과 장(掌)까지 선보이며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일부러 시종일관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를 유지했다.
남궁교명 혼자였다면 귀태 나는 태도와 검술 실력으로 주목받았겠지만, 진화와 비교되면서 오히려 검세에만 치우친 무공과 오만한 태도만 돋보이게 된 것이다.
처음 남궁교명에게 호의적이었거나 진화를 ‘운 좋은 입양아’로 보던 참가자들도 진화에게 돌아섰다.
‘여론이 뒤바뀌었으니, 더욱 실력으로 날 누르려 하겠구나.’
귀는 그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궁교명이 절정에 든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쯤 숨겨 둔 한 수를 생각하며 저를 향해 이를 갈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바라던 바였다.
이번 대회에서 진화는 최대한 남궁교명과 비슷한 수준으로 맞춰, 숨겨진 패를 끌어낼 생각이었다.
이는 남궁가주의 의견이었다.
“남궁교명과의 치열한 대결 구도를 통해 화제를 키워 가는 것이, 시간이 갈수록 저들에게 더 큰 부담을 주게 될 거다. 게다가 여론마저 우리 쪽으로 움직이게 된다면……. 부담감에 짓눌리다 보면 실수도 늘 것이고, 확실한 수단을 강구하기 위해 움직이게 되겠지. 저들이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남궁교명과는 최대한 아슬아슬하게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 좋겠구나.”
진화도 남궁가주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진화가 경계하는 이는 저들뿐만이 아니었다.
‘의선의 진료 이후 정의맹의 관심이 느슨해지긴 했지만, 정의무학관에 들어가게 된다면 또 모르는 일이다. 제갈 놈들이 역천비록의 효용을 안다면, 어떻게든 나도 이용하려 들 테니까.’
진화에게 적은, 귀천성뿐 아니라 남궁세가의 멸문에 일조했던 이들 모두였다.
귀천성은 남궁세가의 적이기에 진화의 적이 되었을 뿐, 사실 진화 혼자였다면 귀천성의 손길을 피해 세상 깊숙이 은둔해서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악적들이니 분노 이상의 배신감이 들 리도 만무했다.
오히려 진화는 권력을 위해 가족들을 죽음에 내몬 남궁도 일파와, 남궁세가의 희생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안위만을 챙긴 제갈세가와 정의맹 수뇌부에 대한 증오심이 더 컸다.
‘이젠, 그자들이 잃어 보아야지.’
이전 생과 달리, 지금의 진화에겐 정도 무림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 * *
준결승에 오른 신인사걸이 결정되었다.
남궁세가 직계 소공자, 남궁진화.
서평원 출신의 의천무학관 직전제자, 남궁교명.
한평현 출신의 절창문 제자, 관서겸.
동평원 출신의 창서각 후계, 남궁구.
올해 대회는 거의 모든 화제를 진화가 잡아먹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준결승을 기대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첫째는 절창문이라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중소 문파 출신이 기라성 같은 양주 일대의 인재들을 다 물리치고 준결승에 오른 것.
관서겸은 단숨에 절창문이라는 이름을 양주 전역에 알렸다.
둘째는 남궁의 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리는 둘, 그런데 준결승에 오른 사람은 셋이라는 것.
그래서 진화를 제외하고 준결승에서 먼저 붙게 된 남궁교명과 남궁구 중 ‘누가 올라갈 것인가’에 사람들의 귀추가 주목되었다.
“그래도 남궁교명이 이기겠지? 의천관주의 직전제자에다, 그 강한 검세. 거기에 검에 아지랑이 피는 거, 못 봤어?”
“에이, 자네야말로 남궁구의 출신이 어딘지 잊었어? 창서각의 후계라고. 상대의 공격을 읽고 대응하는 재기(才器)가 보통이 아니야!”
“무인은 무공이 중요하지!”
“지금까지 오 합 이내로 이겨 왔는데, 그럼 남궁구는 약한가?”
사람들이 남궁교명과 남궁구의 비무 결과에 대해 갑론을박을 하며 기대감을 올렸다.
하지만 누구보다 남궁교명과 남궁구의 비무 결과에 신경을 곤두세운 이은, 남궁교명의 아버지 남궁경옥이었다.
“사방에 얼빠진 놈들이 천지로군!”
남궁경옥이 불쾌한 기색을 풀풀 날렸다.
그는 의천관주의 직전제자이기까지 한 자신의 아들이, 고작 구장로의 아들인 남궁구와 비교된다는 것이 몹시 불만스러웠다.
“성인군자인 척 웃고 다니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외에 무슨 큰 재주가 있다고, 어디 서책 창고지기나 하는 놈 자식이랑 내 아들을……!”
장로들의 순번은 그저 편의를 위해 직책상 주어진 것일 뿐, 그들 사이에 우열 관계는 없었다.
그들의 직책은 언제든지 가주의 명에 따라 거두어질 수 있는 것으로, 이장로인 남궁경옥이 구장로 남궁희를 무시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의 인망을 얻기 위해 재물까지 바치며 애를 쓰던 남궁경옥이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의 존경과 인망을 얻고 있는 남궁희를 질투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청해상단에서 나오는 재물로 남궁경옥이 얻으려 한 것이 사람들의 인망만은 아니었다.
“마셔라. 예선부터 지금까지 기운이 많이 소진되었을 게다. 이번에 심마니들을 돌려 좋은 인형설삼을 구했단다.”
남궁경옥은 한껏 안쓰러운 눈빛으로 남궁교명을 보며 그에게 탕약을 건넸다.
인형설삼은 어지간한 세도가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진귀한 약재로, 나는 곳도 한정적이고 험지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라 따로 심마니와 특별히 훈련된 개를 부려야 했다.
남궁경옥이 남궁교명을 챙기는 모습에, 남궁도가 탐탁지 않은 눈빛을 보였다.
“겨우 그런 상대들을 가지고 기운이 상하진 않았겠지?”
남궁도의 말에 남궁교명이 탕약을 마시다 멈칫했다.
남궁교명의 입에 약 들어가는 것만 보고 있던 남궁경옥도 함께 움찔했다.
“설마 남궁구와의 비무를 걱정하는 것도 아닐 테고.”
미소를 지으며 은근히 압박하는 남궁도의 눈빛에, 남궁교명과 남궁경옥이 바짝 긴장했다…….
“그, 그럴 리가요. 우리 교명이의 실력은 아시지 않습니까?”
“…….”
남궁경옥의 말에도 남궁도의 눈은 여전히 남궁교명을 향했다.
남궁교명이 “자신 있습니다.”라고 말한 후에야 시선이 거두어졌다.
“여론이 남궁구와 너를 묶어 떠들어 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이번에는 남궁경옥과 남궁필이 동시에 굳었다.
말이 향한 곳은 남궁교명이었지만, 결국은 이쪽이 원하는 대로 여론을 움직이지 못한 남궁경옥과 남궁필을 탓하는 것이었다.
남궁경옥은 자식 앞에서 굴욕감이 먼저 들었지만, 남궁교명을 위해 꾹 참았다.
“소찬회인지 뭔지 양자의 껍데기에 미혹된 이들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별것 아니지만, 단지 숫자가 좀 많습니다.”
“그, 그렇습니다. 매 비무마다 놈들이 떼거지로 웅성대니, 그 양자 놈과 관련된 건 아예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남궁경옥과 전 서평원장의 변명에도 남궁도는 전혀 듣는 얼굴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교명이 네 승리를 전제로 짜인 계획이다. 모두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결국 지금까지 이 말을 하기 위해 꺼낸 말들일 뿐이었다.
“반드시 실력으로 누르겠습니다.”
남궁교명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벌써 그의 제자가 된 지 몇 년, 남궁교명은 남궁의 스승이라는 의천관주 남궁도의 진면목을 점점 깨달아 가고 있었다.
말투만 다정할 뿐, 결국 모든 일에 대한 부담을 남궁교명에게 지우는 말이었다.
진짜로 자애로운 스승이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남궁교명은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궁경옥을 보며,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남궁도가 원하는 바였다.
“이장로, 다른 약들은 어찌 되었는가?”
“예, 예. 약제방 몇 군데에서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허허, 그래. 수고했네.”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을요.”
영약이 필요한 것이 어디 남궁교명만이겠는가.
의천무학관의 제자를 끌어들이는 데 쓰이는 돈, 몰래 무사들을 키우는 데 쓰는 돈, 약재를 구하는 데 부리는 사람과 거기에 들어가는 돈, 세가 내에 세력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돈까지.
돈, 돈, 돈!
남궁도가 요구하는 것들은, 이제 청해상단의 이익을 빼돌리는 것 정도로는 부족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남궁도는 그런 남궁경옥의 사정 따위는 모른다는 듯 당연하게 그 모든 것을 요구했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남궁경옥을 압박하며 그가 비굴하게 허리를 숙이는 모습을 보길 원했다.
남궁경옥 또한 그걸 알면서도, 매번 얼굴을 붉히게 하는 수치심을 견디며 허리를 숙였다.
남궁교명이 남궁도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정진할 것이고, 아버지 또한 아들을 위해 수치심과 부담을 견딘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남궁도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바로 남궁도의 의도가 아니겠는가.
남궁도가 남궁경옥과 남궁교명을 향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남궁필 같은 떨거지는 처음부터 그의 안중에 없었던 듯했다.
“그래. 앞으로도 일에 차질이 없어야 할 것이네.”
“예, 더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지. 내일은 중요한 날이니, 교명이도 가서 쉬어야 하지 않겠나.”
“예? 아, 예. 그럼.”
모든 볼일이 끝났다는 듯 남궁도가 축객령을 내렸다.
설마 이렇게 쫓겨나듯 나갈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듯 남궁경옥도 잠시 당황하는 듯했지만, 곧 남궁교명과 남궁필을 데리고 공손히 물러났다.
* * *
같은 시각.
다른 쪽에선 진화가 야심한 밤에 남궁구를 불러내고 있었다.
“그냥 져.”
“뭐?”
“지라고.”
“어이, 친구,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는 거야?”
남궁구가 황당하다는 듯 진화에게 되물었다.
그리고 남궁구보다 더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지나다가 우연히 그 장면을 보게 된 남궁가주와 남궁경이었다.
“……미인계?”
남궁경의 얼굴은 전날보다 더 복잡해 보였다.